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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탁 (1262ㅡ1342)
고려후기의 학자. 자는 천장이고 호는 역동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녕해군 사록이 되였다. 그후 중앙관청에 소환되여 감찰규정이라는 법기관의 벼슬을 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성균관의 제주라는 벼슬을 지냈다. 우탁은 당시의 봉건집권층이 취하는 그릇된 친원정책과 통치배들 내부모순의 격화로 고려의 운명이 날로 기울어지는데 격분하여 벼슬을 버리고 례안현으로 내려가 농촌생활을 하였다. 왕이 우탁의 강의하고 곧은 성품과 충의심을 존중하여 다시 벼슬살이를 하도록 불렀으나 이미 로년기에 이른 우탁은 봉건통치집단안의 부패무능에 환멸을 금할수 없어 왕의 부름을 거절하고 학문연구와 후대교육에 힘쓰며 창작에 열중하다가 생을 마치였다. 탐구심이 강한 우탁은 유교정서와 사서에 통달하였다. 문학분야에서 우탁은 시조창작과 그 발전에 기여하였다. 시조집들인 《해동가요》와 《가곡원류》, 《남훈태평가》에는 우탁이 지은 시조 3편이 올라있다. 이것은 고려시기의 여러 시조창작가들가운데서 우탁이 그중 많은 시조작품을 남긴것으로 된다. 우탁의 시조작품은 그 내용으로 보아 개경에서 벼슬살이를 할 때의 체험을 반영한것도 있고 벼슬을 내놓은 이후시기인 로년기의 심정을 읊은것도 있는데 그 밑바닥에 비록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봉건집권층의 그릇된 행위들에 동의할수 없는 그의 비판적인 태도가 놓여있었다. 대표작으로 시조 《림고대…》를 들수 있다.
《림고대…》
평시조.
림고대 림고대하야 장안을 굽어보니 운리제성 쌍봉궐이오 우중춘수 만인가로다 아마도 번화승지는 이뿐인가 하노라
해석] 높은 대에 오르고 또 높은 곳에 올라 장안을 굽어보니 구름속에 잠긴 개경에는 쌍봉궐이 있고 봄비에 나무는 푸르른데 만호의 집이 잠겨있구나 아마도 번화하고 경치좋은 곳은 이곳 뿐인가 하노라
이 시조는 당시의 수도 개경의 아름다운 풍치를 노래하고있다. 구름속에 싸인 개경의 왕궁, 봄비에 푸르러진 나무와 그속에 잠겨있는 10 000호의 주민가옥들, 마치도 수도의 맑은 공기와 봄비소리까지도 느껴지게 그려놓은 한폭의 풍경화라고 할수 있다. 수도 개경에 대한 사랑이 표현되여있고 그것을 통하여 아름다운 조국강산을 사랑하는 시인의 애국심이 소박하게 반영되여있다. 시조에는 어려운 한자문구가 많고 봉건유학자의 시점에서 수도풍경을 노래하였을뿐 인민대중의 생활감정을 반영하지 못한 제한성이 있으나 조국강산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수도풍경의 묘사를 통하여 노래하였고 발생 초시기의 시조형식을 능숙하게 활용한 점에서 문학사적의의가 있다.
바다속에 처넣은 귀신단지
우탁은 불같은 성미그대로 미신행위도 결패있게 막아냈다. 그가 동해기슭에 있는 녕해고을에 사록이 되여 부임한 직후였다. 고을의 거리바닥을 한바퀴 돌아보는데 으슥한 곳에 팔령사당이 찌글사하게 서있는것이 눈에 띄였다. 건물이라고 말할수조차 없는 볼품없는 사당안팎을 살펴보니 종이 오린것이며 울긋불긋한 천쪼박들이 걸려있어 바다바람에 어지럽게 꼬리치고있었다. 그런 주제에 바닥에 놓인 제사상우에는 떡, 과일, 물고기 등에다가 돼지대가리까지 얹혀있었고 향을 피운 연기가 가는 실오리처럼 피여오르고있었다. 《이것이 무슨 귀신사당이냐?》 우탁이 따라온 고을의 아전에게 물었다. 《예, 팔령신을 위한 사당이올시다.》 《그래, 그 팔령신이라고 하는 요사한 귀신이 이 고을 백성들에게 복을 가져다주었느냐?》 《저…》 아전은 새로온 사록이 이런 사당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알수 없어 약간 갑자르다가 어정쩡한 대답을 하였다. 《그건 잘 모르겠사오나 아무튼 이 고장 사람들은 병자가 생기던가 무슨 소원이 있으면 이 사당에 음식을 차려놓고 빕니다.》 《빌지 않으면?》 《저… 빌지 않으면 큰 화를 입는다고 모두들 겁을 냅니다.》 우탁은 당장 《에끼, 이 시라소니같은것들》하고 호령을 치고싶었으나 잠자코 숙소로 돌아갔다. 그 이튿날 우탁은 아전과 군졸 몇명을 데리고 어제 갔던 사당으로 다시 갔다. 《저 귀신사당을 허물어라.》 따라온 사람들이 아연해졌다. 지금까지 고을에 부임해온 관원들이 한둘이 아니였으나 어느 누구도 이런 령을 내린 사람이 없었는데 이번에 새로운 사록은 별난 소리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그들은 팔령신의 노여움을 사서 무슨 화를 입으려고 사당을 허물라는것인가 하여 우탁을 근심스럽게 쳐다보았다. 《무엇들 하느냐, 령을 지체없이 시행하지 못할고.》 그때에야 정신이 든 아전과 군졸들이 팔령신이 노해서 내리우는 벌을 근심하기에 앞서 당장은 분부시행을 안한 죄로 볼기맞을 걱정이 더해서 마지못해 사당을 허물었다. 우탁은 허물어버린 사당에서 귀신단지를 꺼내라고 하더니 그것을 가지고 자기를 따라오라는것이였다. 그는 바다가 절벽우로 갔다.
아전과 군중들이 그것만은 손이 떨려 주저하는데 우탁은 뢰성같은 호령으로 어서 던져넣으라고 독촉하였다. 그는 끝내 귀신단지를 바다물속에 내던지는것을 보고야 돌아왔다. 그날 고을의 한 모퉁이에서는 우탁에 대한 뒤소리가 수근수근 돌아갔다. 《팔령사당의 령험한 신령님이 노했을테니 새로 온 사록이 오늘밤을 무사히 못넘길거야.》 《그것도 그거지만 우리 녕해고을에 무슨 벼락이 떨어질지 누가 알가베. 그것을 생각하면 윽, 오한이 난다.》 그러나 밤이 지나고 새날의 해가 떠오른 이튿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젊은 사록은 고뿔 한번 앓지 않았고 고을도 아무일 없었다. 이리하여 고을의 몽매한 축들도 차츰 팔령신을 믿는다는것이 허황한 노릇인줄 깨닫기 시작했고 우탁이 있는 동안 녕해고을에 귀신사당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공경대부들은 자기의 죄를 아는가》
젊어서 불같은 성미였던 우탁은 장년기에 이르러 칼날우에도 올라설만큼 강직한 인간으로 성숙되였다. 우탁이 감찰규정으로 소환되여 개경을 올라온 후에 있은 일이다. 1309년에 충렬왕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이 왕의 자리에 들어앉게 되였다. 다섯해밖에 왕노릇을 못한 이 충선왕은 몹시 부화방탕한 인간이였다. 그래서 사람들의 말밥에 오르군하였는데 한번은 그 부화방탕이 도를 지내 넘어서 사람들의 분격을 자아냈다. 그때 왕궁에 숙창원비라는 녀인이 있었는데 충선왕은 다치지 말아야 할 이 녀인을 욕보였던것이다. 여론이 물끓듯하였으나 왕의 측근신하들은 제 목과 벼슬자리가 아까워서 왕의 이 인륜도덕에 어긋나는 폭행을 모르는척하고있었다. 이런짓이 사람들을 더욱 격분하게 만들었다.
일이 이렇게 번져지자 근신들은 누구도 감히 우탁의 글을 왕에게 전할념을 못하고 손만 와들와들 떨었다. 이 꼴을 본 우탁은 추상같은 추궁으로 근신들을 개몰듯 하였다. 《공경대부(고관)들은 자기의 죄를 아는가. 상감마마의 측근신하인 그대들의 잘못때문에 임금이 오늘과 같이 그릇된 행동을 하게 된줄 모르는가. 아직도 자기의 죄를 모르는가 말이다.》 이 말에 근신들은 땀을 뺐고 왕도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사람들은 말하기는 쉽지 실지로 우탁과 같이 결사의 각오로 이렇게 행동하기는 만에 하나도 쉽지 않다고 하였다.
몸은 비록 늙었어도
열정의 인간 우탁도 다가오는 늙음만은 막아낼수 없었다. 그는 조용한 틈을 타서 시조를 지어 불렀다.
한손에 막대 잡고 또 한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터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그가 지은 시조에는 이런것도 있었다.
춘산에 눈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데 없다 저근듯 빌어다가 마리우희 불니고저 귀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볼가 하노라
※ 저근듯ㅡ잠간만 ※ 마리우희 불니고저ㅡ머리우에 불게 하여 ※ 서리ㅡ백발
우탁이 이처럼 늙어가는 몸을 두고 한탄하는 노래를 부른것은 단순한 생의 애착때문만이 아니였다. 그는 몸은 비록 늙어가도 학문탐구에서는 늙음을 모르는 정열가였다. 로학자 우탁의 학문에 대한 열도가 얼마나 뜨거웠는가 하는것을 말해주는 하나의 일화만 들어보아도 그가 어째서 늙음을 막아보겠다고 노래했는가에 대해서 잘 알수 있다. 그 무렵 이웃나라에서 동양철학의 한개 류파인 성리학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퍼지기 시작했다. 이 학설은 송나라 학자들인 주돈이, 정이, 주희 등이 내세운 학설인데 생겨난지 얼마 안되였던것이다. 처음 들어와서 퍼지기 시작한 생소한 학설이여서 우탁이 살고있는 고장에서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우탁자신도 얼핏 읽어보아서는 내용이 잘 안겨오지 않았다. 더우기 난감한것은 젊은이들이 그 학설에 대하여 물을 때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것이였다. 우탁은 결심했다. (이거 안되겠군. 아무리 내가 늙었어도 정신을 차리고 들여다보아야 하겠군.) 그는 방문을 안으로 닫아매고 일체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집안식구들은 로인이 그러다가 잘못될가봐 겁이 나서 속이 달았고 찾아온 나그네들은 면회거절의 리유를 알고 젊은이들도 새우기 힘든 밤을 연거퍼 새우는 우탁에게 진심으로 존경의 뜻을 표시하고 돌아섰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고 열흘 스무날이 흐르고 한달이 되였다. 드디여 우탁은 굳게 닫아맸던 방문을 활짝 열어제꼈다. 그 소식을 듣고 즉시에 젊은이들이 물밀듯이 찾아들었다. 우탁은 달포동안이나 쉬임없는 탐구를 하였지만 학문토론에서는 조금도 지친 기색없이 제기된 질문을 죄다 풀이해주었다. 강의를 듣고 나온 젊은이들은 탄복했다. 《과시 우리 스승은 〈역동선생〉이야. 동방의 큰 철학가라는 호를 들을만하다니까.》 《노력이 천재라고 하지만 우리 선생님의 그 노력과 열정은 학문을 발전시킬 자각과 결심의 산물이거던. 그 결심에는 늙음도 길을 비켜선다고 할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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