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사  언

(1517ㅡ1584)

 

리조전반기의 시인, 명필. 자는 웅빙이고 호는 봉래, 완구, 창해, 해객이다. 돈녕주부 양희수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글공부에 열중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모르는것이 없어 비범한 인재라 하였다고 한다. 1546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후 자진하여 지방관으로 나가 평창군수, 강릉부사, 함흥부윤, 회양부사 등을 지냈다. 회양부사로 있을 때 자주 가마를 타고 금강산에 들어가 자연을 즐기니 마치도 신선이 된듯 했다고 한다. 1582년에는 65살의 나이로 안변부사를 지냈는데 이 벼슬 역시 그가 스스로 지망한것이라고 한다. 그는 안변부사로 있을 때 북방전란을 예견하여 큰 못을 파고 마초를 많이 저장하였다고 하여 통정대부의 벼슬을 받았으나 그로부터 얼마안되여 지릉(리성계의 증조부인 익조의 릉)에 화재가 일어난 책임을 지고 황해도쪽으로 귀양갔다. 2년후에 류배지에서 풀려 돌아오려던중에 병에 걸려 죽었다. 그는 16세기 국문시가창작의 대표적시인중의 한사람이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서는 시조 《산이 높다 하되…》를 들수 있다. 양사언은 회양부사로 있을 때에 《금강산유람기》를 썼다고 한다. 그는 시뿐아니라 글씨도 잘 써서 리용, 김정희, 한호와 더불어 리조시기 4대명필로 이름이 났다. 안변부사로 있을 때 10일씩이나 금강산을 유람하다가 절승경개에 도취되여 만폭동입구의 바위에 《봉래풍악원화동천》이라는 글자를 새겼으며 묘향산을 유람할 때에도 룡연폭포에 이르러 그 장엄한 경치에 격동되여 《신선굴택운하동천》이라는 글을 새겼는데 이 글들은 지금까지 전해지며 힘있고 웅건한 필치로 하여 후세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고있다. 문집으로 《봉래시집》(3권 1책)이 있다.

 

《산이 높다 하되…》

 

시조.

 

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뫼히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를 높다 하더라

 

작품은 사람이 높은 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노력해야 하며 꾸준히 노력하면 세상에 극복 못할 난관이 없다는 생활의 진리를 누구나 쉽게 리해할수 있는 비유의 수법으로 구현하였다.

시조에서는 성공의 길은 높은 산을 톺아오르는것과 같다는 구체적인 하나의 시적세부를 통해 노력이 없이 푸념만 앞세우면 아무 일도 할수 없으며 그대신 꾸준히 노력하면 세상에 달성 못할 일이 없다는 인생의 진리를 밝히고있다.

시조는 교훈적인 의미만을 보여주는데 그친 제한성이 있으나 서정적주인공의 억센 의지와 호탕한 성격, 그 표현의 평이성으로 하여 예로부터 사람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졌다.

 

양사언의 선견지명

 

때는 1582년 임오년이였다. 양사언이 마지막 고을원살이를 안변에서 하고있을 때였다.

양사언은 자기의 지방원살이의 대부분을 강원도와 함경도에서 지내온 경험과 임진조국전쟁을 앞두고 심상치 않은 정세에 대처하여 양병설(군사를 양성할데 대한 설)이 대두하는것을 참작하여 안변의 지리상 위치에 맞게 고을의 정사를 바로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하여 도안에서도 정사가 그중 잘된다는 평가를 받았고 통정이라는 품계에까지 오르게 되였다. 자만을 모르는 양사언은 백성들을 불러일으켜 고을에 못도 큼직하게 파고 마초들도 산더미처럼 가려놓았다.

어떤 아전이 너무 힘들어 투정질 비슷하게 몇마디 비치였다.

《이런 태평세월에 공연한 근심을 하시는것이 아니오니까?》

양사언은 칼로 베듯이 잡아뗐다.

《아서라, 동란은 눈섭에서 떨어지는 법이다. 미리 마련해놓은것이 없이 갑자기 란을 당하면 인명이 무리로 상하는 랑패를 보느니라. 하물며 이 안변고을은 바다도 가깝고 또 서울에서 북도로 통하는 목구멍과 같은 곳에 있으니 어찌 바다로 오는 적, 북도로 기여드는 적을 막을 방책을 미리 마련하지 않을수 있느냐. 후날의 군량과 말먹이를 미리 마련해야 한다.》

양사언이 이렇게 태연하게 자기 주장을 세우기는 하였으나 내심은 죽음도 각오해야 하는 결단이였다. 조정에서조차 왜적을 막을 대책을 미리 세우자는 주장과 태평성세론이 대립되여있고 그것이 당파싸움과 얽혀 자칫하면 죄를 쓰고 목숨을 잃거나 귀양을 가는 판인데 하물며 군사의 요해지(군사상 적을 막기에는 편리하고 쳐들어가기에는 불리하게 지세가 험한 곳)인 안변에서 못을 파고 마초를 쌓는것을 보고 양사언이 반역할 나쁜 마음으로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고 걸고드는 날에는 올데갈데 없는 역적이 되고마는것이였다.

이런 위험이 있었지만 양사언은 나라를 위한 자기의 충직한 마음을 믿고 제 주장대로 내밀었다.

이듬해 1583년(계미년)이 되였다.

이해에 변경지대에서 변란이 났다. 그리하여 관군의 대병력이 북쪽으로 들어가게 되였다. 길옆의 고을들에 길안내를 세우고 군량을 조달하며 마초를 대라는 불같은 독촉이 비발치듯 떨어졌다. 아무 마련없이 있던 고을들에서는 관군의 이동을 보장할만 한 준비된 인원도 제대로 못댔으며 심지어 마초도, 마실물조차 딸려서 쩔쩔 맸다. 책임추궁이 가을서리같았다. 관원들과 아전들이 책임을 지고 벌을 받으며 백성들이 성화를 못이겨 큰 고통을 당했다.

하지만 양사언이 원으로 있는 고을에서는 자기들에게 떨어진 군령을 하나도 어김없이 제대로 척척 해냈다.

이때에야 사람들은 《우리 고을원은 앞을 내다보는 눈이 밝은 명관이야.》하고 탄복하여마지 않았다 한다.

 

글씨를 돈으로 바꿀수 없다

 

리조시기 명필로 이름있던 양사언이 명나라에 갔을 때 있은 일이다.

어느날 양사언이 어떤 부자의 초청을 받아 그의 집에 가게 되였다.

으리으리한 방안에 들어서니 여러가지 족자와 장식품이 눈길을 끄는데 방 한켠에 커다란 병풍이 세워져있었다.

《저 병풍에는 무슨 그림이 있습니까?》

양사언이 묻자 주인이 일어나 병풍을 펴보이는데 새까만 공단으로 면을 씌운 병풍에는 그림 한폭, 글 한귀도 없었다.

《아니 이런 병풍은 어디에 쓰시오?》

양사언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주인에게 다시 물었다.

주인은 양사언의 호기심을 더 불러일으키려는듯 대답없이 병풍을 다 펴놓고서 말하였다.

《이 병풍은 우리 나라에서 글씨로 유명한 사람이 금분으로 글을 써주겠다고 해서 몇달을 두고 정성들여 만든것이요. 그분이 글씨를 써주겠다고 한 날이 오늘이니 좀더 계시다가 그의 필체를 보고가시는것이 어떻겠소?》

원래 글씨에 흥미를 가지고있는 양사언인지라 이웃나라의 명필을 보게 된것이 좋은 기회로 여겨져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얼마 안있어 명필이라는 사람이 왔다. 그런데 그 사람은 손님들과 인사를 간단히 나눈 후 주인과 글값을 흥정하는것이였다. 명필이 요구하는 값이 상당히 높았지만 주인은 몹시 난처해하면서도 나라에서 손꼽히는 명필의 글씨를 받는다는 생각에서 다른 의견이 없다고 하였다.

이 광경을 보고있던 양사언의 마음은 좋지 않았다. 명필이라는 사람이 글씨를 팔아먹는다는것은 글씨를 숭상하는 사람들에게 모욕을 끼치는 일로 생각되였기때문이였다.

그런데다 그 사람이 준비를 다 갖추고 병풍에 글을 쓰기에 앞서 초지에 련습으로 붓 놀리는것을 보니 더우기 가만 앉아있을수가 없었다. 그 글체를 담기에는 병풍이 아까왔고 게다가 글씨를 써주고 값을 받아내는것이 불쾌하였다.

글씨에서는 남한테 양보를 하지 않는 양사언의 자존심이 솟아났다.

《가만, 내가 한번 써봅시다.》

이렇게 말하면서 팔을 걷고나선 양사언은 누가 허락하건말건 큰 붓을 하나 쥐고 금분을 찍어서는 길게 펴놓은 병풍에다 마당에 물을 뿌리듯이 휙휙 뿌려나갔다.

《아니, 왜 이러시오?》

《이 좋은 병풍을 왜 버리게 하시오?》

주인과 명필이라는 사람이 눈이 휘둥그래가지고 어쩔줄 몰라하였다.

양사언은 주인과 그 사람이 말릴사이도 없이 12폭병풍에 금분을 잔뜩 뿌려놓았다. 그리고는 한걸음 물러서서 마른 담벽이 비풍을 맞은듯 금분에 얼룩진 병풍을 이윽히 바라보았다.

《아니 저렇게 아교에 이긴 금분을 마구 뿌려놓은 병풍을 이제 어디에 쓴단 말이요?》

주인은 실망해서 방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잠간만 기다려보시오.》

양사언이 적당한 붓을 골라잡고 그것을 병풍우에 휘두르는데 그 솜씨가 학이 춤추듯, 사공이 노젓듯 하였다.

그런데 어찌된 조화이랴.

붓을 쥔 그의 손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어지럽던 병풍면에 금빛찬란한 글체들이 완연히 나타나면서 어지럽게 뿌려졌던 금박점들이 모두 묻혀버리는것이였다.

전서체, 행서체, 초서체로 조화롭게 어울린 글획들을 눈을 비비고 들여다보던 주인과 명필이라는 사람은 너무도 감탄하여 아무말도 못하였다.

양사언이 그만 돌아가겠다고 하자 주인은 훌륭한 글씨를 남겨주어 감사하다고 거듭 치사를 한 다음 그 값을 어떻게 치르어야 하겠는지 모르겠다고 하는것이였다. 그러자 양사언은

《제가 글씨를 배운것은 팔아먹자고 배운것이 아니니 어찌 돈으로 바꾸겠습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마시오.》라고 말하였다.

이때로부터 양사언은 이웃나라에도 명필로 소문이 나게 되였다.

 

《비래정》전설

 

1564년에 양봉래는 조국의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마음껏 시도 읊고 글씨도 남기려고 그가 늘 마음속에 그리던 금강산에 찾아왔다.

그는 옛날 신선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구선봉아래의 풍치수려한 감호가까이에 집 한채를 세웠다. 양봉래는 이 집에 《비래정》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비래정》이란 《하늘에서 날아온 정자》라는 뜻이다. 그는 여기에 어지러운 세상살이에서 벗어나 신선처럼 살려고 한 자기의 심정을 담았던것이다.

양봉래는 《비래정》에서 맑은 물 출렁이는 감호와 하늘높이 솟은 구선봉이며 가없이 펼쳐진 동해바다가의 아름다운 경치를 내다보면서 떠오르는 시상을 모아 시를 읊고 붓을 휘둘러 글씨를 쓰면서 지냈다. 그는 여기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감호는 거울속에 있는 부용(련꽃)같고 구선봉은 하늘가에 소라(바다조개의 한가지)처럼 틀어올린 상투머리같다고 하면서 감호와 구선봉은 자기집 두리에 친 병풍이라고 즐겨 말하였다.

어느 화창한 날이였다. 양사언(봉래)은 이날 새로 지은 집에다 《비래정》이라는 편액(방안이나 문우에 거는 액틀)을 써서 달고싶은 충동을 누를길 없었다. 그는 문장과 서예로 당대에 명성이 높았던만큼 지금껏 련마해온 재능을 깡그리 쏟아부어 편액을 잘 써보리라 마음먹고 온 정력을 기울여 활달하면서도 기운찬 필치로 《날비》자를 먼저 큼직하게 써놓았다. 써놓고보니 글자의 한획한획이 방금 하늘로 날아오를듯 서리여 꿈틀거리는 룡의 기상이 완연하여 자기딴에도 대견하고 만족스러웠다.

양봉래는 《비》자에 이어서 《래》와 《정》자를 썼다. 그런데 그 글자들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정성이 모자라는것만 같아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두 글자를 썼으나 여전히 《날비》자만 못하였다. 그는 안타까운 심정을 지그시 누르고 몇번이고 고쳐 썼으나 종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양봉래는 그만 화가 치밀어올라 붓을 내동댕이치고말았다. 그리고는 먼저 써놓은 《날비》자를 새겨보았다. 보면 볼수록 그 글자만은 살아움직이는듯 하여 마음에 꼭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날비》자만으로 족자를 만들어가지고 자기 서재에 걸어놓았다.

세월은 흘러 양봉래는 안변부사로 가게 되여 임지로 떠나게 되였다. 그는 비래정을 떠나면서 사람을 두어 집을 지키게 하였다.

1582년이였다. 그는 릉묘에 불이 붙은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황해도지방으로 귀양을 갔다. 낯설은 땅에서 귀양살이를 한지도 어느덧 2년이란 세월이 지나간 1584년의 어느날이였다. 그가 한때 신선처럼 살리라 꿈꾸며 지어놓았던 《비래정》에 고성지방의 특이한 드센 바람이 갑자기 불어닥쳤다. 서재문을 벌컥 열어제친 바람은 방안에 두었던 책이며 병풍이며 족자들을 사정없이 휩쓸어안고나가 공중으로 흩날려버렸다.

집을 지키던 사람은 황급히 땅에 떨어진 물건들을 다 주어모았다. 그런데 다른것은 잃어진것이 없었으나 《날비》자를 쓴 족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은 양봉래가 그토록 애지중지한 족자가 없어진것을 알고서는 부리나케 바람부는 방향을 따라 바다가까지 뛰여가며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종적이 묘연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양봉래와 가깝게 지내던 한 친구가 족자가 잃어진 날자와 시간을 따져보니 그가 바로 귀양살이하던 곳에서 세상을 떠나던 그 시각과 일치하였다고 한다. 그는 양봉래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봉래(양사언의 호)의 과거를 생각할적마다 어느사이에 슬픔이 북받침을 느낀다. 봉래가 비록 이 세상 풍진속에 있었으나 실은 이 세상을 초월한 사람이였다. 그의 깨끗하고도 비범한 글씨와 시문은 세상에서 귀중히 여기고있었는데 귀양지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으니 아까운 일이로다.》

언제인가 《비래정》을 찾았던 한 진사가 《날비》자가 하도 마음에 들어 모사하여두었는데 그는 임진왜란속에서도 그 글자만은 불에 태우지 않고 보관하여두었었다. 양봉래의 맏아들인 양이근이 이 사실을 알고 그를 찾아가 모사한 《날비》자를 보면서 파란많은 아버지의 한생을 추억하였다고 한다.

 

현명한 어머니로 하여 벼슬을 하게 된 양사언

 

양사언의 어머니 라씨는 자기보다 나이가 근 50살이나 차이나는 선비 양승지와 살게 되였는데 양승지는 원래 처가 있었던 사람이다. 일찌기 처가 죽은 후 홀아비로 살다가 기이한 인연으로 라씨를 만났던것이다.

양승지가 죽기 전해에 라씨부인은 북문밖 자양동이라고 하는 곳에 아담한 집 한채를 지었는데 특별히 대문을 드높게 드리고 사랑대청을 넓게 만들고 행랑채에 하인을 두어서 화초를 가꾸며 청소하게 하였다.

안채는 비워두고 때때로 라씨부인이 나가 돌아보았다.

어느해 왕이 평복으로 몇사람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북문밖 자양동근처를 돌아본 일이 있었다.

한나절이 지나자 갑자기 하늘 한켠으로부터 검은 구름이 일어나더니 삽시간에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것을 미처 예견 못했던 일행은 급히 비 그을만 한 곳을 찾다가 아담한 기와집 한채를 발견하였다.

드높은 대문이 활짝 열렸는데 뜰에는 여러가지 화초가 만발하고 그 고운 빛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매우 마음이 조급하였던차라 일행은 우선 그 집에 왕을 모시기로 하였다.

마당에 들어서니 넓은 대청은 티끌 한점없이 깨끗하게 정돈되여있었고 마루에는 산뜻한 돗자리가 쭉 깔려있었다.

정면에는 왕이 앉기에 알맞도록 새로 꾸민 두꺼운 보료를 깔고 그우에 다시 고급돗자리가 펴있었다.

왕이하 여러 신하들이 막 자리를 정하고 났는데 뒤미처 녀자하인 두명이 화류상에 향기로운 차와 갖가지 과일을 놓아가지고 들어와서 권하는것이였다.

조금 있더니 열서너살가량 되는 두 소년이 나와서 왕에게 공손히 절을 올리는것이 아닌가?!

왕이 눈을 들어보니 살빛이 희고 신선같은 풍채에 사랑스러운 소년들이였다.

왕이 너무 기특하여 이름과 조상의 래력을 물어보니 형되는 소년이 엎드리여 《전 승지 양희수의 아들 사언, 사준》이라고 아뢰는것이였다.

왕이 못내 귀여워 운자를 불러 글을 지으라고 하니 두 소년은 즉석에서 글귀를 부르는데 모든 사람들이 놀랄만 한 명구였다.

그러는 가운데 안으로부터 술과 음식상이 나왔다.

음식이 정결하고 소담하여 어디에 비길데 없는 산해진미로서 대궐안에서도 일찌기 볼수 없었던 진귀한 음식들이였다.

왕은 마침 시장기가 있었던지라 만족히 여기며 물었다.

《이 음식은 창졸간에 장만할수 없는것인데 대체 우리가 올줄 어떻게 알고 누가 이렇게 준비하였느냐?》

《집의 모친이 준비한것이로소이다.》

형되는 양사언이 공손히 아뢰였다.

《그래? 그러면 너의 모친은 이 집의 주인이요. 또 양승지의 부인인즉 내가 좀 만나고싶다는 뜻을 전해보아라.》

어명을 받은 사언이 안으로 들어가고 조금 있더니 양승지부인 라씨가 깨끗이 소복단장을 하고 앞을 바라봄이 없이 곧바로 걸어나와서 왕앞에 공손히 절하고 엎디였다.

왕은 라씨부인이 현철하고 선견지명있음을 못내 칭찬하였다.

라씨가 따른 술에 얼근히 취하자 왕은 유쾌한 기분으로 두 소년을 데리고가서 춘방가관이라는 직급을 주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그 이듬해 양씨문중에서 족보를 꾸미게 되였는데 양승지의 두 아들을 서자로 올리기로 하였다.

이 사실을 안 라씨부인은 사람을 보내여 그것이 부당함을 밝혔다.

그는 정원일기(승정원의 기록일기로서 왕의 그날그날의 생활상태와 행동여부를 사관의 붓으로 기록한것)에 기록되여있는 내용과 표현을 찾아보아서 만일 양승지부인이라고 적혀있거든 적자로 해달라는것이였다.

정원일기에 라씨부인이 첩이라고 기록되여있으면 양사언형제는 서자로밖에 될수 없었고 따라서 그때 제도와 풍속에 의하여 벼슬도 얻지 못하게 되는것이였다.

양씨문중 사람들이 줄을 놓아 정원일기를 조사해본 결과 《모년 모월 모일 임금께서 야외순시중 비를 만나 어느 집에 들어가 비를 피하실제 고 양승지부인 라씨 행주…》라는 구절이 분명히 적혀있었으므로 문중사람들도 어쩔수 없이 족보에 라씨를 정실부인으로, 양사언형제를 적자로 올리지 않을수 없었다.

이리하여 양사언형제는 현명한 어머니 라씨의 노력으로 벼슬길에 나서게 되였으며 특히 양사언은 명필, 문인으로 이름 떨치게 되였다.

 

60이 넘어 재혼한 양사언의 아버지

 

양사언의 아버지 양승지는 리조 문종왕(통치년간 1451ㅡ1452)때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다.

중년에 처를 잃고 세상일에 뜻이 없어 일찌기 벼슬을 하직한 후 집에 들어앉아 거문고타기와 책읽는데 재미를 붙이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해 봄날, 하도 갑갑하고 울적하여 산천경개구경을 떠났던 양승지는 금강산, 백두산을 돌아보다가 불현듯 부모제사가 떠올라 부랴부랴 행장을 수습해가지고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안변까지 왔을 때 말이 굶주려 제대로 걷지 못하다나니 좀처럼 갈길이 줄어들지 않았다.

마을에 들어서 주막을 찾아보았으나 원래 산골이여서 주막도 없는데다가 웬일인지 마을의 여러 집들을 돌아보았는데 사람을 만날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한 집에 이르러 문을 두드리니 15살가량의 어여쁜 소녀가 나와서 깍듯이 인사하며 양승지에게 온 뜻을 물었다.

양승지는 말고삐를 잡은채 자기는 서울사람인데 백두산으로 유람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말이 굶주려 걷지 못하므로 말죽을 얻어먹였으면 한다고 말했다.

소녀의 말을 들어보니 마을사람들은 모두 대사집에 가고 그의 부모들도 거기에 가서 집에 없다는것이였다.

소녀는 양승지를 잠간 기다리게 하고 오래지 않아 말죽을 쑤어주더니 이어 조금후에 정결한 밥상을 차려 양승지에게 들기를 권했다.

양승지는 시장하던 판이라 눈이 번쩍 뜨이는 동시에 소녀의 민첩한 행동과 손님접대하는 품이 하도 의젓하고 기특하여 소녀에게 물었다.

《말죽을 쑤어달라고 했는데 웬 밥이냐?》

소녀는 고개를 숙인채 당돌히 대답했다.

《말이 굶주려 걸음을 걷지 못할 지경이라면 사람도 응당 시장하실것이니 주인된 도리로서 어떻게 말만 귀히 여기고 사람을 천하게 대접할수 있겠나이까?》

양승지가 다시한번 감탄하며 밥상을 보니 비록 강냉이밥에 산나물과 두부찌개와 고추장, 콩나물국 등 소박한 차림이였지만 음식이 정결하고 먹음직스러웠다.

양승지는 맛있게 식사를 하고나서 은자 한냥을 내여 소녀에게 주었다.

소녀는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루추한 집에 찾아오신 손님을 대접하는것은 응당한 일이온데 만일 밥값을 받는다면 이것은 인정과 도리에 어긋난 일이오며 또 저의 부모가 돌아와서 이 말씀을 듣는다면 꾸짖을것이오이다.》

듣고보니 소견이 어른보다도 낫고 또 언어행동이 령리하고 단정하여 조금도 례의범절에 어긋남이 없었다.

용모를 보니 연지, 분으로 단장하지는 않았지만 골격이 준수하고 삐여난데다가 살결이 희고 동그스름한 얼굴과 오똑한 코며 검고 영채도는 두 눈이 귀여움과 함께 그 무엇이라고 말할수 없이 그윽하고 우아한 품위가 있어 서울 대가집 규수라도 따를수 없을 정도였다.

양승지는 마음속으로 칭찬해마지 않으며 잠간 망설이다가 행장을 뒤져 부채를 꺼냈다.

《이것이 우리 집에서 전해오는 소중한 물건인데 이것을 신물(후날 표적으로 삼기 위하여 주고받는 물품)로 너에게 주는것이니 받아다고…》

소녀는 문득 꿇어앉아서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두손으로 부채를 받더니

《소중하신 물건을 받삽기 황송하오나 어른께서 주시는것이오매 고맙게 받겠나이다. 그러하오나 신물을 그대로 받을수 없사오니 버릇없는 청이오나 높은 성씨와 사시는 곳을 가르쳐주실수 없겠나이까?》

양승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지필묵을 꺼내 주소성명을 적어주었다.

소녀는 의농문을 열고 명주를 꺼내여 부채와 주소성명을 쓴 종이를 정중히 싸서 장속깊이 간수하는것이였다.

이 광경을 본 양승지는 사랑스럽고 귀여워 소녀의 윤기도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너 참 령리한 아이로구나. 지금 몇살이냐?》

《열다섯살이나이다.》

《내가 오늘 뜻밖에 너의 집에 와서 적지 않은 신세를 지고 간다. 부모가 돌아오시거든 내가 인사드리지 못하고 간다고 말해다오.》

소녀는 문밖까지 따라나와서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하였다.

《부모님께서 계시지 않은 까닭에 모처럼 오신 손님을 정중하게 대접해드리지 못해 죄송하나이다. 아무쪼록 먼길에 몸 조심하시기를 바라나이다.》

양승지는 종시 소녀에 대한 기특하고 고마운 마음과 연연한 정을 이기지 못하여 말이 동구밖 산모퉁이를 돌아설 때 머리를 돌려 돌아보았다.

그런데 소녀는 그때까지 들어가지 않고 마당가 참죽나무에 기대여서서 이편을 바라보고있지 않는가.

참죽에 의지하여 초연히 서있던 소녀의 아련한 모습은 양승지의 망막속에 새겨져 오랜 시일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어느날, 한 촌늙은이가 양승지의 집을 찾아왔다.

《소인은 안변 산협에 사는 촌민이온데 한가지 아뢸 말씀이 있어 불원천리하고 올라왔소이다. 3년전 안변에서 말죽을 쑤어준 소녀에게 부채를 신물로 주고가신 일이 있지 않으신지요?》

늙은이는 이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부채를 꺼내놓았다.

양승지가 부채를 보니 그것은 분명 자기가 기특한 소녀에게 주었던 물품이 틀림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지. 그런데 대관절 자네는 누구길래 그것을 묻느뇨?》

《녜. 그때 그 소녀는 바로 소인의 미거한 딸년이올시다. 소인이 늦게야 딸자식을 하나 보았는데 어릴 때부터 총명하므로 13살까지 조부가 글을 가르쳐 오륜과 삼종지의는 대강 알고있소이다. 그래 올해 나이가 18살에 접어드는지라 시집보내려 하온즉 부채를 내놓으면서 아무해에 기이한 인연으로 신물까지 받은 이상 결코 다른 곳으로는 갈수 없다고 하기에 할수 없이 이곳으로 찾아왔소이다. 황송하오나 딸년의 소원을 풀어주신다면 큰 은혜로 생각하겠소이다.》

양승지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름을 느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내 나이에 그렇게 할수는 없고… 내가 그때 어린 소녀의 손님대접이 하도 깍듯하고 신통하기에 귀여워서 희롱으로 신물이라고 하고 부채를 준것이요. 별다른 뜻이 있은것은 아니였네. 또 보다싶이 내 나이 벌써 60이 넘어서 살날도 얼마 없는 사람인지라 꽃같은 소녀의 평생을 그르쳐줄수 있겠는가? 도의에 어긋나는 일이니 고향에 내려가서 딸에게 잘 알아듣도록 타일러주기를 바라네.》

양승지는 하인을 불러 술과 음식을 잘 대접한 후에 로자로 은자 30냥을 주어 돌려보냈다.

그로부터 서너달후 소녀의 아버지가 또다시 양승지의 집에 나타났다.

딸이 말을 듣지 않아 강제결혼을 시키려 했더니 그날밤 울뒤 참죽나무에 목을 맨것을 겨우 살려냈다는것이였다.

로인은 딸년이 죽는 날은 자기들도 죽는 날이라며 할수 없이 딸년을 가마에 태워 데리고왔으니 측은히 생각하고 받아달라고 애원하였다.

부득이 양승지는 하인을 불러 일행을 안방으로 안내하여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날밤 신부방에 들어가니 등불아래 단정히 앉았던 신부가 나직이 머리를 숙인채 조용히 몸을 일으켜 양승지를 맞는것이였다.

애티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성숙함과 고상함이 엿보이는 처녀의 청초한 모습이 양승지의 눈에 안겨왔다.

양승지는 신부의 옥같은 손을 잡으며

《이 늙은것이 미친 혼이 들어서 경솔하게 신물을 주었다가 남의 꽃같은 청춘을 그르치는구나. 이제 그대를 대하니 애처롭고 측은하고 뉘우치는 마음으로 가슴이 터질것 같다.》고 말하며 긴 한숨을 내쉬였다.

다소곳이 꿇어앉아 양승지의 말을 듣고있던 신부는 약간 얼굴을 붉히며 말하였다.

《이 세상에 잠시 소매만 스치는것도 역시 연분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이까? 그때 저의 집을 찾으신것도, 부채를 주신것도 피할수 없는 전생의 연분인가 하나이다. 아무리 년령이 맞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미 운명으로 지어진 일이라면 할수 없지 않나이까?》

은은한 목소리, 오히려 자기에게 위로의 말을 하는 처녀의 애틋하고 고운 마음씨에 양승지는 여러해만에 처음으로 형용키 어려운 아늑함과 행복감을 느끼며 말하였다.

《보다싶이 나는 이미 백발이 다 되였고 기력이 쇠한 황혼기의 인생인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마음을 돌릴수 없을가? 내가 얌전한 신랑감을 구하여 시집보내줄테니 어려워말고 진심을 말해다고.》

두눈을 내려깔고 양승지의 말을 듣고있던 신부가 문득 입을 열어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음에 없는 생을 백년 사는것보다는 지기(자기의 속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를 위하여 단 하루를 사는것이 도리여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나이다. 만일에 끝끝내 저를 배척하실 의사이시라면 오직 죽음으로써 제 마음을 밝힐수밖에 없나이다.》

이렇게 말한 신부는 돌연히 품속에서 서리발이 선 장도를 꺼내들었다.

《어!어!어!》

양승지는 황급히 그의 손을 잡으며 얼결에 두팔을 벌리여 신부를 꼭 끌어안았다.

《그대 소원이 정 그렇다면 나로서는 만족이다. 난 너무 고마워서…》

양승지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신부도 기쁨과 설음이 한꺼번에 북받쳐 얼굴을 양승지의 품에 파묻으며 눈물을 흘렸다.

이리하여 애젊은 라씨와 늙은 양승지는 넘어가는 초생달이 서창에 비치는 그날밤 부부의 아름다운 인연을 맺게 되였다.

그로부터 현숙하고 명철한 라씨부인이 법도있게 생활을 꾸려나가니 어수선하던 집안은 깨끗해지고 맥을 놓고 지내던 아래사람들도 성수가 났다.

옷차림으로부터 하루 세끼식사에 이르기까지 취미와 구색에 맞게 온갖 성의를 다하니 양승지의 몸도 차츰 좋아지고 건강이 회복되여 양사언, 양사준 두자식을 보게 되였다.

쓸쓸하고 시름에 잠겼던 양승지의 가정에는 화기애애한 봄바람이 일었다.

양승지는 그후 10년을 더 살다가 사랑하는 부인의 품에 안겨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양승지가 세상을 떠난 후 몇해가 지나서 라씨부인은 일가친척들과 자기가 낳은 아들들을 불러앉히고 유언을 하였다.

《나는 이제 아버님을 모시려 저세상에 따라가련다. 그래야 너희들이 아버님제사를 지낼 때 나에게도 음식상을 차리게 될것이다. 그러면 나라님덕택으로 서자신세를 면한 너희들이 집안에서도 서자설음이 없게 될것이다.》

일가친척들과 양사언형제들이 절대 그런 일이 없을것이니 마음을 돌리시라고 애원하였지만 라씨는 그들의 결심을 기특하게 여기면서 눈을 감고 자는듯 조용히 자결하였다.

라씨부인의 이러한 행동은 봉건유교도덕이 내세우는 삼종지의(《녀자가 따라야 하는 세가지 도리》 즉 녀자는 무조건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을 잃으면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것)를 따른것으로서 찬양할만 한 일이 못되지만 한편으로 이것은 불합리한 봉건적신분제도하에서 자식에게 서자의 설음을 주지 않으려는 지극한 마음의 표현이라고도 말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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