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식

 

비단길의 첫 출발지는 평양

 

세계력사와 세계문명문화발달사에 있어서 《비단길》(Silk Road)은 자못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다.

지금까지 《비단길》은 중국의 서안으로부터 란주, 감주, 숙주, 돈황을 거쳐 다림분지를 아래우를 건너 빠미르고원을 지나가고 사마르칸드로부터 테헤란에서 바그다드쪽으로 가는것으로 알고있었다.

알려진 자료에 의하면 《비단길》의 첫 출발지는 황하류역이 아니라 대동강류역의 평양이였다. 평양, 심양, 음산산맥, 돈황, 다림분지, 빠미르고원, 사마르칸드에로의 길이 그것이다.

이 길은 지금까지 상상해오던 교통로와는 다른 로정이였다. 특히 돈황까지의 교통로는 만리장성을 에돌아 사막이나 초원지대를 지나가는 길이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에 의하면 돈황까지의 《비단길》을 개척한것은 고구려사람들이였다.

《비단길》의 중계도시로 유명한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드에는 거의 뷸균형적인 삼각형모양에 네겹의 성벽을 둘러친 광대한 옛도성터가 있는데 이 옛도성터의 벽화에 고구려사신이 그려져있다.

벽화의 내용은 650~655년경의 사실을 반영하고있다.

두명의 고구려사신은 당나라 사신들처럼 선물을 들지 않았으며 외국사절단의 제일 마지막에 떨어져서 당나라와 차가니안사절들의 입절모습을 객관적으로 팔장끼고 방관하고있다는 인상이다.

벽화에 그려진 두명의 사신은 절풍이라고 부르는 머리쓰개, 고리자루칼 등 고구려복장을 그대로 착용하고 서있다.

두 사신은 무릎우까지 오는 널직한 누런색 웃저고리를 입고 허리를 검은 띠로 조이며 완만한 바지를 입었다. 바지는 발목부위가 좁아졌으며 발끝이 버선처럼 뾰족하게 올라갔다. 두손은 모두 손으로 읍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저고리부위는 벽화가 떨어져있어 분명치 않으나 앞부분 옷깃이 섶으로 되여있는것으로 보인다. 이 벽화와 꼭같은 모습을 한 인물은 고구려 집안 춤무덤(무용총), 룡강 쌍기둥무덤(쌍영총)등에서 볼수가 있다. 무릎가까이까지 오는 통소매의 긴웃저고리, 발목이 좁아진 바지, 버선모양의 짧은 신, 모두손을 하는 풍습 등은 고구려사람을 그대로 방불케 한다.

고구려는 이때 처음으로 중앙아시아쪽으로 사신을 파견한것이 아니였다. 《삼국사기》와 《수서》, 《구당서》등의 자료에 의하면 고구려는 일찍부터 중앙아시아지역에서 패권을 쥐고있던 돌궐과의 련계가 잦았다고 한다.

이렇게 고구려는 만리밖에 있는 돌궐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유력한 세력과 정상적인 련계를 취하였다. 따라서 고구려는 중앙아시아에로의 교통로를 확보하고있었다고 말할수 있다. 또한 그것은 중국을 거치지 않은 북방교통로였다. 왜 그렇게 말할수 있는가 하면 고구려는 비단수출과 함께 수나라를 비롯한 정치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서도 교통로를 많이 리용하였을것이기때문에 사막 및 초원지대를 통과한 독자적인 교통로였던것으로 보아진다.

고구려사람들이 개척하고 리용한 교통로는 정치외교적교섭과 함께 물물교역의 길이였다. 고구려의 발전된 비단과 인삼, 털가죽 등은 중국을 거치기도 하였지만 혹은 직접 《비단길》을 통하여 서역에로 전해오게 되였다. 그리고 고구려사신일행의 귀로때 《곤륜의 구슬》을 비롯한 희귀한 서역의 문물들이 말과 락타에 실려 조선에 알려지게 되였다.

이렇게 고구려사람들은 중앙아시아에로 직접 잇닿아있는 자기의 독특한 교통로를 적극 개척한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이였다. 그리하여 고구려사람들은 넓은 국제적시야에서 대내외사업을 추진시켜나갔으며 통이 크고 대담한 삼국통일정책을 실현시켜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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