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97(2008)년 제12호 잡지 《청년문학》에 실린 글  

 

 단편소설

 변  영  건

 

1

 

랭기를 머금은 3월의 하늘로 무거운 구름덩이들이 땅에 닿을듯이 낮추 떠간다. 파르스름하게 봄물이 오르는 고원지대는 구름의 그림자들로 어두워진다. 어데선가 안개가 몰려와 개울가의 허여스름한 봇나무들을 감싸안고 뭔가 깊은 사연을 속삭이는것 같다.

림연은 합숙마당의 나무의자에 앉아 어머니의 편지를 읽고있었다.

《…림연아, 몸은 성한지.

네 생각에 이 에민 밥도 잘 못 먹고 발편잠을 못 자는구나.

떠날 때만이라도 이 에밀 기쁘게 해주고 갈노릇이지 그렇게 화살맞은 독수리처럼 잔뜩 성이 나서 구름속으로 사라지듯 날아가버리다니…

네가 보고싶어 한밤중에도 손을 뻗쳐 네 잠자리를 더듬고 또 더듬노라면 어느덧 날이 새는구나.》

림연의 눈가엔 어느덧 구슬알같은 눈물이 맺혔다. 딸을 바래우며 그냥 걱정만 하시던 어머니. 그날 어머니의 가슴에 온기가 돌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더 해드렸을걸…

그도 어머니가 보고싶었다. 그리고 헤여지기 아쉬워하며 줄줄이 따라서던 학급아이들, 스물다섯해나마 자라온 정든 고향도시… 그 모든것이 그리웠다. 다시금 그 품에 안겨 온갖 정을 나누며 그 향기를 맡아보고싶었다.

수리개마냥 정답고 안온한 고향도시를 떠나 이 고원지대로 용약 날아오른지도 이제는 반년, 그 길지 않은 세월속에서 림연은 매일 어머니와의 속대사를 나눠왔었다. 모녀간의 그 속대사가 지금 문자로 옮겨져 계속되는것이다.

《부탁이다. 시간을 내여 한번 다녀가거라.

네가 오지 않으면 내 널 찾아가련다.…》

림연은 다 읽은 편지이건만 눈길을 들지 못했다. 마음속의 대화는 아직 끝나지 않은것이였다.

(어머니, 이 딸을 믿어주세요.

난 여기서 보람을 찾고 행복을 찾겠어요. 난 우리 당에서 새롭게 구상하고 건설해가는 이 일터에 우리 청춘들의 새생활이 있고 보람이 있고 또 행복이 있다는걸 알고있어요.)

그의 눈빛은 평온한 푸른 하늘인양 그윽하고 잔잔해졌다. 순간 림연은 마음속을 속속들이 파고드는 그 어떤 감상적이고 고무적인 흥분에 잠겨들었다.

그가 편지를 거두고 일어서려는찰나 부엌문이 열리며 합숙 어머니가 뜬김과 함께 마당가에 나섰다. 산토끼가 익는 구수한 냄새가 림연에게 풍겨왔다. 녀인은 림연의 심중에는 아랑곳없이 제딴의 푸념을 늘어놓았다. 오늘이 연구사의 생일이여서 그가 좋아하는 메밀국수를 누르려는데 그가 오지 않는다는것이였다.

《그 〈풀박사〉는 언제한번 끼니때를 지켜본적이 없다니… 하늘이 어두워지는걸 보니 뭐가 올 잡도린데 아직두 삼각봉에서 뭘 하누. 남철인 기타를 메구 나간게 싫증이 나면 어정어정 나타나겠지. 그러니 선생이 좀 다녀오게.》

녀인의 사설많은 부탁에는 어머니의 다심한 그것이 느껴졌다. 림연은 차마 거절할수가 없었다. 생일, 연구사, 삼각봉… 그 낱말들이 자신의 일처럼 한줄로 꿰여지면서 그의 걸음을 떠밀었다.

고원지대의 초봄은 변덕스럽다. 바람한점없이 후덥지근한 열기에 싸여 아지랑이가 무럭무럭 오르다가도 때아닌 폭설이 음침한 숲의 마른가지들을 부러뜨리며 쏟아져 덮이기도 한다. 그래도 계절은 계절이여서 얼음장을 통해 물살의 무늬를 마음 기쁘게 들여다보던것도 어제일이다. 물은 드디여 그 얼음을 부시고 치솟아 넘쳐흘렀다. 물녘 버들개지들에 새노랗고 동실한 꽃망울들이 맺혀 달콤한 꿈을 꾸고있다.

림연은 봄기운을 한가득 품고 아직도 늘어진 겨울잠에 든것 같은 드넓은 고원지대를 바라보며 명상에 잠겨 걸었다.

방목장으로 굽어드는 길에서야 림연은 문득 산으로 오르는 자신의 목적을 상기하게 되였다.

《〈풀박사〉를 꼭 데리구 오라구.》

그래, 림연은 지금 자기의 인생에 아무런 인연도 없는 그 연구사를 찾아 떠난 길이였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그와 그의 조수인 남철이 그리고 림연은 한합숙생이다. 림연은 아직 연구사를 잘 모른다. 단지 먹이풀재배연구사라는 목적으로 전문연구기관에서 자원해온 청년이라는것뿐이다. 자원해왔다는 이 점에서는 림연도 같았다. 그러나 내용에서는 달랐다.

림연은 같은 학교의 물리교원인 박세웅이라는 청년과 사랑의 인연을 맺어왔었다. 그런데 그가 이 새로 건설된 방목지에로의 진출을 이러저러한 구실로 거부했다. 림연은 그후 또 여러가지 문제들에서 그의 인생관을 력력히 들여다보았다. 수치감과 분노에 싸인 림연은 이에 돌발적으로 도전하여 이 방목지에 자원해왔던것이다. 이것은 연구사사이에 공통점을 가져왔다. 이 공통점이 처음 처녀의 호기심을 끌었으나 청년은 기울어지는 달마냥 점차 처녀의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날이 갈수록 성공여부를 알수 없는 연구사업에 미친것처럼 열중하는 그에게 예쁜 방목공처녀들은 《풀박사》라는 별명을 달아주었다. 그 《박사》라는 칭호는 아깝지만 실로 그의 행동은 그 존칭에 퍽 어울렸다. 그는 좀처럼 식사시간을 지켜본적이 없고 함께 밥을 먹는 때에도 가정적인 단란한 한담에는 일체 참가하지 않았다. 생활과 주위세계에 무관심하고 먹이풀재배라는 개념속에서만 숨쉬는 사람… 물론 그것은 연구사라는 직업과 그의 어려운 연구가 강요하는 생활일수 있다. 그렇다고 너무 자기 목적에만 치우친다면…

지난 어느날 림연은 합숙마당에 꽃을 심으려 했다. 누군가가 빈터를 규모있게 뚜져 엎었길래 림연은 애틋한 마음으로 꽃모 몇포기를 떠왔었다.

림연은 그 꽃들이 자신의 미래를 상징하길 마음속으로 바라고 바랐다. 그런데 누군가 마당가로 뚜벅뚜벅 걸어와 주인다운 거친 어조로 말했다.

《심지 마시오. 심은것도 뽑아야겠소!》

림연은 놀랐다. 바람에 거무스레 튼 얼굴, 인정이나 관용같은것을 초월한 랭담한 그 눈빛… 순간 마음속엔 자존심이 고열을 뿜으며 장작불처럼 타올랐다.

《아마 주인인 모양이군요. 그렇게도 꽃을 싫어하세요?》

림연은 자기를 사정없이 짓뭉개는것 같은 그 눈빛과 태도에 좀 더 서리찬 공격을 들이대고싶었다.

진학(연구사)은 그 녀자의 발치를 내려다보며 쓰거운 웃음을 지었다.

《꽃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무시해서 안됐소.》

《아니요. 싫은걸 부디 심을 필요는 없지요. 차라리 남새 몇포기라도 심는게 더 실용적일테니까요.》

림연의 얄궂은 마음속은 그 청년이 울컥하여 흥분이라도 했으면 시원할것만 같았다. 그러나 청년은 신중성을 잃지 않았다.

《내가 이미 거기에 다른 씨앗을 묻었소.》

멀어져가는 청년의 발자국소리, 그 소리가 어쩌면 림연의 가슴속을 뚫고 지나가는듯 했다.

꽃들은 합숙마당가에서도 제일 으슥한 곳에서 아무 흥심도 없이 잡초처럼 자라고있었다. 처녀가 그렇게도 정성을 기울여 심고싶었던 그 자리에서는 이름모를 풀이 그 용도를 알수 없게 자라오르고있었다. 그 무명의 풀들이 연구사에게 류다른 기쁨을 주었지만 림연에게는 알지 못할 아픔만을 주었다.

그것도 한때뿐, 그후엔 이렇다할 접촉도 없었다.

진학은 처음부터 림연이라는 존재를 자기 생활의 울타리밖에서 사는 녀자로 보았고 림연이도 역시 그 울타리를 넘겨다보지 않았다. 그들의 감정은 숲의 나무와 나무사이처럼 인연이 없었다. 그런 진학에게 림연이 할수없이 도움을 청한것은 바로 한달전 일이였다. 림연은 학생들에게 방목지의 래일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 나라 염소방목의 전망에 대해서 알려주어야 했다. 이것은 림연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이고 또 그러고싶었으나 그에 대한 기초가 없었다. 그래서 진학을 생각해냈다. 그의 도움을 청해서라도 아이들의 미래며 조국의 앞날에 대해 이야기해주고싶었다.

밤도 퍼그나 깊어 림연은 지나간 사사로운 감정들을 짓누르고 실험실문을 두드리고야말았다.

진학은 전등불아래서 두루미처럼 한다리를 들고 무슨 책을 읽고있었다. 림연은 그 괴이하고 우스운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저… 방해가 되겠군요. 난 사실 도움받을 일이 있어 왔어요.》

《미안하오만 난 지금 누구를 도와줄 시간이 없습니다.》

진학은 미리 준비한듯 한 순탄한 어조, 재빠른 말씨로 림연의 제의를 단박에 거절해버렸다. 또 그는 이러한 대화를 나누는 순간마저도 아까운듯 림연을 단 한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의 모습에서는 자기 사업이 아닌 다른 모든것에 대한 일종의 무시같은것이 풍기고있었다. 과연 림연이 자신에 대한 이러한 무시의 감정을 당해보고 또 상상이나 해보았던가? 림연은 하얗게 짙어가는 얼굴로 진학의 머리로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한동안 여겨보았다. 질좋은 천으로 맵시있게 만든 옷이건만 외모에 그닥 관심이 없는(혹은 여유가 없는지.) 본인의 불찰로 별로 초라해보이는 차림새, 얼굴륜곽과 표정은 지성적인데 눈빛만은 림연을 떠밀치면서 거만하게 빛나는듯싶었다.

《림연이, 난 동무를 위해서라면 저 하늘의 별이라도 따오겠소.》 이것은 어디서 들려오는 목소리인가?! 사랑아닌 사랑… 하지만 그때 림연은 떠받들리우고 응당한 존경을 받아오지 않았던가. 아니, 생각해보건대 그것은 림연의 외적인 미에 대한 《존경》이였다.

림연은 그 무슨 어둠속에 잠겨있는듯 한 느낌이였다. 그는 도고한 눈빛으로 진학을 바라보았다.

《전 동무의 도움을 받지 않겠어요. 동문 누굴 도와줄 시간이 아니라 능력이 없을테니까요.》

《능력은 시간이 낳아줄수도 있는거요. 그래 나의 어떤 능력이 요구되오?》

《아니요. 어떤 능력도 필요없어요. 난 내 일때문이라면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동무를 찾아오지 않을거예요. 다만 아이들의 교육문제를 위해 난 왔던거예요.》

림연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서려 했다. 그러나 진학의 호된 목소리가 림연의 마음을 잡아흔드는것이였다.

《그 말을 왜 이제야 하는거요. 교육문제와 자기의 사사로운 감정을 혼탁시키지 마시오. 그래 무슨 일이요?》

《우리 나라 염소방목의 현실과 전망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강의해주고싶었어요. 그러니 제가 개념적으로라도 알아야…》

《개념적으로가 아니라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 축산업발전에 이바지하게 될 기둥감이 되도록 말입니다. 품을 들여야 합니다. 〈꾀여〉내는게 아니라 스스로 나서도록 심장을 울려야 합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며칠후 진학은 그런 진중한 얼굴로 림연을 찾아왔다.

《초빙강의준비가 다 됐습니다.》

훈훈한 난로가에 솜옷을 벗어놓은 그의 모습에 림연은 어리둥절함을 금치 못했다.

흰 와이샤쯔에 잘 어울리는 진곤색의 넥타이, 몸에 맞는 회색의 고급양복, 윤기나는 까만 구두는 명절음악회에 나선 명가수의 모습을 방불케 했다. 대체 이 사람은 왜서 이런 차림을 하고 나섰단 말인가?

림연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정중하고 의젓한 모습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안되였다.

《자연은 나날이 발전해가는 인간들의 창조적활동과 요구에 만족을 주지 못하게 되였습니다. 인간은 새시대의 요구에 맞게, 자기의 창조적요구에 맞게 사물을 개변하고 물질을 변이시켜 우량적인 동물이나 식물을 창안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는데 효과적인 먹이풀로서 콩과단백풀인 〈ㅈ〉풀은 인간의 창안이 아니라 발견으로서 지금 세계적으로 먹이풀의 왕으로 인정되고있습니다. 염소방목에서 덕을 보자면 그런 단백풀로 개간된 과학적이고 체계화된 풀판이 있어야 합니다. 염소방목 그자체가 과학이 되여야 합니다.

학생동무들! 그 풀이 바로 우리가 연구재배하여 이 세룡포방목지에 번식시켜야 할 〈ㅈ〉풀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기후와 풍토에 맞는 조숙하고 우량한 품종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나라 염소방목의 실태 그리고 그 전망은 이 단백풀이라는 먹이사료와 많이 련관되여있습니다. 누구나 이 사업에 대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성공적인 현실과 그 미래를 앞당겨올것입니다. 그 무한한 힘의 원천과 력량은 바로 새 세대인 학생동무들인것입니다.…》

학생들의 두눈은 별처럼 반짝였다. 림연이도 역시 그랬다.

계속되는 진학의 론리적인 설명에 학생들은 물론 림연이도 점차 그의 정력적인 풀판조성사업에로 한걸음 두걸음 끌려갔으며 그의 사업에 자기도 모르게 공감하게 되였다.

그래서 지금도 그를 찾아 이렇게 삼각봉으로 가고있는것이다.

어느새 심상치 않은 찬바람이 숲나무의 묵은 가지들을 후두두 흔들어댄다. 구름은 안개와 구분이 없이 드리웠다.

이윽고 실비가 소리없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얼마후에는 찬바람이 구름의 무리를 잡아흔들어 산천에는 실비가 아니라 진눈까비가 흩날렸다.

림연은 시험포전 방풍장너머로 진학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내의바람인데 온몸이 그대로 흙투성이, 물투성이였다. 벗겨진 비닐박막을 걷어안고 걸어가다가 내여던진 호미자루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쳐다본다.

련민의 덩어리가 처녀의 가슴속에서 스르르 굴러내렸다.

걸음은 어느새 방풍장문을 넘어섰다.

《저 합숙어머니가 기다려요.》

림연은 그에게로 가깝게 다가섰다.

《아마 일이 잘 안되는 모양이군요.》

림연은 그의 푹 젖고 옹송그린 몸에 자기의 솜옷을 씌여주고싶은 심정이였다.

《동문 생일도 잊고 이렇게…》

그 말은 마치도 아픔과 괴로움이 소용돌이치는 그의 마음속에서 그 무슨 진통제와 같은 역할을 한듯싶었다. 진학의 입가에 웃음이 피여났다.

《그러니 선생은 나때문에 예까지 오셨군요.》

림연은 몹시 미안해하는 진학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시간이 퍼그나 흘러서야 그들은 합숙에 이르렀다. 방안에서는 어딘가 선률의 감정속에 잠기지 못한 남철이의 기타소리가 텅텅 들린다. 그 소리는 다시 곡상의 엄한 요구에 화합하듯 은은하고 열정적으로 울린다.

《술을 마셨구만.》

진학은 식탁에 앉으려다말고 그를 돌아보았다.

《좀 마셨지요.》

그는 뜻밖에도 그냥 도전적인 자세로 기타줄우에서 재주를 부리는듯 한 손질을 멈추지 않는다.

《무슨 일이요?》

《남철동무!》

림연은 안타까운 질책어린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남철은 응어리졌던 숨을 뽑아내듯 긴 숨소리를 내며 기타를 뎅겅 소리가 나게 벽에 세웠다. 이어 네명이 서먹한 감정으로 상에 둘러앉았다. 합숙어머니는 생일도 잊을 정도로 고심하는 진학의 연구에 념려의 뜻을 표시했고 진학은 그 말에 진심으로 되는 고마움을 보냈다.

림연은 도무지 목구멍으로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다. 이제 20대에 들어선 남철이가 어떻게 연구사에게 저렇게 나올수 있는가. 과연 무엇때문에 저런 엇드레질인가?

남철이가 먼저 일어섰다. 그는 못마땅한 자세로 기타를 들더니 건너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진학은 시종 침착하고 태연했다.

식사가 끝난 후 림연은 불꺼진 식탁에 오래도록 앉아 생각에 잠겼다. 건너방에서 남철의 굵은 목청이 날아 넘어왔다.

《말해주세요. 왜 날 오래동안 속여왔어요? 난 오늘에야 연구사동지의 책상에서 〈ㅈ〉풀의 토양순응에 대한 어느 한 학위론문을 보았어요.》

《학문에 관심을 가지는건 좋은 일이지. 그런데?》

진학의 말은 더 들리지 않았다.

《결국 내가 연구사동지한테 속히운다는데 문제가 있지요.》 남철의 여유가 있고 주변이 좋은 말소리가 연방 들린다.

《그리고 난 연구사동지에 대해서도 다 알아보았어요. 연구소에서 부진만을 거듭하다가 나중엔 이 산속으로 밀려온 사람이란걸…》

별안간 진학의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래서 동문… 그 말을 하자고 술을 마셨구만.》

순간 기타줄을 부르르 떨게 하는 남철의 열띤 목소리가 울렸다.

《말해줘요. 지금 연구사동지도 그 풀을 키우려는거지요?》

《물론이지.》

《그렇다면 정말 우린 남이 한걸 반복하는건가요?》

남철은 울먹이며 소리를 질렀다.

진학은 신음소리를 냈다.

《넌… 아니 날 믿어라.》

《아니요. 내가 무엇을 믿으라는거예요?》

《흥분하지 말아. 넌 지금 리성을 잃고있다. 찾을수 있는것중에서 찾지 못한 한가지, 바로 그런 일을 하고있는거야. 그 풀은 습도에 견딜성이 약하고 여기 토양에 적응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 난 우수한 형질만을 안은 그런 씨앗을 원해! 우수한 토양과 조건만을 바라는 그런 순응은 원하지 않아.》

《싫어요. 그 론문에 자그마한 허점이라도 있단들 그래 그것을 보충하면 그 론문만 한 가치를 얻을것 같애요? 난 포부가 커요. 남이 맞은 4점에 1점이나 보탤 그런 일은 싫단 말이예요.》

《그것이 이 땅에 필요하다면…》 진학은 퍽 유순한 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땐 누구든 해야지. 자오. 난 시험포전에 가봐야겠소.》

저벅저벅 어둠속으로 멀어져가는 발자욱소리, 어째서 저 소리는 가깝게 느껴지는걸가… 밖에서는 여전히 비와 눈이 엇섞여 내리는지 처마끝에선 락수물소리가 쉼없이 들린다. 림연은 두손으로 턱을 고인채 나직이 한숨을 지었다.

과연 그는 그렇게도 그 풀의 연구에 충실한건가? 남의 연구성과에 생긴 그 한점의 공백을 위해서… 아, 저 사람은 찬비뿌리는 밤길을 몇번이고 걸으며 그 한점을 얻겠구나. 그 한점이 정말로 남철이가 바라는 그런 크고 값진, 인생에서 떳떳이 자부할수 있는 그런것이 될가?

림연은 그밤 처음으로 진학이라는 연구사청년에게 동정이 갔다. 방목공처녀들이 《풀박사》, 《풀에 미친 사람》이라고 놀려대던 일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가?

 

2

 

숲의 아침은 정갈하다.

해빛은 숲을 축축히 적신다. 새들이 훌륭한 연주로 맞이한 아침이다.

림연은 이 숲이 좋았다.

그 옛날 룡이 나래를 폈다는 룡비강의 상류가 시작된 이 골안은 세마리 룡이 들어앉아 놀았다는 같은 크기의 세개의 큼직한 소를 지으며 강물이 흘러간다고 그 이름도 세룡포이다. 그 강안에 봇나무, 물푸레나무, 가둑나무들이 촘촘한 숲을 이루었고 그속을 뚫고 강 왼켠으로 오르면 울창한 수림이다. 제나름의 년륜을 자랑하는 푸른 숲을 지나면 고목이 된 밑둥에도 다시 새잎을 펼치는 굴밤나무숲이 나지고 높은 산악의 두리는 숫티를 벗지 못한 이깔들의 세상이다. 그 반대켠은 절묘한 병풍절벽바위를 내세우고 펑퍼짐한 고원이 들어앉았다. 삼각봉은 그 서북쪽에서 풍만한 어머니마냥 고원을 감싸안고 웅장한 자태로 솟아있다. 솜씨있는 젊은이들의 집단은 이 고원을 풀판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이 세룡포에 아담한 지붕의 집들이 서고 골마다엔 발전소가 생겼다. 살찐 염소의 무리가 풀을 뜯는 큰 방목장이 자리잡았다. 림연은 이 목장의 아이들을 위해 이곳으로 온 교원이였다. 말하자면 그는 시대가 부르는 곳으로 달려온것이였다.

그는 랑만적이고 열정적인 처녀다. 생활도 사랑도 그렇게 하기를 갈망했다. 그런데로부터 이런 벅찬 생활을 도피하는, 도피하려는 인간들을 경멸했다.

《내가 가겠어요. 동무가 두려워하는 그 생활속엔 용감하고 거창한 시대의 숨결이 있을거예요. 또 그런 행복이 있을거예요.》

림연은 사랑이 내렸던 뿌리를 모두 걷어안아 쓰린 가슴에 옮겨박았다. 그리고 주저없이 이곳으로 왔다. 와서 아이들을 도시아이들 부럽지 않게 청초한 숲처럼 깨끗하고 거목처럼 꿋꿋이 자라라고 열심히 가르쳤다.

이른새벽, 이슬 돋은 숲을 지나 림연은 아이들과 함께 삼각봉으로 간다. 아이들은 이슬차는 경쟁이라도 하듯 숲을 꿰지르고 산비탈을 만만하게 여기며 선참 산마루에 이른다. 이윽고 둥글고 붉은 태양이 멀리 숲우에 떠받들리운다. 선명하고 장쾌한 그 모습을 림연은 아이들이 새로운 감정과 감각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문학적인 글을 짓게 한다.(그는 문학교원이였다.)

물론 엉뚱하거나 변변치 않은 글들이 섞이긴 하지만 림연은 그속에서 연약하지만 곧은 줄기를 보고 그것이 푸르고 든든해질 앞날을 가꾼다.

《내가 처음으로 새날의 해돋이를 본것은 아버지와 함께 내 고향 바다가 도래굽이에서였습니다. 푸른 바다물을 끓이며 솟는 태양은 여기서는 푸른 수림을 태우며 솟아오릅니다.

내가 이제 이 초원의 싱긋한 냄새를 정말로 느낄적이면 그땐 내 고향 바다가처럼 이 수림을 그리고 이 땅을 사랑하게 될것입니다.…》

림연이도 그런 감정을 느낀다. 오늘 보고 며칠을 또 보고 생활했다고 이 땅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절로 움트지는 않는다. 사랑할수 있는 느낌의 쪼각들이 모이고 축적돼야 한다. 물론 그것은 순간순간 일생을 통해 이루어질것이다.

림연은 자신뿐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이 땅을 사랑할수 있는 그런 감정을 키워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있었다. 그 감정은 이 땅에 자기의 성실한 땀방울을 바칠 때만이 솟아나는 그러한것이였다.

그는 오늘도 그런 마음으로 아이들앞에 섰다. 그러나 오늘 수업은 잘되지 않았다. 아침에 징검다리를 건느던 녀학생이 물에 빠졌다. 얼음같이 찬물에 온몸을 푹 적신 학생을 림연이 업어다가 난로불가에 세워주었다. 갓 선 학교여서 본격적인 다리공사를 못하고 징검다리를 놓았는데 얼음낀 징검돌들이 미끈거려 그런 일이 벌어진것이였다.

림연은 수업중에도 근심에 싸여 자주 징검다리를 내다보았다. 이제 그 물에 아이들이 또 빠져들것만 같은 환각이 그를 자꾸만 사로잡는것이였다.

얼핏 창가에 눈길을 주었던 림연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시 창가에 다가섰다. 물기에 뿌옇게 흐려진 창가너머 강물에서 누군가가 보였다.

(누굴가? 무엇때문에? 혹시 어느 학부형이 징검다리를 고쳐놓는거나 아닐가?)

림연은 꼭 누군가가 그러리라고 생각되였다. 그래서 수업이 끝나자마자 강가로 향했다.

강에 이른 림연은 그만 아연해졌다. 그는 뜻밖에도 진학이였다.

송어살마냥 새빨갛게 얼어든 손, 퍼래진 입술, 살얼음이 낀 강물, 소소리바람이 불어치는 물우… 물은 이런 때도 차야만 하는가. 뜨거움과 고마움의 감정이 외줄기로 피여오르는 모닥불마냥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무엇인가가 가슴벽을 툭툭 쥐여박는것이였다.

진학은 마지막 여덟번째돌을 힘겹게 굴려 다리를 만들고는 취한듯이 지척지척 강물을 나선다.

림연은 그 어떤 충동으로 하여 물에 들어섰다. 허나 그는 하고싶었던 말을 모조리 잃어버렸다. 진학은 그냥 걸어만 간다.…

이틀만에 진학은 앓아누웠다. 감기가 몹시 심했던것이다.

강우에는 진학이 놓은 징검다리가 땅속에서 솟은듯 든든하게 박혔다. 림연은 그 다리를 건너 진학을 찾아 병원으로 갔다.

병상에 누운 진학은 말없는 미소로 림연을 맞이했다.

림연은 그의 기색을 살피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그날 괜히 물에 들어섰댔어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걸…》

림연은 앞날에 대한 아무 고려도 없이 무작정 아무일에나 뛰여드는 그의 성벽을 진심으로 탓하고있었다. 진학은 가쁜숨을 몰아쉬며 얼굴을 찌프렸다.

《아무튼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였소.》

진학은 눈을 감으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참, 아이들이 동무에 대해 늘 말하군 해요.》

진학은 림연의 그 말에 인츰 활기를 띄였다.

《어서 나으렵니다. 나아서 일을 하렵니다.》

진학은 갑자기 자기 마음속에 방울방울 떨어져들어오는 봄의 향취를 느끼며 행복한 기분에 잠기는듯 했다.

림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병치료를 잘하길 바래요. 전 그만 가봐야겠군요.》

《가만…》

진학은 몸을 일으켰다.

《이 자료들을 남철이에게 좀 전해주시오. 그리고 힘들어도 꼭 시험포전들에 나가 관찰하고 이대로 해달란다고 전해주시오.》

《남철인 요즘 평양견학준비를 한다고 바빠 돌아가던데…》

림연은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연구사동문 가지 않는가요?》

책을 든 진학의 손이 떨리는것을 림연은 느꼈다.

《난… 이 몸으론 못 갑니다. 남철이에게 가기 전까지만이라도 시험포전들을 봐달라고 전해주시오. 내가 꼭 부탁한다고…》

진학은 부탁이라는 그 말에 의미를 부여하는듯 했다.

림연은 그 자료들을 받아가지고 문을 나섰다.

 

3

 

학교 맞은편 강녘의 나지막한 둔덕우에 자그마한 단층집이 하나 보인다. 열어제낀 그 집 출입문앞에서 남철이가 시료탕크의 용액을 흥심없이 젓고있다.

림연은 웃으며 그에게 다가섰다.

《남철동문 밤낮 게으름만 부리더니 오늘은 벌을 받은 모양이군요.》

남철은 그 말에 신경질적으로 일손을 멈추고 돌아섰다.

《선생님은 절 조롱하는겁니까? 난 다만 연구사동지를 위해 할수 있는 마지막일을 할뿐입니다.》

《남철인 아주 나쁜 사람이예요.》

림연은 남철의 흡뜬 눈을 심각하게 마주보았다.

《그래요. 그 연구사업이 그렇게도 마음에 없다면 손을 떼세요. 대신 내가 연구사일을 돕지요.》

남철의 비위적거리는 말소리가 들린다.

《그럼 선생님은… 알만합니다. 이 먹이풀연구가 중요하니 조수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거지요?》

《먹이풀연구는 그것으로서 중요한 사업이 아닐가요. 설사 성공된 연구라도 조국을 위해 5점짜리 풀을 만들겠다는 그 정신이 얼마나 훌륭한것이예요.》

그랬다. 그것은 림연이 하고싶었던 말이다. 언제부터 그의 가슴속에 고이고고였던것의 터침이다.

《그렇기때문에 난 연구사동무의 그 피타는 노력에는 만점을 주고싶어요. 도대체 그 사람이 무슨 자기 개인일을 하는 사람인가요?》

림연의 진지하고 타매적인 태도에 남철의 얼굴은 벌겋게 타올랐다. 이어 꺼먼 숯으로 변했다.

《선생님은 그 풀에 대해서 얼마나 알아요. 이 고원지대에 대해선 얼마나 알고요?》

그의 눈엔 그 어떤 원망이 가득 고여오르는듯 했다.

《〈ㅈ〉풀은 습한것을 제일 싫어하는데 이 고원지대는 바로 습지대란 말입니다. 이런 조건에서 그 풀을 재배했다는 자료는 어디에도 없어요. 그 어느 나라에도 없단 말이예요!》

그 말이 림연의 가슴엔 빈구멍을 내는것처럼 들렸다. 사실 림연은 이제 며칠후에 있게 될 봄철등산때 학생들에게 《ㅈ》풀을 보여주고 그에 대한 해설을 부탁하려고 진학을 찾아왔었다.

《나도 며칠전에야 여기 토양조사를 다시 해보며 알게 되였어요. 그런데 연구사동진 이미 알고있었지요. 안되는줄 알면서도 모지름을 쓴단 말입니다.》

드디여 림연의 가슴벽이 허물어져내려앉았다.

《연구산 어데… 어데 있어요?》

림연은 돌아섰다. 그리고는 걸음을 내짚었다.

세룡포의 물줄기는 삼각봉의 계곡들에서 시작된다. 림연은 그 물흐름을 따라 걸었다.

개울가의 듬직한 선바위옆에 천막이 보였다. 천막주위에선 전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림연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천막에 들어섰다. 안은 비여있었다.

림연은 진학의 체취가 느껴지는 방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상우에 놓인 기름등잔, 축산학에 관한 책들과 잡지들, 그옆에 두툼한 학습장이 보인다. 바닥에는 불에 끄슬린 남비와 그릇들이 놓여있었다.

림연은 호― 하고 가느다란 숨을 내쉬였다. 그는 무심히 상앞으로 다가가 두툼한 학습장을 펼쳐보았다. 짚이는대로 첫줄을 읽자 대뜸 일기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림연은 자신의 그 행동이 례의에 어긋나는 불손한것임을 의식하지 못했다. 지금 그의 눈과 마음은 숭엄하고 값높은 세계속으로 달려가고있었다.

 

4월 ×일 날씨 흐림

수령님, 여긴 지금 찬비가 내립니다. 어두운 밤길을 걸으며 수령님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인민들에게 풍족한 생활을 마련해주시기 위해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모든것을 다 바쳐오신 수령님의 자애로운 모습을 그려보게 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 마음은 못견디게 수령님이 그립고그립습니다.

4월이여서 그런지 저도 평양에 가고싶습니다. 그리움은 하늘같고 걸음은 단숨에 달려가고있지만 정말 갈수가 없습니다.

전 아직 이 방목지에 《ㅈ》풀을 키워내지 못했습니다. 수령님께서 이 풀이 풀먹는 짐승들에게 아주 좋다고, 빨리 우리 나라 산과 들에 번식시키자고 하신 그 유훈을 전 아직도 관철하지 못하였습니다.

안타깝습니다. 곳곳에서 그 풀이 무성해질 때 여기서만은… 왜서 이 땅은 이토록 모질단 말입니까. 수령님께서 그 유훈을 남기신 때로부터 너무도 오랜 세월이 흐르니 이젠 더 미여질 가슴이 없습니다. 할수만 있다면 그것을 위해 한줌의 거름이라도 되고싶습니다. 그래서 그 풀이 이 땅에 만발하고 이 땅이 풍요해진다면 아… 그날에는 수령님 계시는 만수대언덕으로 달려가고싶습니다.…

 

4월 ×일 날씨 개임

과연 이 몸이 어버이수령님의 그 뜻을 받들어나갈수 있는지. 우리 장군님께서 그토록 마음쓰시는 인민생활문제의 한 고리를 정말로 풀어드릴수 있는지…

기어코 해야 한다. 추호의 동요도 없이 난관을 뚫고 오직 앞으로만 나가야 한다. 이제 한가지, 《ㅈ》풀과 노랑개자리와의 교잡!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이… 그 누가 부정하고 반대하고 가로막아도 그 시간속으로만 달음치리라. 그래서 경애하는 장군님께 기쁨을 드리리라!…

 

림연은 머리를 숙이고 두손을 맞잡은채 천천히 물흐름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심장이 가슴을 뚫고나와 그 열렬한 세계에 뛰여든것 같은 느낌이였다. 림연은 과연 이런 인간의 충직한 그 마음을 무엇으로 보아왔던가.

림연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황홀한 눈길로 울창한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진학동무우―》

격정에 찬 그 녀자의 웨침소리가 길게 울리며 산골짜기로 메아리쳐갔다.

림연은 그만 걸음을 멈추었다. 시험포전에서 쓰러진 진학을 잡아흔드는 남철이를 보았던것이다.

검고 거칠고 훌쭉하게 꺼진 볼, 그 볼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줄기.

《연구사동지, 왜 이래요. 예? 눈을 뜨라요. 눈을…》

《진학동무!》

애타는 목소리들에 진학의 눈까풀이 소스라치듯 들렸다.

《물을… 주오.》

남철이 천막안으로 달려가 고뿌에 물을 떠왔다.

《난… 성공했소.》

진학은 남철이와 림연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림연은 그의 지치고 피로한 모습을 아픈 눈으로 바라보면서 꾸짖듯이 물었다.

《그 연구가 말이예요?》

《그렇소.》

진학은 반쯤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엔 소낙비 온 뒤의 무지개와 같은 신비한 광채가 흘렀다.

림연은 그 눈빛이 그의 심장속 깊은 곳에서 비쳐나오고있음을 의심치 않았다.

처녀의 심장도 후두두 떨렸다. 정녕 성공했단 말인가?

남철이가 두터운 확대경을 들고 조심스럽게 포전으로 다가갔다. 보드라운 토양속을 헤치며 그의 눈길은 깐깐히 그 어떤 흔적을 찾아헤맨다. 이윽고 그의 눈길이 들렸다.

《연구사동지…》

남철이가 큼직한 눈물방울을 떨구며 흐느낀다.…

감빛노을이 곱게 물든 저녁이다. 진학은 천막안에서 그냥 잠에 들어있다. 남철은 한동안 천막안에 있더니 기타를 메고 나와 시험포전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림연은 모닥불을 피우고 그들의 밥을 짓고있다.

노을은 점점 붉어진다.

정서적이고 폭이 짙은 화음… 노래의 매력적인 전주가 림연의 마음을 파고 곡진하게 흘러든다.

 

그대가 한그루 나무라며는

 

염소떼들이 먹이를 찾아 구름처럼 밀려나가는 이른아침, 림연은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풀판으로 나온다. 세룡천에서는 흰 물안개가 춤추듯 피여오르고 구름 한점없는 산뜻한 하늘에서는 산새들의 지저귐소리가 들린다.

림연은 향기로운 액체마냥 페부깊이 스며드는 아침공기를 마시며 명상에 잠겨 강가로, 풀판으로 걸어간다.

목장지구는 약동과 활기로 차넘친다. 자꾸만 불어나는 염소떼, 토끼풀을 뜯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손풍금을 메고 강가에 모여앉는 소년들, 갈아번진 땅에 감자파종을 하는 녀인들, 현대적인 설계로 건설된 젖가공공장… 난관을 떠밀치고 힘차게 일떠서는 조국의 모습, 거세차고 용감하게 앞으로 내닫는 조국의 숨결…

흙이 되여 뿌리 덮어주리라

 

이제 이 습지대에도 《ㅈ》풀이 진짜로 움트고 왕성하게 자라오르리라.

매혹적인 선률속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곳. 사람들이여, 그날을 기다리라. 연풀빛의 수림은 점점이 진한 검록색으로 변해간다. 림연은 그들의 밥을 짓는다.

 

×

 

며칠후 점심때 학교에서 돌아오던 림연은 길가에서 남철이가 헤덤비며 소리쳐부르는것을 들었다.

《선생님, 웬 할머니가 왔어요. 곱게 생긴 할머니가 림선생님을 찾아왔어요.》

방에 들어선 림연은 《곱게 생긴 할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기어이 먼길을 오고야만것이였다.

모녀는 뜨겁게 포옹하였다.

《원 자식두, 넌 끝내 이 에밀 끌어냈구나.》

《엄마…》

깊은 밤, 달빛은 초조하게 산천을 비친다.

따스한 해빛에 즙을 모으고 고운 청을 합치던 숲의 생명들은 모두 단잠에 들었다. 바위돌을 어루쓰는 열성스러운 강물만이 이밤도 웅글고 우렁찬 소리를 내며 쉼없이 줄기차게 흘러간다.

처녀는 밤길에 나섰다.

《동…무…는…》

처녀는 징검돌 3개를 쉽게 내짚었다. 다음 5개가 남았다. 이제 무슨 말로 맞추어 물을 건늘가 하고 처녀는 생각했다.

건너편 강녘에서는 이 방목지를 떠나가는 진학의 발걸음소리가 들린다.

림연은 안타까왔다. 그는 정말 떠나야 한단 말인가. 성공의 열매를 두고 그는 이제 어느 산, 어느 험한 곳에서 또 찬비와 눈바람을 맞으며 조국을 위한 헌신의 자욱을 새기려는걸가.

림연은 끝내 그 나머지돌들을 그냥 뛰여건느고 말았다.

《진학동무.》

진학은 그 부름에 몸을 돌렸다. 물에 담긴 별들이 두 청춘을 시샘하며 바라본다.

둘은 나란히 걸었다.

《동문 대체 어떤 처녀를 생각해요?》

림연이 별안간 물었다.

《글쎄… 우리 나라엔 얼마나 훌륭한 처녀들이 많소.…》

너무도 일반적인 그 대답에 림연은 머리를 저었다.

《난… 한 남자를 사랑하고싶어요. 나의 모든것을 다 바쳐…》

림연은 수집게 그러나 대담하게 말했다.

《헌신적인 사랑이구만.》

진학은 웃고있었다.

열렬하고 사색에 불타는 두눈, 친근하게 마음을 파고드는 미소… 아, 이 사람은 모른단 말인가.

《그 사람은…》

림연은 한동안 흐르는 별무리를 바라보았다.

《나에게 애국으로 가는 다리를 놓아주었어요!》

진학은 말이 없었다.

림연은 분명 심장이 높뛰는 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에 처녀는 깨여났다. 꿈이였다.

봄밤은 짙어 어느덧 새벽의 고요가 주위를 감돈다.

림연은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 처녀의 꿈을 고이 지키던 바람이 응석을 부리며 그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림연은 생각에 잠겼다.

나도 진학동무처럼 살리라. 그러면 조국을 받드는 나의 마음은 수림속의 거창한 아름드리나무처럼 억세게 자라리라.

그렇게 자라난 마음으로 어머니 나의 조국을 열렬히 사랑하리라.…

《왜 일어났니?》

어머니의 잠기잃은 목소리가 들린다.

림연은 그냥 밖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퍼그나 후, 《어머니, 난… 정말 행복해요.》 하고 림연은 너무도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그 말속에 자신의 앞날까지 깡그리 포함시켰다.

날이 밝아오며 드넓은 초원과 울창한 수림이 그의 눈에 안겨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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