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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97(2008)년 제12호 잡지 《청년문학》에 실린 글
단편소설
우 향 미
가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태양도 열광적으로 응원하는 사람들의 기세에 합세하려는듯 따뜻한 빛을 아낌없이 내뿜고있다. 응원자들의 흥분어린 웨침과 높아가는 열기로 운동장은 단 가마에 든 물마냥 끓어번졌다. 나는 나의 이름을 목청껏 불러주는 응원자들의 기대에 찬 눈길을 거북스레 받으면서 마음 한구석에 어둡게 쌓여있던 손상된 자부심을 다시 되살리게 된 이 운동장의 법석판이 반가왔고 고마왔다. 마치 새장속에서 놓여나온 새가 그 넓디넓은 하늘로 자유롭게 날아옐 때 저 새가 과연 저리도 맵시있게 또 자유롭게 날수 있었던가 하고 놀라움에 찬 눈길들을 모으게 되였을 때의 심정이랄가. 나의 이 흥분은 한 처녀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마음을 송두리채 앗아가고도 마음의 문을 닫아매고 자그마한 미련조차 남기지 않은 그 처녀. 바야흐로 오늘 경기에서 기본이라고 할수 있는 롱구경기가 시작되게 된다. 이전에 진행한 달리기경기와 여러 종목의 유희경기들에서도 나의 활약은 우리 팀의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윽고 롱구경기를 알리는 긴 호각소리가 울렸다. 선수들이 운동장으로 나가자 응원자들은 서로 다투듯 경쟁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자기 선수들에게 사기를 북돋아주고있었다. 방송차에서 울리는 노래소리, 응원자들의 응원소리, 둥둥 울리는 북소리, 응원춤의 약동적인 률동과 어울려 경쾌하게 돌아가는 갖가지 꽃양산들… 이런 소용돌이속에서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마치 나한테만 쏠려있는것 같았다. 운동장으로 달려나가기에 앞서 나는 우리 응원자들을 얼핏 돌아보았다. 순간 수연이, 바로 그 처녀가 나의 눈길을 미덥게 받아주는것이 아닌가. 나는 알지 못할 격정에 휩싸이면서 기운차게 운동장쪽으로 뛰여나갔다. 혹시 이 운동회가 나와 수연이와의 어성버성해진 관계를 회복시켜줄수도 있지 않을가. 심판의 손에 쥐여져 높이 쳐들린 롱구공을 바라보느라니 찬연한 빛발에 눈이 시여났다. 따뜻하고 눈부신 그 빛을 받으며 나는 피끗피끗 떠오르는 수연이와 나사이의 지난날들이 꿈결처럼 상기됨을 어쩔수 없었다…
ㅅ체육단에서 선수생활을 하던 나는 경기도중 뜻밖에 다친 다리때문에 잠시 병원생활을 하게 되였다. 병원에서는 내 다리가 원상대로 회복되기 힘들다면서 더는 선수생활을 할수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이렇게 되자 체육단에서 선수생활을 하는것을 달가와하지 않던 어머니의 《분주탕》이 시작되였다. 결국 나는 어머니의 《분주탕》으로 전혀 생소한 부문인 이곳 연구소의 자재부서에 《림시》라는 조건으로 배치되였다. 그렇게 몇달이 흐르자 상처는 기적적으로 속도가 빠르게 아물어가 다리는 원상대로 회복되였지만 마음속 상처는 더욱 곪아졌다. 넓다란 운동장에서 활개치며 뛰던 내가 갑자기 이 좁고 답답한 방안에 갇혔다고 생각하니 기가 꺾이고 부끄러웠다. 내가 이 연구소에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고민속에 모지름을 쓰며 날들이 흘렀다. 내가 맡은 일은 아버지가 자재공급계통에 있는 덕택으로 쉽게 풀렸고 나는 총화때마다 두어번 평가도 받았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나는 이 생활에 서서히 익숙될수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운동장이 살아있었다. 그러나 마음속의 운동장은 시간과 더불어 점차 희미해져갔다. 그러자 마음이 안정되였다. 어느덧 이 생활에 만족을 느꼈고 여기서 무엇인가 자기의 전망도 희미하게나마 그려볼수 있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똑똑똑… 야무지게 울리는 문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얼굴이 갸름하고 물기를 머금은 포도알처럼 까맣고 시원한 눈을 가진 한 처녀가 사무실에 조용히 들어섰다. 웬일인지 나는 갑자기 나타난 이 처녀에게 대번에 호감이 가는듯 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때문이였는지. 나의 메마르고 고적한 생활속에 조심히 발을 들여민 이 처녀가 나의 마음의 문을 살그머니 흔드는것만 같았다. 그에게는 다른 처녀들과는 구별되는 그 무엇이 있었다. 정차게 내뿜는 눈빛에서 풍기는 만만치 않은 자신심과 도고함으로 해서 더욱 특이하게 돋구어지는 처녀의 매력적인 체취가 나를 확 끌어당긴것 같았다. 아련히 드리운 검은 머리채, 날씬한 몸매를 단아하게 잡아주는 눈같이 흰 위생복… 그는 현숙하고 침착한 거동을 가진 지성적인 처녀였다. 그는 어리둥절해진 나를 보면서도 별다른 기색이 없이 자신만만한 자세로 내앞에까지 다가왔다. 그리고는 약간 예리하나 귀에 거슬리지 않는 쟁쟁하고 여물어진 목소리로 찾아온 용무를 설명했다. 《우리 과에서 신청한 시험용액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길래 사연을 알아보려고 왔어요.》 《아.》 나는 얼결에 이런 외마디소리를 내고나서 급히 신청서묶음철을 뒤졌다. 마음이 조마조마해났다. 어망결에 그것을 어떻게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책상안을 뒤적이는 나의 손에 식은땀이 바질바질 내돋았다. 끝내 신청서를 찾지 못한 나는 한자리에 못박힌듯 서있는 그 처녀를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내… 아직 자재신청준비가 안돼서 그러는데 인차 보장하지요.》 이제껏 나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던 그 처녀는 주로 지성적인 녀자들이 남의 허물이나 무지를 조소할 때 쓰는 유력한 수단인 가벼운 미소(실은 쓰거운것이였지만)를 짓고나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자재부원동무, 연구사업에서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지 그래 부원동문 모른단 말입니까. 그런데… 자, 보세요.》 나는 그제야 처녀의 손에 들려있는 종이장을 보았다. 어떻게 저 신청서가 그의 손에 들려있을가. 내가 불찰로 구내에 떨구었을가? 《책임성이라는 말은 회의나 모임때에만 부르짖는 구호가 아니지요. 부원동무의 책임성이야말로 우리 연구사업에서의 성과를 담보하는 추동력이 아니겠습니까.》 처녀의 그 예리한 비난에 나는 당장 사라져버리고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사나이의 결기와 때로 미욱하다고 할만 한 대담한 행동도 과학적인 론리로 충만되여있는듯 한 그의 정확한 조언에는 다 나처럼 풀이 죽어버릴것이다. 그는 얼이 빠진듯 멍해 서있는 나를 뒤에 남기고 가볍게 방에서 나가버렸다. … 빽― 시작을 알리는 호각소리와 함께 높이 튀여오른 공은 우리 편의 박동무손에 맞고 나에게 곧추 날아왔다. 나는 날래게 그것을 받아쥐고 민첩한 동작으로 빼몰기를 하며 속력을 내여 달리기 시작했다. 앞에선 긴장해진 눈길들을 주고받으며 열성스레 팔을 아래우로 휘저어대는 상대편선수들이 나에게서 공을 뺏을 기회를 노리고있었다. 박동무가 단독몰기만을 하는 나에게 안타까이 소리쳤다. 《학철이, 넘기라. 넘기란데…》 나는 좋은 기회가 엿보이자 맵시있게 공을 던져 박동무에게 련락했다. 《야―》 갑자기 응원자들이 북을 두드리며 환성을 질렀다. 박동무의 첫 투사가 성공한것이다. 나는 덜렁거리며 뛰여오는 박동무와 손바닥을 기분좋게 마주쳤다. 한편 저기 멀리서 수연이의 눈이 남몰래 나를 더듬고있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기운이 버쩍 치밀었다. 아닌게아니라 수연이가 하르르한 수건을 들고 응원자들앞에서 춤추는 모습이 시야에 안겨왔다. 그의 날씬한 몸매에 감겨졌다풀렸다 하며 하느적거리는 푸른 수건은 수연이와 내가 나란히 걷던 대동강유보도의 우거진 버드나무를 련상시켰다. …소슬한 바람에 가벼이 일렁이는 대동강물결을 바라보며 우울하게 앉아있던 나는 《학철동무!》 하고 부르는 소리에 머리를 들었다. 순간 나는 놀라서 몸을 반쯤 일으키기까지 했다. 어떻게 수연이가 나를 찾았을가. 아마 고민으로 가득찬 얼굴로 강물만 멀거니 바라보는 내 모양이 그의 여린 마음을 흔들어놓았는가? 수연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내곁에 와앉았다. 《여기서 뭘해요. 퇴근은 하지 않구?》 그의 목소리는 언제 불쾌한 일이 있었던가싶게 친근하고 다심한 목소리였다. 나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는 의식에 불쑥 이렇게 중얼거렸다. 《다들 일찍 가던데… 왜 이렇게…》 《일에 빠져서 그만 시간가는줄 몰랐어요.》 빨갛게 홍조가 핀 그의 얼굴은 자기 사업에 대한 긍지감으로 무척 행복해보였다. 나는 저도 모르게 후― 하고 한숨을 내뿜었다. 나의 기진한 기색을 조심히 살피던 수연은 담담하게 말했다. 《좀 걷지 않겠어요?》 그래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석양이 버드나무사이로 비쳐들어 천천히 걸음을 내짚는 수연이의 뺨에 불그스레한 여광을 뿌린다. 《그날엔 정말 안됐어요. 저때문에 생각이 많았겠지요. 전 사람의 마음을 헤집어놓고서는 안절부절 못하는 성미랍니다.》 《아니, 오히려 제가 미안합니다. 제 불찰로 생긴 일이 아닙니까.》 나의 대범한 사죄에 수연은 포도알처럼 생신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마워요.》 한동안 서로가 말이 없이 걷기만 했다. 이것으로도 우리의 화해는 충분하였다. 《저… 제가 도와드리겠어요.》 조심스럽게 내비친 수연이의 말에 나는 저으기 의아해졌다. 수연은 발그레해진 얼굴을 수그린채 가만히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그때에야 수연이의 깊은 마음을 리해할수 있었다. 나의 가슴에 예리한 상처를 남기는 비판을 하고도 외면한것이 아니라 나의 사업에서의 성과를 위해 도와주고싶어하는 고마운 처녀에게 나는 머리를 수그리지 않을수 없었다. 《고맙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그러지 않아도 나에게는 연구소에서 일할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한 과학기술학습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진정에 넘친 나의 대답에 그는 무척 당황해하고 부끄러워했다. 수연이도 저런 면이 있었던가 하고 나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수연은 연구소사람들의 눈길을 모으고있는 처녀였다. 연구소사람들은 항상 자신심에 넘쳐있으면서도 연구과제를 수행하지 못할가봐 속을 끓이며 고심하는 그를 귀중히 여기고 사랑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는 유쾌하고 익살맞은 롱담도 즐겼지만 일단 자기 사업에 들어서면 무서울 정도로 심각해지고 깔끔해졌다. 수연이처럼 자기 사업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람도 쉽지 않을것이다. 그는 연구사업에서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진지한 정열가였기에 전공부문에서 한다하는 권위자로 될수 있었다. 그로 해서 그는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지어 두려움까지 자아내는 독특한 매력을 가지게 되였다. 《아이, 장미꽃!》 나는 가벼운 탄성을 지르는 수연이의 목소리에 눈길을 돌렸다. 갖가지 꽃들이 활짝 피여나 방긋이 웃으며 가벼이 살랑대고있는 꽃밭속에서 수연은 치마를 감싸안은채 무릎을 꺾고앉아 그윽한 꽃의 향기를 맡고있었다. 나는 절로 피여나는 웃음을 담고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순진한 어린 처녀애를 방불케 하는 수연의 모습은 마치 그 꽃밭속에 핀 꽃들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진한 향기를 뿜는 꽃같이 여겨졌다. 갑자기 그의 손에 고운 꽃을 들려주고싶은 욕망이 불쑥 일었다. 《저… 여기서 잠간만 기다리십시오.》 나는 영문 몰라 눈을 크게 뜬 수연이를 남겨둔채 가까운 꽃매대쪽으로 내달렸다. 마침 매대에는 여러가지 꽃들이 있었다. 나는 두루 꽃들을 골라보다가 빨간 장미꽃을 집어들었다. 《동무두 참…》 탐스러운 꽃송이를 손에 들려주자 수연은 못내 놀라운 기색을 지었다. 그는 꽃향기를 두어번 맡고나서 슬그머니 꽃을 아래로 내리드리웠다. 좀더 들고서 향기를 맡아주었으면… 하지만 수연이에게서는 어느덧 꽃에 대한 흥심이 사라진것 같았다. 《고마워요. 꽃을 꽃병에 꽂아두길 좋아해요?》 그는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난 좋아하지 않아요. 꽃밭속에서 피여나는 꽃에는 사람들을 언제나 끌어당기는 그런 신비의 힘이 있지요. 그러나 그 꽃이 방안에 놓일 때에는 사람들에게 한순간의 기쁨밖에 주지 못한답니다. 인차 자기 매력을 잃어버리지요. 난 이렇게 생각해요. 꽃은 꽃밭에 있어야 진정 아름답다구요. 다발에 엮어져 명절날이나 생일날 사람들에게 안겨지는 꽃은 그 하루의 기쁨밖에 더 줄수 없을거예요. 그래서 그런지 꽃밭을 떠나 다발이나 꽃병에 꽂히는 꽃에는 자연적인 매력이 전혀 없어보여요.》 수연은 자기 말이 너무 길어진것 같아 살짝 얼굴을 붉히고나서 말머리를 돌렸다. 《어디에 있다가 여기로 왔어요?》 예견치 않았던 질문이여서 나는 한순간 당황해났다. 만일 내가 체육인이며 연구소와는 인연도 없는 사람이라는걸 알게 된다면 어쩔가? 이미 수연이에게 한코 떼운감은 있지만 자신의 약점을 보이고싶지 않았다. 실망시키고싶지 않은 사람에게 실망을 준다는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바쁘게 뒤엉켜진 사색의 혼잡속에서 나의 입으로는 별스런 대답이 튀여나왔다. 《비밀이요.》 그리고는 가슴에 걸리는것이 있는듯 헛기침을 깇었다. 수연은 이 말에 걸음을 멈추고 맑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렌트겐처럼 나를 속속들이 꿰뚫는것 같은 그 시선앞에서 나는 허둥대며 눈길을 피했다. 《왜 그러오?》 그는 아리숭한 미소를 짓고나서 걸음을 옮겼다. 《묻지 말아야 할것을 물었군요.》 그 어조에선 어딘가 의미심장한것이 느껴져 은근히 마음이 조여들었지만 나는 자신을 위안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어쨌든간에 수연이라는 처녀와의 두번째 대면은 우리를 좀더 가까운 사이로 만들지 않았는가. 연구소적으로 관심이 높은 이 처녀와 이렇게 나란히 걷고있는것만도 나에게는 행복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헤여질 때 한 수연이의 말에 나는 속이 덜컹 내려앉았다. 《우리 아버진 ㅅ체육단 롱구감독이예요.》 그와 헤여진 뒤에도 이 말은 내 귀에서 떨어질줄 몰랐다. 나는 오래동안 유보도를 서성거리며 생각을 더듬었다. 내가 애써 감추려고 한 사실이 드러난것 같아 가슴이 졸아들었다. 그런데 다음날 나를 대하는 수연이의 기색은 여전히 평범했다. 그후 나는 그를 자주 찾아갔다. 기술학습이라는 명목도 있었고 또 실질적인 도움도 받았다. 그는 자기 일에도 바빴지만 나를 위해 시간을 짜내였다. 그리고는 매번 진지한 태도로 열정적으로 가르쳐주었다. 그처럼 도고하고 차거운것 같은 그의 마음속에 그렇듯 뜨거운 열정이 가득차있는것이 몹시 놀라왔다. 나는 그앞에서 어느덧 말을 더듬게 되였고 그의 시선을 느낄 때면 점차 심장이 두근거리게 되였다. …
상대편선수의 반칙으로 벌투가 나에게 차례졌다. 치렬한 경기는 마감을 가까이 했고 응원자들의 흥분은 극도에 달하여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듯 높은데 결정적인 순간이 나의 손에 쥐여진것이다. 나는 벌써 많은 투사를 성공시켰다. 수연이의 믿음어린 눈길이 나의 등을 떠민것이다. 모두가 긴장해진 속에서 나는 벌투선에 나와섰다. 이것은 경기의 승패와 관련되여있었다. 나는 활랑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공을 두어번 바닥에 내리치고나서 두손으로 공을 들어 머리우로 올렸다. 그리고는 롱구대판에 그려넣은 네모나기 조준문을 겨누었다. 순간 이상하게도 나의 말을 여지없이 꺾어버리던 수연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만하세요.…》
따분한 침묵속에서 헤여나오지 못한 답답감에 나는 목이 막 타들어갔다. 《수연동무, 왜 대답이 없소?》 수연은 해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물면만을 이윽토록 응시하며 버드나무잎만 뜯어내고있었다. 잠시후 머리를 든 수연은 나의 황황히 타는 눈길과 마주치기 무서운듯 강물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미안해요. 동무의 심정은 알만 하지만… 가슴아픈 소리이지만 솔직히 말하겠어요. 전 동무의 모든것에 공감과 리해를 표시할수 없군요. 후에 시간이 흐르면 그땐 알게 될거예요.》 나는 부르르 떨리는 손을 감추려고 바지주머니에 손을 찌르고나서 까딱않고 서있었다. 그리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소?》 마음을 터놓은 이상 끝을 보아야겠다는 단호한 생각이 욱 치밀었다. 나는 침착하게 자신을 다잡고있는 그를 보자 더욱 분별을 잃고 소리쳤다. 《말해보란 말이요. 무엇이 공감이 안 가고 리해가 안되는지.》 《우린 생활에 대한 리해가 너무나 달라요. 전 가봐야겠어요.》 수연은 나직하게 속삭였으나 거기에는 움직일수 없는 결단성이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선 수연은 불어오는 강바람에 흩어지는 머리를 다듬으며 강잉하게 걸음을 내짚었다. 그가 떠나가자 나는 후들거리는 몸을 지탱할수가 없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꽃밭에 핀 장미꽃도 그런 나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듯 열심히 머리를 저으며 한들거리고있었다. 결국 나에게 남은건 허거픈 공상뿐이란 말인가. 아니 그것보다 무서운것은 나라는 존재가 단 한 사람의 사랑도 받을만 한 가치조차 없다는 그 사실이였다. 마치 세상의 모든것이 나에게서 의미를 상실하고 멀어져가는것 같았다. 아, 나는 머리를 싸쥐고 자신에 대한 환멸과 생활에 대한 좌절감에 몸부림쳤다.…
《꼴이다, 꼴!》 《야!―》 응원자들이 모두 떨쳐일어나 환성을 지르며 덤벙덤벙 뛰여오른다. 우리가 이긴것이다. 나는 얼굴에 내밴 질펀한 땀을 문지르며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우리 선수들이 나에게로 달려와 매달렸다. 기쁨에 넘친 그들의 손이 내 손과 머리를 쓸어주는가 하면 또 잔등을 두드려주기도 했다. 롱구경기의 절정은 나의 성공적인 투사로 하여 이채롭게 장식되였다. 응원자들이 달려나와 나를 추켜올리는 속에서도 나는 환희에 넘쳐 체육모자를 흔들며 콩콩 뛰는 수연이의 얼굴을 놓치지 않았다. 《김학철, 김학철―》 전체 응원자들이 나의 이름을 웨치며 기뻐했다. 응원대장이 나의 손목을 잡고 사람들앞에 나섰다. 그는 나를 향해 팔을 펼치며 웨쳤다. 《박수―》 그러자 《오―》 하는 경탄과 함께 요란한 박수갈채가 터져올랐다. 나는 사람들속에서 응원의 열기로 달아오른 뺨을 두손으로 꼭 누르고있는 수연이의 빛나는 눈을 보았다. 그 눈은 이렇게 속삭이는것 같았다. 《동문 정말 훌륭해요.》 나는 잠재울길없이 밀려드는 흥분으로 들먹이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며 태연히 그의 눈길을 받았다. 처음으로 그를 바라보는 나의 눈길이 자신심에 넘쳐 당당해보였다. 나에게 있어서 이 운동회는 이어지지 못한 사랑의 궤도를 련결시키는 중요한 계기로 될것 같았다. 나는 무슨 생각으로 상을 받았고 박수를 받았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로지 머리속에는 수연이와 만나는 나의 의젓한 모습만이 떠올랐던것이다. 저물어가는 하루해와 함께 떠들썩하던 운동장도 언제 그랬던가싶게 한적해졌다. 나는 퇴근준비를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연구소정문을 지켜섰다. 퇴근하는 사람들은 운동회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며 명랑하게 웃고 떠들었다. 처녀들이 웃음판을 펼치며 나오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우르르 몰려와서 제가끔 찬사를 쏟아놓으며 재잘거리고나서 저편으로 멀어져갔다. 이윽고 나의 기다림의 주인공인 수연이가 손가방을 들고 사뿐사뿐 걸어나왔다. 나를 알아보자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고 뛰여온 수연은 가까이 다가와 재빠르게 말했다. 《오래 기다렸어요?》 나는 너무나 달라진 그의 태도에 감동되였고 그 순간에 쓰디쓴 지난날의 추억을 말끔히 지워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울렁이는 마음을 눅잦히고나서 될수록 말을 뚝하게 만들어내려고 애썼다. 《난 말이요.…》 이때 그가 갑자기 나의 팔을 부여잡더니 흥분하여 말을 막았다. 《아니, 내 말을 들어요. 난 오늘 무엇을 생각했는지 아세요? 난 동무에게서 놀라운것을 발견했어요. 정말 훌륭해요. 오늘 동무의 모습이 얼마나 매력적이였는지 온 연구소 처녀들이 모두 동무이야기뿐이예요. 동문 꼭 성공할수 있어요. 아니 뛰여난 체육선수가 될거예요.》 《?!…》 나는 두번째로 실망을 받아안았다. 그때에야 그가 나에게 그리도 강렬하게 호소하고싶었던것이 무엇인지 나는 어렴풋이 느낀것 같았다. 그 호소는… 《이래봐도 난 아버지를 닮아서 체육선수들을 볼줄 알아요. 내 언젠가 말했지요. 나의 어린시절은 키가 큰 롱구선수들속에서 흘러갔다구. 그때 난 어린 마음에도 조국의 영예를 빛내이는 체육선수들이 돋보였어요.》 수연은 다시한번 자기의 의도를 명백히 하였다. 며칠후 수연은 나에게 편지를 보내여왔다. 《학철동무, 전 연구사업때문에 황해북도로 떠납니다. 동무가 이제라도 자신을 되찾을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이 글을 씁니다. 난 솔직히 운동회날에 동무에게 끌렸어요. 그것은 동무가 우리의 영예를 빛내였기때문인것 같아요. 그러나 그다음에 생각했어요. 동문 우리에게 있어서 단 하루만의 매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다음날 또 그 다음날을 동무는 무의미하게 살아갈겁니다. 왜냐하면 이런 큰 운동회는 매일 있는것이 아니라 한해에 여러번밖에 없는걸요. 그러니 그 운동회날 하루에 비낀 동무의 매력은 그날로 스러질거예요. 그 하루의 매력이 1년 365일 아니, 한생의 매력으로 이어질수는 없을가요? 자신을 위해 한생을 살것이 아니라 집단을 위해 자기의 재능을 깡그리 다 바친 그 운동회날처럼 한생을 살려면 동문 우리 연구소에 있어서는 안될 존재예요. 동무나 나나 하루하루를 보람있게 보내야 강성대국의 그날이 더욱 앞당겨질것이 아니나요. 조국에 필요한 초소에서 자신의 능력을 아낌없이 바칠 때 동무는 조국의 사랑을 받게 될거예요. 아버지에게서 동무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버지는 동무가 꼭 돌아올것이라고 하더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찾아가보세요. 10월 ×일 김수연으로부터》 ×
비행장에는 우리들의 경기성과를 축하하러 모여든 사람들로 붐비였는데 그들속에는 어제날의 연구소사람들도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향기로운 꽃다발을 가슴가득히 안겨주는데 유독 한사람만은 아무것도 없이 내앞에 서있었다. 그 처녀였다. 수연이였다. 그는 그야말로 한순간의 기쁨밖에 주지 못하는 다발속의 꽃이 아니라 영원한 향기를 뿜는 가장 아름다운 꽃이였다. 우리는 서로 손을 꼭 잡았다. (평양연극영화대학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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