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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규 보 (1168ㅡ1241)
고려시기의 시인. 자는 춘경, 호는 백운거사이다. 처음 이름은 인저였다. 경기도 황려현(오늘의 려주지방)의 량반가정에서 출생하였다. 73년간에 걸치는 그의 생애는 10대의 문학수업기, 20대의 서사시, 장시 창작기, 30~40대의 《민본》사상에 기초하여 농민을 동정하는 사실주의시가문학의 창작기, 50~60대의 반침략애국주의시가문학의 창작기로 구분할수 있다. 그의 문학수업은 7살때 아버지 리윤수를 따라 개경에서 살면서 시작되였다. 이때 그의 이름은 인저였다. 남달리 총명하였던 그는 9살때 벌써 글을 잘 지어 사람들로부터 기동(신기한 재주동)이라고 칭찬을 받았다. 11살때에도 재치있는 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래운 일화를 남겼다. 이 시기 리규보는 글공부를 하는 목적에서 아버지와 생각을 달리 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이 글공부를 열심히 하여 남보다 일찍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서서 부귀공명을 누리며 가문도 빛내일것을 바랬다. 그러나 리규보는 장차 창작을 잘하여 나라의 문학을 빛낼 포부를 지니고 글공부를 정력적으로 하였다. 그는 리인로, 림춘, 오세재, 리담지 등 《해좌칠현》의 문인들과도 접촉하면서 이들의 문학적영향을 받았다. 아버지의 권고로 과거시험에도 여러번 응시하였으나 거듭 실패하다가 늦게야 장원급제하였다. 이후부터 이름을 규보로 바꾸었다. 과거에 올랐으나 그의 발길은 벼슬살이길이 아니라 천마산속에서의 창작생활로 이어졌다. 23살에 천마산으로 들어가 책읽기와 창작에 열중하였다. 1194년에는 서사시 《동명왕편》을, 그 이후에 장시 《천보영사시》, 《3백2운시》를 창작하였다. 20대말 30대초에 여러 사람들의 공동추천으로 그의 등용문제가 론의에 올랐으나 리규보의 해박한 지식과 재능을 시기하는자들의 모해와 방해책동으로 오래동안 실현되지 못하다가 1199년에야 비로소 전주 목사로 임명되였다. 첫시작부터 곡절을 겪은 리규보의 벼슬살이길에는 동도지방에서 일어난 농민들의 폭동을 진압하는데 참가하는 그릇된 걸음도 있었고 무신통치의 실권자 최충현과 타협한 떳떳치 못한 일도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지방관으로 떨어져내려가기도 하고 외딴섬에 귀양살이도 갔다. 고심많은 이 벼슬살이과정에 그는 당대의 정치계와 사회현실의 착잡한 내막을 뼈저리게 목격하고 체험하였다. 그는 20대에 랑만적필치로 민족력사의 과거사를 노래하였던 눈길을 장년기에 와서는 사실주의적필치에 비판적기개를 담아 현실문제를 취급하는데로 돌리였다. 《느낀바 있어》, 《원살이 락이라고 하지 말라》, 《퇴근하니 할일 없어》, 《눈이 흐려짐에 느낀바 있어 전리지에게 써보내노라》 등 이 시기에 창작된 시작품들에는 벼슬살이에 환멸을 느끼고 자신의 무력함을 통탄하며 삶의 참된 길을 몰라 모대기는 시인의 체험세계가 노래되고있다. 곡절많은 체험과 진지하고 열정적인 현실탐구과정에 그는 농민들의 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였으며 이 세상의 부를 창조하는 농민들이야말로 천하의 근본이라는 사상적견해를 가지게 되였다. 성실한 로력으로 나라를 받드는 농군들을 마음껏 위해주지 못하는것을 죄스럽게 생각하는 리규보의 절절한 심정은 시 《농부를 대신하여 읊노라》, 《소를 때리지 말라》, 《햇곡식의 노래》, 《홀어미의 탄식》 등에서도 울리였다. 추위에 떨고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근면성을 잃지 않고 깨끗하고 순박하게 살아가는 농민들에 대한 뜨거운 동정은 억압자, 착취자들에 대한 참을수 없는 분노를 낳았다. 시 《군수 몇놈이 뢰물을 받다가 죄를 입었다는 말을 듣고》, 《손한장의 노래에 다시 회답하노라》 등에서 그는 통치배들과 권세가들의 파렴치한 착취와 호화로운 생활이 백성들에게 얼마나 막대한 해를 끼치고있는가를 폭로규탄하였다. 50대 이후부터 리규보는 호부상서, 정당문학, 참지정사 등의 높은 벼슬을 하였을뿐아니라 1232년에 몽골의 침략세력이 쳐들어왔을 때에도 늙은 몸으로 군복을 입고 나라를 지키는 싸움에 나섰다. 그러나 말년의 관료생활도 순탄치 않아 강직과 류배의 곡절을 겪었다. 이 시기의 곡절은 리규보의 세계관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시기에 농민들을 동정하여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던 립장에서 벗어나 농민들을 위하는 립장에서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절절하게 웨쳤다. 또한 시 《추위를 물리치는 서각》, 《이불속에서 웃노라》 등에서는 통치세력들의 끝없는 탐욕과 위선적인 생활풍조를 예리하게 폭로풍자하였다. 시 《나라에서 농사군이 맑은 술과 흰쌀밥 먹는것을 금지하는 령을 내렸다는 말을 듣고》, 《며칠후에 다시 쓰노라》에서는 농민들의 빈궁과 관료들의 호의호식이 몇몇 간신들의 악행에 의해서뿐만아니라 나라의 그릇된 정사에 의해서 초래되였음을 신랄하게 까밝히면서 그릇되고 불공평한 법을 없앨것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처럼 리규보는 창작의 전과정에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사회의 불합리와 모순을 깊이 들여다본데 기초하여 착취자, 권력자들을 폭로규탄하였으며 농민들의 생활처지를 동정하고 옹호해나섰다. 또한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에는 직접 전복을 입고 전장에 나섰으며 시 《10월의 번개》, 《전승소식》, 《다시 쓰노라》와 같이 원쑤격멸의 사상감정을 담은 우수한 작품들도 내놓았다. 그밖에 《딱따구리》, 《금전화》, 《동백꽃》 등 자연풍경을 실감있게 노래한 작품들과 《꼭두각시놀이를 보고》, 《7석날 내리는 비를 두고》 등 인정세태와 민속풍습을 밝고 명랑한 정서로 노래한 작품들도 창작하였다. 그는 일생동안에 방대한 량의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그의 작품집 《동국리상국집》(53권)에는 2 000여수의 시와 700여편의 산문이 실려있다. 산문으로 패설작품집 《백운소설》, 의인전기체작품들인 《국선생전》, 《청강사자 현부전》 등이 알려져있다. 그는 이밖에도 기일원론의 유물론적견해를 비롯하여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사회미학적견해들도 많이 제기하였다. 리규보의 창작은 그에 일관된 강렬한 애국사상과 현실비판정신, 근로하는 인민에 대한 사랑의 감정, 당대의 의의있는 사회적문제의 제기와 사실주의적진실성으로 하여 고려시기문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며 또한 우리 나라 중세문학사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 동 명 왕 편 》
1193년에 창작한 장편서사시. 해모수와 고주몽에 대한 설화에 기초하여 고구려의 건국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나라 력사에 대한 사랑의 감정과 고려봉건통치배들의 부패무능에 대한 비판의 감정을 노래하였다. 작품은 머리시와 맺음시 그리고 내용상 두개 부분으로 갈라지는 본시로 이루어져있다. 머리시에서 시인은 해모수신화와 주몽전설에는 나라가 건립될 때의 신성한 자취가 반영되여있으므로 이것을 후세사람들에게 길이 알리고저 한다고 그 창작동기를 밝히고있다. 본시의 전반부에서는 부여국의 건국과 관련되는 해모수신화를 이야기하고있다. 시인은 력사문헌기록과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에 토대하여 해모수를 천제의 아들로, 다섯마리 룡이 끄는 수레를 타고 하늘땅을 자유로이 오르내리는 신화적모습으로 그렸다. 이 부분에는 해모수가 부여땅에서 정치를 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룡왕 하백의 딸 류화를 안해로 삼으며 바다속으로 들어가 룡왕과 경쟁을 하여 이기며 류화를 두고 혼자 하늘로 다시 올라가는 등의 이야기들이 묘사되여있다. 본시의 후반부에서는 고구려의 건국과 관련되는 주몽전설을 이야기하고있다. 시인은 주몽을 형상함에 있어서 신화적요소를 완전히 벗지는 못하였으나 해모수와는 달리 인간생활에 기초하여 힘이 세고 재주있는 산사람의 모습으로 그리고있다. 주몽은 부여에서 고생스럽게 자라다가 나라를 세울 큰뜻을 품고 그곳을 뛰쳐나와 남쪽으로 내려와 송양왕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후 고구려를 세우고 그 륭성을 위하여 힘썼다고 했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하여 신비롭고 호방한 해모수, 아름답고 소박하며 지혜로운 류화, 힘차고 름름하며 재주있는 주몽 등의 인물을 신성화하고있으며 륭성발전하던 고구려시대를 찬양하고있다. 시인은 주인공들의 신기로운 사적을 객관적으로 노래하는데 머물지 않고 자기가 살고있던 고려의 봉건통치배들을 비판하고있다.
… 태고적 인심이 순박할 때에는 신비롭고 성스러운 일 헤아릴수 없이 많았어라 세월이 흘러흘러 사람들의 마음이 야박해지고 풍속도 사치해지자 세상에 거룩한 사람 나지 않고 신비로운 자취도 드물어졌도다 … …
시에서 시인은 고구려의 건국위업을 이룩한 시조 동명왕의 사적에 대한 찬양을 통하여 고구려사람들의 애국의 넋을 굳건히 지켜가지 못하는 당대의 통치자들을 비판하였다. 시인은 주인공들의 형상창조에서 서사적묘사와 서정적묘사를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자신의 랑만주의적지향이 담겨진 서정풀이를 적절히 배합하고있다. 《조상의 위업》을 잇지 못하고있는 고려봉건통치배들에 대한 시인의 불만은 어디까지나 봉건유교적인 왕도사상에 기초한것이며 작품에 반영된 그의 지향도 리상적인 봉건제왕에 대한 념원에 기초한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거기에 담겨진 애국적감정,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정신으로 하여 일정한 의의를 가진다. 특히 우리 나라 시문학사에서 지금까지 알려지고있는 첫 장편서사시라는 점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나라에서 농사군이 맑은 술과 흰쌀밥 먹는것을 금지하는 령을 내렸다는 말을 듣고》
13세기 전반기에 창작한 한자시. 《동국리상국집》 후집에 실려있다. 시는 리규보의 창작에서 천대받고 억압당하는 농민들의 생활처지를 동정하고 봉건통치배들의 악랄한 착취행위를 폭로한 대표적작품이다. 시인은 국가의 권력을 독차지하고 나라의 정사를 좌지우지하던 반동통치배들이 가난한 농군들은 맑은 술과 흰쌀밥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부당한 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규탄하며 이 시를 지었다. 시에서는 먼저 1년내내 들판에 나가 허리가 휘도록 일하며 곡식을 마련하는 농사군들이 맑은 술과 흰쌀밥을 먹는것이 너무나 응당한 일인데 그것을 금하는 령을 내린것은 잘못된 일이라는것을 밝히고있다. 다음으로 시에서는 량반통치배들의 호화로운 생활은 모두가 농민들의 피땀으로 이루어진것이라고 하면서 잘사는 놈들은 매일과 같이 무수한 재물을 탕진하여 없애버리면서도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부려먹을줄만 알지 그들을 《먹여살리는데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규탄하였다. 시에서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농민들의 성격적특질을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쉬임없이 일하며 애지중지 곡식을 키워가는 로동속에서 보여주었으며 땀흘리며 농사를 지어 수만사람들을 먹여살리면서도 자신들은 갖은 천대와 멸시속에 누데기옷을 걸치고 추위에 떨며 굶주림속에 살아야 하는 그들의 억울하고 비참한 처지를 생동하게 그려내였다. 시는 다음으로 당대의 현실에서 농민들이 당하는 억울하고 기막힌 생활처지가 바로 봉건통치배들의 략탈과 그놈들을 비호하는 그릇된 정사에 의하여 빚어지고있다는것을 밝히였다.
… 구슬같이 희디 흰 밥과 깊은 물같이 맑은 술은 바로 농사군들이 만든것이니 그들이 먹는것을 하늘인들 허물하랴 여보게 권농사 내말 듣게 나라의 법이라도 잘못되였네 …
시는 당대 현실의 불공평성과 불합리를 비판하면서도 그를 바로잡을 방도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시는 이러한 제한성을 가지고있으나 우리 나라 중세기 시문학에서 근로하는 농민의 형상을 창조하였으며 그들이 당하는 고역과 비참한 생활처지를 통치배들의 호화로운 생활과의 대조속에서 사실주의적으로 진실하게 보여준 점에서 중요한 문학사적가치를 가진다.
《이불속에서 웃노라》
13세기 전반기에 창작한 한자시. 한자로 된 원래의 제목은 《금중소》이며 《동국리상국집》에 실려있다. 시는 봉건통치계급의 추악한 생활과 저렬한 정신도덕적면모를 폭로비판한 풍자적성격의 작품이다.
… 사람이 사노라면 우스운 일 하도 많아 낮에는 바빠서 다 웃지 못하고 밤중에 이불속에서 혼자 웃노라 손벽을 치며 소리내여 웃노라 …
시에서 풍자의 대상으로 되고있는것은 글재간이 모자라 보통때는 쩔쩔 매다가도 높은 사람앞에서는 잘난체 뽐내는자, 뢰물을 받아 깊숙이 감춰둔것을 다른 사람들이 다 알고있는데도 자기는 물같이 청백하다고 떠드는자, 거울을 보고도 못난것을 모르고 그 누가 곱다고 춰주면 정말로 잘난체 아양을 떠는자, 매사에 요행을 바라면서도 제 잘나서 높아졌다고 떠드는자들이다. 이와 함께 중들도 풍자의 대상으로 삼고있다. 시는 이러한 형상을 통하여 공명과 출세, 허위와 위선, 아부아첨과 뢰물행위, 자고자대와 허장성세, 안일사치와 부화방탕 등 고려봉건사회가 낳은 정신적불구자들의 추악한 정신도덕적면모를 풍자적으로 신랄히 폭로하였다. 시는 재치있는 풍자의 수법과 비판의 예리성 등으로 하여 고려후반기 풍자시문학의 대표적작품으로 되고있다.
《청강사자 현부전》
의인전기체산문. 주인공 현부(거부기)는 나라에 공을 세운 이름있는 가문에서 태여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여났다. 일찌기 천문과 지리를 깊이 연구하여 자연과 인간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다 예측하였고 또 신선의 기운에 통하여 죽지 않고 오래 사는 방법을 배웠다. 그는 무예를 숭상하여 늘 갑옷을 입고 다녔다. 현부의 재주가 뛰여났다는 소문을 듣자 왕이 신하를 보내여 그를 불렀다. 그러나 현부는 찾아온 신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벼슬길에 나서는것은 소원이 아니였기때문이였다. 그는 자기를 찾아온 신하에게 이런 노래를 들려주었다.
진흙속에 노님이여 그 즐거움이 다함없도다 벼슬길의 총애를 내 어찌 기약하랴
노래는 현무가 벼슬살이가 아니라 제고장에서 일생을 마음편히 지내는것을 소원한다는 의사를 표현한것이였다. 그후에 예차(그물로 거부기를 잡았다는 사람)가 나서서 한편으로는 왕에게 현부를 추천하고 다른편으로는 현부를 음흉하게 타일러 그를 왕에게 데리고갔다. 왕은 기뻐서 현부에게 벼슬을 주려고 한다. 현부는 왕에게 임금이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와서 만나보았을뿐이요 벼슬은 자기가 바라는 바가 아니라고 하면서 놓아달라고 한다. 왕이 더는 현부의 뜻을 굽힐수 없음을 알고 돌려보내려고 하였으나 신하 위평이 현부를 조정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평의 말을 듣고 현부에게 수현승의 벼슬을 주어 등용하였다가 다시 도수사자로 승급시켰고 얼마후에는 대사령의 높은 벼슬을 주었다. 왕은 나라의 흥망에 관한 중대사들을 늘 현부와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현부의 명망은 온 나라에 알려지게 되였고 나라일도 많이 펴이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날 왕이 현부에게 롱삼아 말했다. 《그대는 신명의 후손으로 길흉을 예측하는 터에 (옛날에 거부기 등껍데기를 구워 길흉화복을 점치는 풍속이 있었다) 제손으로 자기 앞길은 열어가지 못하고 예차의 모략에 빠져 나에게 등용되였으니 어찐 일인가.》 현부는 《아무리 밝아도 보지 못하는데가 있고 지혜로워도 미치지 못하는데가 있기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현부는 그후 어리석은 왕이 자기를 리해하지 못하자 정계에서 소리없이 물러나 종적을 감추고 만다. 작품은 이와 같은 이야기의 기본줄거리에 이어 현부일가의 운명이 덧붙여 적혀있다. 현부의 맏아들과 셋째아들은 잡혀서 삶아 먹히우고 둘째아들도 명망을 떨쳤으나 자기의 뜻을 더 펴지 못하고 만다. 작가는 작품의 마감에 이런 글을 남긴다. 《지극히 적은데까지 살피여 그 어떤 징조를 미연에 방지한다는것은 성인도 혹시 어그러질수 있게 되는 법이다. 현부의 지혜로써도 예차의 모략을 미리 막지 못하였으며 또 두 자식이 삶아먹히우는것을 구해내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그밖의 일이야…》 작가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 현부의 운명을 통하여 저들에게 필요할 때는 리용하다가도 리용가치가 없을 때는 내버리는 어리석고 신의없는 왕의 처사를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현부와 같이 좋은 일과 나쁜 일을 예측할줄 알고 나라일을 많이 펴이게 하는 능력있는 인재라 하여도 어리석은 왕밑에서는 자기의 운명은 물론 자식들의 목숨도 지켜내지 못하고 도피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것을 까밝히였다. 작품의 이러한 내용에는 곡절많은 당시 문인들의 운명과 자기자신의 가슴아픈 체험이 안받침되여있다. 왕에게 현부를 추천한 예차, 그는 그물질을 하여 거부기잡이를 하는데 이골이 난자이다. 왕이 말하는것처럼 현부는 이 예차의 모략에 의해 벼슬길에 끌려든다. 이것은 30대초의 리규보가 최충헌의 알선으로 벼슬길이 열렸던 사실을 방불케 한다. 리규보는 이 무신통치의 실권자에 의해 벼슬길이 열렸지만 나중에는 또 지방관직에 쫓겨가기도 하였다. 예차와는 다른 립장에서 현부를 벼슬길에 붙들어주는 사람 위평, 리규보의 벼슬길에는 이와 비슷한 인물들도 있었다. 리규보의 재능을 귀히 여겨 왕에게 적극 추천한 조영인, 임유, 최선 등이 그러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도 위평이 현부의 운명을 마지막까지 담보하여주지 못한것처럼 리규보의 벼슬길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하였다. 《청강사자 현부전》은 작가자신의 체험과 당대 문인들의 운명을 반영하여 거부기를 의인화하는 이야기줄거리를 재치있게 짜넣음으로써 의인전기체예술산문에서 현실비판의 의미를 강화하고 고려의인전기체산문발전을 촉진시키는데 기여하였다.
《 천 금 지 자 》
리규보에게는 유년시기의 이야기가 많다. 난지 석달밖에 안되였을 때 온몸이 습진으로 고통을 겪게 되였다. 별의별 약을 다 써보았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성이 난 그의 아버지는 송악산사당을 찾아가 이 아이가 살겠는지 죽겠는지 알아봐달라고 하였다. 사당에서는 살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온몸이 헌데투성이고 진물이 흐르는것이 도저히 살것 같지 못하였다. 또다시 약을 계속 써보았으나 효험이 없는지라 그냥 놔두었다. 어느날 아이가 너무 울어 얼리다 못해 유모가 업고 밖에 나가 땀을 빼고있는데 지나가던 한 늙은이가 걸음을 멈추었다. 유모가 애타하는 모습을 측은하게 들여다보던 그 늙은이가 왜 그러는가고 물었다. 《아이의 몸이 온통 헌데투성이인데 그것이 아파 너무 울어 달래는 중이라우…》 《그럼 어디 내가 좀 볼가요?》 아이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늙은이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이 아이는 보통아이가 아니요. 천금지자야, 천금주고도 못바꿀 귀한 아이란 말이요.》 《예?!》
유모가 의아해서 어리둥절해하자 늙은이는 《천금같이 귀한 아이는 만금을 들여서라도 꼭 고쳐주어야 한다는 소리요.》 늙은이는 이 말을 남기고 가는것이였다. 멍하니 서서 머리를 기웃거리던 유모는 생각되는것이 있어 집으로 들어가 규보의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규보의 아버지는 급히 밖으로 달려나가 그 말을 했다는 늙은이를 찾았다. 하지만 찾는 로인은 자취없이 사라지고 가랑잎만 굴러가고있었다. 아쉬운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 리윤수는 이것은 분명 하늘이 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아이병을 고쳐주기 위해 갖은 정성을 다했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우에도 꽃을 피운다는 말이 있듯이 온 집안 사람들의 극진한 치료에 의하여 죽을번 한 아이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부모들은 아이가 어진사람의 덕으로 살아났다고 해서인지 이름을 인저라고 지었다.
11살난 소년시인
인저는 갓난아이때 지지리 앓아 부모의 속을 태웠는데 차츰 자라면서 그닥 앓는일 없이 부지런히 공부하여 9살때부터는 글을 잘 짓는 기동이라는 소문을 냈다. 인저가 11살때였다. 하루는 글을 읽다가 쉬는참에 사랑방 마당으로 걸어나갔다. 마침 사랑채 대청에 여러 선비들이 모여 무슨 이야기에 열중하고있었다. 어른들이 앉아 이야기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히 걸어서 대문쪽으로 가는데 대청에서 아버지가 부르는것이였다. 《인저야!》 그는 얼른 돌아서서 두손을 공손히 포개잡고 《예》하고 대답했다. 《어데로 가는 길이냐?》 《글을 읽다가 내가에 잠간 나가 소풍을 할가 합니다.》 《이리 오너라.》 아들이 대청뜰앞에 와서 서자 리윤수는 모여있는 선비들에게 《이 애가 방금 이야기한 나의 변변치 못한 자식 인저요.》라고 소개하였다. 인저가 선절을 하고 쳐다보니 대부분 낯선 손님들이였고 알만한 사람은 이웃집 최진사를 비롯해서 두세명뿐이였다. 마루 복판에 큰 벼루를 놓고 선비들이 저마끔 종이를 펴놓은채 붓을 들고있는것을 보니 분명 시짓기모임을 하던중인것 같았다. 리윤수의 소개가 있자 몸집이 작을사하고 인정미가 눈가에 찰랑거리는 옆집 최진사가 얼른 말꼬리를 받아 자랑을 늘여놓았다. 《중이 제머리를 못깎고 부모가 제 자식 자랑 안한다는데 이웃은 사촌간이라 하였으니 내가 마저 말하겠소. 저 애가 그 병다리였는데 지금은 저렇게 딸 가진 어버이라면 누구나 탐낼만큼 잘 생긴 소년남아가 됐소. 내가 방금 말한 시인 기동이라오. 내 말이 맞는가 틀리는가 한번 시험을 쳐보는것이 어떻소?》 모두가 찬성했다. 신바람이 난 최진사가 이번에는 소년을 향해 말을 건넸다.
리규보는 좀 쑥스러웠으나 어른들이 시키는데 마다할수 없었다. 아니 그보다도 그는 아직 11살 소년인지라 한창 글을 읽고 글짓는데 기름이 돌기 시작하였으니 한번 어른들앞에서 지어보고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인저는 한창 꽃들이 피고 새가 봄을 즐기는 화원쪽을 잠시 바라보고나서 입을 열었다.
꽃은 웃어도 소리를 들을수 없고 새는 울어도 눈물을 볼수 없네
모두가 그만 입을 딱 벌리고 감탄했다. 방금 자기들이 머리를 짜내면서도 아직 짓지 못한 제목을 가지고 자기들이 미처 생각도 못한 시구를 지었으니 그 세련된 관찰, 섬세한 정서, 기발한 표현을 어찌 11살짜리 아이가 지었다고 하겠는가. 모두가 감탄하고있는데 최진사 한사람은 기가 돋았다. 《옛말에 성인도 후대를 두려워한다는데 내 말이 맞소? 틀리오? 저 인저가 시에서는 우리 스승인 셈이요.》 모두가 《과시 소년시인이 분명하오.》하고 칭찬하였다. 인저는 아버지앞에서 이런 칭찬을 듣는것이 오히려 송구했다. 그래서 얼른 사양했다. 《어린것을 앞에 세워두고 너무 과한 말씀인줄 압니다. 저는 다만 꽃과 새에 대해서 표현했을뿐 사람의 넋은 미처 그리지 못하여 꾸중을 들을줄 알고있소이다.》 최진사가 그말까지 얼른 감싸주었다. 《시를 듣고 이제 한 너의 말까지 들으니 비단우에 꽃수를 놓은듯 안팎이 다 상당하다. 어서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이 나라 문단의 혜성으로 빛나거라.》
웃음속의 진담
인저가 22살때였다. 그날은 감시라는 생원과 진사를 뽑는 과거시험이 있은 날이였다. 이날도 인저는 마음에 내키지 않은 걸음으로 과거시험장에 들어갔다. 돌이켜보면 6년전에 아버지의 엄한 령을 어길수 없어 억지로 과거보러 갔었다. (과거는 보아서 뭘해. 조정이 소란하여 벼슬살이가 귀양살이인 판에 공연히 오라(포승)을 지고 옥에 갇히우고 귀양지에 끌려다니느라고 시간을 허비하느니 뜨뜻한 내집에서 글이나 외우고 시를 지으며 살지. 그 노릇도 마음편히 못하게 무신들이 조정을 타고앉아 문인들의 목을 무우밑둥 자르듯 하는 이때 공연히 섶을 지고 불속에 뛰여들게 뭐람.) 인저는 그까짓 감시쯤은 식은죽먹기로 장원급제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시험장에서 그는 엉뚱한 짓을 하였다. 시험답안을 허투로 써서 떨어졌던것이였다. 이때부터 인저는 부모들이 과거보러 가라고 하면 선뜻 응했고 시험에서 매번 락제하였다. 기동으로 소문난 인저가 6년동안 락제꾸러기가 되였으니 부모들과 사람들은 그 조화속이 이상하였으나 그만이 락제의 비밀을 지켜왔던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쓰거운 웃음을 지으며 답안지우에 붓을 달린 인저는 남먼저 글을 다 쓰고 한번도 훑어보지도 않은채 시험지를 제출한 다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험장을 나오고말았다. 이날 합격자발표가 있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락제이려니 하였는데 합격자명단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 그것도 제일 마지막자리에… 그때에야 인저는 자기가 《실수》한 까닭을 알았다. 답안을 쓴 다음 한번 훑어보았으면 떨어질수 있을만큼 고쳐놓았을것인데 귀찮다는 생각으로 그냥 내고말았으니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것이다. 인저자신은 이만큼 되는대로 적당히 쓰면 락제가 되겠지 하고 그전의 기준을 생각하며 쓴것이지만 그동안 글이 썩 늘어서 대강 쓴 글이지만 합격권안에 들었던것이다. 락제보다 더 창피한 망꼬리합격, 인저는 과거때문에 처음으로 창피를 느꼈다. 그는 이 망꼬리합격을 받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의 결심을 듣고 펄쩍 뛰였다. 아버지로서는 여러해동안 락제만 하다가 이번에 망꼬리일망정 아들이 합격권에 든것이 반가웠다. 그리고 합격자가 자기의 합격을 취소한다는것은 과거시험의 전례에 없는 일이니 용서할수 없었다. 아버지의 엄한 꾸중에 눌려 그는 부끄러운 합격증을 받았다. 아버지는 급제한 아들을 꾸짖는것이 가슴에 맺혀 시뿌둥해있고 아들은 마음에 없는 합격증을 받고 시무룩해있는 가운데 과거에 급제하면 축하연을 차리는 관례에 따라 인저의 집에서도 연회를 차리고 친지들과 이웃들을 초청하였다. 기분을 달리한 아버지는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반갑게 맞아들였으며 초청받고 오는 사람들은 그동안 애를 쓰다가 급제한것을 축하하며 기쁘게 웃었다. 이런 자리에서 본인인 인저가 시무룩해 있을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기쁘지 않은데 기뻐할수도 없고… 하지만 인저는 생각을 고쳐하였다. (이왕 락제술법이 틀어진 이상 다음번 과거시험에서 본때를 보이면 그동안에 있은 불명예는 회복될것이다. 그것쯤은 자신이 있다. 그리고 장원급제를 한 다음에도 벼슬살이를 서두르지 않고 창작을 하면 될것이다. 이제는 나도 10대 소년이 아니라 20대 청년기에 들어섰으니 아버지인들 아들이 글공부를 더 하겠다는것을 막지 못할것이다.) 이런 결심을 하고나니 인저는 배포가 유해졌다.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축하연이 시작되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축하의 말을 하며 술과 음식을 들었다. 좌석이 흥성거리자 여기저기서 인저에게 한마디 하든지 시 한수를 읊으라고 요청하였다. 인저는 주저없이 성큼 일어섰다. 사람들은 이제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것인가 하고 기대하는데 왕청같은 말이 튀여나왔다. 《제가 이번에 비록 과거에서 말석을 차지하였으나 두고보십시오. 제가 후날에 지제고가 되여 똑똑한 문생(급제자)후배를 양성해낼 사람일줄을 누가 알겠습니까.》 지제고란 과거시험을 받아내는 벼슬아치였다. 그 시절에는 시험관이 과거시험을 공정하게 진행하여 전도유망한 합격자를 골라내는것을 명예로 여겼다. 그러니 망꼬리급제자인 리규보가 후날에 과거시험관이 되여 훌륭한 인재를 선발할텐데 내가 그런 사람이 될줄을 여러분들은 아마 알지 못할것이라 하였으나 얼마나 우스운 소리인가. 그 소리에 사람들은 입속으로 가만히 웃었다. 어떤 사람은 망꼬리급제자인 주제에 큰소리를 되우 친다고 웃었고 또 누구는 망꼬리한 어색함을 흰소리 하는것으로 굼땐다고 웃었다. 그러면서도 인저의 말이 하도 악의가 없으므로 듣는 사람들도 악의없이 웃었다. 하지만 누구도 인저가 이 말속에 자기의 결심을 내보인줄은 몰랐다. 물 흐르듯하는 세월만이 후날에 가서 그의 이 말이 빈소리가 아니였다는것을 증명하였다.
이름을 고치게 된 사연
인저가 감시에서 망꼬리급제를 한후 얼마 안있어 진사과에 응시하였다. 감시라는것은 과거시험가운데서 진사와 생원을 뽑는 급이 낮은 시험이였다. 진사와 생원을 한꺼번에 시험쳐서 성적에 따라 진사와 생원을 가르는것은 아니였다. 감시(국자감시 또는 소파라고 한다)는 보통 이틀 아니면 사흘동안 치는데 첫날시험에서 조금 급이 높은 진사를 뽑고 마지막날에 약간 급이 낮은 생원을 뽑았다. 이런 관계로 인저도 망꼬리급제후 다음번의 진사과에 응시하는것이였다. 과거보러 가는 날 아침에 인저는 부모앞에 느닷없이 말을 꺼냈다. 《제가 어제밤에 꿈을 한자루 꾸었습니다.》 이 말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대번에 귀가 솔깃했다. 그 시기에 사람들은 좋은 꿈을 꾸면 임신을 하든가 과거에 급제한다든가 좋은 일이 생긴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런 꿈은 길몽 즉 좋은 징조의 꿈이라고 하였다. 《무슨 길몽이냐?》 어머니가 묻는 말이였다. 《글쎄 하늘에서 규성이 나타나더니 내가 과거보러 가는 길을 환하게 비쳐주는것이 아니겠어요.》 《규성이?》 이번에는 아버지가 물었다. 옛날 천문학에서는 태양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도는 황도라는 하늘길이 있는데 그 황도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을 빙 둘러싸고 28개의 별자리가 있다고 하였다. 그중 규성은 황도를 서쪽에서 지키는 7개별자리가운데서 첫번째 위치를 차지한 별이였다. 해길을 비치는 별, 그 가운데서도 황도가 시작되는 서쪽의 첫자리에서 황도를 지키는 규성이 왕을 지키게 될 인재를 뽑는 과거보러 가는 사람의 앞길을 비쳤다니 이야말로 길몽중의 상길몽이 아닌가! 그리하여 아버지가 조급하게 물었던것이다. 《예!》 《그래서?》 《그 규성어른이 나를 보고 〈네가 오늘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할것이다.〉하고는 하늘로 급히 사라졌어요.》 부모들은 아들이 정말 장원급제라도 한것처럼 기뻐서 어쩔줄 몰랐다. 리인저가 이런 꿈을 실지 꾸었는지 어쨌는지는 알수 없다. 그러나 이 과거시험의 앞뒤에 있은 일을 놓고보면 인저가 이날 아침에 이런 말을 한데는 까닭이 있었다고 할수 있다. 인저로서는 락제만 하다가 얼마전에 망꼬리급제를 하고 일이 이렇게 된바에야 다음번 과거시험에서 실력을 보일 결심을 하였기에 이러한 말을 할수 있은것이 아닌가. 그 결심은 헛맹세가 아니라 자신만만한것이여서 부모님앞에 자기의 맹세를 다지고 과거보러 떠나자고 이런 꿈이야기를 비쳤을것이 틀림없다. 이날 과거시험에서 인저는 맹세대로 실력을 남김없이 발휘하여 당당히 장원급제하였다. 부모들은 너무 기뻐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규성이 꿈에 나타나서 네가 장원급제할것을 미리 알려주었으니 오늘의 이 경사는 하늘의 뜻이니라. 그러니 규성이라는 〈규〉자와 예보해주었다는 〈보〉자를 따서 이제부터 네이름을 〈규보〉라고 고치자.》 하늘의 뜻으로 장원급제한것이 아니라 리규보자신의 결심과 실력으로 장원급제한것이다. 그러니 규성이 예보해서 규보라고 하였기보다 나라와 겨레앞에 별처럼 빛나게 보답하라는 뜻에서 《규보》라고 하였다고 했어야 적합할것이다. 실지 리규보의 생애는 고려문학에서 규성처럼 빛나는 한생이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가 이름을 규보로 고치게 된 사연을 하나의 아름다운 일화로 전하게 되였던것이다. 사람들은 이 일화를 여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좀더 극적으로 부각하여 전개하였다. 리규보는 시험장에서 답안지에 쓴 시의 첫련을 시험관들의 비위를 뒤틀리게 만드는 말마디로 엮어놓았다.
태고때엔 벼슬이 높고낮음이 없었나니 그 뉘가 인간을 귀천으로 나누었노 이런 제도 생긴 후에 더욱 심하여 아름다운 사람 구해볼수 없네
리규보는 결심을 하고 나선 과거시험이지만 아첨을 해서 장원급제를 따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할소리는 다 하고 당당한 장원급제를 할 생각이였다. 그의 곧은 목소리가 또 시험관들을 노엽혔다. 《이런 발칙한것 보았나. 당장 잡아다가 옥에 넣어 된맛을 보여야 해.》 어떤 축은 《철없는 젊은것의 망동인데 락제나 주고맙시다.》고 하였으나 강경한 주장자들은 답안지를 자세히 검토하고 결심하자고 우겼다. 그리하여 리규보의 답안지를 시험관 전체가 있는 앞에서 자자구구 따지면서 재검토하였다. 따져보면 볼수록 말투가 예리하고 비판이 신랄했으나 죄를 씌울 건덕지는 못되였다. 충신들이 왕에게 충고하는 상소장에는 그보다 더한 표현이 있지만 용납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답안지의 내용은 다 정당하며 특히 그 글이 아주 훌륭하였다. 다른 사람들의 답안은 어느것이나 이 글을 따를수 없었다. 그리하여 자세히 따져보고 벌을 주려고 시작한 재검토가 결국에는 리규보를 장원급제시키는것으로 락착되였다는것이다.
나이가 아니라 인품으로 교우
리규보는 18살때부터 당시의 시인들로 명망이 높던 《해좌칠현》시인들의 사회에 자주 참가하여 이름을 날리였다. 《해좌칠현》시인들가운데서 리규보에게 큰 영향을 주고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친근한 벗으로 여겨준 사람은 오세재였다. 오세재는 리규보보다 서른살이나 우인 년장자였다. 그러나 오세재는 리규보의 남다른 재능을 귀중히 여겨 그를 둘도 없는 시벗으로 대하면서 학문과 창작의 세계에로 이끌어주었으며 당대의 사회정치의 현실생활의 부정면을 비판적으로 보고 인식하도록 가르쳐주었다. 리규보 역시 오세재의 겸허한 성품과 뛰여난 학식에 탄복하여 그를 진심으로 따르고 존경하였다. 어느날 리규보가 오세재에게 물었다. 《우리 나라에 옛날부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난 사람들이 많으나 소 먹이는 아이들과 하인들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만 선생님의 명함만은 부녀자들과 어린 아이들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웬 일입니까?》 이에 오세재는 웃으며 대답하였다. 《내가 일찌기 나이 많은 서생으로 사방을 돌아다니며 밥을 빌어먹었기때문에 가보지 못한 곳이 없으니 나를 아는 사람이 자연히 많아졌소. 과거에 련이어 락제하여 사람들이 금년에도 아무개가 또 락제하였다지 하고 손가락질을 하였기때문에 내 이름이 사람들의 귀와 눈에 익었을뿐이지 내게 남다른 재주가 있어서 그런것은 아니란말일세. 그런데 실속이 없이 빈 이름만 얻는것은 하는 일 없이 나라의 록봉을 받아먹는것이나 다를것이 없소. 내가 궁한것이 이와 같으니 평생에 꺼리는것은 이름이 알려지는것일세.》 오세재의 이 말에 리규보는 다시금 탄복했다. 리규보와 오세재의 교우관계가 더욱더 깊어지자 일부 사람들은 오세재를 비난하기까지 하였다. 《선생은 규보보다 서른살이나 더 년장자인데 왜 철부지와 가깝게 지내는것이옵니까?》 그럴 때마다 오세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난 나이로 교우하는것이 아니라 인품으로 교우하네. 이 사람(리규보)은 비범하여 후날에 반드시 높은 경지에 오를것이네.》 리규보는 또 리규보대로 자기를 믿어주고 내세워주는 오세재를 잊지 못하여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현정선생(오세재)을 매일같이 외웠다고 한다. 나이로 보면 부자간이나 다름없이 세대가 다르지만 진리탐구와 문학창작의 길에서는 언제나 진심으로 사귄 오세재와 리규보, 이 두사람의 교우관계는 당시에 있어서 아름다운 인간들의 고결한 사귐의 표본으로, 사람들에게 잊을수 없는 일화로 전해졌다.
《누가 오얏씨 뚫는 사람인고》
우리 나라 고려중기의 대표적시인인 리규보는 대바르고 호탕한 성격과 뛰여난 시적재능으로 젊은 시절에 벌써 년장자들인 리인로, 림춘, 오세재, 리담지 등 《해좌칠현》의 문인들과 사귀며 어깨를 겨루었을뿐아니라 야유솜씨 또한 보통이 아니였다. 19살때 리규보는 오세재의 망년지우(나이 많은 사람이 나이에 꺼리끼지 않고 허물없이 대하여 사귀여진 벗)가 되여 그와 함께 《해좌칠현》문인들의 모임에 자주 다니였으나 오세재가 경주로 떠나간 후로는 리규보가 혼자서 계속 그 모임에 갔다. 어느날이였다. 좌중에 인사를 보내며 리규보가 빈자리에 가앉자 리청경이 그를 넌지시 건너다보며 말을 붙였다. 《오덕전(오세재)이 경주 가서 돌아오지 않았으니 그대가 그 자리를 보충함인가?》 쩍하면 모여앉아 술마시고 시를 지으며 마치 저들밖에 세상에 사람이 없는듯이 으시대기도 하는 그들을 미심쩍게 여기던 리규보는 즉시 야유조로 반문했다. 《칠현이 조정의 벼슬도 아닌데 자리를 대신한다는 말이 웬말인가요?》 그 말에 모두가 크게 웃었다. 그러면서 수염을 내리쓸며 년장자냄새를 피우느라 거들먹거리는 청경을 멋지게 골려넘기는 젊은 시인의 솜씨에 사람들은 연방 감탄을 표시했다. 얼굴이 벌기우리해진채 낑낑 갑자르던 리청경이 깎이운 체면을 유지해볼 셈인지 이번에는 운자로 《봄춘》자와 《사람인》자를 부르며 시짓기를 청했다. 리규보는 흔연히 붓을 들어 써내려갔다.
영광스럽게 죽하모임에 참여하여 유쾌히 술을 마셨노니 내 몰라라 칠현가운데 누가 오얏씨 뚫는 사람인고
※ 죽하모임ㅡ해좌칠현의 모임
시랑송이 끝나자 모두가 시인의 시적재능에 또다시 감탄했다. 그러나 다음순간 시에 담겨진 의미를 가늠하고는 모두들 불쾌한 기색을 나타냈다. 오얏씨란 리규보가 자기의 성씨를 념두에 둔것으로서 시구의 의미인즉 자기를 당할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것이였다. 그의 당돌한 야유솜씨에 좌중에서는 혀를 내두르며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규보는 모르는체하며 여유작작하게 량껏 술을 마시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탐구하고 사색하라
천마산에 푸름푸름 동이 트고있었다. 그럴 때 아늑한 골짜기안에 제비둥지마냥 자리잡은 아담한 초가집의 방문이 활짝 열렸다. 젊은이 하나가 방안에서 나와 마당에 내려섰다. 후리후리한 키에 름름한 체격을 가진 생기있는 얼굴은 어뜩새벽인데도 첫눈에 알릴만큼 멀쑥하였다. 젊은이가 주위를 한번 휘ㅡ둘러보는데 호수같이 그윽한 두 눈은 빛을 쏘는듯이 정기가 돌았다. 그는 가슴을 한껏 펴며 숨을 길게 들이그었다가 내뿜으며 힘있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지금까지 조용하던 산속에 주인이 나타난듯 모든것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나무며 풀이며 흙이며 산속의 모든것을 포근히 감싸안던 안개가 선녀의 날개옷처럼 가벼이 스쳐지나면서 차츰 걷어졌다. 새들은 푸른 나무가지에 앉아 경쟁이라도 하는듯 각양각색의 소리로 노래를 불렀고 골짜기에서는 시원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젊은이는 천천히 걸으면서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동녘하늘가에 흰꽃 한송이가 곱게 피여있었다. 자연의 조화란 참으로 신기하고 묘한것이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구름송이였다. 그의 얼굴에는 문득 천진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이미 구상을 무르익힌 작품 주인공의 세계를 체험하는듯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이 젊은이가 바로 장편서사시 《동명왕편》의 창작에 심혈을 기울이고있는 시인 리규보였다. 그는 과거시험에 세번 떨어지고 네번째만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여기 천마산에 들어와 《동명왕편》을 비롯하여 서정시묶음 《천보영사시》 43편과 장시 《3백2운시》를 쓸 계획이였다. 지금 리규보는 이 방대한 계획의 첫번째 목표인 고구려시조 동명왕의 성스러운 자취를 더듬어 장편서사시 《동명왕편》의 구상을 끝낸 기쁨을 안고 청신한 아침을 맞이하였다. 그는 어려운 사색의 바다를 힘겹게 건너 마침내 목적지에 이른 행복감에 취해있었다. 그 기쁨이 어찌나 컸던지 허전하고 서글픈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고심끝에 맛보는 이 기쁨을 함께 나눌수 있는 벗이 곁에 없는것이 유감스러웠다. 리규보는 정의와 진리를 귀중히 여기는 학자였고 작가였다. 그는 또한 나라를 열렬히 사랑하였고 력사를 깊이 알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가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사적을 더듬어 큰 형식의 서사시를 쓰려고 한것도 이와 관련되여있었다. 그런데 막상 고주몽을 주인공으로 하여 글을 쓰려고 하니 주저되는바가 없지 않았다. 그는 학문연구에서 언제나 구체적이고 정당한것을 사실그대로 해명하는 립장을 견지하였고 이로부터 허황한 거짓말에는 혐오감을 느끼였다. 《동명왕편》을 쓰기 위해 자료연구에 착수하였을 때에도 느낀 감정이 바로 이 혐오감이였다. 사람들속에서 전해내려오는 주몽이야기를 수집하고보니 황당한것이 많았던것이다. 그는 후날 이때를 회상하면서 유교에서 말하는것처럼 《괴상한 귀신의 이야기 같은것은 말도 하지 말라》는것을 믿고있었던탓에 세상에 널리 퍼져있는 동명왕이야기도 황당한 일로 여겨져서 웃고 말았으며 전혀 믿지 않았다고 한다. 믿음성없는 자료를 가지고 어떻게 진실한 작품을 쓸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하여 전설에도 없는 이야기를 꾸며낼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그리하여 리규보는 참다운 력사자료를 각방으로 구해보았다. 중국 력사책 《위서》, 《통전》도 읽었으나 고주몽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도 간략되여있어 취할것이 없었다. 다음해에 그는 《구삼국사》를 보았다. 거기에 《동명왕본기》가 실려있었는데 그 내용은 세상에 전해진것보다 더 풍부하였다. 그러나 이 책도 리규보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다. 역시 황당한 이야기로 생각되였다. 그런데 한번 읽고나면 또 읽고싶어지는것이 이상하였다. 그래서인지 《구삼국사》의 이야기를 덮어놓고 부정해버릴수 없었다. 《동명왕본기》를 몇번 읽어보니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면서 《구삼국사》에 있는 이야기의 가장 좋은 부분을 많이 생략해버렸다는것이 확연해졌다. 리규보는 김부식이 취한 그런 태도에 동의할수 없었다. 조상들의 발자취를 어떻게 그처럼 간략하게 취급할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오르며 그것이 어느덧 스스로 짊어져야 할 의무로 여겨졌다. 나라를 세운 성스러운 력사의 자취를 후세에 전해야 할 의무가 이제 와서는 그의 어깨를 무겁게 눌렀다. 자료에 대한 불신과 꼭 써야겠다는 의무의 서로 상반되는 두 문제를 안고 모대기면서 리규보는 《구삼국사》를 읽고 또 읽었다. 그는 읽고나서 사색하고 그런 다음에는 또 읽어보며 그 이야기의 밑바닥에 깔린 진실을 파고들었다. 전설의 주인공 고주몽이 신비로운 광채에 휩싸이더니 차츰 성스럽고 장엄한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점차 지금까지 허황한 거짓말로 여겨져 믿을수 없었던 이야기가 진실한것으로 안겨왔다. 비로소 신화와 전설속에 깃들어있는 력사의 진실도 파악되였다. 이야기의 환상적인 겉껍질을 뚫고들어가 마침내 본질을 들여다본것이다. 우리 고구려를 세운 신성한 력사의 자취를 후세에 전하는것이 얼마나 보람있는 일인가. 그는 참다운 시적창조물을 눈앞에서 보는 환희와 격정이 너무도 커서 저도 모르게 환성을 질렀다. 리규보는 그후 자기의 이 격동된 심정을 서사시 《동명왕편》의 마감부분에서 이렇게 썼다.
… 내 성질이 본대 소박하여 신기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아 처음에는 동명왕의 사적을 보고 황당하고 괴이한 일이라 하였노라 그 다음 천천히 살펴보니 그 변화란 헤아릴수 없구나 력사에 기록된 바른 필치라 글자 한자인들 움직일수 있으랴 신성하고 또 신성하다 만세에 길이 법이 되리로다 생각하면 나라를 처음 세우신 그 임금이 성스럽지 않을수 있으랴 …
그가 스스로 걸머진 의무는 이렇듯 샘솟는 창작적흥분과 정열을 낳았고 그 정열은 불길로 활활 타올랐다. 그는 이런 흥분, 이런 열정으로 며칠을 보냈다. 어제밤에도 사색과 환상의 나래를 펴고 상상속에서 신비로운 하늘을 날며 동 터오는 아침을 맞이하였다. 동쪽 산등성이 우로 붉은 태양이 서서히 솟아올랐다. 눈부신 해살이 주위의 모든것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이슬을 머금은 꽃잎들은 진주인양 반짝이며 살랑거렸다. 동녘하늘가의 흰 꽃송이는 어느사이에 진홍색으로 변하였다. 리규보는 붉은 태양이 솟은 산등성이우로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아, 고려국의 하늘은 얼마나 맑고 아름다운가! 하늘의 아들 해모수도 수억만리 떨어진 저 아름다운 하늘, 땅사이로 오룡차를 타고 마음대로 오르내리며 부여땅을 다스렸으리라. 그의 눈에는 오색운무에 싸여 오룡차에 앉아있는 해모수와 그를 둘러싼 신하들 백여명의 모습이 분명 보이는것 같았다. 수레를 끄는 다섯마리의 룡은 너울너울 날개를 젓고 맑은 음악소리도 쟁쟁히 들려왔다. 황금채찍을 높이 든 해모수, 다섯마리의 룡과 충직한 신하들…
리규보는 눈을 들어 동쪽하늘을 바라보았다. 조금전에 피여있던 진홍색 꽃송이가 바람에 흐트러졌는지
수레모양으로 변해있었다. 어찌보면 앞에서 룡들이 끄는듯도 하였다. 그러자 문득 막혔던 물목이 터진듯 아름다운 시의 샘이 솟아나
거침없이 흘러내렸다.
그가 처음 하늘에서 내려올 때 다섯마리 룡이 수레를 끌고 백여명의 신하들이 따오기를 타고 날개도 가지런히 나붓기며 내렸도다 음악소리 맑게 울려퍼지고 채색구름은 기발을 펼친듯 … … 대낮에 하늘에서 날아내리는 이런 일은 있어보지 못하였어라 아침에는 세상에서 나라를 다스리고 저녁이면 다시 하늘로 올라갔도다
정력이 넘치는 청년시인 리규보는 이윽고 산등성이우에 올라섰다. 태양은 환하게 웃고 살살 부는 바람은 숲의 즐거운 노래를 날라왔다. 그런가 하면 맞은편 골짜기로는 뽀얀 안개가 강물처럼 흘러가고있엇다. 그것은 마치 부여군사들의 추격을 받은 주몽이 급한 걸음을 멈추었던 그 옛날의 엄체수 같았다. 홀연 그의 눈앞에 말을 탄 네 용사가 나타났다. 추격은 급한데 큰 강이 앞을 가로막으니 어찌하랴. 말은 앞발을 높이 쳐들고 울부짖는다. 고삐를 당겨 말을 제어한 용사 하나가 날새처럼 말에서 뛰여내린다. 그가 바로 주몽이다. 다른 세명의 용사도 땅에 내려 굽이치는 강물을 바라본다. 참으로 위급한 시각이다.
오, 하늘이여 굽어살피시라! 리규보는 《안개의 강물》을 바라보며 시상을 모았다.
… 남몰래 사귄 어진 벗 세사람 그들은 모두 지혜가 많았어라 부여군사들의 눈을 피하여 큰 뜻 품고 함께 떠날제 엄체수언덕에 이르러보니 강물은 깊은데 배가 없구나
주몽은 채찍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크게 한숨 짓고 다시 웨쳤어라 《나는 하늘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이라 란리를 피하여 여기에 이르렀거늘 슬프다, 이 외로운 마음을 하늘과 땅은 저바리려나…》
문득 활을 들어 강물을 치니 자라떼 몰려나와 꼬리를 맞물고 어느덧 훌륭한 다리가 되여 무사히 강을 건너섰도다 …
리규보는 잠간 시읊기를 멈추고 이 땅우에 강대한 나라 고구려가 일떠서던 력사의 성스러운 자취를 더듬어보았다. 지금 그에게는 고주몽이야기가 단순한 하나의 전설이 아니였다. 찬연한 빛발에 싸인 그 이야기에서는 슬기로운 선조들의 긍지높은 노래가 울리고있었다. 리규보는 그날 방안에 들어와 앉자마자 종이를 펴고 그우에 거침없이 붓을 달렸다. 그리하여 아득한 태고시절 세상이 처음 열렸을 때와 주몽이 태여난 신기한 일, 그가 온갖 난관을 뚫고 나라를 일으켜세운 크나큰 업적이 장엄한 노래가 되여 쟁쟁하게 울려나왔다. 그는 주몽이 나라를 세우고 부강하게 만든 이야기를 힘있는 시적표현으로 다 쓰고나서 그 뒤에 주몽전설에 대한 자기의 견해와 세상사람들에게 하고싶은 말도 첨부하였다. 이처럼 리규보는 뜨거운 애국주의정신과 시인다운 자각, 진함이 없는 창작적사색과 탐구를 가지고 우리 나라의 건국설화를 소재로 하여 력사에 길이 전해질 장편서사시 《동명왕편》을 창작하였다.
연기로 날려간 300여편의 시
1219년 가을 어느날 리규보가 살던 개경의 어느한 자그마한 집에서는 활활 불길이 타오르고있었다. (이런 시들을 써놓고 지금까지 시를 쓰노라고 자처했단말인가. 표현은 현란하지만 내용이 없는 시, 형식밖에 없는 시, 이런 헛가비 시들을 써놓고 시라고 가지고있었으니 참 한심하도다!…) 리규보는 시를 쓴 종이장들을 하나하나 집어 불속에 던져넣었다. 순식간에 확 불길이 달리며 불꼬리가 춤추더니 곧 한점의 재가 되여 공중에 이리저리 흩어져갔다. 사실 리규보가 지금 불태우고있는 시도 그리 한심한것이 아니였다. 당시에 류행되던 태평성가식의 형식주의적이며 모방주의적인 시에 비해볼 때 훨씬 가치있고 무게있는것들이였다. 그러나 리규보는 지금 자기가 애써 지어온 시들을 부정하며 불에 태우고있는것이다. 한장 또 한장… 가물거리던 불길이 다시 확 퍼져오르더니 옆에 나떨어진 종이장 하나를 밝게 비쳤다. 순간 리규보의 손은 굳어진듯 그 자리에 움직일줄 몰랐다. 그것은 《시에 대하여》라는 제명을 단 한토막의 시였다. 타오르는 불길에 글자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동공에 차들었다.
말과 뜻이 함께 아름다워 그안에는 깊이 숨은 뜻이 있고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야 하리 뜻은 통하여도 말이 거칠거나 어렵기만 하고 뜻이 통하지 않으면 무엇하랴
(참 이렇게 써놓고서도 시를 한심하게 써왔군. 내 다시 뜻이 깊고 힘있는 시를 쓰리라!) 규보는 이 시를 두고 앞으로 교훈으로 삼으리라 결심하고 그것을 옆에 밀어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시뭉테기를 집어들고 한장한장 태우기 시작했다. (말과 뜻이 조화롭게 결합된 시, 그런 시야말로 아름다운 시라고 할수 있다. 젊어서 쓴 이 시편들은 그때엔 옥과 같이 잘되였다고 여겨졌으나 오늘 다시 보니 어느 한편도 마음에 드는것이 없구나. 돌이켜보면 참 부끄러운 일이야! 부끄러운 일…)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태워버리기로 결심했던 두툼한 종이뭉테기가 절반나마 축났다.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써온 시편들이였던가. 거기에는 한생의 한시절이 비껴있었고 그 기간에 뿌린 땀이 슴배여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없애버려야 한다. 대담하게 그리고 보다 높은 요구성을 위해서! 또다시 눈에 안겨오는 시가 나타났다. 그것은 언젠가 고루한 사대부들속에서 만연되고있던 모방주의적인 풍조를 문단에서 반드시 없애버려야 할 그릇된 병집으로 락인하고 날카롭게 폭로규탄한 시엿다.
더우기 버려야 할것은 깎고 아로새겨 곱게만 하는 버릇 곱게 하는것이 나쁘기야 하랴 겉치레에도 품을 들여야 하지만 곱게만 하다가 알맹이를 놓치면 시의 참뜻은 잃어버리는것이라 요즈음 시짓는 사람들 시로 사람을 깨우칠줄 모르도다 겉으로는 울긋불긋 단청을 하고 내용은 한때의 산뜻한것만 찾누나
리규보는 그 시도 집어 옆에 내놓았다. 역시 앞으로 두고보면서 교훈으로 삼을수 있는 시편이였다. 어느덧 시들을 모두 불태워버린 리규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품들여 써온 300여편의 시가 삽시에 재가 되여 하늘로 날아갔다. 그러나 리규보의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지금까지 마음속을 괴롭히던 잡스러운것들을 털어버리고 새로 일떠선 기분이였다. 이제부터 보다 참신하고 훌륭한 시편들을 쓰리라. 집안에 들어온 리규보는 책상앞에 마주앉아 붓을 꺼내들었다. 오늘 저녁의 일을 시로 기록하여 마음속의 거울로 삼고싶었다. 《시고를 불사르다》라고 큼직하게 제명을 써붙인 리규보는 힘있게 획을 그어나가기 시작했다.
… … 명년에도 올해 지은 시들을 보고 또 이같이 불태워 버리리라
이처럼 리규보는 스스로 자신에 대한 엄격한 시험관이 되여 자기가 품들여 지은 시를 서슴없이 불태울줄 안 요구성이 높은 시인이였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그의 훌륭한 시작품들은 시인 자신이 스스로 정한 엄격한 관문을 통과하여 나온 성공적인 작품들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얼마나 많이 썼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전해지는가 하는것이 중요하다는것을 속속들이 깨우쳐주는 산 증거인양…
《시 짓는 병》
세상에는 이름난 시인들이 많다. 그러나 그자신이 《시 짓는 병》이라고 제목을 달고 시를 쓴 시인은 오직 리규보 한 사람뿐이다.
두서너달 병석에 누워있었건만 그동안에 몇편이나 시를 지었는가 앓는 소리와 시읊는 소리 서로 뒤섞여 요란하였네 시짓는 버릇 이 또한 큰 병이라 아무리 약을 써도 고치지 못하니 … … 생각을 다른 일로 옮기려고 해도 마음이 통 쏠리지 않으니 아 마침내 고치지 못하고 아마 이 병으로 죽게 되리라
그 자신이 시에서 노래한것처럼 시짓기는 그에게 있어서 고칠수 없는 불치의 병이였다. 그는 태여나 11살때부터 죽기전 73살까지 이 병을 앓았는데 그 결과는 막대한것이였다. 다른 한 작품에서는 나이 70이 넘어 벼슬도 재상에 올랐으니 글재간 부리기는 그만두어야 할터인데 왜 이리도 옛버릇을 버리지 못할가고 하면서 시속에 살며 시짓기에 정열을 쏟아붓지 않고는 견딜수 없는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 손벽을 치고 웃으며 노래하였다.
아침에는 귀뚜라미처럼 중얼거리고 저녁에는 새매같이 휘파람을 부니 아마 무슨 마귀가 들어 밤낮으로 나를 따라다니는가봐
온 몸에 기름이 마르고 이제는 살점마저 남아있지 않아 뼈만 앙상하여 그래도 시읊는 이 모양이야 정말로 우습구나
그 시라는것도 뛰여나지 못하여 천추에 남길것이 되지 못하니 내 스스로 손벽을 치며 웃노라 그러나 웃고나선 또다시 시를 쓰네
리규보는 이처럼 창작으로 한생을 살고 인생행로에서 겪는 기쁘고 슬프고 괴롭고 즐거웠던 모든 일들을 시에 담아 읊었던만큼 참으로 많은 시들을 썼고 또 쓴 시들을 검토해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며 시로서는 잘 되지 않은것은 스스로 비웃으며 없애버리기도 하였다. 그는 일찌기 이렇게 썼다. 《마음에서 새여나온바는 반드시 글에 나타나는것이기때문에 그 글로써 족히 그 사람을 알수 있다.… 구름과 노을의 고움과 달리 이슬의 정기와 벌레와 물고기의 기이함, 새와 짐승의 기괴함과 움돋고 꽃피는 초목의 천만가지 현상이 온 천지를 장식하는것을 나는 서슴지 않고 닥치는대로 취하여 열에 하나도 남기지 않으며 보는대로 읊어 옹긋종긋한 삼라만상을 붓끝으로 옮기지 않은것이 없다.》 유승단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는 자신의 창작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내가 소년시절부터 시짓기를 좋아하여 평생에 지은 시가 아마 8 000수가 넘을것이다.》고 하면서 그중에서 일부는 불살라버렸다고 썼다. 리규보는 이처럼 시짓기를 즐겨했을뿐아니라 변천하는 생활속에서 열정적인 탐구와 진지한 노력으로 시세계를 파고들어 독자적이며 심오한 창작경험을 쌓았으며 현실비판적안목과 예술적기량을 발전하는 시대의 요구에 접근시켜 진보적시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나갔다. 소년시절부터 70이 넘을 때까지 《시짓는 병》을 무섭게 《앓았고》 또 그 《앓음》속에서 생의 희열을 느낀 《만성적인 시짓는 병 환자》였던 리규보, 그는 진정 고려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가운데서도 제1인자였다.
리규보의 겸손성
고려시기의 재능있는 문필가였던 최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남기였다. …문순공 리규보의 문집은 이미 세상에 류포되였다. 그의 시문을 보면 해와 달도 오히려 무색하다. 근대의 률시는 5언과 7언으로 성운과 대구를 다듬어야 하므로 반드시 이모저모 다듬고 쪼아서 틀에 맞도록 하여야 한다. 아무리 재주있고 숙련된 사람이라도 표현을 마음대로 하거나 글귀를 마음대로 피력할수 없으며 그런 경우 시는 흔히 기운과 뼈가 없이 무력하게 된다. 리규보는 젊었을 때부터 붓을 달려 즉흥시를 썼는데 모두가 새롭고 창발적이였다. 언어가 다양하고 기운이 장대할뿐아니라 성운에 관한 규칙에 있어서도 섬세하고 교묘하며 호방하고 기발하다. 그러나 그를 우수한 천재라고 하는것은 다만 률시에 관하여 하는 말이 아니다. 그는 옛시와 장편에 있어서도, 어렵고 힘든 운에 있어서도 자유롭고 분방하여 한번 붓을 들면 벽장에라도 휘둘러 써내려갔으며 그러면서도 결코 옛사람을 답습하여 모방하지 않고 훌륭한 작품을 창발적으로 써냈다.… 이렇듯 재능있는 리규보였으나 그는 또한 겸손성으로 하여 이름을 날리였다. 그는 자기 시에 대해서는 조금도 양보가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문에 대해서는 한가지라도 잘 쓴것이 있으면 반드시 칭찬하여마지 않았으며 자기가 쓴것보다 낫다고 말하군 하였다. 그가 젊었을 때 《국선생전》을 지었는데 리윤보가 처음 과거에 급제한 후 이것을 본따서 《무장공자전》을 쓴 일이 있었다. 사람들속에서 뒤소리가 분분했다. 《문순공의 글을 그대로 본땄군!》 《아무 볼나위도 없는 글일세. 문순공의 글에 비하면 옥과 모래알의 차이일세!》 리규보도 이 글을 보았다. 마지막까지 다 읽어보고난 리규보는 불쾌해하거나 업신여기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크게 칭찬하면서 항상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군 하였다고 한다. 《요즘 우수한 문학자 리윤보라는 이가 나타났는데 진정 쓸만한 인물이요.》 리규보의 이 말에 리윤보는 자기를 다시한번 돌이켜보고 더욱 분발하여 이름있는 문필가가 되였다고 한다. 또한 리규보가 유승단과 함께 지제고라는 벼슬에 있을 때 진양공이 보제, 광명, 서보통의 세 절간에서 모임을 가진 일이 있었다. 모임을 마친후 진양공은 리규보와 유승단 그리고 윤우일을 불러 세 모임에 관한 기록을 짓게 하였다. 인차 글을 지어냈다. 글들을 차례차례 본 사람들이 모두 리규보의 글이 제일이며 유승단의 글은 리규보의 글보다 못하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리규보는 유승단의 글을 내세우고 칭찬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유승단의 문장은 나로서는 따를수 없으리만큼 우수하오.》 리규보가 한림으로 있을 때 손득지가 리규보의 《이른 차》라는 장편시 5수에 운을 맞추어 시를 지은적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리 달갑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리규보는 이 시를 보고 감탄하면서 《지금까지 손군에게 이런 훌륭한 재주가 있는줄은 몰랐다.》고 말하였다. 이렇듯 겸손한 리규보였으나 결코 모든것을 다 좋다고만 한것은 아니였다. 그는 옳고그른것을 항상 갈라볼줄 알았고 그릇된것을 보고는 예리하게 질책하여 바로잡아주군 하였다. 학식있는 인간만이 가장 겸손할수 있고 또 가장 예리할수 있는 법이다.
가난뱅이 재상
70고령에 리규보는 재상이라는 높은 벼슬에 올랐다. 그러나 청렴을 근본으로 삼아온 그였는지라 살림살이는 말할수없이 어려웠다. 그가 재상으로 있을 당시에 정이안이라는 재능있는 화가가 있었다. 그가 대를 뛰여나게 잘 그린다는 말을 듣고 리규보는 종이를 보내면서 한평생 두고 볼 좋은 대를 그려줄것을 부탁하였다. 당시 정이안이 그림을 잘 그린다는 소문이 중국에까지 널리 퍼져 저마다 다투어 하얀 비단을 가져와도 그의 그림 한장 얻기가 힘들었다. 리규보도 이것을 모르는바 아니였다. 그러나 살림형편이 하도 가난하여 비단을 살 돈이 없었다. 리규보의 이러한 처지를 잘 알고있던 정이안은 조금도 나무람하는 기색이 없이 이슬에 젖어있는 대나무, 바람에 날리는 대나무, 늙어서 절반이나 꺾이였으나 큰 잎들이 아직 매달려있는 대나무, 약하기는 하나 생기가 흐르는 새로 솟아난 대나무를 각각 그려 한꺼번에 보내왔다. 받아놓고보니 종이에 그린것이 다시금 후회되였다. 그러나 집안형편으로서는 어떻게 할수 없는 일이였다. 집에 드나드는 친구들이 이 사실을 알고는 너무도 믿어지지 않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아무리 가난해도 재상이야 재상이겠지. 그래 집안에 비단 한필 살 돈도 없단말이요? 허 참, 도저히 믿을수 없구려.》 《원 그건 거짓말이지. 고관대작의 집에 비단 한필 살 돈도 없다니…》 이러한 말이 한입두입 건너 퍼지는 과정에 어느덧 좋지 못한 색채까지 덧붙였다. 《거 재상이라는 량반이 꽤나 쬐쬐하구만. 방아간의 참새가 낟알을 안먹는다면 누가 곧이 듣겠나?》 《량반치고 린색하지 않은 놈이 없네.》 소문이 리규보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얼토당토 않는 헛소문이지만 소문의 연유가 어느정도 리해되였고 또 사람들 보기가 따분한것도 사실이였다. 일이 이쯤 되자 리규보의 안해가 발이 굵은 비단 한끝을 애써 구해왔다. 남편의 딱한 처지를 메꾸어주기 위해 남의 집에서 빌려온 비단이였다. 그다지 잘 짜지는 못했으나 종이보다는 나았다. 비단을 보내면서 리규보는 정이안에게 사죄의 뜻을 표시하고 소슬대 하나를 그려줄것과 거기에 자기의 늙은 초상까지 하나 덧그려줄것을 부탁하였다. 부탁대로 정이안은 대와 초상을 멋지게 그려 보내주었다. 이날 리규보는 자신의 빈궁한 처지를 돌이켜보며 《가난한 재상》이라는 제목으로 한편의 시를 지었다.
한낮에 홰불을 켜고 보게 가난뱅이 재상을 찾기 힘들리 그러나 여기 찾아와 보게나 바로 내가 그 사람일세
아들에게 남긴 조언
리규보의 시에는 농민들의 생활을 동정한것들이 많다. 그는 량반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농민을 천하의 근본으로 여기면서 그들의 불행한 처지를 동정하는 많은 시편들을 썼다. 시 《햇곡식의 노래》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하였다.
그 얼마나 소중한가 생사도 빈부도 이 낟알에 달려있네
내 농부를 존경하기 부처님을 받들듯 하노니 사실 부처님이야 굶어죽는 사람 살려내는가…
기쁘구나 이 머리 흰 늙은이가 금년에 또 햇곡식을 보았으니
이제 죽은들 무슨 한이랴 농사군의 은덕이 이몸에도 미쳤네
농민들의 손에 의해 모든것이 창조되고 가꾸어진다는것, 따라서 농민을 근본으로 보고 그에 의한 정치를 실시해야 한다는것이 그의 정치적견해였다. 이러한 견해로부터 그는 자신이 청렴결백하게 사는것으로써 농민들의 피땀을 빨아먹는 기생충이 되지 않으려고 애썼으며 될수록 벼슬을 멀리하고 한낱 평범한 선비로 살기를 원했다. 그는 《백운소설》이라는 글에서 《백운》이라는 자기 호에 깃든 의미에 대하여 쓴 일이 있었다. …구름이라는것은 뭉게뭉게 솟고 훨훨 피여서 산에 걸리거나 하늘에 매이지 않고 동쪽으로 서쪽으로 마음대로 오고가는데 꺼리낌이 없다. 또 잠간사이에 변화하여 앞뒤를 짐작할수 없으며 활활 퍼질 때에는 군자가 세상에 나타난것과 같고 뭉칠 때에는 벼슬을 탐내지 않고 고결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종적을 감춤과 같으며 비가 되여서는 가물에 마르던것을 살리니 어질다 할것이요. 와도 반갑지 않고 가도 그립지 않으니 탁 틔였다 할것이요 빛은 푸른것, 누른것, 붉은것, 검은것이 다 구름의 본빛이 아니요. 오직 희고 무늬없음이 본 빛인것이다. 덕이 벌써 그러하니 빛도 그러한것이다. 만일 이것을 모범으로 하여 배우면 세상에 나가서 사물에 리익을 주고 들어오면 허심하여 그 흰빛을 지키고 무늬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면 귀있어도 들리지 않고 눈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 신선의 지경에까지 이르러서 구름이 나인지, 내가 구름인지 모르게끔 되면 옛 사람이 공부에서 얻은 결과에 가까울것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리규보는 자기를 평생 떠다니는 흰구름ㅡ백운이라고 하면서 벼슬을 탐내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가려 하였으며 농민들의 피땀을 빨아 욕심을 채우는 추악한 관료배들을 규탄하고 농민들을 천하의 근본으로 떠올렸다. 이러한 사상적견해와 관점은 생의 마지막시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1240년 늦가을 어느날 리규보는 통주목사로 부임되여 떠나가는 맏아들 함을 바래우게 되였다. (이제 저 남쪽하늘밑으로 아들을 떠나보내면 언제 다시 만날런지, 몸도 이제는 병들고 늙어서 다시 만날 날을 과연 기약할수 있겠는지…) 이것이 영리별이 될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저려와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임지에 가거든 부디 농군들의 생활을 잘 돌보거라. 어버이다운 심정으로 그들의 생활을 보살피고 잘 가꿔준다면 그들도 너를 따를것이다. 이것은 우리 가문의 뜻이기도 하니 아무쪼록 명심하여 이 대의를 버리지 말기를 바란다.》 마디마디 뜻을 담아 울리는 아버지의 말에 아들은 머리를 숙이며 《아버님, 걱정마시오이다. 제 어찌 아버님의 뜻을 거역하겠소이까. 아래로는 백성들을 잘 보살피고 우로는 임금을 잘 받들어 만사에서 그르침이 없도록 하겠소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작별의 시각이 가까워졌음을 느낀 리규보는 다시금 아들을 그러안고 어깨를 어루쓸었다. 이제는 늙어서 눈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저 떠오르는것은 새물새물 웃으며 아비품에 뛰여들군 하던 어릴적 아들의 모습이였다. 이날의 작별은 리규보에게 있어서 아들과의 마지막작별로 되였다. 그로부터 1년후에 그는 사랑하는 아들을 다시 보지 못한채 조용히 세상을 하직하였다. 한생 농민들의 피땀을 빨아먹는 어지러운 세상을 멀리하여 흰구름처럼 깨끗이 살아온 리규보는 개경의 이름없는 등판에 묻히였다.
《병이 다 나으니 이웃집 의원이 온다.》 《곱게만 하려다 알맹이를 놓치면 시의 참뜻을 잃어버린다.》 《시의 내용이란 진리에서 나옴이라 되는대로 가져다 붙일수 없다.》 《사람을 썩게 하는건 색에 빠짐이다.》 《뱀이나 승냥이도 제 새끼는 물지 않는다.》 《늙어도 인정은 변하지 않는다.》 《청백하게 사는것이 제일이요, 그 다음은 삼가하고 겸손함이다.》 《자기 몸 보기를 남의 몸 보듯 행동거지를 하나하나 살피라.》 《보람없이 사는 늙은이는 죽은 사람만 못하다.》 《가난하고 궁하면 세상인정을 안다.》 《목이 말라도 우물이 깊어 마실수 없다.》 《가난한 사람에겐 풍류도 소용없다.》 《송사리를 잡겠다고 시내물을 더럽히랴.》 《땅은 쓸어도 나무그림자는 남아있다.》 《같이 지낼 사람이 없으면 해도 길어진다.》 《꽃의 뒤에는 반드시 열매가 있으니 진다고 서러워할것 없다.》 《나라의 성쇠는 백성들의 힘에 달렸고 만백성의 생사는 벼이삭에 달려있다.》 《못난 녀자가 분 바른다고 고와지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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