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3(2014)년 10월 13일 로동신문

 

부전령일대에 타오른 조국해방을 위한 전민항쟁의 불길

신흥지구 혁명전적지를 찾아서(1)

 

백두산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치고있는 오늘 신흥지구 혁명전적지를 찾는 답사자들의 수는 날을 따라 늘어나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백두의 밀림에서 타오른 혁명정신은 이 땅에서 대를 이어가며 빛을 뿌릴 가장 고귀한 재부이며 우리 민족의 무궁한 번영을 담보하는 불멸의 기치입니다.》

부전령일대의 넓은 지역에 분포되여있는 신흥지구 혁명전적지에는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혈전만리를 헤쳐오신 어버이수령님과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의 불멸의 혁명업적이 뜨겁게 깃들어있으며 백두의 혈통을 굳건히 계승발전시키기 위하여 걸으신 위대한 장군님의 거룩한 발자취가 어리여있다.

얼마전 신흥지구의 혁명전적지들을 찾았던 우리는 답사자들과 함께 항일의 나날 백두산위인들께서 헤쳐가신 사연깊은 길을 걸으며 주체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완성할 굳은 결의를 다지였다.

 

총검의 숲을 헤치고 국내에 진출하시여

 

신흥읍에서 북쪽으로 뻗은 길을 따라 30여리 가느라면 독산이라고 불리우는 산이 솟아있다.

소나무, 잣나무, 봇나무 등이 숲을 이룬 그 산기슭에 신흥지구 혁명전적지분포도가 세워져있었다.

우리를 맞이한 강사 박수정동무가 분포도에 대한 해설을 시작하였다.

신흥지구 혁명전적지분포도는 항일무장투쟁시기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김정숙동지께서 국내인민들을 전민항쟁에로 불러일으키시기 위하여 여러차례 진출하신 혁명활동로정을 종합적으로 보여주고있었다.

신흥지구 비밀근거지에는 뒤덕봉밀영, 백역산밀영, 고대산밀영, 동오골밀영을 비롯한 여러개의 밀영들이 있다. 신흥지구 비밀근거지는 동해안일대의 혁명운동전반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유일적령도를 실현하는 지역적령도거점이였고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의 작전기지, 활동기지, 후방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때를 회고하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신흥지구 비밀근거지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때문에 자신께서는 1937년과 1938년에 신흥지구에 직접 갔다왔으며 그무렵에 김정숙동무를 비롯한 유능한 정치공작원들을 자주 파견하군 하였다고 교시하시였다.

주체90(2001)년 5월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신흥지구 혁명전적지를 찾으시였다.

아침해도 뜨기 전에 신흥지구 혁명전적지분포도앞에 이르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항일의 나날 총검의 숲을 헤치시고 국내깊이에로 진출하시였던 어버이수령님과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의 모습을 그려보시며 깊은 사색에 잠겨계시였다.

신흥지구는 자연지리적으로 보나 주민구성으로 보나 전민항쟁준비를 본격적으로 다그치는데서 매우 중요한 곳이였다. 더우기 우리 나라 로동계급이 집중되여있고 일제의 군수산업중심지인 함흥, 흥남을 끼고있기때문에 이 지역을 혁명화하는것이 절박한 문제로 나섰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으로부터 신흥지구 비밀근거지를 튼튼히 꾸리고 당 및 조국광복회조직을 확대할데 대한 임무를 받으시고 주체26(1937)년 8월 신흥지구진출의 길에 오르시였다.

그때로 말하면 김정숙동지께서 도천리에서 적들에게 체포되시여 당한 악형으로 불편하신 몸이였다.

강사는 김정숙동지께서 불편한 몸으로 얼마나 높고 험한 령을 넘으시였는가 하는것을 신흥군 영웅리에 있는 금패령의 유래를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고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옛날 한 암행어사가 함경도일대에 대한 순찰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던 길에 이 령을 넘게 되였다고 한다. 령이 어찌나 높고 험했던지 길을 잃고 초기를 만나 쓰러졌던 그는 산나물을 뜯으러 왔던 한 녀인의 도움으로 원기를 회복하고 서울로 가게 되였다. 암행어사로부터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다시는 사람들이 그 령을 넘어다니지 않도록 하라는 어명을 새긴 패쪽을 박게 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의 통행을 금한다는 패쪽이 박혀진 령이라고 하여 금패령으로 불리워오는 령, 100리안팎이 무인지경이고 대낮에도 맹수들이 울부짖는 그 험한 령을 녀성의 몸으로 넘으신 김정숙동지이시였다.

강사는 항일의 나날 위대한 수령님께서 세차례나 신흥지구에 진출하시였다고 하면서 해설을 계속하였다.

김정숙동지께서 다녀가신지 한달후인 주체26(1937)년 9월 부전령을 넘어 신흥지구에 나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영광군에 있는 신흥탄광 1갱앞에서 탄부들과 허물없이 이야기도 나누시고 삼밭산회의도 지도하시였다.

다음해 8월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혜산사건의 후과로 파괴된 혁명조직을 복구하며 무장투쟁을 계속 앙양에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또다시 신흥지구에로 나오시였다.

부전령비밀근거지의 옥련산밀영과 신흥지구 비밀근거지의 백역산밀영을 지나 뒤덕봉밀영에 나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장골회의를 지도하신 후 신흥군 부연리에 있는 오봉산밀영을 거쳐 양덕으로 나가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세번째로 신흥지구에 진출하신것은 주체32(1943)년 2월이였다.

후치령비밀근거지를 거쳐 신흥지구 비밀근거지의 두무봉밀영에 이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곳에서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들과 소부대, 지하혁명조직책임자들의 회의를 소집하시고 조국해방3대로선을 다시금 천명하시였으며 신흥인민무장대의 훈련도 지도해주시였다.

이처럼 항일혁명전쟁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신흥지구 비밀근거지에서는 많은 혁명유적, 유물들과 구호나무들이 발굴되였다.

13년전의 그날 신흥지구 혁명전적지를 돌아보시면서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우리 수령님은 조국의 해방과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혈전만리를 헤쳐오시며 온갖 시련과 난관을 다 겪으신 전설적영웅, 절세의 애국자이시라고 하시면서 수령님의 불멸의 혁명업적은 천만년세월이 흘러도 우리 인민의 가슴속에 간직되여있을것이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신흥지구 혁명전적지분포도앞에서 종합해설을 들은 우리는 장골혁명전적지로 향하였다.

 

자주의 기치를 더 높이 추켜든 장골회의

 

독산에서 왼쪽으로 뻗은 길은 깊은 골짜기를 굽이굽이 에돌며 부전령마루로 이어져있었다.

골짜기가 하도 길어 장골로 불리운다는 곳이였다.

부전령에서는 찬바람이 내리불어오고 키높이 자란 아름드리나무들이 울창한 수림을 이루고있어 해빛조차 제대로 스며들지 못하였다.

락엽이 드문드문 밟히는 길을 따라 20여리 올라가니 장골혁명전적지가 있었다.

우리의 눈앞에는 력사적인 장골회의를 지도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모습을 형상한 미술작품이 안겨왔다. 오른손을 높이 드시고 열정에 넘쳐 연설하시는 20대청년장군의 영상을 우러를수록 가슴은 절세의 위인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으로 설레였다.

우리는 청진광산금속대학 학생들과 함께 전적지를 돌아보았다.

강사 리남희동무가 안내하였다. 몇해전 혁명전적지구역의 산림감독원을 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자 그의 동생도 언니처럼 혁명전적지강사가 되였다고 동행한 일군이 말하였다.

백두의 혁명전통을 빛내이는 길에 모든것을 바쳐갈 소중한 꿈을 안고 깨끗한 량심의 자욱을 새겨가는 그들의 정신세계에 감동을 금할수 없었다.

숲속의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니 너럭바위들이 드문드문 박힌 펑퍼짐한 언덕이 나졌다. 그곳에서 위대한 수령님의 지도밑에 주체27(1938)년 8월 장골회의가 진행되였다.

회의에는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들과 소부대, 지하혁명조직책임자들이 참가하였다고 하면서 강사는 해설을 계속하였다.

회의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혁명에서 자주적립장을 철저히 고수하고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을 하루빨리 앞당길데 대한 력사적인 연설을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연설에서 혜산사건의 후과로 혁명조직들이 파괴되고 일제침략자들이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토벌》을 그 어느때보다 강화하고있는데다가 국제당에서 열하원정을 강요하고있는 정세를 분석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이런 정세속에서 우리 혁명을 계속 앙양에로 이끌어올리자면 자주적립장을 확고히 견지해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선혁명의 주인은 우리자신이며 그 어떤 시련과 난관속에서도 조선사람자체의 힘으로 조국해방을 이룩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러자면 무장투쟁을 국내깊이에로 계속 확대해나가는것과 함께 전민을 반일민족통일전선에 묶어세워 국내 여러 지역에서 반군사조직들을 결성해야 한다고 가르치시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을 강화하는것과 함께 전민항쟁의 불길이 온 강토에 타번질 때 반드시 조국해방위업이 성취된다고 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확신에 넘치신 음성이 무성한 숲의 설레임소리에 실려오는듯싶었다.

참으로 장골회의는 우리 인민자체의 힘으로 조국해방을 이룩할수 있는 뚜렷한 길을 밝혀준 력사적인 회의였다.

절세의 위인들을 높이 모시여 항일혁명의 첫 시기부터 높이 추켜든 주체의 기치, 자주의 기치가 강성국가건설투쟁이 힘차게 벌어지는 오늘도 변함없이 휘날리고있는데 대한 긍지와 자부로 답사자들의 가슴은 설레였다.

강사는 회의장주변에서 10여점의 구호문헌들이 발굴되였다고 하면서 답사자들을 안내하였다.

《광복의 길, 자주적립장고수, 항일무장투쟁국내확대, 반일애국력단합, 국내지하조직확대》라고 씌여진 구호문헌은 력사적인 장골회의정신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금일회합에서 다진 맹세 변치 말자》, 《오늘을 영원히 잊지 말자 1938. 8》을 비롯한 여러 구호문헌을 통해서도 회의참가자들의 격동된 심정을 잘 알수 있었다.

청진광산금속대학 학생 정혁동무는 장골혁명전적지를 돌아본 소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주체의 기치밑에 혁명발전의 매 시기, 매 단계마다 자주적대를 굳건히 세워 백전백승을 안아오신 어버이수령님의 위대성을 깊이 체득하였습니다. 오늘도 자주의 기치, 선군의 기치를 변함없이 높이 드시고 조선을 이끄시는 경애하는 원수님의 령도를 충직하게 받들어갈 결심이 백배해집니다.》

 

붉은기 휘날리는 뒤덕봉마루에 올라

 

골짜기를 따라 뻗어간 경사급한 길을 따라 우리는 걸음을 다그쳤다.

산중턱에서부터 흐르던 안개는 산마루에 오를수록 더욱 짙어 몇걸음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옷자락은 물기를 머금어 눅눅해졌고 머리카락끝에 매달린 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져내렸다.

마을뒤에 있는 덕에 솟은 봉우리라는 의미에서 뒤덕봉으로 불리우는 1 200m를 넘는 산마루에 이르니 갈림길이 나졌다. 오른쪽으로 20리정도 가면 바른골혁명전적지이고 왼쪽으로 600m정도 떨어진 곳에 뒤덕봉밀영이 자리잡고있었다.

우리는 함경남도혁명사적부문 일군들과 함께 밀영을 돌아보았다.

강사 김신향동무가 소부대활동정형을 료해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모습을 형상한 미술작품앞으로 답사대오를 이끌었다.

검은색의 닫긴깃양복을 입으시고 소부대성원들이 따올린 조국의 머루, 다래를 맛보시며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모습을 우러르는 답사자들의 얼굴마다에는 다함없는 경모의 정이 어려있었다.

뒤덕봉밀영은 신흥지구 비밀근거지의 중심밀영이라고 하면서 강사는 해설을 계속하였다. 이 일대는 밀영으로서 아주 유리한 곳이다. 량옆은 반원형으로 산들이 둘러막혀있고 뒤에는 부전고원이 펼쳐져있어 유격활동에 매우 유리하였다. 또 앞은 낭떠러지여서 사람들이 발붙이기 힘든 곳이였다.

강사의 안내를 받으며 경사급한 오솔길을 따라 조금 아래로 내려가니 붉은기 휘날리는 귀틀집이 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항일의 나날 두차례 나오시여 사업하신 귀틀집이였다. 그 귀틀집자리는 김정숙동지께서 몸소 잡아주시였다. 원래 이 골안은 늘 안개가 끼고 흐려있다고 해서 흐리골이라고 불리웠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여기서도 해가 제일 잘 비치는 동남쪽에 사령부위치를 정해주시였다. 참나무만 꽉 들어차있는 이 일대에서 흔치 않은 이깔나무를 멀리서 날라다가 껍질을 벗기고 정히 다듬어서 귀틀을 맞춰 벽체를 쌓은것을 보아도, 분비나무껍질을 한장한장 펴서 지붕을 씌우고 바람에 날려가지 않게 돌로 짓눌러놓은것을 보아도 소부대성원들의 성의를 뜨겁게 느낄수 있었다.

노전이 깔린 방안에 놓여있는 애기호박만 한 주전자며 벼루, 라침판 등을 바라보느라니 소부대성원들에게 로동자돌격대, 생산유격대와 같은 반군사조직들을 결성하여 전민항쟁의 돌파구를 열어나가야 한다고 하시던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이 귀전에 들려오는듯싶었다.

사령부귀틀집에서 50m정도 떨어진 곳에 김정숙동지께서 사업하신 집이 있었다.

주체26(1937)년 8월 이곳에 오신 김정숙동지께서는 소부대성원들에게 사령관동지께서 이 부전령산줄기를 타고앉아 무장투쟁을 국내깊이에로 확대발전시킬 웅대한 구상을 하고계신다고 하시면서 장군님의 깊은 뜻을 명심하고 신흥지구 비밀근거지를 동해안일대를 장악하기 위한 전초선으로 잘 꾸려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귀틀집의 부엌당반에는 밥그릇과 밥주걱, 사기단지, 병 등이 놓여있었고 부뚜막에는 쇠가마가 걸려있었다. 혁명사적발굴과정에 찾아낸 가마였다. 가마를 엎어놓고 그밑에 밥사발과 밥주걱같은것을 넣어두었는데 하도 오랜 세월이 흐르다보니 서로 얽힌 나무뿌리를 도끼로 토막친 다음 꺼냈다고 강사는 말하였다.

뒤덕봉밀영에서 대원실자리들과 감시초소자리, 샘물터, 20여점의 구호문헌들이 발굴되여 원상대로 보존되여있었다.

우리는 사령부귀틀집 지붕우에서 힘차게 나붓기는 붉은기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밑에 조국의 해방을 위해 청춘도 생명도 다 바쳐싸운 혁명선렬들이 높이 들었던 주체의 붉은기, 그 기발을 변함없이 추켜들고 대를 이어 백두의 행군길을 꿋꿋이 걸어갈 맹세가 답사자들의 심장속에서 용암처럼 끓고있었다.

 

글 본사기자 김 승 표

사진 본사기자 김 광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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