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2(2013)년 1월 3일 《우리 민족끼리》

력사상식

《명치유신》

1868년 일본에서 수행된 불철저한 부르죠아혁명이다. 이해에 봉건적도꾸가와막부통치가 뒤집혀지고 군사봉건적인 일본이 자본주의길에 들어선것을 말한다.

《명치유신》은 도꾸가와(에도)막부통치말기에 앙양된 인민들의 계급투쟁을 력사적배경으로 하여 일어났다. 18세기부터 일본의 봉건사회태내에서 자라난 자본주의적관계는 막부통치의 경제적기초를 무너뜨리기 시작하였으며 인민생활을 더욱 령락시켰다.

그리하여 1864년~1866년에 효고를 비롯한 일본 각지에서 막부의 봉건적착취를 반대하는 농민들과 도시빈민들의 폭동이 일어났다. 1867년 쵸슈, 사쯔마번은 이 기회를 리용하여 자기 군대를 교또에 진출시키고 도꾸가와막부의 마지막장군 요시노브에게 정권을 《천황》에게 넘겨줄것을 강요하였다. 인민들의 투쟁과 반막부파의 공세에서 타격을 받은 요시노브는 그해 10월 중순 할수없이 반막부파에 굴복하고 그 요구를 듣지 않을수 없었다.

1868년 1월 3일 반막부파는 《천황》의 이름으로 도꾸가와막부의 페지와 《천황》정권의 수립(《왕정복고》)을 선포하였다. 반막부파군은 1868년 4월 에도(도꾜. 1869년 3월 새 정권의 수도로 제정)를 점령하고 다음해 5월까지는 동북지방과 혹가이도를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명치《천황》을 우두머리로 하는 지주, 부르죠아정권-《천황》제절대주의정권은 전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천황》정권은 그 계급적바탕으로 하여 봉건제도를 철저히 청산하지 않고 다만 그것을 자본주의발전에 적응시키는 방향에서 부르죠아개혁을 실시하였다.

《천황》정권은 종전의 지방분권적인 번을 없애고 부, 현을 설치(《페번치현》)함으로써 중앙집권적통치체제를 강화하였으며 중앙관제의 개혁을 실시하고 군사관료들로 내각을 만들었다.

《천황》정권은 또한 인민탄압과 해외침략을 강화하기 위하여 징병제를 실시하고 근대적인 상비군을 조직하였다. 그후 《군부대신현역무관제》가 실시되고 《천황》에게만 직속된 참모본부가 조직됨으로써 군부세력은 정부의 대내외정책을 좌지우지하고 극악한 군국주의지배체계가 수립되였다.

《천황》정권은 자본주의발전에 적응할수 있도록 봉건적토지소유제를 반봉건적토지소유제로 개편하고 중세기적인 조합과 국내관세를 페지하였으며 자본주의적교육제도를 도입하였다.

《사, 농, 공, 상》의 중세기적신분제도는 형식상 《페지》되였을뿐 신분적불평등은 그대로 존속되였다. 막부통치시기의 봉건지배계급은 문벌대신에 공, 후, 백, 자, 남의 작위를 받았으며 자기가 모아둔 화페재산과 이전에 소유한 광산과 산림 및 토지의 일부를 그대로 가짐으로써 대지주로 혹은 부르죠아지로 되였다.

이와 같이 《명치유신》은 일본의 미약한 신흥부르죠아지들이 일부 봉건들과의 타협밑에 봉건적관계를 다분히 보존하면서 그것을 자본주의발전에 적응시킨 중도반단적인 불철저한 부르죠아혁명이였다. 그것은 인민대중에게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았으며 다만 일본이 군사봉건적자본주의로 나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뒤늦게 자본주의발전의 길에 들어선 일본은 군사봉건적침략성과 함께 강도적략탈성과 비길데없는 교활성을 가졌다.

《명치유신》후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국내에서 파쑈적탄압을 강화하는 한편 큰놈을 등에 업고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나라들에 대한 발광적인 침략에 매여달림으로써 일본인민뿐아니라 조선인민과 아시아인민에게 커다란 재난과 불행을 들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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