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98(2009)년 제1호 잡지 《청년문학》에 실린 글  

 

  단편소설

                                                      김  정  희

 

해가 서산마루에 올라앉자 련희는 가정방문의 길에 나섰다. 고개너머에 있는 전수성이네 집을 찾아가는 그의 마음은 가볍지 못했다.

눈섭이 반달처럼 휘여지고 호수처럼 그윽해보이는 두눈에는 한가닥 그늘이 비끼고 방긋이 벌어진 입에서는 가느다란 한숨마저 새여나왔다.

그도 그럴것이 련희는 벌써 여러날째 림시학급담임일을 보고있었다. 상급기관에 소환된 남편을 따라간 교원을 대신하여 새 학급담임이 올 때까지 소학반 2학년을 맡아보게 된것이다.

이미 전 담임에게 익숙되여있던 아이들과 어울리자니 속쓸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그중에서도 전수성이란 애가 제일 문제였다. 다른 애들과는 달리 장난이 심했고 공부에 열성이 부족했다. 수업종이 울린줄도 모르고 철봉대에 매달려 노는가 하면 언제인가는 점심시간이 끝난줄도 모르고 내가에 나가 신발을 벗어들고 정신없이 잔고기들을 따라다니지 않나…

오늘 있은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어이가 없다. 글쎄 오전수업을 마친 련희가 교실문을 나서기도 전에 뒤따라온 수성이가 다짜고짜로 집으로 가겠다는것이였다. 할머니가 공부가 끝나거들랑 제꺽 집으로 오라고 했다고 한다.

(혹시 전번날처럼 또 얕은 수를 쓰는건 아닌지…)

련희는 학급을 맡아보게 된 첫날 오후에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그날 머리가 아프다며 책상우에 넙적 엎드려있는 수성이를 집으로 돌려보낸 그는 앓는 애를 홀로 보낸것이 아무래도 안심치 않아 저녁에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도중에서 조무래기들을 잔뜩 거느리고 개울이 좁다하게 뛰여다니는 그를 보게 될줄이야…

혹시 그날처럼 오늘도 고기잡이를 하고싶어 몸살이 나지 않았는지, 아니면 오늘 배운 내용을 시험쳐서 5점맞은 학생만 집으로 보낸다고 했더니 학급에서 실력이 낮은 그가 나머지공부를 하는게 싫어 이러지는 않는지…

련희는 수성이를 보내고 가정방문을 해보자고 생각했다.…

수성이네 집은 멀기도 하였다. 큰길을 따라 한 30분 그리고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또 한동안 걸어서야 막바지에 있는 그의 집에 가닿을수 있었다. 흘러내린 비지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주인을 찾으려던 련희는 그만 아연해지고말았다. 자물쇠가 걸려있는 부엌문, 토방우에 놓여있는 나무단우에 벗어놓은 빨간 책가방…

(날이 저무는데 집사람들은 모두 어디 갔담.)

때마침 깡충깡충 토끼뜀을 하며 집앞을 지나가던 대여섯살 나보이는 꽁지머리 소녀애가 오똑 멈춰서더니 동그란 두눈을 깜빡거리며 련희의 아래우를 살핀다.

《너 이 집 수성일 못 봤니?》

《수성오빤 저기 뒤산에 있어요.》

《뒤산에? 거긴 뭣하러 갔니?》

《오빤 개미들의 모습을 살펴본다면서 갔어요.》

련희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개미들의 모습을 살펴봐선 어쩐단 말인가.

언제인가는 복습시간이 된줄도 모르고 신발을 벗어들고 새끼고기를 잡는 그에게 먹지도 못할 작은 고기는 잡아 뭣하는가고 물으니 몇밤을 자야 어미고기가 되는지 키우려고 한다더니. 어느 모로 보나 엉뚱하기 그지없다. 언제면 공부에 취미를 붙이고 그 모든 장난에서 벗어나게 되겠는지…

소녀애는 다시금 뜀박질을 한다. 깡충깡충 두다리를 엇바꾸어가며 높이 들 때마다 빨간 댕기로 묶은 길다란 꽁지머리가 그네뛰듯 흔들거렸다. 그 모습이 멀리로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던 련희는 문득 탁아소에 홀로 남아 기다릴 딸애가 생각났다.

더는 속수무책으로 서있을수 없었다. 글쪽지라도 써놓고 가는수밖에. 서둘러 책가방을 끄당겨 열었다. 순간 련희는 두눈이 딱 감기고말았다. 그것은 책가방인것이 아니라 잡동사니들의 수집통 같았다. 구부러진 쇠줄이며 못따위들, 크고작은 딱지들이며 물오른 가래나무껍질을 벗겨 만든 길고짧은 물총들… 필갑안의 연필도 심이 부러지거나 무딘것뿐이였다. 어쩔가 하여 둘러보니 마침 기둥에 꽂힌 낫가락이 띄였다. 그것으로 연필을 깎은 련희는 수학학습장 뒤장에 찾아왔던 사유를 몇자 적었다. 아무의 눈길에든 띄우길 바라며 책가방우에 학습장을 펼쳐 올려놓았다.

그가 왔다간것을 알면 집에서 해당한 대책들을 세울것이였다.…

걱정이 앞서 집에 달려왔더니 생각과는 달리 뜻밖의 기쁜 일이 그를 기다리고있었다. 출장갔던 남편이 돌아와 아이도 제때에 데려온데다가 이미 저녁밥까지 지어놓은 뒤였다. 그뿐이 아니였다. 련희가 은근히 기다리던 새 담임이 글쎄 남편과 같이 왔다질 않는가. 순간 저도 몰래 긴숨이 나갔다. 래일이면 림시학급담임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제 남은것은 새로 온 교원이 처음 교단에 서는 신임교원이라니 그에게 보여줄 본보기수업준비나 잘하면 된다. 하지만 그런 일이야 늘 하던것이여서 그닥 품들일것 없다. 이미 밤도 깊었는지라 다음날 새벽으로 미룬 련희는 오래간만에 발편잠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이였다. 출근길에 나선 련희는 가락맞게 울리는 호미질소리에 주춤 멈춰섰다. 교재원의 울창한 수림이 끝나는 공지에서 률동적으로 허리를 굽혔다폈다 하며 열심히 땅을 뚜지는 사람이 있었다. 누굴가? 이 새벽에 무얼하려고 저리도 극성스레 땅을 파는지. 호기심을 가지고 가까이 다가가던 련희는 두눈을 크게 떴다. 날씬한 몸매의 처음 보는 처녀였다.

손수건으로 뒤머리칼들을 가뜬히 졸라매고 수박색작업복에 풀색장화까지 척 받쳐신은 예쁘장스러운 처녀는 가까이에 말뚝처럼 서있는 련희를 보자 제먼저 방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은향이라고 합니다. 이 학교에 새로 배치되여왔답니다.》

처녀가 깍듯이 인사를 차리는 바람에 련희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해하며 자기 소개를 하였다.

《그런데 이 새벽에 무얼 해요?》

서로의 통성이 끝나자마자 련희는 호기심을 참지 못해 물었다.

《저… 사실은 키낮은 해바라기씨를 좀 가져온것이 있어서… 어제 오자마자 교장선생님에게 물어보니 여기에 공지가 있다고 하더군요. 모판에서 키워가지고 학교주변에 심으려고 그럽니다.》

맑고 또렷한 대답을 듣고서야 모든것을 짐작할수 있었다. 어째서 직4각형모양으로 땅을 뚜지는지 그리고 한옆에 포개여놓은 비닐박막이며 활창대가 어디에 필요한지를, 그 순간 어제 밤 남편이 하던 우스개소리가 생각났다.

《…이 학교에 훌륭한 원예사감이 나타났소. 새로 배치받은 그 처녀선생 말이요. 글쎄 어린 철쭉나무모를 안고 오질 않겠소. 그게 바로 철령의 철쭉이라나, 허허.》

남편의 말이 그럴듯했다.

(처녀시절 꽃시절이라더니 참.…)

련희는 조용히 웃으며 돌아섰다. 어제는 철쭉나무모를 안고 읍에서부터 예까지 그 먼길을 걸어왔다더니 오늘 아침엔 또 해바라기꽃모판을 만드는 처녀, 교원생활의 첫 시작을 꽃을 가꾸는것으로부터 시작한 처녀가 과연 수성이와 같은 장난꾸러기들을 감당할수 있겠는지 근심스러웠다. 아직은 고운것만을 알고 제손으로 가꾸고싶어하는 꽃나이처녀가 이제 얼마나 눈물을 흘리고 속을 썩여야 능숙한 교원의 체모를 갖추겠는지.…

첫 수업을 알리는 예령이 길게 울렸다. 련희는 보고있던 교수안을 접어들고 천천히 분과실을 나섰다. 늘 해오던 수업이였지만 신임교원앞에서 본보기수업을 하자니 저도 몰래 긴장되였다. 먼 후날에도 아름답게 추억할수 있게 잘해야 할텐데.

문을 열고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선참 안겨온것은 뒤쪽 창가에 놓여있는 낯설은 꽃화분이였다. 아직은 알릴듯말듯 한 작고작은 꽃봉오리들이 아지 끝마다 맺혔을뿐 푸른 잎도 향기도 없는 애어린 꽃나무화분을 바라보며 련희는 고개를 기웃했다.

(온실에 가면 활짝 핀 아름다운 꽃화분들이 많은데 하필이면 저런것을?…)

바로 그 화분곁에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처녀가 앉아있었다. 오은향이였다. 무릎우에 펼쳐놓은 두툼한 책에 뭔가 또박또박 적고있는 그를 일별하고는 곧 출석을 긋기 시작했다.

《김철학생!》

《옛.》

《리봄별학생!》

《옛.》

하루공부시작의 즐거운 서곡인양 교원의 부름소리와 학생의 류창한 대답소리가 노래선률마냥 가락맞게 울린다. 그러나 시내물 흐르듯 굴곡을 이루면서도 거침없이 흐르던 문답소리가 한순간 동강이 나고말았다.

《전수성학생!》

《…》

순간 련희의 가슴은 철렁하였다. 또 늦었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

(어쩌면…)

섭섭한 감정이 뭉클 솟구친다. 어제 밤 적어놓고 온 글을 보았겠는데 달라진것이 없으니 학생보다 부모들에 대한 섭섭한 감정이 더 살아났다. 했으나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교수를 인내성있게 끌고나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던지… 손기척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리며 수성이가 불쑥 들어섰다. 그래도 늦었다고 뛰여왔는지 이마에 번지르르 흐르는 땀을 팔소매로 뻑 문대고나서 버릇처럼 고개를 숙인다.

(그래도 결석하진 않았구나.)

련희는 안도의 숨을 가볍게 내쉬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실은 새 담임의 교수참관중이여서 두말없이 제자리로 들여보낼 생각이였다. 헌데 무엇이 못 마땅한지 두눈을 질끈 내리감고 도톰한 입술을 비죽이 내민채 볼이 잔뜩 부어가지고 서있는 모양을 보니 정말 어이없었다. 어제일때문에 추궁을 할가봐 미리 한방망이 얻어맞은 자세를 취하는가보다.

《수성학생, 왜 늦었어요?》

《…》

《늦잠을 잤나요, 아니면 학교오던 길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

《자, 어서 대답하고 들어가세요.》

했건만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영 반응이 없었다. 련희는 은근히 약이 올랐다. 어린 처녀앞에서 망신을 당한듯싶어 저도 몰래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럴줄 알았으면 애초에 묻지도 않을것인데 이제 와서 그냥 들여보내면 버릇이 되겠고 이왕 시작한김에 끝장을 봐야 했다.

《수성학생, 이건 뭐예요?》

그가 성이 났음을 짐작했는지 수성은 드디여 아이의 본성을 드러내놓았다. 울음을 터친것이다. 련희가 당황하여 어쩔줄을 모르는데 쿨쩍거리면서도 늦어진 사연을 터놓았다.

《우리 집 토끼가 새끼를 낳… 몇마리 낳는지 알고싶어 다 낳을 때까지 기다리다 그만…》

무슨 소리가 나오는가 하여 숨을 죽이고 귀를 강구던 아이들이 그만에야 흐야 웃음보를 터뜨렸다. 련희도 너무 어이가 없어 손등으로 입을 가리우고말았다. 저런 엉터리를 보고 이제 무슨 말을 더하랴.

《수성학생, 앞으론 무슨 일이 있어도 지각해선 안되겠어요, 알겠어요? 그럼 들어가 앉아요.》

결국 신임교원의 추억속에 아름다운 화폭으로 남게 하려던 본보기수업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학급인계가 끝났을 때는 퇴근시간이 좀 지나서였다. 후날에 오겠다면서 거절하는 은향이를 억지다짐으로 데리고 집으로 온 련희는 한발 먼저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때까지도 은향은 뜨락 한가운데 서있었다. 한손으로 왕추리나무가지를 매만지며 마당 한구석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천진스런 웃음이 비껴있었다. 뭐가 그리 재미나 저럴가싶어 련희도 그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그곳에선 제법 큰 닭 모양새가 잡혀가는 중병아리들이 모이를 쫏고있는데 토실토실한 흰점박이 강아지가 장난을 치고있었다.

《어때요, 은향선생. 저 강아지의 행동이 꼭 수성이 같지 않아요?》

《어마나, 수성이가 뭐 장난꾸러기인가요?!》

《왜 그뿐이겠어요. 학급학생들중에선 제일…》

련희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지금껏 수성이에 대해 느껴오던바를 내리엮었다. 그리고 놀라와하는 은향이를 보며 이쯤은 보통이란듯 너그럽게 웃었다.

믿기 어려운듯 두어번 고개를 가로 젓고나서 선자리에서 돌아서는 은향이를 보고 련희는 의아하여 물었다.

《아니, 왜 그래요?》

《저, 아무래도 수성이네 집엘…》

《성미두 참, 이제 싫도록 마주앉게 될텐데 오늘 저녁만은 푹 쉬세요.》

련희는 웃음속에 만류하였다. 그러나 은향은 벌써 울타리밖을 벗어나고있었다.

《은향선생, 지금 간댔자 수성이 아버진 만날수 없을거예요.》

《?!…》

《전 담임선생이 하는 말이 농업연구사인 수성이 아버진 새로운 벼종자를 우리 고장에 맞게 풍토순화시키기 위해 몇년째 나가 산다더군요.》

《그랬댔군요.…》

은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나서 방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인츰 다녀오겠어요.》

《그럼 늦기 전에 꼭 돌아와요. 기다리겠어요.》

련희는 따라나가며 종종걸음으로 멀어져가는 그의 등뒤에 대고 소리쳤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지…

저녁밥을 다 지어놓고 방안까지 말끔히 거둔 련희는 달아오른 몸도 식힐겸 밖으로 나섰다. 4월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밤날씨는 퍼그나 찼다.

은향이가 금시 나타날듯싶어 한걸음두걸음 나온것이 퍼그나 멀리도 왔다. 하지만 은향은 보이질 않는다. 이럴줄 알았으면 좀 든든히 껴입고 나오는건데…

《휘익―》소리치며 불어온 쌀쌀한 바람이 얇고 하르르한 옷자락을 들출 때마다 련희는 진저리를 쳤다.

련희는 마중가기를 단념하고 돌아섰다. 푸릿한 달빛을 밟으며 금방 온 길을 되짚어 걷는 그의 마음은 서운함과 쓸쓸한 감정으로 무거워졌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건만…)

갑자기 저 멀리로 흘러가버린 처녀시절이 되살아오르며 짜릿한 감정에 젖어든다. 낮에는 정열적으로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밤에는 시간가는줄 모르고 가정방문의 길을 걷고… 남보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자리에 들면서 넘쳐나는 정열을 깡그리 학급학생들을 위해 쏟아붓던 그때는 얼마나 보람찼던가.

(그런데 지금은?…)

련희는 조용히 오늘의 생활을 더듬었다. 새 직무를 맡은 남편을 따라 이곳으로 이사오니 마침 학급담임들이 다 차있었다. 하여 그는 자연실만을 맡아보게 되였다. 처음엔 학급이 없이 생활하자니 별스레 마음속이 허전한것이 섭섭한 감정이 없지 않았다. 했으나 세월의 흐름과 함께 새생활에 익숙되여버렸다. 한것이 은향이의 출현으로 하여 다시금 안정을 잃기 시작한것이다.…

이튿날 아침이였다. 출근길에 오른 련희는 소학반 제2학년이란 명찰표가 붙은 교실앞에서 잠간 멈춰섰다.

(어제 밤 은향선생이 왜 못 왔을가? 혹시 나처럼 빈집을 지키다 늦은게 아닐가?)

이때였다. 교실안에서 걸상을 끄당기는 소리가 짧게 흘러나왔다.

(혹시 은향선생이?!…)

련희는 얼른 출입문 손잡이를 당겼다. 다음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글쎄 수성이가 먼저 와 책가방을 벗고있지 않는가.

《아니, 수성학생이 오늘 아침엔 어찌된 일이예요?》

수성은 련희를 알아보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며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기다린듯 책가방뚜껑을 열었다. 번쩍거리는 새 필갑이며 파란 비닐뚜껑을 씌운 교과서며 학습장들을 꺼내놓았다.

《저런, 수성학생은 참 좋겠군요. 어머니가 사다주었나요?》

련희는 여러자루의 새 연필들과 지우개를 바라보며 물었다. 순간 수성이의 쌍겹진 동실한 두눈이 반짝 빛났다.

《저어, 우리 선생님이…》

《?!…》

련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였다. 어제 저녁 은향이가 가정방문을 나가더니 잡동사니들만 가득하던 책가방부터 말끔히 정돈한 모양이다. 그제서야 수성이가 남먼저 학교에 온 리유를 알게 된 련희는 소리없는 웃음을 지었다.

(하는 잡도리가 보통이 아닌걸…)

련희는 은향이에 대한 기대가 커짐을 느끼며 교원실로 향했다.

그날도 련희는 여느때와 꼭같은 시간에 출근길에 올랐다. 버릇처럼 교재원쪽으로 뻗어간 길로 잡아든 련희는 한가지 생각에 옴해 걸었다.

(오늘 자연시간엔 키낮은 해바라기와 키큰 해바라기의 생김새를 대비하여 가르쳐야겠어.)

마침 은향이가 심고 가꾸는 모판을 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쪽으로 눈길을 돌리던 련희는 우뚝 멈춰섰다. 꽃모판에서 긴 막대기로 하얀 비닐지붕을 두드리기도 하고 이쪽저쪽으로 달려다니며 끄트머리를 잡아 젖혀놓기도 하는 장난꾸러기를 발견한것이다.

(원 애두 참, 놀데가 없어 하필이면…)

련희는 걸음을 다우쳤다. 장난꾸러기를 현장에서 붙잡아가지고 두번다시 그러지 않게 닦아세울 작정이였다. 그런줄도 모르고 사내애는 이번엔 손을 쑥 들이밀어 파아란 잎사귀 같은것을 잡아 뽑는다.

《이건 무슨 장난이예요?》

련희는 저도 몰래 큰소리를 쳤다. 그 바람에 와뜰 놀라며 일어선 아이를 알아보는 순간 입을 딱 벌리고말았다. 수성이였던것이다.

(어쩜 애두…)

그는 입을 다셨다. 그전에는 너무 늦게 와서 야단이더니 이제는 너무 일찍 와서 말썽이다.

《수성학생, 일찍 왔으면 아침공부를 해야지 이런 나쁜 장난을 하면 되나요. 본래대로 해놓고 교실로 들어가요.》

하지만 그는 언제인가처럼 고개를 수그린채 신발코숭이로 땅만 뚜질뿐이다. 늘 봐야 첫마디에 제꺽 움직일줄 모르는 그의 진득한 성미에 벌컥 화가 났다.

《수성학생, 못 들었어요? 본래대로 해놓고 교실로 들어가란 말이예요.》

그때 마침 은향이가 달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선생님.》

여느때와 같이 아침인사부터 깍듯이 하고난 은향이가 나직이 물었다.

《은향선생, 수성이가 무슨 장난을 하나 봐요.》

련희는 어딘가 모르게 그늘이 진듯싶은 은향이의 얼굴빛을 보고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자기가 무엇때문에 어성을 높였는가는 수성이가 해놓은 일을 보고 그자신이 판단하리라고 믿었다.

모판과 수성이를 번갈아 보는 은향이를 남겨놓고 련희는 그 자리를 서둘러 뜨고말았다. 허나 이 일로 하여 련희는 자신을 돌이켜보며 그 어떤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

 

일요일의 하루를 분주히 보낸 련희는 해가 뉘엿해지자 서둘러 부엌에 들어섰다. 고사리며 버섯을 볶아내기도 하고 김올린 찹쌀을 질기게 쳐서 팥보숭이를 묻혀놓기도 했다.

가마안에서는 닭고기 삶는 구수한 냄새가 부엌안에 짙게 풍겼다. 언제인가 강아지를 쪼아주던 그 수닭이였다.

(이젠 은향선생이 올 때가 되였는데…)

련희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6시를 가까이 하고있었다.

(늦어서 5시까지는 오라고 했는데 어찌된 일인가. 혹시?…)

그의 가슴속엔 불안의 그림자가 슬며시 나래를 펴기 시작했다. 아직도 그때 일을 고깝게 생각하는게 아닐가?

며칠전 해바라기꽃모판에서 수성이를 추궁한 그날 저녁이였다. 은향이와 함께 퇴근길에 오른 련희는 뜻밖의 일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선생님, 수성이는 오늘 아침 실없는 장난을 한게 아니였어요. 그 애는 밤새 비닐지붕에 맺힌 이슬방울들을 털어주자고 막대기로 그것을 두드려주었어요. 그리고 어린 모가 한낮때 더위에 델가봐 통풍을 시키느라 량쪽을 열어놓고는 눈에 띄우는 잡풀을 뽑아주었더군요. 수성인 어떻게 그런 좋은 일을 할 생각을 했느냐고 물으니까 어머니가 모판관리를 하는것을 보고 그랬다는거예요.…》

그때 련희는 머리를 한대 든든히 맞은 심정이였다. 수성이가 그렇게 하는 일을 자신은 왜 실없는 장난으로만 보아왔을가. 그 애때문에 신임교원앞에서 두번째로 창피를 당하게 된다는 부끄러움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그날 인상이 그리 밝지 못했던 은향이를 보며 처녀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행동을 삼가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다나니 자연히 둘사이가 서먹서먹해졌다. 별치 않은 일을 가지고 언제까지 그렇게 지낼수는 없었다. 분명 잘못은 자신쪽에 있었다. 어린것의 철부지행동으로만 여긴 경솔성이 낳은 후과였다. 하여 지금껏 미루어오던 집구경도 시키고 둘사이의 선입견도 풀겸 모처럼 오늘 저녁을 마련한것이다.…

련희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은향이가 왜 못 오는지 속시원히 알아볼 결심이였다. 벌써 두번째나 약속을 어긴데 대한 고까운 생각을 품은채 급히 합숙마당에 들어선 그는 뜻밖의 광경에 어리둥절 해지고말았다. 잔뜩 널려진 판자쪼각이며 톱이며 망치들, 그속에서 수차 같은것을 열심히 돌려보며 고개를 기웃거리는 은향이, 손가락 하나엔 흰천쪼박을 동친것으로 보아 아마 다친 모양이다.

《아니 뭘 만들고있어요?》

그제서야 고개를 든 은향은 대번에 얼굴이 빨갛게 익어가지고 바쁜소리를 쳤다.

《어마나, 벌써 시간이… 정말 미안해요.》

그다음에는 덤벼치며 돌아가는 그를 보니 옹쳤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저… 사실은 다람쥐채바퀴를 만들려고 시작했는데 잘되지 않는 바람에 그만…》

은향은 시간을 어긴데 대한 미안함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몰라하며 손에 든것을 슬며시 등뒤로 가져간다.

《아니, 그럼 교편물을?…》

련희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오랜 기간 교수활동을 해왔지만 다람쥐채바퀴를 보여주어야 할 그런 교재는 없었던것이다.

《실은 그런게 아니라 수성이에게 주려고…》

《…》

《선생님, 우리 수성인 정말 지내볼수록 얼마나 엉뚱하고 또 령리한지 모르겠어요. 글쎄 오늘 아침엔 제손으로 다람쥐를 잡아오지 않았겠어요.》

《아니, 그건 뭣하려구?》

《언제인가 복습시간에 다람쥐가 나오는 응용문제풀이를 한적이 있답니다. 그때 수성이가 이렇게 묻지 않겠어요. 〈선생님, 다람쥐와 쥐는 친척입니까?〉그때문에 학생들은 두편으로 갈라져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답니다. 그 문제를 숙제로 내주었더니 글쎄 실물을 놓고 증명한다면서…》

은향은 마치 그 일을 자기가 해내기라도 한듯 성수가 나서 내리엮기 시작했다.…

벼랑끝에 바싹 매여달린채 아짜아짜하게 서있는 허리굽은 소나무는 바로 수성이가 그처럼 자기의 소유물로 만들지 못해하는 다람쥐의 《놀이터》였다. 해빛이 따스하게 쬐이는 한낮이면 두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언제까지나 해바라기를 하는 다람쥐는 이제는 무척도 낯익어 수성이가 나타나도 달아날 생각을 않고 오히려 함께 놀자고 청하듯 두발만 싹싹 마주 비빈다. 어쩌나 보자고 알사탕만큼 한 돌멩이를 던지면 마치 문지기가 공을 잡는듯 한 멋진 동작까지 한다. 다람쥐의 약점이 바로 그것이였다. 수성은 긴 회초리끝에 가느다란 쇠줄로 코를 만들어 붙였다. 그다음에는 마치 낚시질이나 하듯 다람쥐의 코앞에 바투 가져다대고 한들한들 젓는다. 놀자고 장난하는줄로 판단한 다람쥐는 두발로 동그랗게 만든 코를 잡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슬며시 목에다 척 걸어본다. 바로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탁 잡아챘더니 다람쥐는 대롱대롱 매달린채 포로신세가 되였던것이다.…

《래일은 고양이가 잡아온 큰쥐를 빼앗아온다나요. 서로 비교해보겠다는거예요. 어쩌면 어린애의 생각이 그럴듯할가요?》

은향은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없는지 만족한 웃음을 거둘줄 몰랐다.

련희는 허거프기 그지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장난이 심한 수성이에게 틈을 주지 말고 단단히 조일 생각을 해야지 오히려 제손으로 장난감까지 만들어주느라고 저런 수고를 하다니.

《은향선생, 그런 일은 애들의 아버지나 할노릇이니 그만두고 어서 가요.》

련희는 혀끝까지 나온 이 말을 겨우 삼켰다. 돕지는 못할망정 공연히 남의 열성에 찬물을 끼얹는 노릇이 될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제 그도 오래동안 경험을 쌓느라면 할 일, 안할 일을 가리겠지…)

처음 며칠은 그 다람쥐채바퀴가 효험이 되였던지 수성이가 아무런 말썽도 부리지 않았다. 오히려 련희를 깜짝 놀래울 작정이라도 한듯 늘 그보다 한발 먼저 출석하군 하였다. 어떤 날에는 그림책을 번지느라 여념이 없는가 하면 또 언제인가는 제손으로 만든 크고작은 바람개비들을 량손에 들고 넓은 운동장을 마음껏 달리기도 한다. 그 모양이 신기하여 따라다니는 아래학년아이들에게 수성은 이렇게 소리쳤다.

《얘들아, 나를 따라잡아. 그럼 이 바람개빌 줄테야.》

너도나도 따라나선 애들이 저마다 이기겠다고 승벽내기를 하는데 땀을 흠뻑 흘린 수성이가 제일 어린 꼬마들에게 자기의것을 나누어준다.

《싸우지 말고 함께 가지고 놀아라.》

련희는 그 모양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웃거렸다. 어쩌면 애가 저리도 빨리 딴 아이처럼 될수 있단 말인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수수께끼였다. 련희가 그 의문을 풀수 있은것은 뜻밖의 일이 벌어진 뒤였다.

낮모임시간이였다. 운동장으로 나간 련희는 수심에 잠긴채 학급대렬뒤에 서있는 은향이를 보게 되였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간 련희는 입속말로 물었다. 그를 돌아보는 순간 은향은 나직이 긴숨을 내쉬였다.

《저어, 수성이가 아직…》

그리고는 큰길 웃쪽을 안타까이 지켜본다.

《난 또 무슨 큰일이 생겼나 했지요. 너무 걱정말아요. 때가 되면 어련히 오지 않을라구요.》

련희는 년장자답게 여유있는 웃음을 보였다.

《글쎄 그랬으면 좋으련만… 혹시 무슨 일이 생긴건 아닐가요?》

《일은 무슨 일, 아마 어디서 또 장난을 하겠지요 뭐. 이제 두고봐요, 부리나케 달려오는걸.》

그제서야 은향은 다소 마음이 놓이는지 활기있게 대렬앞으로 걸어나갔다.…

이날 저녁이였다. 늦어서야 탁아소에서 아이를 찾아오던 련희는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였다. 수성이가 다쳤다면서 은향이가 왕진을 청해가더라는것이였다.

련희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은향이에 대한 측은한 생각과 함께 수성이가 사고를 친줄도 모르고 이제 달려올거라며 너무도 쉽게 장담해버린 일이 미안스럽기 그지없었다.

(나무에서 떨어졌다는데 어느 정도인지… 원참 애두, 또 무슨 장난을 하려고 나무에 올랐을가.)

그가 방금 산굽이를 돌아섰을 때였다. 바로 멀지 않은 지름길쪽에서 《어마나!》하는 가벼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꺼밋한 물체가 돌덩이처럼 미끄러지더니 길 한복판에 털썩 내려앉는다. 깜짝 놀라 멈칫했던 련희는 다음순간 반달음을 쳤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꼼짝 않던 물체가 조금씩 움쭉거리더니 마침내 벌떡 일어섰다. 은향이였다.

《다치지 않았어요?》

련희는 다급하게 물으며 아래우를 살펴보았다.

《어마나, 선생님이셨군요. 괜찮아요. 그만 발을 헛디디는 통에… 그 덕에 미끄럼은 실컷 탔어요. 호호―》

속이 상해 남몰래 울고있을줄 알았던 그가 이처럼 웃고있는 모습을 보니 막혔던 숨이 열리는듯 싶었다.

《그런데 어딜 갔댔어요?》

《이 고개너머예요. 발목이 접질린데 찜질할 약초를 얻자고…》

은향은 부피큰 보자기의것을 쳐들어보였다.

《참 다행이예요. 그런데 어쩌다 그런 일이…》

《글쎄 동네애들에게 나누어줄 물총감을 만들려고 올랐다가 그랬다나봐요.… 선생님, 생각나세요. 언제인가 조퇴맞고 가던 길에 고기잡이를 했다던 일 말이예요. 알고보니 그날도 유치원꼬마들이 버들치를 보고 더퍼리라고 하는걸 보고 글쎄…》

련희는 감동속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런걸 난 또… 헌데 은향선생이 이렇게 약초까지 구하러 다녀요? 어머니가 어련히 알아할터인데…》

《어머니라니요? 수성이 어머니야 얼마전에 남편에게 가지 않았어요.》

《예?!…》

《수성이 아버지가 요구하는 시약을 마련해가지고 가서 아예 조수로 눌러앉았대요, 연구사업이 성공할 때까지…》

《…》

련희는 고개를 수그렸다. 저도 몰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런줄도 모르고 어린 처녀앞에서 수성이의 허물만 들추었으니… 림시담임이라고 학생의 가정일에 그처럼 무관심한것이 부끄럽기만 했다.

《정말 쉽지 않은분들이예요. 고산지대에 적응한 벼종자를 얻기 위하여 어려운 일을 스스로 맡아나선 수성이 아버지와 그를 도와나선 수성이 어머니 그리고 며느리마저 떠밀어보내며 〈수성이나 이 에미걱정은 아예 말고 하루라도 빨리 그 일을 성사시키도록 하거라.〉하고 당부하셨다는 할머니는 또 얼마나 고마운분이예요.》

《…》

《전 정말이지 요즘 생각이 많아집니다. 교단과 나자신에 대해서 말이예요.… 선생님, 애들의 부모들이 어려운 길을 웃으며 걷도록 그들에게 힘을 주는것이 우리 교원들한테도 달려있지 않을가요?》

련희는 그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할수 없었다. 부모들의 행복이 자식들의 앞날에 있다는 말은 들어왔지만 그들의 밝은 웃음이 우리의 교단과 잇닿아있다고 생각한적은 아직 없었던것이다.…

 

×

 

련희는 퇴근하는 길로 옆집에 들려 탁아소에서 딸애를 데려다줄것을 부탁하고는 곧장 수성이네 집으로 향했다. 그의 손에는 수성이가 좋아하는 송편과 기름튀기, 당과류와 첫물남새를 넣은 큼직한 구럭이 들려있었다. 전날 밤 은향이와 함께 병문안을 하고 온 련희의 마음은 개운치 않았다. 덤벼치느라 빈손으로 찾아갔는데도 련희를 보고 그처럼 반가와하며 매여달리던 수성이, 떠나올적엔 치료를 잘 받으라고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품에 슬며시 안겨들며 《선생님…》하고는 뒤말을 잇지 못하던 물기어린 눈동자가 얼른거려 잠들수조차 없었다. 이런 때 얼마나 부모의 정이 그리우랴.…

련희는 먼곳에 가있는 수성이의 부모들을 대신하여 자주 찾아가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하는것이 그들을 돕는 길이였다. 련희는 수성이가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줄조차 모르고있은 자신의 마음속 빚을 조금이나마 덜고싶었다.…

그가 수성이네 집에 와닿았을 때는 방금 솟아오른 둥근달이 금빛다람쥐의 채바퀴가 걸려있는 구부러진 소나무아지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있을 때였다. 은향이가 일요일의 옹근 하루를 바쳐 만들어준 채바퀴를 받아안고 그처럼 기뻐하던 수성이가 다람쥐는 내것이 아니라 우리모두의것이 되여야 한다며 스스로 놔주었다던 기특한 이야기를 생각하며 뜨락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할머니, 그럼 약속했습니다. 오늘이라도 당장 짐을 풀어놓겠다니 아들며느리가 성공하고 돌아오는 그날까지 서로 의지해사십시오.》

련희는 너무도 귀익은 남자의 웅글진 목소리가 방안에서 울려나오는 바람에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는 다름아닌 학교교장이였던것이다.

(수성이때문에 오셨구나. 그런데 갑자기 짐을 풀어놓는다는것은 무슨 뜻일가?)

련희는 저도 몰래 바싹 긴장됨을 느끼며 선자리에서 귀를 강구었다.

《그리고 마을어른들과 토의가 있었는데 학교가까이에 수성이네 새집을 짓고 이사를 시키자고 합니다.》

《원 새집은 무슨… 한일없이 나이만 먹은 이 늙은게 뭐라구 어린 처녀선생이 날마다 찾아와 돌봐주구 손자녀석의 공부까지 배워주다못해 이젠 한식솔이 되겠다구 짐까지 싸가지고…》

(아니, 그럼 은향선생이?)

련희는 너무나도 큰 충격으로 하여 온몸의 기운이 발밑으로 새여버린듯 불시에 나른해졌다.

(어쩜 그런 생각을 다했을가?…)

련희는 정말이지 믿어지질 않았다. 가정을 가진 자기는 고작 궁리한것이 수성이의 다리가 다 나을때까지 자주 찾아가 돌봐주는것으로 만족했는데 처녀의 몸으로 하루이틀도 아닌 오랜 세월을 함께 살 생각을 했으니…

《할머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래 수성이의 부모님들이 집을 떠나 고생하는것이 과연 제집 쌀독때문이구, 할머니가 집살림과 손자까지 돌보며 아직까지 농사일을 놓지 못하시는게 또 무엇을 바라서입니까? 그건 이 나라의 공민된 도리를 다 하려는 높은 자각과 헌신의 마음이 없이는 할수 없는 일입니다. 그 길이 참다운 애국의 길이기에 오늘은 은향선생이 따라나섰고 래일엔 또 우리 수성이가 걷게…》

교장선생의 열정적인 목소리는 맑고 잔잔한 은향이의 음성으로 바뀌였다.

《할머니, 선군조선의 미래가 자라는 우리의 교단은 한점의 그늘도 없는 가장 따뜻한 교단이 되여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제가 할머니의 딸이 되여주고 수성이의 어머니가 되여주는건 너무도 응당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련희는 천천히 뜨락을 벗어났다. 부끄러웠다. 쫓기듯 걷는 그의 귀전에 은향이의 부드러운 음성이 매달린채 떨어질줄 모른다.

《따뜻한 교단!》

입속으로 조용히 외워보는 순간 뜨거운것이 불쑥 치밀어올랐다. 이제는 수년세월 하루에도 수십번은 더 오르내렸을 교단, 아침마다 출석을 긋고 글을 가르쳐온 그 교단이 따뜻해야 한다는 말은 여직 들은적도 없고 생각해본적은 더욱 없다. 이 말은 오직 자기가 딛고 선 교단의 위치를 알고 스스로 맡아나선 은향이만이 할수 있는 말이다. 그렇다, 교단은 결코 년한이 지키는것이 아니였다. 말로 지키는것은 더욱 아니였다. 그 누구보다 조국의 래일을 귀중히 여기는 뜨거운 애국심이 지킨다.…

그때로부터 얼마후 수성이네는 온 마을 사람들이 떨쳐나서 학교가까이의 양지바른 산기슭에 새로 일떠세운 살림집으로 이사해왔다. 뜻깊은 그날 은향은 교실창가에서 키우던 화분속의 철쭉나무모를 뜨락에 정성껏 옮겨심었다. 병사시절의 그날을 못 잊어 제대배낭속에 고이 떠지고 왔던 철령초소의 애어린 철쭉! 아버지장군님을 부대에 모셨던 그날의 감격을 한생토록 잊지 말고 살자고 대학의 기숙사창가에서 한줄기 또 한줄기 아지를 돋치고 뿌리를 자래워온 그 철쭉이 드디여 이름없는 산촌의 소박한 인가에 영원한 삶의 뿌리를 내렸다.

그것은 어버이장군님께서 어제날의 병사 은향선생의 가슴속에 심어주신 애국심의 따뜻한 뿌리였다.

봄빛은 시간을 다투어 짙어간다. 어제는 노란 민들레며 보라빛제비꽃들이 다문다문 피여나 뭇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면 오늘은 연분홍빛진달래가 산허리며 강언덕에 발갛게 피여 웃는다. 이제 멀지 않은 래일엔 수성이네 집 뜨락에서 아름다운 철쭉꽃이 활짝 피여날것이다. 그 준비를 서두르노라고 아지끝마다 맺힌 붉은 꽃망울들이 금시라도 터질듯 한껏 부풀었고 푸르른 잎사귀들은 불어오는 미풍에 산들산들 부채질한다. 마치도 사랑과 정으로 교단을 덥히며 수성이네를 키워가는 은향이처럼.

 

(자강도 동신군 석포중학교 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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