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상식

 

문익점과 목화씨

 

목화라면 흔히 사람들은 문익점을 생각한다.

문익점은 고려말 다른 나라에서 처음으로 목화씨를 가져다 보급시킨 애국자이다.

문익점이 사신단의 한 성원으로 어느 한 나라에 갔을 때였다.

그는 그곳에 가있는 기간 늘 조국과 고국의 백성들을 생각하였으며 심한 더위속에서도 들판을 밟으면서 남방의 식물들을 열심히 관찰하였다. 그러던중 하루는 어느 밭에서 우연히 목화송이를 보게 되였다. 문익점은 그 밭에서 일하는 농부에게 물었다.

《옛날 시구절에서 목면꽃과 관련된것을 읽은바 있지만 이런 식물은 처음 보는데 옷감의 재료로는 어떠하오이까?》

목화를 부지런히 따던 농부는 일손을 놓고 대답하였다.

《저 한알을 심어 목화 백송이를 수확하니 그 리득은 말할것도 없고 추위를 막는데는 베나 비단에 가져다댈것이 아니지요.》

이 말을 들은 문익점은 깊이 생각되는바가 있었다.

(고국에서는 목화가 없어 추운 겨울에도 백성들이 베옷을 입고 떨지 않는가. 부자놈들은 누에고치실로 짠 비단옷을 입고있지만 백성들이야 그걸 생각이나 하는가. 목화씨를 가져다가 고국에 심으면 백성들의 생활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니 가슴은 기쁨으로 설레이였다. 그렇지만 이 일은 쉬운것이 아니였다.

당시 이 나라에서는 목화씨를 다른 나라에 가져가는것을 엄격히 단속하면서 만일 몰래 가져가다가 발각되면 엄벌을 받게 되여있었다.

그러나 조국을 사랑하고 백성들의 복리를 생각하던 문익점은 그것을 몰래 가져갈수 있는 방도를 찾아내였다. 그리하여 그는 실한 목화씨 10알을 붓대속에 감추어가지고 무사히 국경을 넘어 조국에 돌아올수 있었다.

그가 고국에 돌아올 때는 1364년경이였다.

문익점은 목화씨 10알중 절반은 자기가 심어가꾸고 절반은 장인 정천익에게 주어 심게 하였다. 그러나 재배법을 몰라 그랬는지 문익점이 심은 목화씨는 모두 죽고말았다.

다행히도 정천익이 심어가꾼데서 한알이 싹트고 살아나서 그해 가을 100여알의 목화씨를 얻게 되였다.

문익점은 그후 3년동안 온갖 신고를 다하여 재배한 결과 목화가 번성하여 꽃이 피고 솜이 달려 사방에서 구경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문익점은 목화재배의 유익성을 설명해주면서 목화씨를 그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다.

이리하여 목화재배는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다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전파되여 불과 몇년사이에 삼남지방에 보급되였다.

목화를 재배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지만 일단 수확한 목화송이에서 씨를 뽑아내고 솜을 다시 실로 뽑아 그것으로 천을 짜는 공정도 힘들고 품이 많이 드는 일이였다.

문익점과 그의 자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를 거듭한 결과 마침내 씨뽑는 기계인 씨아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하였다.

그후 문익점의 손자인 문래가 실을 뽑는 기구를 발명하였는데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붙이여 《문래》라고 하였다. 그리고 문래의 동생 문명이 천짜는 방법을 창안하여 널리 보급시켰다고 한다. 그러므로 솜으로 짠 천을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달아 《문명》이라고 하였다. 후에 《문래》는 《물레》로, 《문명》은 《무명》으로 불리우면서 우리 인민들이 널리 리용하였다. 목화의 보급과 재배, 리용에서 문익점과 그의 일가가 기울인 노력은 우리 인민들의 생활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문익점이 멀리 이국땅에서의 그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자기 나라 인민들의 생활에 리익이 될수 있는 작물을 유심히 관찰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그 씨앗을 가져다 퍼뜨린것은 그의 열렬한 애국심의 표현이다. 하기에 력사는 문익점을 애국자로 길이 전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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