잡지 《청년문학》 주체100(2011)년 제9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잊을수 없는 밤에
박 호 산
별들이 하나둘 돋아나기 시작할무렵, 초급단체총회는 열기를 띠고 진행되였다. 안건은 당면한 풀베기전투에서 청년들이 앞장설데 대한 문제였다.
허나 맨뒤에 웅크리고앉은 내 귀전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초급단체비서는 리청년동맹회의에 참가하였기때문에 순임이가 회의를 맡아 진행하고있었다.
나는 그의 눈길과 마주치는것이 두려웠다. 마주치기만 하면 그 영채도는 두눈에서 또다시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눈빛이 쏟아져나올가봐 차마 고개를 들수 없었다.
《앞에서도 강조됐지만 이번전투는 여느때와 다릅니다. 강성대국건설에 떨쳐나선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청년들이 더 많은 땀을 흘리고 더욱 분발할것을 요구하고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일부 동무들속에서는 시대의 요구에 발을 맞추지 못하고 건숭건숭 일하는 현상이 없어지지 않고있습니다.》
그 순간 나와 순임의 눈길이 마주쳤는데 마치도 불꽃이 번쩍이는것 같았다. 나는 쿵ㅡ 하고 헛기침을 깇었다.
이건 뭐 나를 빗대고 하는 소리인가? 류순임,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천만에, 동무는 비판을 받아야 해요.
좋아.
말없는 속에 일순 오고간 격렬한 속대사들이였다.
《그래서 조직에서는 풀베기전투를 더 짜고들기로 결정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찬성입니다.》
일제히 대답하는 소리에 창문유리가 부르르 떨렸다.
《난 도시에 있는 친척들이 자기 공장에서 올해엔 어느만큼 계획을 넘쳐수행했다. 새 기술발명을 몇건 했다 하는 소릴 들을 때면 자존심이 상했댔는데 우리도 농촌의 청년들답게 본때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달리 얼굴이 가무스레하고 키도 자그마한 명숙이라는 처녀가 작은 주먹을 부르쥐고 소리치자 모두가 호응하였다.
여느때는 눈에 잘 띄지도 않던 처녀는 이 한마디로 하여 순간에 모두의 찬탄을 받는 존재로 되였다.
(흥, 나야말로 진짜 본때를 보여줄테다.)
다음해에 나는 대학입학시험에 응시할 생각이였다. 이젠 몸도 어지간히 좋아졌겠다, 이쯤 농사일을 했으니 이젠 나도 떳떳하다는 생각에 이런 결심을 굳히게 된것이였다.
물론 농사도 중요하다. 하지만 최첨단을 돌파해나가는 지식경제시대에 살면서 배우지 않고서는 한치앞도 내다볼수 없다는것을 나는 잘 알고있었다.
어느덧 토론이 끝나 모두가 일어서 밖으로 나갔다.
시원한 바람이 휙ㅡ 불어들어오며 책장이 번져져서야 나는 머리를 들었다.
민망한 표정을 짓고 서있는 순임의 모습이 내눈앞에 안겨왔다.
나는 아무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무도 참…》
그의 목소리를 등뒤에 남기며 문밖으로 나서던 나는 안으로 들어오던 한 녀인과 부딪칠번 하였다. 순임의 어머니였다.
《아니, 어머니가 어떻게?》
《너 아버지 어디 가셨는지 모르니?》
《잘 모르겠는데요.》
《창고로 나간다던 령감이 아직두 들어오지 않았으니 이게 무슨 일이 생긴게 아니냐?》
그러니 순임은 아직 아버지를 만나지 못한 모양이였다.
《일은 무슨 일이 있겠다고…》
《아니야, 아까부터 웬 녀석이 낫을 잃어버렸다고 끙끙거리더니 그것때문에 늦어지는건 아닌지. … 원, 령감성미두. 그저 창고, 공구… 이것밖에 모른다니까.》
저도 모르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비스듬히 돌리고 나는 뒤덜미를 슬슬 어루쓸었다. 혹시 그 낫때문에?… 잃어버린 사람대신 다른 사람이 안타까와하며 그걸 찾으러 다니다니… 에익, 그 잘난 낫 하나가 뭐라구.
《혹시 그 낫의 주인은 동무가 아니예요?》 마치도 이렇게 묻는듯 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순임의 눈길을 마주할수가 없어 나는 밖으로 황황히 뛰쳐나왔다.
날도 어두워오는데 정말로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이때처럼 내가 미워보기는 처음이였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마음속으로 빌며 달음쳐가느라니 어느덧 낮에 일하던 풀판이 눈에 안겨왔다.
얼마 높지 않은 산중턱이였지만 사방이 어두워오는 때이라 어둑침침하고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원, 아바이두 이렇게 고지식하다구야, 여기가 어디라구 낫 하나때문에…
나는 나무그루터기며 가시덤불에 발이 걸채이는것도 느끼지 못하고 정신없이 산을 톺아올랐다.
희미한 달빛속에서 나는 낮에 일하던 곳을 어렵지 않게 찾을수 있었다.
은은한 달빛이 흐르는 풀판은 그 어떤 알지 못할 공포를 안고있는듯 괴괴한 정적속에 숨죽이고있었다.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만이 여기저기에서 간간이 울려올뿐이였다.
아바이는 어데 있을가?
문득 어스름한 달빛아래 한쌍의 시퍼런 불빛이 움직이는것이 보였다.
저게 뭘가?
나는 목안이 말라드는것을 느끼며 긴장해서 그쪽을 주시하였다.
이때 비탈쪽에서 스적스적 인기척이 나더니 시퍼런 불빛이 그쪽을 향해 번개처럼 달려가는것이였다.
나는 그때에야 약간 구부정하게 쭈그리고앉은 아바이의 잔등을 알아보았다. 시퍼런 불빛은 아바이네 집에서 기르는 검둥개였다.
나는 그리로 막 달려가고싶은 충동을 겨우 누르며 옆에 서있는 나무에 스르르 기대여섰다.
순간 어떤 소리를 들었는지 아바이의 시선이 내쪽으로 돌려졌다.
《어ㅡ 자넨가. … 글쎄 내 올줄 알았다니까.》
마치도 내가 오리라는것을 미리 알았다기보다 그걸 더 바란듯 한 말투에 나는 말 못할 뜨거운 정을 느끼며 아바이에게로 다가갔다.
《오늘 밤은 정말 아바이 말대로 무사히 못넘기겠군요.》
컹컹 짖어대는 검둥이를 쓰다듬던 아바이는 투정질하는듯 한 내 말투에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아직 속에서 내려가지 않는게로군.》
《아닙니다. 다 제탓입니다.》
《녀석두, 알았으면 됐다. 오늘은 정말 기쁘구나.》
자기 잘못을 자꾸만 감추려고 하는 사람에겐 꼭자령감으로 불리우는 창고장아바이지만 허심하게 자기 결함을 비판하는 사람앞에서는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무던한 늙은이였다.
나는 이때까지 아바이에 대해 품고있던 고까운 감정이 봄날에 눈녹아내리듯 일시에 풀리는것을 느꼈다.
《나때문에 아바이가…》
《됐네, 가자구.》
나는 앞서걷는 아바이의 뒤를 따라 산을 내렸다.
얇은 구름장을 헤치고 고개를 내민 별들이 밤길을 가는 두사람의 머리우에서 반짝이고있었다.
《이걸 좀 봐주게. 자넬 주려고 구해놓은것인데 꽤 쓸만한건지 모르겠어.》
나는 얼결에 아바이가 내미는 책을 받아들었다.
아바이도 참, 책이 무슨 호미나 낫가락처럼 생각되는가부지.
소리없이 웃으며 책표지를 펼치는 순간 나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언제부터 구하려고 애쓰다 끝내 구하지 못했던 참고서가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있었던것이다.
《아니, 이건?…》
《그래, 꽤 볼만 한가?》
나는 뜨거운것이 목구멍으로 치밀어올라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렇다면 됐네. 오늘 밤을 넘겼더라면 그 책도 주인을 만나지 못할번 했어. … 헌데 주인이 제발로 찾아왔거던.》
나는 아바이의 속깊은 말에 감동을 금할수 없었다.
이런 아바이를 난 어떻게 생각했던가. 그런데도 아바인 날 위해 밤을 밝히고 이 귀한 책까지…
《헌데 아바인 어떻게 내가 나올줄 알구 책을 들고나왔습니까?》
《글쎄… 자넬 믿었다고 할가. … 난 자네나 순임이들을 볼 때면 생각이 많아지네. 언젠가는 모두가 이 땅에 뿌리를 깊이 내릴 거목으로 자랄텐데 사소한 융화나 눈먼 사랑이 줄기의 곧음에 드팀을 주게 된다면 내게 무슨 량심이 있겠나. … 애착이 가는 곳엔 손길이 더 많이 가는 법이라네. … 아직 자넨 내 마음을 다 몰라. 낫 한가락이 큰것도 아닌데 이렇게 밤길을 걸으면서까지 고생할 필요가 있겠는가. … 자넨 지금도 이렇게 생각하고있을테지?》
나는 그만 얼굴을 붉히고말았다.
마치도 내 속을 들여다보고 하는 말처럼 느껴졌기때문이였다.
《창현이, 올해 몇살이더라?》
《열아홉살입니다.》
느닷없이 던지는 아바이의 물음에 나는 재빨리 대답하였다.
《우리 순임이도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농장원이 됐지. 그 애에게도 꿈과 희망이 있었다네. 아무리 내 자식이래도 선뜻 말이 나가지 않더군. 사람이 생을 두번 살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그러면 한번은 아쉽게 살았다 해도 다음번엔 일점 후회도 남지 않게 멋있게 살수 있지. 하지만 생은 하나거던. 어떻게 하면 사람에게서 한번밖에 없는 생을 후회없이 빛나게 살수 있을것인가? 그래서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는 순임이에게 말했네.
네가 정녕 너의 꿈과 희망을 귀중히 여긴다면 먼저 이 땅에 자기의 땀을 쏟으며 땅의 귀중함을 느껴야 한다. 모든것엔 근본이 있는 법이니라, 그때 가선 이 땅도 너의 꿈과 희망만이 아닌 더 크고 소중한것을 꽃피우고 안겨줄게다. … 순임인 그래서 농장원이 됐지. 펜대를 쥐던 손으로 농사일을 하자니 오죽이나 힘들었겠나? 가끔 나도 미안한 생각이 들어 순임에게 말을 건넬라치면 그앤 이런다네. 농사일때문에 우리 장군님께서 험한 농장길을 걸으시지 않게 하겠다고 말이야. 그게 바로 이 땅에 사는 농사군들의 본분이라는게지. 이젠 나도 그 앨 당해낼수 없을것 같애, 허허허. …》
나는 머리가 숙어짐을 어쩔수 없었다.
순임인 바로 그런 처녀였구나. …
《내 언제부터 창현이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었네. 자네를 가만 살펴보면 여기에 정이 든것 같지 않아. 사람이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고지식하고 성실하게 산다는게 쉽지야 않지. 하지만 하루를 살아도, 백년을 살아도 한본새로 살아야지. 무슨 일이나 자기의 진심을 바칠 때에야 빛이 나는 법이야. 진심이라는건 적의 화구를 막는 그 영웅성에도 있지만 이 작은 낫 하나를 사랑하는 마음에도 비끼는 법이라네.》
나는 저도 모르게 생각이 깊어졌다.
내딴에는 조국을 빛내이겠다고 결심하면서도 이 땅의 주인이라는 초보적인 의무마저 잊어버렸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애국은 결코 나이로 하는게 아니다.
그 어느곳에 있어도 자기의것을 사랑하고 조국에 진심을 바쳐가는 여기에 애국이 있는것이 아닌가.
그렇다, 나에게는 바로 이것이 부족했다. 일을 해도 자신을 위해, 나 하나의 명예와 자존심을 위해 땀을 흘렸고 그것을 사람들이 평가해주지 않는다고 고깝게 생각하였다.
허나 순임은 이 땅에 든든히 발을 붙이고 고향땅을 위하여 자기의 구슬땀을 아낌없이 흘려오지 않았던가.
바로 아버지의 뜻이 조국이 바라는것이며 시대의 부름에 대답해야 할 신성한 청춘의 의무라는것을 순임은 너무도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문득 멀리서부터 여러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다가오는 소리와 함께 활활 타오르는 홰불무리가 눈에 안겨왔다.
《이크, 저 애들이… 젊음이 좋긴 좋구나.》
부러운듯 외우는 아바이의 말에는 자신의 청춘시절을 돌이켜보는 추억과 감회가 짙게 어려있었다.
《어서 가보게. 순임이네들이 오는가보이.》
아마도 결의를 다진 그 기세로 이밤을 그냥 보낼수 없어 모두가 여기로 달려오는 모양이였다.
나는 알지 못할 흥분에 가슴이 떨리는것을 느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 나는 훌륭한 사람들속에서 살고있구나.
저속엔 순임이랑 회의에서 열변을 토하던 그 명숙이랑 있겠지. 이들속에 있다는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나는 애국의 진리를 깨우쳐준 이밤을 먼 후날에 가서도 영원히 잊을수가 없을것 같았다.
나는 아바이에게로 돌아서며 고개를 숙였다.
《아바이…》
그리고는 그의 손에서 낫을 받아들었다.
그 순간 나에게는 손에 든 낫이 그 어떤 값진 보석보다도 더 귀중한 보물처럼 느껴지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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