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99(2010)년 제5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유채꽃향기
김 명 호
작업반기술원 유순정은 여느때보다 일찌기 집으로 향했다. 작업총화가 끝난 뒤 버들골포전을 돌아볼 예정이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까맣게 잊고있었다.
그의 귀가에서는 방금전에 동왈숙이 전해준 말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맴돌았다.
《기술원을 만나자고 어떤 군관이 찾아왔었다우. 거 누군지 기술원에 대해 이만저만 잘 알지 않더구만. 유채재배때문에 고심한다는것두, 집떠나 외지생활을 한다는것두 알구… 무작정 유채밭에 가보자는걸 겨우 잡아뗐지.》
순정은 동왈숙의 거쿨지고 너부죽한 손만을 멍하니 보고있었다. 유채라는 말을 하는 동왈숙의 두손이 알릴듯말듯 떨리는듯 하였다.
얼마전 유채밭을 갈아엎을 때에도 순정은 동왈숙의 손이 그렇게 떨리는듯 한 감을 느꼈었다.
유채, 그것은 순정이 기술원을 하면서 여기 토양에 적응시키기 위해 재배연구를 하던 작물이였다.
5년째의 실패, 실패… 그래도 한번만 더…
이번에는 꼭 성공할거야! 하면서 심었던 그 유채들이 또다시 쓰러지기 시작했다. 잎이 노래지고 검붉은 반점들이 생겼다. 흰녹병이였다. 그런 유채들에서 열매를 기대한다는것은 어리석은 일이였다.
포전을 갈아엎던 날 순정이보다 더 가슴아파한것은 동왈숙이였다.
《어이구… 속이 타서 견디겠니. 내가 어떻게 너희들을 심고 가꾼줄 알기나 하니? 이젠 그만하구 열매를 내줄 때가 되지 않았느냐, 응?》하며 포전머리에 펄쩍 주저앉아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였었다.
순정의 눈앞에는 지금도 병든 유채뿌리며 잎사귀들이 지꿏게 살아있었다. 유채라는 말만 들어도 첫자식을 잃어버린 어머니의 심정처럼 그렇게 가슴이 아프고 쓰렸다. 시간이 흘러가면 잊혀지리라고 생각했던 그 아픔이 좀처럼 가셔지지 않고 순정의 여린 가슴을 허비군 했다.
오늘도 같았다. 유채라는 말을 듣는 첫순간부터 순정의 심장은 후두둑 뛰기 시작했다. 그때에야 순정은 앞으로도 영원히 그 아픔은 아물지 않을것이라는것을 알았다.
불현듯 유채에 대한 연구로 하여 땅과 인연을 맺던 지나간 일들이 순정의 눈앞에 영화화면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대학졸업식이 끝난 그날 저녁이였다.
순정은 동무들과 함께 꽃들이 만발한 대학구내를 거닐었다.
《성심인 과학원연구사, 연희는 대학교원, 순정이도…》
경심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순정이 입을 열었다. 그는 정색한 표정을 짓고있었다.
《난 아무래도 농장에 가야 할것 같아.》
《아니, 또 그 유채냐? 아 유채야 대학시험포전에서도 얼마든지 연구할수 있지 않아. 넌 대학교단을 떠나서는 안돼.》
《나도 교원이 되고싶어. 그러나 유채재배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바라시는 문제야. 지금은 론문으로 그쳤지만 난 기어이 북방의 기온에 적응된 유채종자를 만들어내고야말겠어.
생각해봐. 아득히 뻗어간 포전에 유채꽃향기가 만발할 때 포전길을 걷는 우리의 가슴이 얼마나 설레이겠니. 안 그래?》
《공상가 유순정선생! 꿈에서 깨여나시오.》
경심은 시치미를 떼고 남자목소리로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는 까르르 웃어댔다.
그러나 순정은 웃지 않았다.
《왜 공상이겠니. 이제 두고봐. 이 북방에도 유채꽃향기가 넘쳐나게 하는걸. 내 그때 너희들을 모두 찾겠어.》
《하긴 이악쟁이 순정이가 빈말은 안할거야.》
《순정동무, 우린 모두 기다리겠어.》
그때 순정의 마음속에 그 어떤 가능성이 있어서 그런 약속을 한것은 아니였다. 순정은 자기의 의지가 그들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해본적도 없었다. 책상물림인 자기가 어떤 험한 가시덤불을 헤쳐야하는지 가늠할수도 없었다.
그러나 순정은 예술영화 《열네번째 겨울》의 주인공을 늘쌍 그려보았고 자기도 그처럼 한생을 과학연구에 바치리라 결심한것이였다. 순정은 이 결심이 한갖 말이 아니라는것을 증명하고싶었다. 사실 그 증명은 대학교정에서도 그리고 연구소에서도 할수 있었다.
하지만 순정은 현실속으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그것은 대학시절에 받은 한장의 편지때문이였다.
겉봉에는 《김수봉》이라는 알지 못할 이름이 적혀있었다. 영문을 모르고 무심히 읽어가던 순정은 그만 긴장해졌다.
편지에는 순정이의 연구론문에 대한 심한 질책이 씌여져있었기때문이였다.
《동무가 서술한 유채의 겨울나이률에 대한 연구자료들을 반갑게 읽어보았습니다.
대학시절에 이런 론문을 쓴다는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것을 저도 잘 알고있습니다. 그러나 동무의 론문에는 현실에서 절실히 바라는 문제가, 례하면 북부지방의 기후조건에 맞는 내한성이 높은 유채종자에 대한 문제가 집중적으로 연구되지 않았더군요.
유채재배에서 성과를 이룩한 일부 농장들의 경험과 기술만을 론한 동무의 론문은 우리들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일부 국한된 농장들에 적합한 종자가 아니라 우리 나라의 그 어느 농장에 심어도 든든히 뿌리를 내릴수 있는 그런 종자가 더 절실히 필요하지 않을가요?
순정동무, 진정 유채를 연구하려면 이 문제에 낯을 돌려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자면 서재에서가 아니라 실지 각이한 토양이 있는 현실속에서 자신이 심고 가꾸며 연구를 심화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편지는 순정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되여 졸업후 랭이 심한 메태골틀이 있는 옥수농장에 기술원으로 배치받았던것이다.
낯선 곳에 가서 길을 물어보는것도 저어하던 순정이는 현실속에서 참으로 많이 변하였다.
자립성이 강하고 탐구정신이 강한 유순정을 농장에서는 모두 사랑해주었다. 순정이의 시험포전도 짬을 내여 가꾸어주었다.
동왈숙이와 마을 농장원들의 진심어린 성의속에 다섯해가 지나간 유채연구… 성과는 적었다. 실패의 쓴맛을 들이킬 때마다 순정의 머리속에는 《공상가》라고 자기를 놀려대던 대학동창생 경심의 목소리가 온갖 조소와 비난의 소리처럼 들려오는것이였다. 그보다 순정의 가슴을 더 괴롭히는것은 농장원들의 노력과 수고를 땅에 헛되이 뿌린다는 생각이였다.
보름전, 유채포전을 갈아엎은 그날 밤 순정은 그동안의 연구일지들을 모두 꺼내놓았다. 쌓아놓으니 장편소설을 쓴 원고처럼 많았다. 그것을 배낭에 차곡차곡 넣으니 한배낭이 되고도 남았다. 대학시절부터 지새온 고심어린 탐구의 밤들이 배낭속에 다 들어있었다. 자기의 꿈과 자기의 넋이 깃든 연구일지들과 이제 영원히 작별하자고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순정은 한밤을 꼬박 새운 뒤 배낭을 숙소의 제일 구석진 곳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자기 손으로 만들었던 《시험포전》이라는 표말도 없애버렸다.
순정은 결심하였다. 이제부터 그저 작업반기술원으로 평범한 농민들처럼 한생을 고스란히 땅에 묻으리라고, 지난 시기보다 더 자기의 지식과 능력을 다 바쳐 나라의 쌀독을 채우는 일에 전심하리라고, 그러나 그 결심도 순정의 마음을 위안해주지 못하였다.
허전하고 속이 텅 빈것 같은 생각에서 벗어날수가 없었다.
《어쩐지 요새 기술원얼굴이 몹시 축간것 같구만. 몸을 좀 돌보면서 일하라구…》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말하였다.
너무 무리하게 일을 한다구?
이전에는 기술원이 해야 할 일외에 유채밭을 가꾸어왔다. 그러나 유채밭을 갈아엎은 지금에 와서 하는 일은 순정에게 있어서 너무 무리한것이 아니였다. 결국 연구사업을 집어치운 지금은 아무일도 하지 않는것과 같다고 할수 있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지내는 죄의식은 낮에도 밤에도 순정의 마음속에 늘 무겁게 매달려있었다.
오늘 순정은 유채밭에 가보겠다고 했다는 이름모를 군관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무엇이 자기의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는지 알았다. 그것은 유채연구를 포기한 순간부터 온몸을 덮은 자신에 대한 불안과 죄의식이라는 무거운 돌덩이였다.
그 군관은 누구일가? 왜 갑자기 나타나 유채밭을 보자고 했을가? 혹시 어머니가 보낸 청년이 아닐가? 일전에 어머니가 보낸 편지에 그런 말이 있었는데… 만약 그가 어머니가 보낸 대상자청년이라면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이렇게 말할것이다.
《자, 보시오. 유채밭은 없어졌고 감자가 심어졌소. 그러니 이제는 돌아설 때가 되지 않았소? 그만큼 쓴맛을 봤으면 되지 않았소.》
이러며 무작정 짐을 싸들고 자기와 함께 가자고 할것이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나는 편할가. 과연 거기에 행복이 깃들수 있을가.
아니, 나는 한생 죄스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할것이다. 나라에서 품을 들여 공부시켜주었는데 그 사랑에 보답하지 못하고 가정의 행복에 파묻혀버린다면 그것은 나라앞에 그리고 나를 도와준 농장원들앞에 두번다시 죄를 짓게 될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할가?
아, 난 어쩌면 좋아…
×
삽짝문앞에 다달았을 때 순정은 흠칫 놀라 서버렸다. 저녁어둠이 서린 토방에서 빨간 담배불이 타고있었던것이다.
(혹시?)
순정은 낯모를 군관이 아직도 가지 않고 웅크리고 앉아있는것이라고 자기나름대로 판단하였다.
정말 어머니가 보낸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저안으로 어떻게 들어선단 말인가. 실패의 쓴맛에 마음이 얼어들대로 얼어든 가슴 어디에 과연 사랑이 움틀 여지가 있다고…
《무작정 유채밭에 가보자는걸 겨우 잡아뗐지.》하던 동왈숙의 말을 되새겨보니 유채때문에 왔는지도 몰랐다.
실패로 끝나버린 연구결과를 자초지종 터놓는다는것은 자존심이 허락치 않는 일이였다.
그때 발밑에서 강아지가 끙끙거렸다.
《저리 가!》
순정은 발을 살짝 굴렀다.
《아이구, 이제야 오는가보군.》
동왈숙이 반기며 일어섰다. 그러자 담배불은 이젠 됐다는듯 획 원을 그으며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기술원동무, 이제야 오우?》
뜻밖에도 그것은 농장기사장의 목소리였다.
《아니, 어떻게?》
순정은 반기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비서동지도 함께 오셨소. 동물 만나자구.》
《예?!》
순정은 놀라움과 함께 불안이 가슴속을 휘젓는것을 느꼈다.
무슨 일일가? 봄씨붙임때문에 온것 같지는 않은데…
《순정동무, 잘있었소?》
방안에서 문이 열리며 불빛이 쏟아져나왔다. 리당비서의 크지 않은 단단한 모습이 불쑥 순정의 눈앞에 나타났다.
《언제부터 동물 한번 만나자던참인데 이제야 찾아와 정말 미안하오.》
《아이, 무슨 말씀을…》
강아지는 여전히 순정의 발밑에서 돌아갔다.
《기술원, 먼저 그분네들을 모시구 들어가라구. 내 얼른 뭘 좀…》
동왈숙이 김치독에서 김치를 푸는지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우린 인차 가야 하오. 지나가던 길에 들렸소. 순정동무, 그 유채있잖소?》
기사장이 먼저 말을 꺼내였다.
순정은 머리를 푹 수그리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웃군에 주둔해있는 인민군부대의 후방부대대장동무가 우릴 찾아왔댔소. 인민군대에서두 기름문제를 자체로 해결해보려고 유채를 심기 시작했다는구만.
헌데 순정동무에게 알아볼 문제가 있다는거요. 아마 제기되는 문제들이 있겠지. 그래서 동무가 좀 와주었으면 하더군. 어찌겠소. 군대동무들이 부탁하는 일인데… 그 분야에서야 몇해동안 유채를 연구한 순정동무가 전문가일테니까.
우리가 도울 일이라면 도와줍시다.》
순정은 기사장의 말을 잠자코 듣기만 했다. 실패한 나에게 전문가는 또 뭐구 도와주라는건 또 뭔가. 이것은 당치않은 일이다.
《실패한 주제에 어떻게 남을 돕는다고…》
《무슨 소릴… 실패가 없는 성공이 어디 있겠소. 신심을 가지오.
반장동무랑 토론이 있었으니 래일 제꺽 갔다오우. 혹시 알겠소? 오히려 순정동무에게 도움이 될지. 그러니 그렇게 합시다.》
당비서가 사람좋은 얼굴에 웃음을 띠우며 큰소리로 말하였다.
순정은 머리가 뗑하였다. 생각지 못했던 뜻밖의 일에 부닥치고보니 정신은 어데론가 나가버리고 육체만이 빈 허울처럼 남아있는듯 하였다.
그들을 바래우고났을 때 순정은 오래도록 어둠속에서 굳어진채 서있었다.
쌀쌀한 봄바람이 귀를 얼어들게 하는 밤이였다.
어느 집 창가에서나 불빛이 흘러나오고있었다. 매집마다에서 활기있게 흐르고있는 생활의 숨결은 외롭게 생각되던 순정의 가슴을 후덥게 하여주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자기 일을 두고 가슴아파하며 안타까와하고있다는것을 알았다. 그들은 멀리에 있지 않았다. 순정이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살펴보며 맥을 놓을세라 힘을 주어 쓰러지지 말고 끝까지 가라고 말없이 등을 떠밀어주고있었다.
코등이 찌르르해나고 눈물이 솟구쳤다.
유채와 함께 땅속에 묻혀버렸다고만 생각했던 웃음과 열정, 온갖 희망이 되살아나는것을 순정은 다시금 확인한것이였다.
×
사실 그날 김수봉은 동왈숙이와 헤여졌을 때 갈아엎은 유채포전에 찾아갔었다. 그는 아직도 흙밑에서 생생히 엿보이는 유채잎과 뿌리가 널려진 포전머리에 한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그의 손에는 노랗게 황들기 시작한 유채잎이 들려있었다.
드디여 수봉은 무슨 결심을 내렸는지 관리위원회를 찾아 씩씩하게 걸어갔다. 그리하여 관리위원회 앞마당에서 무슨 사업인가 토의하던 리당비서와 기사장이 김수봉을 만나게 되였다.
《무슨 일입니까?》
기사장이 수봉을 보고 먼저 물었다.
《여기서 일보십니까?》
《제 여기 기사장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리당비서동지구…》
《그렇습니까.》
김수봉은 차렷자세를 하며 자기의 소속이며 이름, 찾아온 용무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그때에야 두사람은 수봉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검은 눈섭과 유난히도 정기가 도는 두눈… 그 얼굴을 보면 속이 깊고 인정이 많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이며 얼굴은 해볕에 탄것이 농장사람들과 별로 다른데가 없었다. 바로 그 점이 그들로 하여금 친근감을 느끼게 하였다.
그는 유채에 대하여 말하고있었다.
이곳 농장의 한 처녀가 연구한다는 유채, 그것을 기사장과 리당비서가 모르지 않았다.
이 고장에서 성공 못한 유채였고 이제는 밭까지 갈아엎은것이여서 그들도 속수무책으로 있는 문제였다. 그것으로 하여 가슴앓이를 하고있는데 그 내용은 모르고 이 젊은 군관은 계속 그 유채소리만 하고있다.
수봉의 열띤 호소에 기사장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자책감으로 하여 눈길을 땅에 박았다.
그런데 리당비서는 오히려 시뭇시뭇 웃으며 기사장과 달리 수봉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몇해전이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기름작물을 많이 심어 먹는 기름문제를 자체로 해결해야 한다고 하신 최고사령관동지의 말씀대로 유채를 심기로 하였습니다. 령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말입니다. 이런저런 노력끝에 첫씨를 박았는데 겨울을 난 유채들이 점차 병들기 시작하지 않겠습니까.
론의가 많았습니다. 된다, 안된다… 바로 그때 유채연구에 대한 론문이 잡지에 실렸더군요. 필자는 대학생이였지만 얼마나 기뻤던지.
그런데 그 론문에는 지역별특성에 대한 고찰이 없었습니다. 그래 편지를 썼습니다. 실정에 맞는 연구를 해달라고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좀 어이없는 일이긴 하지만… 론문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기회가 생겨 대학에 찾아가보니 론문의 주인은 그새 졸업하고 어느 농장으로 배치받았다고 합니다. 알고보니 이 농장이였습니다.》
《그 동무의 이름이 유순정이지?》
리당비서는 저도 모르게 수봉의 말허리를 자르며 반가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예.》
《그럴줄 알았소. 그 다음은 어떻게 됐소?》
리당비서는 마치 순정이가 제 딸이나 되는것처럼 희색이 만면해서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의 머리속에는 늘 속에 걸려 내려가지 않고 괴롭히던 이 유채문제가 이상하게도 이 군관에 의하여 해결되지 않겠는가 하는 그 어떤 예감이 갈마들었다.
《그 다음은…》 김수봉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유채에 대한 자료를 가지고… 그 자료라는게 우리가 심은 유채재배일지와 병든 유채를 살리려고 애쓸 때 적은 기록에 불과합니다.》
수봉의 얼굴은 붉어졌다.
《그걸 가지고 빨리 만나고싶었지만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였습니다. 이왕이면 성공한 자료를 그 동무앞에 내놓고싶었습니다.
그렇게 노력하던 끝에 올해에 성공하였습니다.》
《야, 그럼 됐구만요.》
뜻밖에도 기사장이 눈길을 들더니 기쁘게 소리쳤다.
《이젠 우리를 좀 도와주시오. 아니, 그 처녀동무를 말이요. 너무 안타까와 속에 이젠 재가 들어앉았을거요.》
《그래서 밭을 몽땅 갈아엎었군요.》
《그래서… 갈아엎었소.》
기사장의 목소리는 다시 풀이 죽어버렸다. 한숨처럼 내뱉는 그 한마디에는 안타까움과 실망, 이름할수 없는 자책까지도 엿보였다.
《동무앞에 면목이 없게 되였소.》
리당비서가 이렇게 말하였다.
《면목이야 뭐… 그런데 제가 분한것은 유채를 더는 심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그것입니다.
실패할수도 있지요. 그래서 연구가 아닙니까. 문제는 주저앉지 않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명백하게 항의였다. 순정이를 대신하여 농장일군들에게 하는 비판이였다.
리당비서는 아연해졌다.
포전을 갈아엎은데까지는 알고있었으나 그 뒤일은 알지 못했던것이다. 주저앉아 더는 유채를 심지 않는단 말이지.…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그는 자신을 자책하였다.
리당비서라는게 그것도 알지 못하고 돌아갔으니 항의를 받아야 했고 응당 비판을 받아야 했다.
무거운 침묵이 안타까울 정도로 굼뜨게 지나갔다.
리당비서가 돌연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김수봉을 똑바로 보며 나직한 어조로 말하였다.
《고맙소, 군관동무. 일깨워주어 정말 고맙소.》
그리하여 그들사이에는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굳고도 억센 다리가 마련되였고 아침내 유순정을 그곳 부대의 유채밭으로 보내겠다는 약속이 이루어지였다.
《좀 잘 도와주오. 늘 속이 까매서 돌아가는 기술원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프거던.
군대동무들이니 그걸 해냈지 우리야… 좌우간 여러모로 고맙소. 참, 동무네가 성공했다고 하면 순정동무가 부끄러워할수도 있고 괴로워할수도 있으니 동무가 도움받을 일이 있어서 보내는것으로 하기요. 어떻소?》
《고맙습니다. 비서동지, 전 그렇게까지…》
그들은 천천히 관리위원회마당을 벗어났다.
리당비서는 억세고 든든한 김수봉을 점도록 바래주었다. 마음속에 유순정과 김수봉을 나란히 세워보고는 내심 흐뭇한 생각을 해보았다.…
그날 저녁 그들이 유순정을 찾아 동왈숙의 집에 오게 된데는 이러한 사연이 있었던것이다.
×
순정은 들길을 걷고있었다.
따뜻한 봄볕이 자글자글 내려쪼이는 길가녁에는 냉이며 길장구 등 봄풀들이 파랗게 돋아있었다.
순정은 들놀이를 떠난 소녀처럼 마음이 들뜨는것을 느끼며 산기슭에 자리잡은 농장마을을 정답게 바라보았다. 아담한 문화주택들이 늘어서고 과일나무들이 집집마다 꽃을 피운, 그림처럼 아름다운 마을이였다. 저 마을을 떠나서 한시도 못살것 같았다. 어느새 정들어버린 마을, 유채만 성공한다면 정말로 떳떳하련만…
등에 진 가방에는 동왈숙이 정성담아 꾸려준 음식들이 들어있었다.
동왈숙은 순정이가 마치 원족이나 가는듯이 닭알을 삶는다, 두부를 튀긴다 하며 부산을 피우더니 멀리까지 따라나와 바래워주는것이였다. 후덥고 따뜻한 인정미가 온몸에서 물씬물씬 풍겨오는것만 같았다.
《기술원, 가거들랑 잘 가르쳐주구 오라구. 후방일군인 그 사람이 오죽했으면 예까지 찾아왔겠나. 이 어머니들을 대신해주느라구 병사들을 위해 발이 닳도록 뛰여다니는게 그 사람들이야.
거기만이라도 유채가 성공해야겠는데…》
《어머니의 마음을 알겠어요. 걱정말고 들어가세요.》
순정은 방긋이 웃음을 남기고 걷기 시작했다.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 땅에서는 흰김이 문문 피여오르고있었다. 순정은 피여오르는 흰김을 보면서 어쩐지 동왈숙의 집 부엌을 생각하였다.
언제나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흰김이 뽀얗게 서려오르군 하는 부엌, 그것은 동왈숙이와도 같이 후더분하고 인정미 넘쳐나는 이 나라 어머니들의 마음이 아닐가.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궃은 일, 마른 일 가리지 않고 아낌없는 정성을 쏟아가는 어머니들… 그 어머니들을 대신하고있을 낯모를 후방부대대장, 그는 어떤 사람일가.
순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쳐든 호기심에 싸여 있는 자기를 뒤늦게야 발견하고 스스로 얼굴을 붉혔다.
어머니가 그렇게도 안달아하며 소개하는 대상자들은 모두 싫다고 하면서도 어떻게 낯도 모르는 사람을 두고 자기나름대로 《그는 성미가 급한것 같으면서도 인정미가 넘칠거야. 그는 좋은 사람일거야. 쾌활하고 또…》하고 단정하는 자기의 속마음이 우스웠던것이다.
순정은 바로 그래서 들놀이를 떠난 소녀처럼 마음이 흥겨워진것이였다.
해볕이 자글자글 내려쪼였다. 봄도 이제는 여름에게 자리를 내여주려는듯싶었다.
만일 지금 유채가 살아있다면 꽃이 피였을것이다. 군대동무들이 심었다는 유채는 어떠할가.
그의 눈앞에는 흰녹병이 발생하여 소장등처럼 잎이 누래지였던 시험포전이 다시금 생생히 떠올랐다.
군대동무들도 흰녹병때문에 애를 태우고있다면 나는 무슨 도움을 주어야 하는가. 이 고장에서는 유채재배가 불가능하니 더 고생하지 말고 이제라도 그만두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순정의 걸음은 태엽이 풀려버린 장난감처럼 점점 떠지기 시작했다. 그가 한자리에 못박힌듯 서서 망설이고있을 때였다.
《아니, 길을 몰라서 그럽니까?》
뒤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순정은 화뜰 놀라 돌아보았다. 빨간 령장에 노란줄이 하나 건너간 병사가 귀엽게 생긴 얼굴에 웃음을 담고 순정을 보고있었다.
《그런게 아니라…》
《어서 말씀하십시오. 제가 도울수 있는 일이라면야…》
병사의 왼쪽팔에는 기통수완장이 끼여있었다.
《여기 어디 유채밭이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찾아가야 할지…》
《아, 우리 유채밭보고 그러지요? 자, 갑시다.》
병사의 걸음은 순정의 걸음과는 대비도 되지 않았다. 얼마나 힘있고 얼마나 빠른지.
그는 말도 그렇게 빨리 했다.
《유채밭은 왜 찾아갑니까?》
《그건 저…》
《비밀이라면 말 안해도 됩니다.》
《아이참, 비밀은 무슨, 난 유채를 연구하던 사람이예요.》
《예―에. 그래서 우리 부대 유채밭을 찾았구만요. 우리 후방부대대장동지가 몇년전부터 유채밭을 가꾸고있습니다. 밤낮 나가 살면서… 공부는 또 얼마나 많이 한다구요. 후방부대대장동지에게 오는 숱한 과학기술서적들을 전달하자면 유채밭에가야 합니다. 과학원과 인민대학습당… 정말이지 안 가본데 없습니다.》
《후방부대대장동진 참 훌륭한분이구만요.》
《두말하면 잔소리지요. 내가 기통수임무를 수행하느라고 찬밥을 먹을수 있다고 글쎄 내 밥만은 가마안에 넣어두라고 했다는겁니다. 우리 어머니도 그렇게는 못했겠는데…》
순정은 자기의 생각이 맞아떨어진데 대하여 속으로 연방 감탄사를 터쳤다.
그래, 선군시대인 오늘 어느 부대에나 이런 후방일군들이 다 있을것이다. 그래서 시대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 않는가.
병사의 이야기는 계속되고있었다.
《며칠전엔 콩비지를 했는데 좀 식었지요. 뭐. 콩비진 따끈할 때 먹어야 제맛이 난다면서 내가 먹을 한그릇때문에 또 불을 지피게 하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미안하던지…》
그러고보니 병사의 얼굴이 귀염성스럽게 생각된것은 얼굴이 동그스름하기때문이였다. 실팍한 잔등에서는 기운이 막 뻗치는듯 하였다.
순정은 대대의 병사들을 그렇듯 따뜻이 돌봐주느라 쉴새없이 바쁘게 보낼 후방부대대장이 유채밭까지 가꾼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무슨 사연이 있는것이 아닐가? 그렇지 않고서야…
순정이 묵묵히 생각에 잠겨있는것을 감촉한 병사가 자기의 이야기를 서둘러 끝맺았다.
《아니, 그런데 왜 유채를 연구하던 사람이라고 합니까? 지금은 하지 않는다는겁니까?》
《내가 그렇게 말했던가요.》
《예, 그 말을 듣는 순간 과거형이구나 하구 생각했습니다.》
순정은 웃었다.
《글쎄… 우리 농장에서도 몇해전부터 시험을 시작했는데 끝내 빛을 못 보았어요. 여기는 어때요?》
《직접 보십시오. 거의 다 왔습니다.》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아, 고거 다람쥐.》
병사는 나무우를 기여오르는 다람쥐를 향하여 휙― 휘파람을 불어댔다.
《저기가 유채밭입니다.》
병사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니 유채꽃이 만발한 포전이 무연하게 펼쳐져있었다.
놀라왔다. 암만 자세히 보아도 분명 유채꽃이였다. 그러니 후방부대대장은…
《저기 후방부대대장동지가 있습니다.》
순정은 뛰여가는 병사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아니, 기통수동무가 웬일이요? 오, 편지가 온 모양이구만.》
순정의 귀에 이런 말소리가 울려왔다.
《아닙니다. 손님을 데려왔습니다. 유채를 연구하던…》
《유채?! 그럼 순정동무가…》
이어 발자국소리가 나더니 키가 큰 사람이 순정이앞에 나섰다.
실농군처럼 얼굴이 구리빛인 그 사람은 생각과는 달리 매력있고 칼칼하게 생긴 젊은이였다. 그의 밝은 눈빛은 기쁨과 반가움을 담고 해빛을 받아 설레이는 바다물과 같이 반짝였다.
《유정동무지요. 제 휴방부대대장 김수봉입니다.》
《김수봉?!》
순정은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김수봉, 대학때 받았던 편지의 겉봉에 씌여있던 이름도 김수봉이였다. 그러니 그가… 이 대대장?
모든것이 명백해졌다. 그 어떤 의문도 없었다.
그때 자기의 론문을 부정했던 사람, 그가 지금 실천으로써 나의 연구생활 5년을 전면부정하는것이 아닌가.
순정은 기통수가 후방부대대장에게 인사를 하고 가는것도 모르고 자기 생각에 빠져있었다.
《순정동무, 정말 잘 왔소. 사실 유채꽃이 처음 피였을 때 제일먼저 떠오른 사람이 순정동무였소. 그래서 시간을 내여 대학에 갔댔는데 그만 졸업했다는거요.
대학에서 배치지를 알려주었지만 이래저래 바쁘다나니 찾아가진 못하고 동무에 대한 소식을 귀동냥으로만 들었소.
농사일을 하면서도 계속 유채를 연구한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소. 한달음에 달려가 만나보고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열두번씩 들었댔소. 하지만 동무에게 도움이 될만 한 자료가 부족했소. 그래 몇해 더 해본다는게 이렇게…》
순정은 눈물이 쿡 솟아올랐다.
그가 지금껏 자기의 유채연구를 줄곧 지켜보고있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뜨겁게 하여주었다.
《전 유채연구에서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순정은 돌아섰다. 첫째로는 눈물을 보이고싶지 않아서였고 다음은 자기가 있을 곳이 못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상처입은 마음으로 하여 그는 몸을 지탱할수 없으리만큼 맥이 진해있었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순정의 뒤로 수봉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총알처럼 날아왔다.
《서시오. 그렇게는 못 갑니다.》
명령처럼 울리는 그의 말에 순정의 걸음은 점차 속도가 떠지더니 공기빠진 공처럼 멎어버렸다.
수봉이 천천히 다가왔다.
《사실 잡지에서 동무의 론문을 읽었을 때 난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릅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유채를 많이 심어 기름문제를 풀려고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떨쳐나서 고심어린 탐구의 밤을 새우고있구나 하고 생각하니 막 힘이 생기더군요. 비록 그것이 현실에 접근하지 못한 론문이였지만 나와 한 목적지로 가는 길동무들이 많은데 대해 자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동문… 이 일이 하고싶으면 하고 하고싶지 않으면 그만두는 그런 일인줄 아십니까.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이 일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바라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난관이 많다고 그만두겠다는겁니까?》
그는 안타까운듯 긴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지금 일부 사람들속에서는 당이 아파하는 문제, 우리 장군님께서 바라시는 문제라면 자기들이 맡겠다면서 뛰여듭니다. 그러나 조그마한 난관이라도 앞을 막아서면 언제 그랬냐싶이 주저앉습니다. 결사관철의 정신은 말보다 행동에서 필요한것입니다.》
순정은 숯불처럼 달아오른 김수봉의 얼굴을 놀랍게 바라보았다.
결사관철,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현실에 몸을 잠그었다고 해서 저절로 생기는것이 아니다.
나에게는 그러한 결사관철의 정신이 없었다.
순정은 수봉의 눈에서 뿜어져나오는 열기가 자기에게 와닿아 싸늘하게 얼어들었던 자기의 피를 서서히 그리고 열광적으로 덥혀주고있는듯 한 감을 느꼈다.
그렇다. 저 군인의 심장처럼 뜨거운 결사관철의 심장이 나에게도 있었더라면 유채연구를 저버릴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을것이다.
나는 군대동무들처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바라시는 문제를 전투명령으로 받아들이지 못한것이다. 자기를 더 먼저 생각했고 눈앞의 실패에 겁을 먹은것이다.…
그가 고마웠다. 자기에게 든든한 신념의 대를 심어준 수봉이가 아득히 자란 거목처럼 보였다.
순정은 봄바람에 설레는 유채밭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향기가 풍겨왔다.
유채꽃향기!
그것은 혁명적군인정신을 체현한 한 인간이 낳은 향기였다.
순정은 그 향기에 반하여 저도 모르게 다가갔다. 한발자국 또 한발자국…
×
다음해 유순정은 유채재배에서 성공하였다.
(정평농업대학 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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