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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광 조 (1482ㅡ1519)
리조전기의 학자, 시인. 자는 효직이고 호는 정암이다. 151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수찬, 부제학 등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다. 그는 성리학의 대가였던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에게서 배웠는데 성리학자로서 두각을 나타내였다. 그는 신진관료세력인 사림파의 대표적인물로서 봉건정부안에서 사림의 정치사상적립장을 대변하였다. 그는 당시 훈구파들이 숭상하던 사장학(글짓기와 시를 공부하는것)을 반대하고 성리학을 적극 장려하여 사람들의 인격을 수양함으로써 리상적인 《왕도정치》를 실현할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학문연구에서 잡것이 섞이게 되면 정치가 불순하여지고 나라가 문란하여진다고 하면서 도교제사를 맡아보는 소격서와 각종 미신행사 등을 철페할것을 주장하였다. 도덕적인 감화의 방법으로 리상적인 《왕도정치》의 실시를 주장하던 그는 대토지소유자인 훈구파들의 토지겸병을 반대하는 《한전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관리들을 문벌본위나 틀에 맞춘 과거제도에 의하여 선발할것이 아니라 현량과를 실시하여 인재본위로 관리를 선발등용할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주장들은 훈구파의 리해와 대립되여 1519년 《기묘사화》때 훈구파의 모해에 걸려 살해되고말았다. 그의 문집으로 《정암집》이 전해진다. 그의 작품으로서는 《절명시》, 《거문고》, 《릉성의 귀양살이》 등이 알려져있다.
《절명시》
한자시.
내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와 같이하였고 나라일 근심하기를 내 집일처럼 하였노라
하늘의 해는 이 마음 알아주어 이 땅을 밝게밝게 길이 비치라
시에서는 부끄럼없이 살고 떳떳하게 죽음을 맞는 그의 태도가 강하게 나타나고있으며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노래되고있다. 5언절구형식으로 씌여진 이 《절명시》에는 유교적교리에 뿌리박은 그의 애국적감정이 가식이 없이 드러나있으며 왕권의 비호밑에 일어난 《기묘사화》(1519년)에 의해 억울하게 사형을 당하는 희생자로서의 항의가 울리고있다. 조광조가 사형을 당하기직전 이 세상을 작별하며 읊은 시로서 도학자다운 사색이 느껴지면서도 짙게 서정화되여 사람들의 미학적공감을 자아낸다.
사형장에서 남긴 애국시
사람은 생을 마치는 마지막순간에 그의 인품이 뚜렷이 나타난다. 조광조가 사형장에 나선것은 귀양지인 릉성(전라도 화순군의 옛이름)에 끌려와서 가시울타리안에 갇힌지 겨우 두달이 되였을 때였다. 그는 사형통지가 그리 놀랍지 않았다. 자기를 이 귀양지로 쫓아보낸 《훈구파》보수관료들이 그냥 있지 않고 기어이 죽이려고 날치리라는것을 예견하고있었던것이다. 사형장에 나선 조광조는 머리를 들고 사방을 돌아보았다. 그는 지금 마음속으로 금산에서 귀양살이하는 김정, 선산의 감옥에 갇혀있는 김식, 성주에 간 박훈, 아산에 귀양간 기준 등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는것이다. (제발 공들만이라도 무사히 살아남아서 우리의 뜻을 실천해주오.) 이윽고 조광조는 엄숙한 어조로 도사(사형집행관) 류엄에게 물었다. 《주상(왕)께서 신에게 사형을 내리셨는데 마땅히 죽어야 할 죄명이 있을것이요. 청컨대 그 죄가 무엇인지 알고나 죽고싶소.》
류엄은 할말이 없었다. 조광조는 대답을 못하는 류엄에게 들으라는듯이 자기의 주장과 립장을 그대로 담아 시 한수를 읊었다. 알아주는 동료도 없고 들어주는 가족도 없는 가시울타리안이였으나 그는 온 세상이 다 듣고 내 나라의 력사가 듣는다는 자부심에 넘쳐 《절명시》를 읊었다.
… … 하늘의 해는 이 마음 알아주어 이 땅을 밝게밝게 길이 비치라
나라를 위하여 애써온 지난날을 부끄럼없이 돌이켜보며 사형당하는 마지막순간에도 《하늘의 해》가 《이 땅을 밝게밝게 길이 비치라》고 웨치는 애국의 그 마음에 산천초목도 감동되여 끝없이 설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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