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자

(1188ㅡ1260)

 

고려중기의 문인. 그의 첫 이름은 종유 혹은 안, 호는 동산수이다. 성품이 순박하고 인정이 후하였으며 입이 무겁고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무슨 일에서나 꾸준하였고 특히 공부에서 노력가, 탐구가였다.

그는 13세기초에 과거급제하여 경상도 상주의 지방관원으로 벼슬살이 첫걸음을 내디딘 이후 1260년에 중서평장사의 관직을 마지막으로 하여 72살로 생을 마친 전기간에 지방관으로서는 정사를 공정하게 한다는 평과 인심을 얻었다. 중앙관청에 들어와서는 교육과 학문연구, 문화부문사업에 주로 관여하였다. 이 과정에 최자는 공적도 많았지만 흠집도 있었다. 몽골이 침략해왔을 때 대책을 토의하는 고관들의 회의에서 화의를 제기하는 오유를 범하였던것이다.

최자의 작품으로 약간의 시작품과 《보한집》이 남아있다. 비록 남아있는 글이 많지 않으나 그 글들은 뜻이 품위있고 형상이 고상한것으로 하여 고려중엽의 민족문학발전에 의의있는 기여를 하였다.

 

《 보 한 집 》

 

1254년에 집필된 패설집. 3권으로 되여있다. 리인로의 《파한집》이 나온 뒤에 만들어졌고 또 《파한집》의 내용을 보충하는 의미에서 집필되였다고 하여 《보한집》 또는 《속파한집》이라고도 불리웠다. 단행본으로 간행된것, 《파한집》, 《익재집》, 《동인시화》 등과 합본하여 출판한 활자본도 있다.

최자는 《파한집》을 보충하여 날이 감에 따라 점점 없어질 우려가 있는 시가유산들을 기록에 남기고 후세에 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보한집》을 집필하였으므로 문학유산의 수집범위를 훨씬 넓히였다. 그는 《보한집》 서문에서 이에 대하여 밝히면서 지어 중들과 아녀자들에 관계되는 일이지만 이야기거리로 될만 한것들은 그 시가 비록 잘되지는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아울러 다 기록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보한집》에 실린 자료는 《파한집》의 2배에 달하는 150편이나 되였다. 그중 대부분은 최치원, 박인량, 정지상, 리인로, 림춘, 오세재, 김극기, 진화, 리규보 등의 시작품과 그에 관련된 일화들이다.

그는 재능있는 시인들과 시작품들을 소개하면서 창작동기, 창작과정, 시의 특징, 시에 대한 자신의 미학적견해도 서술하였다.

《보한집》에는 또한 같은 뜻을 표현하는 경우에도 시어와 운률에 따라 형상의 질과 수준에서 차이가 생긴다는것을 밝히였다. 이와 함께 시는 마땅히 뜻과 형식을 다같이 중시하여야 우수한 작품으로 될수 있다는 최자의 견해도 제시되여있다.

《보한집》에는 강감찬을 비롯한 력사적인물들에 대한 일화, 명승고적과 구전설화와 관련된 자료들도 적지 않게 실려있다.

이와 같이 《보한집》은 다양한 소재와 여러가지 형식의 이야기들을 많이 싣고있어 고려중엽 예술산문의 발전정형과 특성을 연구하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특히 개인문집이 없거나 원래는 있었는데 중간에 없어진 문인들의 작품과 창작이야기가 많이 실려있는것은 귀중한 문헌사료적가치를 가진다. 정지상, 박인량, 리인로, 림춘, 진화, 김극기 등의 작품들과 창작이야기들은 적지 않게 《파한집》과 함께 이 《보한집》을 통하여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였다.

이 책에는 또한 김극기의 작품집편찬과 관련한 이야기, 별곡체의 노래와 《별조》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고려시기 시집편찬사업과 특히 당시의 국어가요의 연구에 의의있는 사료들도 실려있다.

《보한집》에는 량반선비들의 유흥적인 생활감정을 반영한 작품들을 소개하고 작품평가에서 사대주의적표현들도 있는 제한성을 가지고있다. 일련의 제한성을 가지고있으나 《보한집》은 《파한집》에 이어서 편찬된 패설이라는 종합적인 작품집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는 문화유산으로 된다.

 

《남쪽언덕의 버들》

 

한자시.

 

남쪽언덕의 버들 한그루

실실이 늘어져 바람에 나붓기네

 

빈 밑둥속엔 독사가 들었는데

약한 가지에선 꾀꼬리가 우누나

 

추운 겨울에는 꼼짝 못하다가

봄이 따뜻하면 하느적거리거니

 

아무리 백길이나 높이 자란들

이런 나무야 어디다 쓰랴…

 

시는 간신들이 판을 치고있는 당대의 무능한 조정을 구새먹은 버들에 비유하여 풍자하였다.

시에서는 뜻이 깊은 시어들을 형상적론리에 맞게 재치있게 쓰고있다. 속이 텅 빈 나무밑둥은 무력한 조정을 상징하였고 그속에 숨어서 도사리고있는 독사는 조정에 깊숙이 숨어있는 간신들을 의미하였다. 시인은 간신들을 독사에 비유함으로써 사람들의 생명을 해치는 악독하고 징그럽고 못된 놈으로 락인하고있다. 그리고 이런것이 구새먹은 밑둥에 도사리고있는 버들 즉 조정의 위험한 상태를 폭로하였다.

시인은 시의 앞부분에서 조정이 썩고 병든 버들꼴이 되여 밑둥에서는 독사ㅡ간신들이 해독행위를 하고 실실이 가지가 늘어진 웃쪽에서는 꾀꼬리ㅡ부화방탕한 관료들이 노닐고있다고 하면서 뒤부분에서 이런 썩은 버드나무가 아무리 백자높이로 자란다 한들 어디에다 쓰겠는가고 토로하였다. 나라를 구원할 옳은 방도를 인민들의 힘에 의거하여 적극적으로 제기하지는 못했으나 나라의 운명을 근심하는 애타는 심정을 진실하게 표현하였다.

 

기이한 벼락출세

 

무신정권의 실권자 최이가 정치를 쥐락펴락하고있을 때였다. 최이는 자기가 자는 침상뒤에 커다란 병풍을 하나 둘러쳐놓았다. 그 병풍에는 멋부리기 좋아하는 벼슬아치들이 다 그러하듯이 아름다운 자연풍경이나 화초, 그림도 아니고 옛 문인들의 명시, 명문장도 아닌 사람 이름만 잔뜩 적혀있었다. 최이는 아침, 저녁으로 이 병풍에 제손으로 적어넣은 사람이름들을 받는 소처럼 들여다 보다가는 이 사람이름 저 사람이름에 저 혼자 아는 기기묘묘한 표식을 하군하였다. 그 이름이란 최이의 눈안에 든 사람들의것이였다.

최이는 조정의 실권을 무력으로 틀어쥐고 제마음대로 휘두르지만 반대파가 암암리에 활동하는것이 두려워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 최충헌도 사람들에게 범같이 무섭게 굴어 반대파가 그의 생명을 노리였다. 무신정권의 력대실권자들이 그러하였듯이 최이도 문관들의 반란이 소름끼치도록 무서웠다. 그리하여 최이는 문관등용에 최대의 신경을 도사리면서 문관이든 무관이든 등용하는 기준에 따라 순서를 정한 다음 그것을 병풍에 쭉 적어두고 아침, 저녁으로 들여다보군 하였다. 그중 최자의 이름은 맨 아래줄 한쪽 구석에 있다나니 10년동안을 국학학유라는 직책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있었다.

이러한 최자에게 관직의 계단을 몇단씩이나 뛰여오를수 있는 희한한 기회가 닥쳐왔다.

최이가 한번은 리규보를 만나 느닷없이 이런 말을 꺼냈다.

《공께서 이제는 년세가 높으신데 뒤를 이어 나라의 문화를 맡아 이끌어나갈 후임을 선정해야 할것 같습니다. 누가 적임자인것 같소이까?》

리규보는 최이의 말을 듣고 머리에 떠오르는 문인재사들을 하나하나 상기해보았다. 리백순, 리항, … 리규보는 이러한 이름들을 다 지워버리고 문득 최자를 생각했다.

(이 사람이면 내 뒤를 이어 이 나라 문학과 문화전반을 짊어지고 나갈만하고 또 최이의 까다로운 성미로도 군말을 못하겠지.)

리규보는 무게있는 어조로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국학학유에 최안(최자)이라는 선비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첫째이고 두번째 적임자가 김구라고 생각하오.》

《최안이요?》

최이는 알릴듯 말듯 고개를 약간 기웃거리다가는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말머리를 돌리고말았다. 평범하게 시작되여 짤막하게 끝난 대화였다.

그날 최이는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병풍부터 들여다보았다.

병풍에는 사람이름들이 우에서부터 아래로 4등급으로 구분되여 적혀있었다. 제일 웃줄에는 글도 잘하고 벼슬살이물계도 잘 트인 사람들의 이름이 있었다. 이것은 더 말할것 없이 최이의 눈에 제일 잘 보인 사람들의 이름이였다. 글을 잘한다는 기준도 최이 생각으로 그렇게 생각되는 사람이고 벼슬살이물계가 잘 트이였다는것도 바꾸어말하면 최이자기에게 고분고분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 이 많지 않은 사람이 고위관료등용의 첫째 후보인것이다. 두번째 부류는 글을 잘하기는 하지만 벼슬살이하는데서는 좀 둔한 축이였다. 벼슬살이에서 둔하다는것은 최이에게 입안의 혀처럼 굴지 못하고 좀 꿋꿋하기는 하여도 고지식해서 최씨집권에 반기를 들지는 않을 사람들이였다. 세번째층은 벼슬살이는 잘할것 같으나 글이 모자라는 부류였고 마지막층은 출신가문을 보아서나 인맥관계로 보아서는 벼슬을 시켜주어야겠으나 글도 모자라고 관료재목도 못되는 인물이였다. 이 넷째부류에는 최이의 눈에 신통해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이름이 올라있었다.

최이가 차례로 훑어내려가니 네번째 부류 맨 꼬리부분에 《최자(최안)》라는 이름이 있었다.

최이는 또 고개를 기웃했다. 이 변변치 못한 사람을 리규보가 어째서 후임으로 추천하였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최이는 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 침상우에 벌렁 누워버리고말았다. 리규보가 자기만 아는 내막이 있는것을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말한적이 없는 까닭이였다.

언제인가 최자는 우미인초의 노래와 수정술잔시를 지은 일이 있었는데 이 파격적인 노래와 시가 리규보의 눈에 들어서 기발하다는 인상을 준 일이 있었다. 그후로 리규보는 자기 아들 나이인 최자를 주시하였고 그 과정에 이 사람이 훌륭한 문인으로 두각을 나타내리라는것을 믿어마지 않았던것이다.

이런줄 모르는 최이는 리규보에게 자기의 눈에 차지 않는 최자를 추천하는 리유가 무엇인가고 물어볼수도 없어서 혼자 생각으로 자신이 직접 시험해보리라 결심하였다. 이 끈질긴 실권자가 처음에 최자를 불러 외교문서를 몇자 씌여보았더니 의외로 사리정연하고 주장이 뚜렷한 글을 쓰는것이였다. 다음은 리규보에게 시험제목을 내게 하여 여러 젊은이들을 시켜 답안을 쓰게 해서 그것을 다시 리규보가 채점하게 하였다. 무려 열번이나 시험을 반복 실시하였는데 다섯번은 최자가 1등합격하고 나머지 다섯번은 최자가 2등 합격을 하였다. 삶은 게다리도 흔들어보고야 먹을만큼 집요하고 세심한 최이였으나 최자의 글재주를 충분히 리해하게 되였다. 그는 이것으로 그만둘수 없었다. 최자의 벼슬살이능력을 검열해보아야 하였다. 최이는 최자에게 급전도감 록사라는 말단직무를 맡겨보았다. 최자는 이 일을 군말없이 잘 처리하였다. 사람됨이 성실하여 웃사람에게 아첨할줄 모르고 나타난 사실대로 처리하였으며 처리한대로 기록해두는것을 보니 앞으로 휘여잡기가 조련치 않을것 같은 우려가 없지 않았으나 최자가 관가공무를 처리하는 능력만은 훌륭하다는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최자는 이때부터 높은 벼슬에 오르게 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을 두고 사람들은 최자와 같은 인재의 성실성은 최이뿐아니라 누구도 어쩌지 못한다고들 칭찬하여마지 않았다. 최자는 자기의 성실성과 진지한 노력으로 문학분야에서도 나라의 문화유산을 수집하고 산문과 시들을 지어 13세기 전반기 문학발전에 이바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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