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식

(1501ㅡ1572)

 

리조전기 학자, 시인. 자는 건중, 호는 남명이다. 어려서부터 기개가 도고하고 성품이 조용하면서도 신중하며 책읽고 사색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일찌기 국내외의 고전들을 많이 읽고 정통하였으며 젊은 나이에 일가견을 세우게 되였다. 즉 그는 학문에서 도학적견해를 가지였고 생활에서 강의하고 엄격하였으며 행동거지에서는 음탕한것을 눈으로 보지 않고 그릇된것을 귀로 듣지 않았을뿐아니라 항상 공손하고 부지런하였다.

조식의 청소년시절은 조정에서 훈구파와 사림들의 권력다툼, 연산군의 폭정, 중종반정 등으로 인한 봉건집권층 내부갈등의 격화, 인민생활의 령락과 불만의 증대로 매우 복잡다단한 가운데 흘러갔다. 이런 가운데서 조식은 벼슬살이에 나서는것을 단념하였으며 시골에 있으면서 학문연구와 후대교육에 종사할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처음에 자기가 사는 고장에 글읽는 정자를 하나 짓고 이름을 산해(산과 바다)정, 자기가 거처하는 집을 뢰룡(우뢰치는 룡의 집)이라 하였으며 후에는 두류산의 덕소동에 들어가 산천재라는 서재를 짓고 여기서 학문연구와 집필사업을 하였다.

조식은 사림파인물들로부터 학문이 넓고 깊으며 인품이 존엄있고 신중하며 글 또한 기발하고 고결하며 기백있을뿐아니라 시와 산문에서도 첫시작은 평범한것 같더니 점점 언어표현과 뜻이 고상하고 절도가 있다는 평을 받았다.

1568년 그는 관리들의 부패타락으로 인민들에 대한 수탈이 가혹하게 진행되는데다가 아전들의 중간착취가 극심하여 나라의 운명을 위태롭게 하고있으므로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여 나라의 정치를 일신할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것이 량반관리들인것이 아니라 아전들의 중간착취에 있다는 《서리망국론》을 내놓음으로써 량반지배계급의 리익을 옹호하는 립장을 취하였다.

그는 당대 대표적인 성리학자로서 경상도에서 리황과 대립하여 큰 학파를 형성하고있었다.

그는 봉건정부의 여러차례의 부름이 있었으나 마지막까지 벼슬을 받지 않았다. 저서로 《남명집》을 남겼다. 그가 쓴 《남명가》, 《왕릉가》 등은 국문시가로 알려졌다. 한자시로 《붓길 가는대로》가 있다.

 

《붓길 가는대로》

 

한자시.

 

세상사람들

옳은 선비 대함이

마치 범의 가죽을

좋아하듯 하도다

 

살았을 때는

잡지 못해 애를 쓰다가

죽고나면

아름답다 칭찬하나니…

 

시는 유능한 선비가 나타나면 어떻게 해서든지 모함을 하여 그를 잡자고 애를 쓰던 당시의 사회풍조를 노래하고있다. 봉건유학자의 립장에서 어지러운 정국을 비난하고 인민들의 목소리를 똑똑히 반영하지 못한 제한성이 있으나 당시 현실에 대한 비판을 진실하게 가한 의미에서 16세기 한자시문학발전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특이한 우정

 

조식과 리황은 우정이 깊었다. 그러나 그 우정은 특이한것이였다. 한평생 가까이 살면서 한번도 만나보지 못하고 서로 글을 통해 사귄 우정이였다. 그런데도 그 우정은 서로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가 되여있는 그런 깊은 관계의것이였다.

명종때였다. 리황이 여러모로 왕을 설복하여 조식을 나라의 제사때 쓸 짐승을 기르는 일과 왕실족보의 편찬, 왕족들의 그릇된 행실을 조사장악하는 일을 처리하는데 종사하는 벼슬에 소환하기로 하였으나 조식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리황이 안타깝기도 하고 섭섭한 마음도 있는지라 조식에게 너무 사양하지 말고 벼슬길에 나서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저 권고하는 말이나 듣기좋게 해서는 조식이 들을것 같지 않은지라 리황은 그에게 자극이 될 말마디를 편지에 썼다.

조식이 편지를 받고 읽어내려가느라니 그대가 왕의 부름을 받고도 조정에 나가지 않는다면 군신간의 의가 없는 짓이라는 대목과 그대와 같이 추천된 누구누구들은 다 이미 부임지로 떠나갔는데 그대만이 안오는 리유가 무엇인가고 하는 구절들이 있었다.

리황의 우정에 넘치는 진심에 조식은 가슴이 후더워옴을 금할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순간 조식은 우정은 우정이고 한번 다진 결심을 흐트릴수 없는 자기의 립장을 담은 회답을 써보냈다.

자기의 편지를 받고 조식이 달려올것이라 짐작하고있던 리황은 뜻밖에 그의 회답편지를 받고 락심천만하여 읽어내려가다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편지의 한대목을 거듭 읽어보았다.

…그대가 나같은 못난 인간의 헛소문을 믿고 임금의 은혜가 잘못 내리게 하였으니 죄송하기 짝이 없소. 그러나 남의 물건을 훔친것도 도적이라고 하는데 하물며 하늘의 물건(왕이 주는 벼슬)을 훔치는것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리황은 저도모르는 사이에 종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갈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말이 맞아. 나도 이 벼슬길이 싫증나 그만두자고 생각한 일이 그 몇번이던가. 그런데 생각대로 되지 않았지. 이제 와서 내가 또 그에게까지 어지러운 비구름덮인 벼슬살이를 권해놓고 후날에 가서 그 구름을 헤칠 약을 구해다줄 짓을 왜 할고.》

그리하여 리황은 다시는 더 그를 벼슬길에 추천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때로부터 몇해가 흘렀다. 조식은 어느날 뜻밖에도 리황이 세상을 떠났다는 비통한 소식을 뒤늦게 받았다. 그 부고를 손에 들고 어린 아이처럼 엉엉 통곡을 하였다. 집안사람들과 제자들이 무슨일인가 하여 달려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이윽고 마음을 다잡은 조식은 좌우에 모여든 제자들에게 말했다.

《퇴계(리황)와 나는 같은 해에 나서 같은 도에서 살았건만 아직 한번도 만나보지 못하고 영영 리별하였으니 이 무슨 기구한 운명이란 말인가, 아까운 인재가 죽었으니… 나도 이제 더 살 날이 얼마 남은것 같지 않구만…》

듣는 사람들은 모두 참된 친우는 생사를 같이 한다더니 리황에 대한 조식의 우정이 그야말로 생사도 같이 할만큼 뜨거웠구나 하는 생각으로 가슴이 후더워졌다.

조식은 며칠후 제자들을 부르더니 글쓴것을 내주었다. 거기에는 자기가 죽으면 장례를 어디다가 어떻게 간소하게 해달라고 적혀있었다. 그후 조식은 시름시름 앓더니 생을 마쳤다.

 

왕도 어쩌지 못한 조식의 고집

 

명종말년이였다. 왕은 훈구파관료들의 전횡을 억제하고 사림파신진학자들에게 벼슬을 주어 자기의 정치적지반을 굳히고 민심을 끌어보려고 사림파인물들을 끌어당기기에 애를 썼다.

한번은 성운, 리황, 림훈, 김범, 한수, 남인경 등과 함께 조식을 왕궁에 불러들여서 사정전에서 만나보았다. 참가자들을 쭉 훑어보던 왕의 눈길이 조식에게서 못박혔다.

(흠, 저 사람이 고집쟁이 조식이란 말이지. 내 오늘은 기어이 저 조식이를 조정에 붙들어두리라.)

왕은 《큰 마음》을 먹고 조식의 이름을 부른 다음

《이 자리에서 그대를 상서원 판관으로 임명하노라.》

하고 엄숙히 선포하였다. 좌우에 있던 대신들이 깜짝 놀랐다. 상서원이라면 나라의 옥새와 각종 인장, 절월 등을 맡아보는 아주 중요한 관청이고 판관은 종5품의 관직이였던것이다. 아무 벼슬실적도 없는 60대 인물에게 이런 중요한 직책을 맡긴다는것은 아주 드문 일이였다.

왕이 《큰 마음》먹고 준 벼슬에 대해 본인이 어떤 태도인가를 살펴보았으나 조식은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아무 내색도 보이지 않았다. 속이 은근히 달아난 왕이 제 먼저 말을 붙였다.

《옛날 소렬(중국 촉나라 왕 류비)이 제갈량을 삼고초려한데 대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중국의 옛 력사책인 《삼국지》를 보면 류비가 조조를 치기 위해 군사에 밝고 작전에 능한 제갈량을 군사(군사고문)로 초빙할 목적으로 그가 사는 남양의 초가집을 세번씩이나 찾아갔다는 사실이 적혀있다. 명종이 이 사실에 대해 조식에게 물어본것은 류비가 제갈량을 초청하기 위해 애쓴것처럼 자기가 조식을 위해 애쓰는것을 알고 조식도 제갈량처럼 나서라는 의도에서였다.

조식은 그 의도를 알고도 남았다. 그는 서슴없이 대답을 하였다.

《소렬제가 제갈공명을 삼고초려한것은 제갈량같은 인재를 만난 까닭에 한 일이옵니다.》

명종은 그러니 자기는 제갈량같은 인재가 못된다는 소리인가 하고 뒤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 제갈량도 소렬제를 받든지 수십년이 되도록 촉나라 왕실을 부흥시키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것이 어째서였는지도 신이 알지 못하는바로소이다.》

그 말에 명종은 맥이 탁 풀렸다. 제갈량같은 재사도 류비밑에서 수십년동안 일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죽었는데 나같은것이 왕을 받든다 한들 무슨 성과가 있겠습니까. 하는 뜻이니 결국 거절한다는 의미였다. 조식은 이 말을 남기고 례절있게 인사한 다음 왕궁을 물러나와 그 길로 두류산 자기집에 돌아가고말았다. 이러는 조식의 고집을 왕도 어쩌지 못하고 하는대로 내버려두었다.

 

굶어죽더라도 신조는 못 굽혀

 

1571년에 큰 기근이 들었다. 소나무껍질을 다 벗겨 울구어먹었고 풀도 다 뜯어먹었으나 주림에 시달려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집집에 쓰러져있었다. 조식의 집에서도 풀죽으로 끼니를 잇다나니 가족들의 얼굴이 퉁퉁 부었다. 이런 때 새로 왕이 된 선조가 경상도 감영에 령을 내려 조식의 집에 좁쌀을 보내주라고 하였다.

왕의 령을 받고 감영의 관원이 조식의 집으로 와서 주인을 찾았다.

《거 누구요?》

하는 70로인의 기력없는 목소리가 나더니 사랑채 방문이 열리고 조식이 퇴마루로 나서는데 허리에서 방울소리가 덜렁덜렁 들렸다.

(옳지. 저것이 소문난 쇠방울이구나.)

감영의 관원은 그것을 직감하였다. 조식은 허리에 쇠방울을 차고다녔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덜렁덜렁 소리가 났다. 조식은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기의 행동을 조심하라는 경고로 여기고 스스로 각성하였다. 그리하여 근년에 와서 조식이 자기 호를 《성성자》(각성하는 사나이)라고 한다는것이였다.

감영의 벼슬아치가 왕의 령을 전하고 싣고온 조섬을 부리우게 하려는참에 《가만!》하는 조식의 목소리가 튕겨나왔다.

아무말없이 방으로 들어간 조식은 의관을 바로하더니 종이를 펴놓고 무슨 글을 써서 봉해가지고 다시 나왔다.

《곡식을 실어오기에 수고했네마는 어찌겠나. 도루 싣고가게. 이 글은 조정에 올리는것이니 가지고가서 바쳐주게. 내가 이 곡식을 받지 못할 리유가 여기 적혀있네.》

그는 더 말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온 집안이 낟알구경 못한지 오랜 때 보내온 좁쌀이 목숨을 살리리라는것을 조식인들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남들이 다 굶는 이때 자기 혼자 명목없는 량식을 받는다는것이 평생 벼슬살이를 거절해온 자기의 신조에 어긋나는것이여서 조식은 그것을 받지 않았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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