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은 고구려의 옛 도읍지로서 1 500여년의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는 유서깊은 도시이다.
오늘 평양에는 고구려의 옛 수도성이였던 평양성이 국보유적 제1호로 보존되여있다.

원래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갓 옮겨왔을 때의 위치는 대성산성과 안학궁을 포괄하는 일대였다.
고구려는 국력이 강성해짐에 따라 수도를 외래침략자들로부터 더 잘 지켜내기 위하여 552~586년사이에 평양성을 쌓고 현재의 성안으로 다시 옮겼다.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유리한 지대에 평지성의 우점과 산성의 우점을 종합하여 평산성형식으로 쌓은 평양성의 둘레는 약 16㎞였으며 성벽의 총연장길이는 약 23㎞에 달하였다.
고구려가 한창 번성하던 시기 수도의 주민호수는 21만 508호에 달하였는데 이 수자는 호당인구를 5명정도로만 보아도 평양이 인구 100여만수준의 대도시였다는것을 말하여준다.
중세기초에 세계적으로도 이만한 대규모도시는 매우 드물었다.
평양성은 금수산과 그 남쪽의 평지를 둘러막아 쌓았다.
그 바깥성벽은 금수산의 모란봉(최승대가 있는 봉우리)을 북쪽끝으로 하고 을밀봉(을밀대), 만수대의 마루를 타고 내려가면서 보통강안을 따라 서남쪽으로 뻗었다.

그리고 대동강과 보통강의 합수목에 이르러 방향을 바꾸어 동북쪽으로 대동강을 거슬러올라가 대동문, 청류벽을 타고 전금문, 부벽루를 지나 다시 모란봉에 이르렀다.
평양성안은 내성, 중성, 외성, 북성의 4개 부분성으로 나누었으며 북성에는 철성을 붙였다.
고고학적유물과 옛 기록에 의하면 내성은 만수대언덕과 그 남쪽 대동문을 포괄하는 평지대를 차지하였는데 여기에는 궁전들이 있었다.
중성은 보통문과 오늘의 중성동일대를 차지하였는데 여기에는 고구려 중앙정부의 관청들이 자리잡고있었다.
외성은 오늘의 중앙우편국계선의 남쪽으로부터 평천구역일대를 차지하였는데 이곳은 주민지대로 되여있었다.
북성은 을밀대와 최승대사이를 차지하였는데 여기에는 영명사 등 절을 두고 궁성(내성)의 북방방위시설들을 두었다.
철성은 모란봉에서 북으로 무봉을 감싸면서 120m가량 내쌓았다.
성벽은 산지대에서는 돌성벽을 쌓고 평지대에서는 돌과 흙을 섞어 쌓았다.
성벽밖에는 일부 황을 파고 대동강과 보통강을 해자로 삼아 방어력을 높이였다.
성벽우에는 성가퀴를 쌓고 성벽의 곳곳에 치를 두었다.
평양성에는 크고작은 성문들을 두었는데 지금 남아있는 성문들인 대동문(내성의 동문), 칠성문(내성의 북문), 보통문(중성의 서문), 전금문(북성의 남문), 현무문(북성의 북문)은 당시의 모습을 돌이켜볼수 있게 한다.

지금까지 평양성에서는 성벽쌓기를 담당한 지방과 구간(길이), 감독자의 직위와 이름 등을 밝힌 글자를 새긴 고구려시기의 성돌 4개가 발견되였다.
평양성과 같이 고구려인민들이 창조한 평산성형식의 대규모수도성은 이후 우리 나라 봉건도성들의 전형으로 널리 전습되여왔다.
평양성은 축성이래 성을 지켜싸운 우리 인민들의 수많은 투쟁이야기를 전해주고있다.
특히 왜적들을 쳐물리치기 위한 임진조국전쟁시기 우리 군민이 발휘한 무훈담은 오늘도 우리들의 마음을 뜨겁게 울려주고있다.
적들에게 일시 강점되였던 평양성탈환전투때 김응서를 도와 적장 소서비의 목을 베도록 하고 최후를 마친 계월향의 의로운 장거, 수천의 승군을 이끌고 평양성탈환전투에 달려온 서산대사의 애국적소행 등은 다 이때의 이야기이다.
또한 평양성을 지켜싸울 때 대동문과 전금문을 드나들면서 강건너 왜적을 기습소탕한 우리 군사들의 용감성, 모란봉일대에 허수아비를 많이 세워놓아 대병력이 있듯이 기만하여 적들을 혼란에 빠뜨린 우리 군사들의 지혜 등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있다.
선조들의 슬기와 재능, 애국의 넋이 깃들어있는 평양성은 오랜 력사의 증견자인양 오늘도 그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고있다.
본사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