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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 란
1135년에 중 묘청을 비롯한 서경량반관료들이 개경집권자들을 반대하여 일으킨 정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묘청의 란은 1135년에 서경지방 량반들이 일으킨 정변으로서 고려시기 량반통치배들사이에 벌어진 권력다툼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정변에 참가한 사람들의 지향과 요구에는 진보적인 측면도 있었습니다.》 1126년 리자겸일파가 제거된 후에도 계속된 금나라에 대한 개경집권자들의 사대외교정책은 인민들과 진보적인 량반들, 특히 서경량반들속에서 커다란 불만을 일으켰다. 묘청, 정지상, 백수한 등 서경출신량반들은 《건원칭제》 즉 자체의 년호를 제정하여 쓰며 왕을 황제라고 부름으로써 고려의 권위를 안팎에 떨쳐야 한다는 진취적인 구호를 들고 수도를 서경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미신적인 풍수지리설을 리용하여 개경은 수도로서의 지기(땅기운)가 쇠퇴하고 왕궁도 타버려 남은것이 없으나 서경에는 《왕의 기운》이 있으므로 서경에 수도를 정하고 좋은 자리에 왕궁을 지으면 금나라는 스스로 항복해올것이며 이웃 26개 나라도 복종시킬수 있다고 하였다. 이 주장은 당시 금나라의 압력에 굴종하던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집권자들에 대한 반항의 표시인 동시에 고구려의 옛 수도인 평양에 도읍을 옮김으로써 수도로서의 개경의 전통적권위를 거부하고 서경량반들이 정권을 잡을것을 노린것이였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여 서경 림원역자리에는 새 왕궁인 대화궁이 건설되고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한 사업도 점차 추진되여갔다. 그러나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량반들의 완강한 반대로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려는 기도가 실현되지 못하게 되자 묘청을 비롯한 서경출신량반들은 1135년 1월 서경에서 개경통치배들을 반대하는 정변을 일으켰다. 그들은 나라이름을 《대위》라고 선포하고 《천개》라는 년호를 제정하였으며 서북지방출신의 관리들로 국가기구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천견충의군》(하늘이 파견한 충성스럽고 의로운 군대)이라는 군사를 새로 편성하여 절령(자비령)에 파견하여 개경군을 막게 하였다. 개경통치배들은 김부식을 총지휘자로 한 3군을 조직하여 서경을 치도록 하였는데 개경군은 절령을 에돌아 안주로 진출하여 서경성을 포위하였다. 개경군의 진출과 위협에 겁을 먹은 정변지휘부안에서는 동요가 일어나고 분렬이 생겨 조광 등은 개경군과 끝까지 싸울것을 주장한 묘청, 안중영, 류감 등을 죽이고 항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광은 어차피 봉건정부의 징벌을 면할수 없으리라는것을 타산하였으며 항전을 계속하려는 서경군민의 충천한 투쟁기세에 고무되여 끝까지 싸울것을 결심하였다. 서경과 그 부근의 광범한 군민들은 정변지휘자들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처음부터 개경통치배들의 가혹한 억압과 착취를 반대하여 투쟁에 용감히 떨쳐나섰다. 이리하여 정변은 순전히 봉건통치배계급안에서의 정권쟁탈전으로 끝나지 않고 억압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으로 발전하게 되였다. 서경방어군은 선요문으로부터 다경루에 이르는 구간의 보통강연안에 1 730여간에 달하는 성을 새로 쌓고 철도(황주군)로부터 대동강을 따라 기여든 적의 함선 50척을 화공전술로써 격파하였다. 그후 서경군민들은 마탄 자포를 건너 개경군의 후군을 기습하여 수많은 적들을 소멸하였다. 그러나 개경군이 수적우세를 믿고 장기전을 꾀하는 조건에서 서경군민들은 식량난을 극복하기 어렵게 되였다. 이리하여 다음해 2월 서경방어군은 우세한 개경군과의 결전에서 패하고 마침내 그들의 투쟁은 진압당하고말았다. 서경군민들은 투쟁에 궐기한 후 만 1년동안 개경통치배들을 반대하여 용감히 싸웠다. 서경을 점령한 개경통치배들은 투쟁에 참가한 군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이 정변은 지배계급내부의 정권쟁탈전으로 시작되였으나 억압자, 착취자들을 반대하는 피압박인민대중이 적극 참가함으로써 농민전쟁의 성격을 띤 투쟁으로 발전하여 통치배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으며 12세기 후반기에 벌어진 대농민전쟁의 전주곡으로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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