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99(2010)년 제5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붉은 노을

윤 금 철

 

 

봄의 향기는 종합청사앞의 잔디밭에서부터 풍겨나오는상싶었다. 저 멀리 산마루에는 아직도 뿌연눈이 희끗희끗 하건만 여기 잔디밭에는 누런 잎들을 밀어내며 새파란 새싹들이 뾰족뾰족 자라올랐다. 그우에 아지랑이까지 춤추며 아물거렸다.

기술자들과의 회의를 마치고 나온 성동제강련합기업소 지배인 신철묵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역에 나갈 시간이 박두해오고있었다. 그는 이마에 살며시 와닿는 해빛의 따스한 감촉을 느끼며 승용차가 있는 곳으로 가볍게 걸음발을 떼였다.

해볕에 제법 따뜻해진 승용차의 문손잡이를 잡는데 금속연구소 소장 안광석이 바삐 뒤쫓아왔다.

《저… 지배인동지!》

철묵은 문손잡이를 잡은채 고개를 돌렸다.

《오, 소장동무로구만. 왜 그러오?》

광석은 두손을 앞으로 모아잡고 서서 어줍게 웃었다. 닫긴형의 까만 양복에 눈부시게 하얀 목달개를 달고 머리기름까지 번쩍번쩍 바른 광석의 뾰족한 얼굴이 오늘따라 별로 젊어보인다.

〈ㅈ〉철조동무들이 지배인동지와 사진을 한장 찍자고 해서…》

광석은 이러며 슬쩍 철묵의 기색을 살피였다.

《허허… 그렇다?!》

철묵은 빙긋이 웃으며 문손잡이에서 손을 내리웠다. 철도성일군들이 기업소의 물동을 실은 차판을 끌고 들어온다는 련락이 와서 역에 마중나가려던 참이였다. 그런데 광석의 제의를 받고보니 허술히 밀어버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아직 시간도 좀 있었다.

사실 그는 오늘 기분이 좋았다. 기술자들의 회의와 그뒤끝에 그들에게 줄 상품과 식사준비도 성의있게 된데다 연단에 나선 토론자들의 결의 또한 매우 좋았던것이다. 좋은 기분은 언제나 마음을 너그럽게 해주는 법이다.

《그 동무들이 어디 있소?》

《저기 있습니다.》

광석이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정말 《ㅈ》철조성원들이 웅기중기 모여서서 흘끔흘끔 이쪽을 주시하고있었다.

(허… 그냥 가면 안되겠는걸.)

철묵은 빙긋이 웃으며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넘겼다.

《ㅈ》철조동무들이란 《2월17일과학자, 기술자돌격대》의 《ㅈ》철생산을 위한 소대에 망라된 기술자들이다. 철묵은 성에서 사업하다가 여기 지배인으로 배치받아온 날부터 지금까지 그들과 함께 무수한 탐구의 낮과 밤을 보내였다. 그리하여 《ㅈ》철생산공정을 드디여 세워놓았다. 이 나날에 그들이 흘린 땀은 그 얼마였으랴. 끝없는 탐구와 열정으로 새것을 창조해낸 사랑스러운 사람들! 아무리 바쁜들 그들의 소박한 소원이야 왜 풀어주지 못하겠는가.

《오라구 하오. 아니, 내가 가야지.》

광석의 얼굴은 조명이라도 받은듯 환해졌다. 그는 성수가 나서 동료들에게 《동무들! 빨리!》하고소리치며 손짓을 했다.

모여섰던 사람들은 서로 뒤질세라 황급히 이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지배인동지, 이거 바쁘신데 안됐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허허… 무슨 소릴? 큰일을 한 동무들과 한장 찍어놔야 추억이 되지 않겠소. 자, 자릴 잡소.》

옷차림을 바로할래, 자리도 잡을래 부산을 피우는 그들을 흥그럽게 바라보던 철묵의 눈길은 뒤줄 맨끝에 서있는 한 청년에게 멎어섰다.

기름한 얼굴, 꾹 다문 입… 연구소의 《막내》로 불리우는 연구사 강진이였다. 큰 키를 우뚝 솟구고 서있는 그의 모습은 미풍에 아지를 흐느적이는 수양버들속의 한그루 강대같이 뻣뻣한 기운이 느껴졌다.

《강진동문 사색중이요? 지금같은 때야 인상을 좀 펴야지. 거 맨 가녁에 서지 말구 여기 내곁으로 오오.》

주변사람들이 술렁거리며 길을 틔워놓았다. 그러나 그는 선자리에서 손을 내흔들었다.

《지배인동지, 괜찮습니다. 전 여기두 좋으니… 빨리 찍읍시다.》

《허허… 그래, 참 고집두…》

사진을 찍고난 철묵은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했으나 마음속엔 가벼운 파도가 일었다. 여느 사람들같으면 제꺽 응해나섰겠는데 모를 일이다.

(이제 보니 강진이가 나와 마주서길 꺼리는구나.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러지 않았는가.)

그의 눈앞에는 잊혀지지 않는 그때의 일이 방금전일인듯 생생하게 떠올랐다.

석달전, 새벽녘에 《ㅈ》철조성원들이 시험로로 쓰고있는 1강철직장 4호전기로에 가니 그들은 맨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있었다.

전기로는 쇠물을 쏟던 자세로 기우뚱 서있고 주변에는 쇠장대들이 어수선하게 널려있었다. 그들은 철묵을 보자 한사람, 두사람 엉치를 털며 무겁게 일어섰다.

《아니, 왜 이렇게들 저기압이요?》

광석이가 머밋머밋 다가왔다. 엊저녁만 하여도 부드럽고 하얗던 방열복이 때가 올라 얼룩덜룩했다.

《지배인동지, 면목이 없습니다. 〈ㅈ〉철생산법에 의한 〈ㅌ〉합금강생산이 오늘은 꼭 성공할줄 알았는데 또…》

《실패란 말이지. 허허… 그래서 어깨들이 처졌구만. 일없소. 초행길인데 왜 실패가 없겠소. 세계발명왕인 에디슨도 주먹만 한 백열등을 발명할 때 천번이나 실패하지 않았소. 기운을 내시오. 이 전기로는 동무들이 성공의 만세를 부를 때까지 아예 설비명부에 없는셈치겠으니 제집 가마처럼 생각하구 마음놓고 쓰란 말이요.》

《그렇지만… 현행생산두 바쁜데…》

철묵은 축 처진 광석의 어깨에 다정히 한손을 얹었다.

《그런 걱정은 마오. 〈ㅈ〉철생산을 완전히 정상화하자면 지금 하고있는 시험생산까지 끝을 봐야 하오. 그러니 잔걱정에 발목을 잡히지 말구 앞으로만 돌진하잔 말이요.》

《지배인동지, 이렇게 밀어주시니 정말… 힘이 생깁니다. 동무들, 어떻소?》

불끈 틀어쥔 주먹들이 머리우로 솟구쳐올랐다.

《힘이 생깁니다!》

철묵은 코허리가 시큰해났다. 기업소의 중임을 떠멘 일군의 한사람으로서 응당한 말을 해주었는데 팽배한 힘을 얻고 다시금 일떠서는 이들, 넘어야 할 언덕은 높고 마셔야 할 실패의 고배는 열물같건만 절대로 물려서지 않으려는 이들에 의해 지금 하고있는 시험생산도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기대와 믿음이 철기둥처럼 뻗쳐올랐다. 그는 옆의 의자에 허물없이 앉았다.

《내 생각에는 말이요, 실패의 원인이…》

철묵은 허리를 구부리고 발치에 있는 석회덩어리를 필묵처럼 쥐였다. 철판을 깐 바닥에 여러가지 기호와 수식을 써가면서 자기가 생각하고있던바를 설명해주었다. 긍정하는 사람, 반대하는 사람…

조심조심 서로의 의향을 내비치며 시작된 토론은 차츰 열띤 론쟁으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동안 시간이 흘렀어도 이렇다할 묘안이 나오지 않았다.

이때 철묵의 뒤쪽에서 누군가 급하게 뛰여오는 기척이 났다. 뒤미처 헉헉 단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머리우에서 들리였다. 돌아보니 기름한 얼굴에 두눈이 이글거리는, 약간 면식이 있는 소대의 《막내》 강진이였다. 풀색작업복을 걸친 강진은 풀떡풀떡 널뛰기를 하는 앞가슴을 한손으로 누르며 꿀꺽 닭알침을 삼키였다.

《강진동무! 퇴근했던 사람이 이 밤중에 웬일이요?》

광석이가 어떤 예감에서인지 벌떡 일어서며 놀랍게 물었다.

《소대장동지! 동무들! 원인을… 원인을 찾았습니다. 찾았단… 말입… 니… 다.》

강진은 학습장을 말아쥔 한손을 높이 쳐들고 흔들어대다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며 어깨를 떨구었다.

《뭐라구? 그게… 정말이요?》

《예, 이걸… 이걸 좀… 보십시오.》

강진은 팔을 들어 눈굽을 뻑 닦더니 말아쥐였던 학습장을 펼쳐 광석에게 내밀었다. 퍼런 마분지뚜껑에 때가 반질반질한 책이였다. 문제풀이학습장처럼 지우고 쓴 자리가 력력하였다. 강진은 손가락으로 맨 아래부분을 짚었다.

《계산해보니 이것때문에…》

《…》

잠시 정적이 깃들었다. 숨을 죽인채 머리를 맞대고 학습장을 들여다보던 사람들이 하나, 둘 고개를 쳐들었다. 각이한 얼굴들에 하나같이 감탄과 경탄의 빛이 차넘치였다.

《우리 〈막내〉가 끝내 찾아냈구나.》

《강진이!》

다음순간엔 왁 달라붙어 강진을 추켜올렸다.

《어쌰! 어싸!…》

강진은 날개처럼 팔을 벌린채 올라갔다가 떨어지군 하였다. 광석이가 철묵에게 속삭였다.

《우리한테 온지 1년밖에 안된 동무인데 현장에서 살다싶이 합니다. 너무 힘들어하는것 같아서 엊저녁에 억지로 등을 떠밀어보냈는데 집에 가지 않구 또 사무실에서 밤을 새웠습니다.》

《!…》

철묵은 감동어린 눈길로 강진을 바라보았다. 평시에 사람들이 《막내》, 《막내》하기에 심상히 대해왔는데 얼마나 정열적이고 수준있는 청년인가.

기업소기술진의 중추적역할을 하는 몇사람밖에 파악하지 못하고있던 철묵은 머리 허연 로배들도 못한 일을 해제낀 전도양양한 젊은 연구사를 알게 된것이 여간 기쁘지 않았다. 학위학직소유자들이 듬직하게 틀고앉은 간단치 않은 기업소기술진의 한복판에서 일약 두각을 나타낸 수재급의 청년! 안아주고 업어주고싶은 심정이였다.

그는 덥석 강진의 손을 잡고 세차게 흔들어댔다.

《정말 수고했소.》

얼결에 손을 맡기고섰던 강진은 얼굴을 붉히며 슬며시 손을 뽑았다.

《고맙… 습니다.

《허허… 젊은 동무가 정말 대단하오, 대단해. 그래, 어느 대학을 나왔소?

《김책공업종합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나이는?

《스물여덟입니다.》

《좋구만.》

광석이가 옆에서 곁들었다.

《지배인동지, 대학 최우등생입니다. 대학에 떨어지라는걸 로동현장에서 연구사업을 하겠다면서 우리 기업소에 왔습니다.》

《그래? 허허… 보배덩이가 왔구만.…

철묵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김책공업종합대학 최우등졸업생! 스물여덟살! 《ㅈ》철생산방법에 의한 《ㅌ》합금강생산 성공! 이제 보니 기술진의 《막내》가 아니라 《맏이》로 받들어야 할 재사였다. 어쩌면 우리한테 이런 보배가 찾아왔단 말인가.

《그래, 부모님들은 뭘하오?》

《아버님은… 1강철 2호로장입니다.

《아, 그렇소? 동무가 2호로장의 아들이란 말이지. 좋구만. 그래, 장가는 갔소?》

강진의 얼굴에 갑자기 그늘이 비껴들었다. 그는 입을 꾹 다물더니 꿋꿋한 자세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총각입니다.》

광석은 이러며 시물시물 웃었다. 하지만 철묵은 같이 웃을수가 없었다. 점점 얼굴빛이 컴컴해지는 강진을 보느라니 어딘가 그의 아픈 곳을 찔러놓지 않았는가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는 얼른 말머리를 돌리였다.

《집은 어디요?》

《저… 마선폭포… 마을입니다.

《음.》

기업소에서 10여리는 좋이 떨어져있는 마을이다.

(가까운 곳으로 집을 옮겨줘야겠군.)

철묵은 광석을 손짓해 찾았다.

《동무가 내 차를 가지고 강진동물 집에까지 태워다주고 오오.》

《알았습니다.》

그런데 강진은 덴겁을 한듯 펄쩍 뛰며 두손을 내흔들었다.

《전 일없습니다.》

광석이가 손을 잡아끄는데도 그는 끝내 사양하였다. 철묵은 서운한대로 더 권하지 못하였다.

그때는 초면이니 그러겠지 하고 심상히 생각했었다. 그러나 방금전일을 당하고보니 그것이 아닌것 같다. 자기를 의식적으로 멀리하려 하지 않는가 하는 의혹이 슬그머니 머리를 쳐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왜 그럴가?… 어쨌든 집은 옮겨줘야겠어.)

 

×

 

며칠후 어느날 철묵은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송수화기를 들었다. 드바쁜 시간을 보내다나니 오늘 퇴근길에서야 강진의 집문제가 생각났던것이다.

광석은 기다리고있기라도 한듯 인차 전화를 받았다.

《오, 소장동무요?》

《그렇습니다. 지배인동지!》

《집에까지 전화를 걸어 안됐소. 식사중이 아니요?》

《아닙니다. 방금 상을 치웠습니다.》

《그럼 마침이구만. 다른게 아니구 전번에 내가 과업을 준거 말이요. 이번에 동무네가 배정받은 주택중에서 한 세대는 강진동무에게 주라는것 말이요.》

《예, 오늘까지 집꾸리기가 다됐습니다. 아까 퇴근길에 들려보니 후방부동무들이 집안도배까지 다 끝냈습니다. 돌아봤는데 정말 멋쟁이입니다.》

《허허… 그렇소?!

철묵은 그제서야 목단추를 끌러놓았다. 조마스럽던 마음이 봄눈녹듯 스르르 풀리였다. 그는 송수화기를 바꿔잡으며 의자등받이에 몸을 제끼였다.

《집이 어디요? 정문앞이요? 아니면 옆이요?》

《정문앞 3층살림집 2층입니다.》

《집위치가 마음에 드누만. 해빛이 잘 들거요. 소장동무가 래일은 본인을 데리고나가 집을 보여주구 마음드는 집을 골라잡도록 해주오. 동무나 내가 좋다구 해서 본인에게도 좋다는 법이야 없지 않겠소.》

《알겠습니다.》

홀가분하게 일어나 양복을 벗는데 뜻밖에도 평양에 떨구어두고 왔던 막내딸 미향이가 불쑥 방안에 들어섰다. 찬기운을 풍기며 들어선 미향이의 갸름한 얼굴은 빨갛게 익었으나 깜장치마에 분홍저고리를 받쳐입은 그의 온몸에서는 싱싱한 활력이 풍겨왔다.

《아버지, 건강하셨어요?》

미향은 활짝 웃으며 나부시 인사를 하였다.

《아니, 네가?!》

철묵은 어마지두 놀라 벗은 옷을 손에 든채 눈만 껌뻑거렸다.

《맡았던 연구사업을 다 끝냈다우다.》

안해 은실이가 미향이의 트렁크를 들고 뒤따라 들어오며 시들한 어조로 한마디 하였다. 쟁반같이 둥실한 얼굴은 쓴 오이를 씹은 상이였다.

철묵은 풍만한 몸을 흔들며 웃방으로 올라가는 은실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눈길을 돌렸다.

《그게 정말이냐?》

《네. 그런데 아버지 몸이 퍽 축갔어요.》

《오, 바빠서 그러겠지. 앉아 숨을 좀 돌려라. 내 몸을 좀 씻구 나올게.》

철묵은 벗은 양복을 미향이에게 넘겨주고 세면장에 들어갔다. 내의까지 벗어제끼고 스프링바람으로 찬물에 활활 세면을 하였다. 그러나 몸을 씻을 때마다 솟구치던 그런 상쾌한 기분은 살아나지 않았다.

(하던 연구사업을 다 마무리했단 말이지.)

생각이 깊어졌다. 원래 철묵은 여기로 배치받아올 때 미향이를 데리고오려고 했었다. 그런데 맏딸, 사위가 반대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연구소에서 한창 일을 하고있는 애를 왜 지방으로 데리고가겠는가 하는것이였다. 앞으로 미향이 배우자문제까지 자기들이 책임지겠다고 법석거렸다. 물론 은실이도 찬성이였다.

하지만 미향이는 처음부터 반대였다. 자기는 전공이 금속공학이기때문에 지방에 내려가서 현실에서 절박하게 요구하는 문제를 잡아 연구사업을 하겠다는것이였다. 그러다가 연구소일군들까지 나서서 부모를 따라가더라도 지금 하고있는 연구사업이나 마무리해놓고 가는것이 어떻겠는가고 하는 바람에 수그러들고말았다.

그때 철묵은 미향이가 열중 아홉은 거기에 머물러앉고말것이라고 예측했었다. 함께 일하는 동무들은 물론 딸, 사위들이 미향이가 마음을 돌려먹도록 이러저러하게 작용할것은 불보듯 뻔하기때문이였다. 그런데 그 생각을 뒤집으며 이렇게 훌쩍 나타날줄이야. 아주 왔을가? 아니면?

철묵은 소랭이에 담그었던 발을 씻고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새 실내복을 갈아입고 가지고온 짐을 정리하던 미향이는 철묵이가 안락의자에 앉기 바쁘게 고급담배 한곽을 차대우에 놓아주었다.

《맏아저씨가 보내는거예요. 피워보세요.》

《그래? 거기선 다들 무고하겠지?》

《예.》

철묵은 느슨한 미소를 지으며 담배갑에 손을 뻗쳤다.

《셋째넨?》

《별일 없어요. 아저씨가 굉장한걸 연구했다면서두 밤낮 연구소에 나가사니 언니가 속상해해요.》

《연구사업이 말처럼 쉽겠냐? 그래, 넌 맡았던 과제를 정말 다 끝냈다는거냐?》

《예, 곁에서들 도와주어서 예상외로 빨리 끝냈어요. 그 덕에 전 학위론문까지 심사에 제출하게 되였어요.》

미향은 례사롭게 말하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감출수 없는 기쁨이 내비치고있었다.

《참 잘되였구나. 그래, 앞으론… 어떻게 할셈이냐?

《어떻게 하긴요. 아버지공장에 다니겠어요. 오면서 보니 풍치수려하고 도시가 깨끗한게 마음에 들더군요. 아버지, 전 인차 정들것 같애요.》

《그렇단 말이지?!》

《예, 그만 재잘거리구 밥상이나 놔라. 네 속심을 모를줄 알구

언제 들어왔는지 은실이가 밥상걸레를 든채 미향이에게 곱지 못한 눈길을 주며 서있다.

《호호호

미향은 은실의 시선을 피하며 까르르 웃어댔다.

철묵은 은실이가 미향이와 주고받는 말이며 은실이의 말에 웃어대기만 하는 미향이의 행동이 의문스럽기만 했다.

얼마후 저녁식사가 끝나고 미향이 일찍 자겠다며 웃방으로 올라가자 철묵은 안해에게 조용히 물었다.

《저 애 속심을 안다는건 무슨 소리요?》

은실은 아직도 어딘가 흐린 낯색을 풀지 못한채 평양에 있는 자식들에게 보낼 말린 물고기따위의 지방특산물을 꾸리다가 풀썩 자리에 물러앉았다.

《평양에 배치받아 일하던 애가 제발로 찾아왔으니 참… 이제 두고보세요. 저 애만은 외기러기처럼 여기에 댕그라니 둥지를 틀지 않나.

《허허! 그 애 마음속에 들어가본것 같구려.》

《당신은 너무도 몰라요.》

《?

철묵은 천천히 담배를 붙여물었다. 그는 딸 넷을 거느린 아버지였다. 젊없을 때는 《딸딸이아버지》, 《녀맹위원장》이라는 놀림을 자주 받군 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젊어 한때였다. 딸 셋은 이미 평양에 살림을 폈다. 그래서 은실은 막내인 미향이까지 형제들곁에 의좋게 있게 해주고싶어 그처럼 몸달아하는것이다.

《저애도 제 생각이 있겠는데 딴 내색을 마오. 이왕 수속까지 다 해가지고온 애한테 이제 딴 소릴 해야 무슨 필요가 있겠소?》

《알겠어요.》

다음날 아침 철묵은 미향에게 피로를 풀고나서 천천히 입직수속을 하라고 이르고는 출근길에 올랐다.

(저 애도 이젠 시집갈 나이가 되였는데)

너무 갑자기 나타나고보니 배우자문제가 좀 캄캄하였다.

(참, 언젠가 대학때 알게 된 총각이 있다는 소릴 들은것 같은데)

하지만 생각을 더 이을수 없었다. 사무실에 들어서기 바쁘게 결재문건을 든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찾아들었던것이다.

드바쁜 하루가 시작되였다. 결재수표, 참모회의, 협의회

오전내내 사무실을 뜨지 못하고있던 철묵은 점심무렵에야 밖으로 나왔다.

류달리 맑은 날이였다. 창창 맑은 하늘에서는 따스한 해빛이 한껏 쏟아져내리고 청사주변의 살구나무 아지들에는 촘촘히 내돋은 꽃망울들이 입쌀튀기같이 부풀어올랐다. 천천히 계단을 내리는데 승용차곁에서 서성거리던 광석이가 꾸벅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소장동무로구만. 왜 그러오?》

《지배인동지, 오늘 점심에 강진동무가 1강철동무들을 위해 뭘 좀 간단히 준비를 해가지고 왔는데… 좀 봐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 동무가

철묵은 선뜻 리해가 가지 않아 광석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 국수와 콩물을 좀

철묵은 코마루가 찡해났다.

(참, 사람두!)

《타오. 가보기요.》

승용차는 잠간사이에 1강철직장앞에서 멎어섰다.

철묵이가 오기 몇해전에 개건확장했다는 1강철직장은 웅장한 밤색건물이였다. 처마밑으로 공기창들이 주런이 달리고 출입문우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쇠물바가지가 비스듬히 기울어지면서 쇠물을 쏟는 그림이 부각되여있었다.

현장식당은 직장뒤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구수한 음식냄새가 마음을 흥그럽게 한다.

철묵은 출입문앞에 있는 식탁에 다가갔다.

비록 그 량은 얼마 되지 않아도 얼마나 뜨거운 진정이 어려있는것인가.

다시한번 가슴이 뭉클 젖어든다.

(이런 용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은 때인데… 정말 괜찮은 친구야.)

철묵은 강진의 그 남아다운 성격에 저도 모르게 매혹되였다.

《그런데 강진동무는 어디 있소?》

《어색하게 뭐 얼굴을 보이겠는가고 하면서 안 오겠다는걸 소개도 해주고싶어서 데려왔습니다. 지금 식당앞 소공원에 있습니다. 제가 가서

《놔두오.》

철묵은 강진을 데리러 가려는 광석을 제지시켰다. 강진이같이 자존심이 강하고 열정적인 사람들은 이런 일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더 옹색해할수 있기때문이였다. 그는 식탁을 다 돌아보고나서 발길을 돌렸다.

《강진동무에게 집을 보여주었소?》

《예, 아침 첫시간에 데리고 갔댔습니다.》

《잘했소. 마음들어합데?》

《예, 지배인동지가 찍어서 배정해준 집이라는것도 다 말해줬습니다. 그런데 글쎄

그들의 이야기는 문밖에 나서자 동강이 났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입을 쩍 벌리게 한것이다. 식당앞 공지에서는 식사하러 온 1강철직장 로동자들이 방열복차림으로 무릎싸움을 벌려놓고있었다. 수염터가 꺼밋한 사람, 솜털이 보르르한 애숭이… 나이의 차이가 없이 마구 엉켜돌아가는데 왔다갔다 어찌나 맹렬한지 발을 옮겨디딜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복판에 강진이도 끼여있지 않는가.

늘 입는 풀색작업복꽁무니에 얄팍한 잡지 같은것을 쿡 찌른채 맞다드는 상대들을 벌써 몇명째 넘어뜨리고있었다. 그러다가 두명의 선수가 동시에 달려드는 바람에 철묵의 발치에 와서 꽝 넘어지고말았다.

《강진동무, 이게 무슨 꼴이요? 한다하는 기술자가

광석이 강진을 부축여주며 한마디 했다.

《한번 겨뤄보자고 대드는판인데 가만있을수가 없어서

이러며 엉뎅이를 툭툭 털던 강진은 철묵을 보자 엉거주춤 굳어졌다. 웃음발이 흐르던 유쾌한 표정도 점차 굳어졌다.

《허허, 좋구만.  5. 1절땐 무릎싸움도 한 종목 넣어야겠소. 어떻소, 강진동무?》

《좋습니다.》

강진의 얼굴에 화색이 피여올랐다. 철묵은 수수한 작업복차림으로 로동자들과 휩쓸려있는 강진이가 얼마나 정차게 느껴지는지 몰랐다.

《오늘 보니 강진동무가 체육에도 취미가 있는것 같구만. 응?》

《취미정도가 아니라 배구는 완전히 전문가수준입니다.》

《그렇소? 그럼 이번 5. 1절을 맞으며 진행하는 경기에 연구소가 출전하게 되면 내 봐주지. 강진동무, 오늘 현장지원을 해줘서 정말 고맙소.》

《지배인동지, 우리의 연구사업을 현장로동자들이 얼마나 직심스레 도와주는지 모릅니다. 거기에 비하면야 뭐… 그저 성의뿐입니다.

강진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어줍게 웃었다.

《자, 그럼 난 가겠소. 소장동무가 강진동무와 같이 식사시키는걸 봐주오.》

《예.》

《지배인동지, 주택배정을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무슨 소릴?… 빨리 이살 하오. 10여리통근길에 바치던 시간이 연구사업에 돌려지면 나도 기쁘겠소.

《저

발걸음을 떼려던 철묵은 강진의 태도가 이상하여 눈빛이 굳어졌다. 강진은 고개를 수그리고 바재이는듯싶더니 천천히 머리를 쳐들었다.

《지배인동지…우린 …지금 집에… 그냥 있기루… 했습니다.

《뭐요?

철묵은 너무 뜻밖이여서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니 새집에 안 가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는 면구스러운 일을 당한 때처럼 얼굴이 화끈해났다. 큰 기업소를 떠메고 일하다나니 간혹 얼굴 뜨거운 일을 당하는 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처럼 기업소책임일군으로서 아래사람들을 위해주는 마음이 거절당해보기는 처음이였다. 철묵은 노여움에 앞서 싱거운 생각이 들었다.

(통근하는것이 마음에 걸려 그랬는데)

《그렇단 말이지. 그래, 부모님들과는 의논해봤소?》

《예.》

《그래, 리유는 뭐요?

《저》 강진은 주밋거리며 좀처럼 말할념을 하지 않았다.

철묵은 그의 입에서 좀처럼 대답이 나올수 없음을 느끼자 말머리를 돌렸다.

《음, 아버진 무슨 교대에 나오시나?》

《허리증이 도져서 며칠째 집에서 안정치료를

《알겠소.》

철묵은 승용차 있는 곳으로 걸음발을 떼였다.

속이 허전해왔다. 정에 끌려 정을 주려는데 번마다 거절당하기만 하니 이처럼 메사한 일이 어데 있겠는가.

(도대체 왜 그럴가. 처음 차를 타고가라고 할 때도 거절했고 다음번엔 곁에 와서 사진을 찍으라니까 거절하고… 이번엔 또…누구의 동정도 바라지 않는 삐여진 자존심때문일가? 그럴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란 남이 정을 주면 사양하기 힘들어하는 법이다. 하물며 이 지배인의 호의를 칼로 베듯 거절할 때는 무슨 다른 감정이 작용해서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굴려봐야 도무지 짚이는데가 없다. 그를 안 다음부터 아껴주고 위해준 일만 있지 언성을 높이거나 얼굴 붉힌 일은 한번도 없었기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정방문을 해보자. 부모도 만나는겸 사람의 마음 절반은 집에 가보면 알수 있다지 않는가.)

철묵은 차에 오르며 이렇게 결심을 굳히였다.

 

×

 

강진의 집 가정방문계획을 세운 철묵이였지만 분공장들에서 급하게 제기되는 문제때문에 며칠동안이나 나가있다가 점심무렵에야 기업소에 돌아왔다. 그간 제기된 문제가 없는가를 알아보고나니 점심시간이 되였다. 급하게 떠나느라 그곳에서 아침을 설치고온탓인지 배가 출출하였다.

집문을 열고 들어서니 여느때없이 지지고 볶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전실에서는 안해가 그전부터 쓰는 빨간 꽃무늬보자기에 음식그릇들을 차곡차곡 싸는중이였다. 옆에 놓인 초물구럭에는 사과가 그들먹이 차있었다.

어느 움속에선가 겨울을 났을 그 과일들은 조금도 손상이 가지 않고 아직도 향긋한 냄새를 몰몰 풍기고있었다.

《허허… 이 집에서 오늘 들놀이준비를 하는가?

《이제 오세요?》

남편이 며칠 나갔다가 들어오는것쯤은 보통례상사로 만성화된 은실은 시뭇이 웃으며 비만한 몸을 무겁게 일으켰다. 그래도 반갑다고 달려나오는것은 미향이였다.

세면장에서 나오던 미향은 얼른 달려와 가방을 받았다.

《아버지두 참, 약두 안 가지고 며칠씩이나 가계시면 어떻게 해요?》

《그럴만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어델 가려구 그러느냐?》

《앓는 사람… 면회를 가겠다고 그러지 않아요.

은실이가 시들히 대답해주었다.

《면회? 허, 오자마자 벌써 그런 친구가 다 생겼는가?》

미향은 귀밑이 붉어졌다. 은실은 입을 꾹 다문채 일손만 묵묵히 놀리였다.

오후에 출근하자마자 바쁜 일들만 골라 처리하고난 철묵은 사무실을 나섰다. 머리우에 걸렸던 해가 벌써 서산마루로 뉘엿뉘엿 기울고있었다.

운전사가 철묵의 앞에 제꺽 차를 갖다대였다.

얼마후 승용차는 강진의 집앞에 멎어섰다. 대문을 열고 들어선 철묵은 나직하게 주인을 찾았다.

밤색조끼를 걸친 반백의 사나이가 방문을 열고 나와 한손으로 허리를 잡은채 토방을 내려오다가 엉거주춤 멎어섰다.

《아니, 지배인동지가?!

철묵이도 반가운 미소를 지였다.

《허허… 이제 보니 1강철 2호로장 리대성동무로구만.

《예, 저의 집입니다. 이렇게 지배인동지까지 오실줄은 정말

《내가 오면 안됩니까? 그런데 아직 말짼게구만.》

철묵은 대성을 부축하여 방안에 들어섰다. 집은 괜찮은편이였다. 전실도 시원하고 아래웃방이 다 널직하고 채광도 좋았다. 아래방에는 텔레비죤수상기와 삼면거울이 놓여있고 웃방에는 기술서적이 꽉 들어찬 큰 책장이 이불장들 한복판에 위풍있게 자릴 잡고있었다.

(이만하면 괜찮아.)

철묵은 우선 한시름 놓여 자리에 앉았다.

《허리증이 차도가 없는 모양입니다.》

《이젠 다 나았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환절기때마다 이렇게 며칠씩 애를 먹이군 하지요. 그런데 바쁘신 지배인동지가 어떻게 저의 집엘 다

용해공일반이 다 그러하듯 대성이도 직통배기였다.

《좀 의논할 일두 있구 해서 겸사겸사 왔습니다. 이 집에서 산지 오래됐습니까?》

《한 20년 됩니다. 참, 이번에 우리에게 새집을 배정해주었다는 소식을 듣구두 인사가 늦어 안됐습니다.》

《허허… 인사는 무슨 인사를 하겠습니까. 강진동무랑 출근거리가 너무 먼것 같애서 그랬습니다. 아무리 새집이래두 정든 집을 떠나기가 헐치 않지요?

《거야 뭐… 원래는 가자구 했댔는데 그 녀석이 뻐스통근도 괜찮다면서 고집을 쓰는 바람에 지고말았지요.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됐군. 오늘 오길 잘했어.)

《강진동무가 요새두 현장에서 밤을 새지요?》

《예, 그 애는 어릴 때부터 알아맞추기경연이요, 1중학교요 하며 나가산데다가 여러해동안 고향을 떠나 대학공부까지 하고온 애여서 그런 생활에는 습관되였을겁니다. 우리도 익숙해졌구요.》

《아들을 잘 키웠습니다.》

《우리야 무슨… 나라에서 다 키워주었지요.

《대성동문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됐습니까?》

《쉰여덟입니다. 4.4분기말에 이르렀지요.》

《허허! 그러니 우린 동갑입니다. 아직 일없습니다. 60이 청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강진동무 국수먹을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대성은 철묵이가 각근히 대해주자 한결 긴장감이 풀리며 히죽이 웃었다.

《때는 안성맞춤인데 어디 뜻대로 됩니까?》

《글쎄… 그런것 같기도 합니다. 맏이때는 몰랐는데…

대성은 눈을 껌뻑거리며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행동은 그랬지만 얼굴엔 대견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허허… 아들가진 집이야 뭐랍니까. 우린 딸부자인데 사위 셋을 맞느라 골머릴 좀 앓았습니다.

강진동무가 책하구만 친하다보니 처녀 사귈 생각은 아예 잊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대학때 알게 됐다는 평양처녀가 하나 있긴 한데

철묵은 호기심이 나서 얼른 말꼬리를 잡았다.

《평양처녀를요? 그럼 데려와야지요.》

《그게 힘들어 그러지 않습니까. 글쎄 무슨 애가 그 처녀 어머니한테서 지난해 편지 한장 받은걸 새기지 못해서 요샌 집에까지 찾아온 그 처녀를 슬슬 피하며 그러지 않습니까?》

《평양에서 온 처녀를요?!》

《예, 본심은 그렇지 않은것 같은데 자존심이 몹시 강한 애여서 한번 삐뚤어지면 좀 시간이 지나서야 안정이 되지요. 처녀 부모들이 태도를 고치기 전에는 리해하지 못하겠다고 엇서는데 참, 야단났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철묵은 강진이가 그 문제때문에 지금껏 자기의 호의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어 그러지 않는가 하는 예감이 들면서 마음이 얼마간 누긋해졌다.

《남자가 자존심도 세워야지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인데 호락호락 머릴 수그리겠습니까. 한데 그 평양처녀는 지금 어디에 거처하고있답니까?》

《우리 애 말은 친척집에 와있다구 하는데 처녀보기가 정말 미안합니다. 방금전에도 내가 앓는다고 저 보따리를 들구와서 병문안을 하고는 총총히 돌아가더군요.》

《?!》

철묵은 마음 한구석이 아릿해났다. 딸가진 아버지로서, 일군으로서 아직 보지 못한 미지의 처녀에게 동정이 갔다.

(대체 어떤 처녀길래?) 이러며 대성이가 가리킨 《평양처녀》의 면회보따리에 고개를 돌린 철묵은 몸이 떡 굳어졌다.

여러개의 음식그릇들을 정히 싸놓은 빨간 꽃무늬보자기, 그옆에 있는 초물구럭… 너무도 눈에 익은, 아까 점심에 은실이와 미향이가 면회준비를 한다고 펴놓았던 그 보자기와 구럭이 아닌가?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보았으나 틀림이 없었다.

철묵은 육중한 그 무엇에 한대 맞은듯 머리가 뻥했다. 그는 자꾸만 두근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억제하며 대성을 쳐다보았다.

《저… 그 평양처녀 이름이… 미향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지배인동지가 그걸 어떻게?! 옳습니다. 미향입니다. 이름처럼 곱구 향기가 풍기는 처녀인데

《?

철묵은 행여나 했던 마지막의혹마저 끊어져나가자 온몸의 맥이 쭉 빠져 스르르 눈을 감아버렸다.

《미향입니다.》라는 대성의 이 말이 크게 공명되면서 머리를 쑤셔대였다.

(그러니 미향이가 대학때 알게 되였다는 그 청년이 강진이였단 말인가?)

숨이 차고 몸에 진땀이 났다.

…1년전 평양에 있을 때였다. 어느날 저녁 식사를 끝내고 책상에 마주앉아 새로 나온 기술잡지를 보고있는데 펼쳐진 책우에 손바닥만 한 색사진 한장이 놓여졌다. 제낀옷에 넥타이를 매고 승용차곁에 의젓하게 서있는 청년의 사진이였다.

《?

머리를 드니 은실이가 가쯘한 흰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으며 서있었다.

《이건 뭐요?》

《미향이 대상자예요. 넷째사위, 아니 막내사위감이지요.》

《어디 있는 총각이요?》

《무역성 부원이래요. 그의 어머니가 우리 미향이를 보구 이 사진을 보내왔더군요.》

철묵은 다시금 사진에 눈길을 주었다. 어깨가 쩍 버그러지고 얼굴이 멀쑥한 미남이였다. 철묵의 입가에 미소가 비껴들었다. 자기는 부국장사업을 하면서 늘 바쁘게 지내다보니 언제한번 이런 문제에 시간을 내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딸가진 아버지의 마음은 어쩔수 없는것이여서 간혹 눈에드는 총각들을 볼 때면 저도 모르게 미향이와 견주어보게 되였다. 그러나 아직 이렇다할 결심을 못 가지고있는 때에 이렇게 멋진 총각이 히쭉 웃으며 《어떻습니까?》하는듯 한 눈길로 자기를 올려다보고있지 않는가.

《자세히 알아봤소?》

《네. 평판이 좋더군요. 가풍도 괜찮구요. 그런데

은실은 웃음을 거두고 가는 한숨을 내쉬였다.

《왜?》

《미향이가 어디 말을 들어야지요.》

《마음에 없다우?》

《총각이 있대요.》

《그게 정말이요?》

《이 사진을 보이니까 속을 털어놓더군요.》

《그렇다면 구태여 이런 사진을 들고다닐 필요가 없구만.》

철묵은 사진을 뻑 밀어놓고 다시 책을 집어들었다.

《그렇지만… 고향에 있는 제강소루 내려갔다는데 아무렴 미향일 그 산골루…

《어디에 있건 과학기술사업만 하면 되지 않겠소. 문제는 총각이 어떤가 하는거지.》

《머리는 좋다지만 한생 연구사업으로 살겠다고 한다니 또 〈큰 보따리〉사위를 맞자요?

《?!》

철묵은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을 다물고말았다.

《큰 보따리》! 이것은 은실이가 셋째사위를 맞은 때부터 쓰기 시작한 말이다. 연구사로 일하는 셋째사위는 책과 연구사업밖에 몰랐다. 명절이나 생일때면 다른 사위들은 큼직한 보따리를 마련하여 들고오지만 셋째사위는 딸이 들려준 명절공급술 한병을 어색하게 꺼내군 하였다. 그래서인지 은실의 온 관심은 갓 세간을 난 셋째네한테 가있었다. 딸, 사위들이 모였다 헤여져갈 때면 큰 보따리를 가져온 사위들한테는 작은 보따리를 간단히 꾸려주고 반대로 제일 작은 보따리를 가지고 온 셋째네한테는 제일 큰 보따리를 꾸려보내주군 하였다. 언젠가는 새로 나온 기술서적이며 식료품, 옷가지들을 보자기에 꾸리다가 《언제 가야 이 보따리가 없어지겠는지?》하며 어이없는 웃음을 지은적도 있었다. 그러니 직접 뒤를 봐줘야하는 은실의 마음을 무시할수도 없는 일이였다. 그렇다고 또 당사자인 미향이의 의향을 막아버릴수도 없고… 골치아픈 일이였다.

《여보, 당장 바쁘지는 않으니 이 일은… 좀더 두고봅시다.

은실은 반대없었다. 얼마후 철묵은 외국출장길에 오르게 되였다. 또 출장을 마치고 와서는 여기로 조동되여 내려왔다. 바쁘게 보낸 나날들이였다. 언젠가 은실이한테서 미향이의 그 총각에게 대상자가 나타났으니 그리 알라고 편지를 보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적이 있을뿐이였다.

그런데 그 청년이 바로 강진이일줄이야

철묵은 이제야 강진이가 왜 자기를 멀리하려 했는지, 자기의 호의를 번마다 거절했는지 알게 되였다. 안해가 보낸 편지를 받았을 때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가. 또 내가 지배인으로 배치되여왔을 때는… 그런 괴로움을 안고있으면서도 하루같이 밤을 새우며 《ㅈ》철생산법에 의한 《ㅌ》합금강생산을 성공시켰지. 그때까지는 미향이 당사자가 없었으니 그럭저럭 참고 견디여냈을것이다. 그런데 불쑥 미향이가 나타났다. 눈앞에 사랑을 약속한 처녀를 보면서도 멀리해야 하는 청년의 심정, 그런 괴로움을 언제까지나 겪어야 한다는 마음속 고충… 감정이 있고 리성을 가진것이 인간일진대 그가 나를 어떻게 기술자들을 위해주는 진정한 일군으로 볼수 있을텐가.

철묵은 무딘 칼끝으로 가슴을 허비는것 같았다.

내가 무슨 일군인가. 보배로, 재사로 받들리우는 한 기술자에게 그런 정신적아픔을 주면서도 뭐 그를 위한다고?! 그것은 위선이였다, 기만이였다.

일군으로서의 의무감을 지키면서도 전도가 촉망되는 한 청년연구사가 집안에 들어오는것을 외면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나라의 장래운명과 관련되는 기술인재를 가정의 《짐》으로 생각하며 멀리한것은 커다란 실수였다. 아니, 죄악이였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 안해때문에?! 아니였다.

바로 나때문이였다. 강진이 문제가 제기되였을 때 나는 응당 딸가진 어버지로서가 아니라 과학과 기술, 정보산업시대의 일군으로서 옳은 견해를 세웠어야 했다. 과학기술중시를 심장에 새기지 않고 혀끝에만 묻혀가지고 살다나니 어정쩡하게 처리해버리지 않았는가. 철묵은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떻게 강진의 집을 나섰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

 

그날 저녁 철묵의 집 창문에는 오래도록 불이 꺼질줄 몰랐다. 철묵은 뒤짐을 진채 창가에 서서 불빛이 명멸하는 거리를 오래동안 내다보았다. 후회, 자책, 환멸… 이미 은실에게 강진이와 있었던 일을 다 이야기하였건만 도무지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았다.

강진인 1중학교를 거쳐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한 보배요. 그는 이제부터 지식경쟁의 활주로를 거침없이 달려가야 하오. 그런데 그에게 힘이 되고 의지가 되여주어야 할 우리가 걸음을 지체시키는 장애물이 되였단 말이요.…

!…

은실은 손수건으로 눈굽을 닦았다.

《난 밖에 나가서는 과학기술중시에 대해 자주 말했지만 집에 들어와서는 그렇지 못했소. 그러다나니 기술자인 셋째사위가 우리 집에 들어온 다음부터 그만하면 됐지 하는 생각으로 저도 모르게 기술자가 아닌 청년이 막내사위로 들어오길 바랐단 말이요. 결국 내 손으로 한대의 귀중한 붓대를 꺾어버릴번 했소. 여보, 난 결심했소. 미향이와 강진이의 사랑을 되찾아주자고 말이요.》

《알겠어요. 여보, 집안에 붓대가 많아지는것을 자랑으로 여길 대신 꺼려한 절

은실은 말을 맺지 못하고 다시 눈굽을 찍더니 책상우에 있는 편지를 철묵에게 내밀었다.

《오늘 온 편지예요. 글쎄 셋째사위가 장군님을 만나뵙고

은실은 어깨를 떨었다.

《?!

철묵은 얼떠름해서 편지를 받아들었다. 그는 자꾸만 뿌잇하게 흐려드는 눈을 슴벅거리며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저를 만나주신 자리에서 지난 기간 나라의 과학기술발전에 이바지할 하나의 일념을 안고 고심어린 탐구와 사색으로 생물공학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하시면서 박사칭호는 물론 영웅칭호도 함께 주자고…

철묵은 눈앞이 흐려와 더 읽을수 없었다. 어쩌면 우리 집안에 이런 영광과 행복이 찾아왔단 말인가.

《여보, 전 셋째사위를 볼 낯이 없어요. 우리 장군님께서 그처럼 사랑하시고 믿고 내세워주시는 귀중한 사위를 집안의 작은 보따리를 가지고 금새를 치려 했댔어요. 강진이 그 사람한테두… 제가 용서를 빌겠어요.

《그렇게 생각한다니… 정말… 고맙소.

철묵은 은실의 두어깨를 다정히 잡아주었다.

며칠후, 철묵은 1강철직장에 들리였다. 강진의 아버지 리대성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용해장은 끓고있었다. 넓은 작업장 끝까지 늘어선 전기로들은 《붕! 붕!》 귀맛좋은 동음을 울리고 천정기중기가 《뗑! 뗑!》종소리를 울리며 원료통을 물고 부지런히 오가고있었다.

대성의 2호로는 출강직전이였다. 쇠물빛을 받아 작업복이며 얼굴들이 벌겋게 물든 용해공들이 보호안경을 끼고 쇠물을 젓고있었다. 후끈한 열기가 훅훅 얼굴에 미쳐왔다. 둘러보니 모두 같은 용해복차림이여서 누가누군지  가려보기 힘들었다. 가까이 있는 용해공의 귀에 대고 대성의 행처를 물었다.

《뭐라구요?》

용해공은 귀를 바싹 강구었다.

《로장동무가 어디 있는가 말이요?》

용해공은 대답대신 쇠물을 젓고있는 두사람중의 한사람을 손짓해보였다. 철묵은 그리로 다가가 무작정 쇠장대를 뺏어들었다. 한손으로 불빛을 가리우고 쇠물을 저었다. 얼굴도 뜨겁고 손끝도 따가왔다. 그래도 뜨거운 불앞에서 땀을 흘리니 마음이 거뜬해진다. 한참만에야 전기로앞에서 물러났다.

대성이가 준 수건을 받아 땀을 씻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함께 일한 《용해공》친구를 눈여겨보던 철묵은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강진이였다.

얼굴은 좀 축갔건만 두눈엔 생기와 열정이 전보다 더 세차게 불타고있었다. 강진은 전처럼 외면하거나 피하려는 기색은 꼬물도 없이 존경과 정을 담아 철묵을 뜨겁게 마주보았다.

《지배인동지!》

《허허… 오늘은 여기가 작업장이요?

《전기로에 지방원료를 좀 먹였습니다. 그래서 결과를 보려고 왔습니다. 지배인동지… 제가 시시한 놈이였습니다. 다 지나간 일을 속에 품구 미향동물… 괴롭혔습니다.

《그런 소린 마오. 동무한테 마음속 상처를 입힌건 바로 나요. 이젠 거뜬한 머리로 연구사업을 본때있게 해보라구.》

《고맙습니다, 지배인동지. 오늘 시험만 성공하면 수만톤의 원료를 기업소자체로 해결할것 같습니다.》

《!

철묵은 목이 꺽 메였다.

(그래 그렇구말구. 정말 나같은것은 백명, 천명과도 바꿀수 없는 귀중한 사람이지.)

대성이가 다가왔다.

《지배인동지, 아주머니가 어제 우리 집에 왔댔습니다. 전번날은 정말… 안됐습니다.

《무슨 소릴

《내 저녀석을 단단히 채찍질했지요. 제가 뭐라구 처녀의 부모들이 자기한테 머릴 숙이라는 식으로 코를 쳐든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래야 합니다. 강진에겐, 과학자, 기술자들에겐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 일군들은 그들의 심부름군일뿐입니다.》

《지배인동지!》

《대성동무!》

그들은 손과 손을 뜨겁게 틀어잡았다. 정과 정이 오가는 손이였다. 출강종이 울리였다.

《출강!》

육중한 전기로가 어마어마하게 기울어지며 남비에 쇠물을 쏟는다. 불보라가 일었다. 용해장에, 용해장의 하늘가에 노을이 물든다. 그것은 강성부흥할 래일을 불러오는 행복의 노을이였다. 시대의 최첨단을 향해가는 과학기술이 안아온 꺼지지 않을 노을이였다.

《동무들! 지방원료를 먹인 쇠물이 합격이예요!》

언제 왔는지 풀색작업복을 가뜬히 차려입은 미향이가 시험분석표를 내흔들며 소리치고있었다.

어제부터 금속연구소에 출근한 미향이였다. 미향이의 얼굴에도, 그옆에 의젓하게 서있는 강진의 얼굴에도 노을빛이 물들었다.

철묵은 옆구리에 두손을 얹은채 용해장에서 끊임없이 피여나는 붉은 노을을 점도록 바라보며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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