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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행 (1478ㅡ1534)
리조전기의 학자, 시인. 자는 택지이고 호는 용재이다. 어려서부터 시와 문장을 잘 지었고 17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예문관 검열, 홍문관 대제학, 대사간, 좌의정을 지냈다. 그러나 권세있는자들에게 아부굴종하지 않는 강직한 성격으로 하여 생활에서 많은 풍파와 곡절을 겪었다. 홍문관 응교로 있을 때 연산군의 뜻을 거슬려 충주에 귀양갔으며 또 박은의 상소문사건에 관련되여 혹독한 고문을 받고 함안에 류배되여 량반의 신분을 박탈당하고 노비로 되였다. 그후 1503년 익명의 투서로 하여 또다시 옥에 끌려가 고생을 하였으며 거제도로 류배되였다. 연산군이 다시 령을 내려 끌어다 죽이려고 할 즈음 《중종반정》이 일어나 홍문관 교리로서 벼슬살이에 되돌아왔다. 그는 대사간을 거쳐 1517년 대사헌이 되였을 때 《사림》의 젊은 선비들속에서 《나라를 그르친다》는 시비가 있게 되자 첨지중추부사로 임명되였으나 스스로 물러나 충청도 면천군 창택촌으로 가서 《창택어수》(창택의 고기잡이할아버지)로 자처하면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후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다가 리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력임하였으나 1531년에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모해한 령의정 김안로의 비행을 규탄하다가 오히려 화를 입어 1532년에 평안도 함종에 류배되였으며 1534년에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이러한 곡절많은 생애로 하여 량반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똑바로 알게 되였으며 착취받는 인민대중의 불행한 처지와 감정을 깊이 리해할수 있었다. 리행의 시에 당대 봉건사회현실의 부정면을 날카롭게 폭로비판한 사회정치적주제의 작품들이 많은 리유가 여기에 있다. 리행의 작품으로서 《여름비의 탄식》, 《들은 이야기》, 《왜구에게 우리 성이 함락되였다는 소문을 듣고 정암진까지 달려가며》, 《웅천성이 함락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끊임이 없이》, 《슬프다 궁한 새여》, 《느낀바 있어》, 《얄미운 쥐를 덫을 놓아 잡았다》, 《가물》 등이 많이 알려져있다. 작품집으로 《용재집》이 전한다.
《여름비의 탄식》
한자시.
여름비 농사철에 알맞게 오건만 옛날엔 기쁘더니 오늘은 괴롭네 사람의 힘 무엇인들 못하랴마는 란리가 모든것을 뒤엎는구나
제포는 남쪽땅의 중요한 요새 군사들 모두 강하고 억세건만 거느린 장수 제구실 못해서 원쑤들의 로략질 꺼리낌 없네
한 홰불로 일만집을 다 태우니 살기가 하늘까지 서려있구나 용사들 어찌 편히 잘수 있으랴 약한 선비도 울분을 못참노라
굳세고 위엄있는 그대 절도사여 밝은 전술에 용맹을 겸하여 튼튼하고 안전한 진지를 차지하고 화살로 일곱겹 과녁을 꿰뚫누나
백성들의 마음 그대를 돕거니 대세가 마땅히 유리할지라 도적무리 산산이 흩어지고 밝은 세상이 곧 오리로다
활과 칼 당당히 늘어섰고 군사들의 갑옷 찬란히 번쩍이니 원쑤의 세 소굴 모조리 소탕하고 남쪽 백성들 도탄에서 구하라
※ 제포ㅡ경상도 웅천군에 있었던 포구이름. ※ 세 소굴ㅡ왜적이 살던 3포를 말함.
시는 왜구에 대한 치솟는 분노를 터치면서 왜구침입을 격퇴한 애국적군인들과 인민들의 투쟁을 반영하였으며 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심을 가지고 침략자들을 무자비하게 소탕할것을 호소하였다. 시에서는 먼저 당시 인민들의 기분과 지향을 진실하게 반영하면서 왜구침입이 인민들에게 미친 불행과 고통을 보여주고 통치배들의 무능과 비겁성으로 그것을 막아내지 못한데 대한 격분을 표현하였다. 시는 또한 승리에 대한 신심을 보여주고 왜구격퇴에서 현지지휘관이 전술을 옳게 쓰고 용맹을 발휘하는것이 중요하다고 절절히 호소하였다. 시인은 승리에 대한 확신과 락관으로 형상적화폭의 색조를 밝게 조화시키였다.
《들은 이야기》
한자시.
아침엔 할아버지 울더니 저녁엔 할머니 우네
그 울음소리 너무 마음아파 내 얼굴도 찌프려지누나
사내애를 낳는건 딸낳기만 못하고 딸을 낳아도 안낳기만 못하다네
아들은 모조리 부역에 끌려가고 세금을 못내여 소마저 팔았다네
집안에 어린 처녀 하나 있어 아침 저녁으로 죽이나 끓였는데
리원에 제자들이 그렇게도 많거늘 농가집에서까지 뽑아가야 하는가
무명베 한자도 남은것 없으니 무엇으로 새옷을 해입히겠나
빨리 보내라고 독촉이 성화같애 모진 관리들 매질을 하니
떠나가는 아이는 간다고 치고 남아있는 늙은이는 누가 돌보랴
가슴치며 원망하누나 죽음이 눈앞에 다달아있네
※ 리원의 제자ㅡ나라에서 음악, 무용 등을 가르치는곳을 리원이라고 하며 거기에서 배우는 사람들을 제자라고 불렀다. 또한 궁중에서 왕을 즐겁게 하여주는 궁녀들도 리원제자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주로 궁녀들을 가리킨다.
작품은 봉건통치배들이 민간의 아녀자마저 강제로 끌어가는 폭정을 폭로비판하고있다. 연산군이 백성들을 가혹하게 억압하며 채홍사, 채청사 등 일찌기 있어보지 못한 명칭의 특사까지 각도에 내보내여 얼굴이 곱고 예술적재능이 있는 민간인 녀성들, 심지어 어린 처녀아이들을 강제로 끌어다가 저들의 부화방탕한 생활을 위해 희생시키는 못된 짓을 하였다. 시는 이것으로 하여 인민들이 당하는 고통을 폭로하고 인민들의 가슴에 맺힌 원한과 울분을 토로하였다. 시에서는 늙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통곡과 그들이 터뜨리는 울분을 통하여 봉건통치배들의 죄행이 얼마나 크고 악착한가를 보여주었다. 시인은 주정토로를 피하고 늙은 부부의 하소연을 전달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그 진실성과 애절한 감정을 더욱 생동하게 나타내였다.
류배지에서 쓴 시 《들은 이야기》
1504년, 당시 왕이였던 연산군은 자기의 부화방탕한 생활로 국가재정에 엄중한 난관이 조성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으로 일부 량반들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내려고 하였다. 그는 1479년에 자기 아버지인 성종이 자기 어머니인 왕비 윤씨를 내쫓고 독약을 먹여 죽게 한 사실을 다시 들고나오면서 그때 이 사건에 직접 참가하였거나 지지하였던 관료들을 수많이 죽이고 그들의 토지와 노비들을 빼앗아 왕실재정으로 처분하였다. 이것이 《갑자사화》였다. 이 사건때 권달수, 박은, 조지서 등 사림파관료들이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는데 리행도 이 영향으로 류배살이를 하게 되였다. 리행은 고독한 류배지에서의 생활속에서도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날 저녁이였다. 리행이 거처하고있는 집으로 한 로파가 찾아왔다. 그가 오게 된 사연인즉 매우 간절한것이였다. 로파의 부부는 두 아들과 딸 하나를 키웠는데 아들들은 부역에 나가 언제 올지 모르고 그동안 세금을 물지 못하여 유일한 가산이였던 소까지 팔았다는것이였다. 늙은 부부는 가난에 쪼들리다나니 기력이 점점 없어지고 병까지 들었는데 다행히도 딸이 죽물이나마 끓여주어 간신히 살아가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관가에서 사령들이 와서 하는 말이 딸에게 새옷을 입혀 대궐로 들여보내라는것이였다. 아침에 통지를 받고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나 필경 딸이 다시 나오지 못할 곳에 간다는것을 짐작한 로파의 남편은 이 사실을 안해에게는 말하지 못하고 하루종일 소리없이 눈물만 흘렸다. 저녁에야 조정의 령으로 딸을 대궐로 들여보내야 한다는것을 알게 된 로파는 어이없어 통곡하다가 문득 정배살이 온 리행의 생각이 나서 무슨 좋은 수가 없을가 하여 찾아온것이였다.
(왕궁에 궁녀들도 많은데 어이하여 막바지 촌에서까지 처녀들을 데려가야 하는가?) 서울에 있을 때는 다 몰랐던 문제들, 그 무엇인가 석연치 않던 세상면모가 그 순간에 다 명백해지는것 같았다. 그러나 리행은 자기를 찾아온 로파에게 도움을 줄수 있는 아무러한 대답도 하지 못했다. 눈에 거슬리면 당장에 처리해버리는 연산군에게서 자신도 쫓겨나 불우한 인생을 보내고있으니 로파의 처지나 자신의 처지나 서로 다를바 없었다. 로파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으나 리행은 생각이 깊어졌다. (이것이 지금껏 내가 받들어온 조정이였단말인가. 저 불쌍한 로파의 가정이 겪는 고통이 곧 내가 써야 할 생활의 진실이 아닌가?) 리행은 서둘러 붓을 들어 달리였다.
아침엔 할아버지 울더니 저녁엔 할머니 우네
그 울음소리 너무 마음 아파 내 얼굴도 찌프려지누나
… …
자기로서도 어쩔수없는 현실불만의 시를 써놓았는데 이것이 후세에도 널리 알려진 리행의 시 《들은 이야기》이다.
리행과 권달수
리행은 권달수보다 나이도 아래이고 문과에도 3년이나 늦게 급제한 후배였다. 그러나 걸걸한 호걸풍의 리행이 지닌 식견과 인품은 정직하고 대바른 권달수와 뜻이 맞아 서로 친숙하게 지냈다. 리행이 홍문관 응교이고 권달수가 교리일 때의 일이다. 연산군은 자기 아버지 성종에 의해서 어머니 윤씨가 페비사형된것을 알고 페비사건에 관여하였던 대신들을 모조리 죽이고 자기 할머니마저 병들어 죽게 만들었다. 그리고 윤씨를 지나치게 높이 내세우려고 리성을 잃고 날뛰였다. 그것을 반대하여 나섰다가 권달수는 지방으로 귀양가고 리행은 옥에 갇혀 혹독한 심문을 받게 되였다. 이 사건이 깊이 파헤쳐지면서 리행은 주모자로 몰려 사형의 위기에 처하고 권달수도 다시 붙잡혀오게 되였다. 옥에 갇힌 련루자들가운데서 사형당하는것이 두려워 구구한 변명을 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신조가 굳은 리행은 말 한마디 없이 수염속에 묻힌 큰 입에 빗장을 든든히 지르고 앉아버티였다. 권달수가 잡혀와서 옥에 들어가보니 리행의 머리우에 죽음의 검은 구름이 짙게 드리워져있었다. 그는 정당한것을 주장하다가 죽는것을 떳떳하게 여기는 리행의 사나이다운 태도에 탄복하였다. 권달수는 곰곰히 생각하였다. (연산군이 날치는 꼴을 보니 누군가 한사람은 주창자의 책임을 지고 사형을 당할것만 같다. 지금은 리행이 말없이 그 책임을 지려 하고있다. 아니다. 그 젊은 재사가 죽어서는 안된다. 얼마나 앞날이 창창한 사람이고 살아서 끝까지 어지러운 조정을 바로잡아야 할 귀중한 인재인가. 그렇다. 내가 주창자가 되자. 리행이 알면 펄쩍 뛸것이다. 그가 알지 못하게 나서야 한다.) 이렇게 비장한 결심을 한 권달수는 심문장에 들어가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번 일에서 전하의 뜻을 반대한 주창자는 나요. 바로 내가 주창자이고 리행은 아니요.》 그리하여 권달수는 사형당하고 리행은 장형(몽둥이로 치는 형벌)을 당한 끝에 충주 귀양지로 실려갔다. 리행은 권달수가 죽은 다음에야 그가 자기를 비호하고 사형당하였다는것을 알았다. 리행은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의로운 선비 권달수의 죽음에 대한 끝없는 슬픔에 울었고 그런 훌륭한 신하를 죽인 연산군을 원망하여 분격의 눈물을 흘렸다. 리행은 자기를 지켜주고 대신 죽은 권달수의 장의에도 참가하지 못하고 귀양지로 가야 했다. 몸은 귀양지로 가고있었으나 마음은 권달수의 령전에 달려가 그가 념원한대로 한생을 부끄럽지 않게 살것을 다짐하였다. 리행은 귀양살이하는 사이에 권달수의 안해마저 비참한 운명을 겪게 된데 대하여 알게 되였다. 권달수의 안해는 함창에 있었다. 남편이 사형당한 소식을 들은 그는 머리를 풀고 땅을 치며 통곡하였으며 낟알을 입에 대지 않았다. 남편의 제상을 차려놓고 그옆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연산군의 학정을 저주하다가 죽음에 다달아 유언하였다. 《내가 오늘까지 살아있은것은 내 남편의 뼈라도 고향에 돌아오는것을 볼가해서였다. 떳떳이 생을 마친 남편을 떳떳이 맞이하고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못되였다. 남편의 유골을 모셔오거든 나와 함께 묻어달라. 황천에 가서라도 의로운 남편을 끝까지 의롭게 모시련다.》 이 소식을 듣고 리행은 《아! 나를 위해 권공뿐아니라 그의 안해까지 생을 바쳤구나. 내 하늘에 맹세하거니 나의 목숨은 이미 죽었다. 살아있다면 이는 권공부부의 소원을 지키기 위한것이다. 죽는 한이 있어도 이들의 념원대로 떳떳이 살아가리라.》 리행은 한생을 이 맹세대로 살았다.
《도리무화》
《도리무화》는 《중종반정》후에 다시 정계로 돌아온 리행에게 친구들이 붙인 우스개별명이다. 예로부터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는 꽃이 보기 좋아서 도리화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러니 《도리무화》란 꽃이 없는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라는 뜻이다. 그런데 《도리무화》가 어째서 리행의 별호로 되였는가? 《중종반정》후에 리행이 국가의 중요한 문제를 토의하는 곳인 도당에서 사인으로 있을 때였다. 이 사인벼슬은 그때까지 대체로 이름있는 대가집 젊은 귀공자를 골라서 시키는것이 관례였다. 이런 자리에 30대의 텁석부리가 들어앉았으니 이상할만도 하였다. 게다가 리행이 남녀세계에서는 아예 《중》이였다. 사인이 된 첫시기에 리행이 밖에 나갔다가 사무보는 방에 들어서니 벽에 《도리무화》라고 쓴 커다른 종이 한장이 붙어있었다. 그 뜻이 꽃 즉 녀자가 없는 리행이라는것을 알아차렸지만 그는 못본척하고말았다. 리행을 한바탕 놀려주려던 장난꾸러기들이 제풀에 싱거워져서 입을 다물었다. 오히려 그들이 붙인 이 별명은 방탕한 생활과는 담을 쌓고 지낸 리행의 점잖은 풍모를 반증하는 말로 되고말았다. 아마도 리행은 권달수부부를 잊지 못해 일생동안 방탕한 생활에는 발을 들여놓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것 같다.
말에서 떨어진 록사
리행은 30여년의 관료생활기간에 검박하게 생활하였다. 그의 집을 방문해본 사람은 누구나 이것이 고관대작의 집이 맞는가고 의심할만큼 매우 검소하게 살았다. 그의 집은 남산아래 청학동에 있었는데 집으로 들어가는 길 량옆에 그가 심은 갖가지 화초와 나무들이 무성하였다. 관가에서 집으로 들어오면 굵은 무명천으로 지은 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 지팽이를 짚고 이 나무들사이로 산책하면서 시를 읊고 글을 외우는것을 락으로 삼았다. 한번은 어두울무렵 관가의 록사 한사람이 급한 련락을 할 일이 있어서 말을 달려 리행의 집으로 다가왔다. 록사는 임명된지 얼마 안되여 리행의 얼굴이 익지 못한데다가 저녁 어스름이 굼실거리는 길로 말을 달리다나니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키큰 늙은이를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말탄 록사가 아이 하나를 데리고 동구밖으로 나서는 촌늙은이를 지나치다가 문득 말을 멈추고 돌아서서 물었다. 《말 좀 물읍시다.》 《무슨 말씀이요?》 《보아하니 이 마을에 사는 농사군 같은데 어느댁이 리정승대감댁이시오?》 《저기 저 대부동소나무 밑에 초당이 있는 그 옆이요.》 《그렇습니까. 대감님께서 댁에 계시는지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묻는 말이요?》 《급히 알려드릴 일이 있어 그럽니다.》 《그렇다면 어서 말하구려.》 《예?》 록사는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은 나무그늘이 가리워 누군지 모르고 물은것인데 농부차림의 촌늙은이가 태연히 이런 말을 하는것을 들으니 어정쩡해졌다. 《내가 리행이네.》 늙은이는 평범하게 대답했으나 록사는 화닥닥 놀랐다. 그 순간 너무 다급하던 나머지 고삐를 잡아당긴 탓으로 타고있던 말이 앞발을 쳐들고 호흐흥거렸고 록사는 말에서 뚝 떨어졌다. 리행이 급히 다가가서 록사를 부추겨 일으키며 근심했다. 《어디 다친데는 없는가? 원 사람도 말이 크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공골말 같았으면 큰 변이 날번했네.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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