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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승 단 (1168ㅡ1232)
고려중기의 문인. 처음이름은 원순이다. 과거에 급제한 후 희종때부터 고종년간에 이르는 기간에 례부시랑, 우간의대부를 거쳐 참지정사의 벼슬을 하였으며 고종의 스승으로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 《고려사》에 의하면 유승단은 《입이 무겁고 말이 적으며 믿음직하고 겸손하였을뿐아니라 아는것이 많고 기억력이 비상하였》고 옛글에 밝아 《세상에서 원순의 글을 첫째로 손꼽았》다고 한다. 《한림별곡》이라는 노래에 《원순문》이라고 있는것처럼 유승단은 산문에서 뛰여난 창작적재능을 가지고있었으며 옛도서와 력사에 대해서도 넓고 깊은 지식을 가지고있어 이에 대해 묻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의문이 풀릴 때까지 해석하고 론증하였다. 유승단은 당시에 나라일로 여러곳을 돌아다니는 과정에 보고 느낀 체험에 기초하여 날로 쪼들려가는 백성들의 가긍한 처지를 우려하는 시들을 적지 않게 썼다. 대표작으로 시 《덕풍현에서 쓰노라》를 들수 있으며 그밖에 시 《보령현에서 자며》 등이 알려져있다. 벼슬길에는 곡절이 많았으며 고려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는것을 극력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덕풍현에서 쓰노라》
한자시.
내 갈길 하도 바빠 잠시도 말을 멈추지 못하나니 나라의 엄한 령 받고 급하게 가는 몸이여라
신새벽 등불 아래 머리를 쳐들며 일어나고 온 하루 풍진에 휩싸여 눈을 비비며 달리노라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의 집은 거의나 허물어졌는데 이상하다 중들의 절간만 모두 풍성하고 잘 사누나
근년에 쌓여오던 페단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니 탑과 절의 큰 집들만 우뚝우뚝 남아있구나
유승단은 이 시를 쓰게 된 사연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밝혀놓았다. 《여러 고을을 지나며 보니 백성들의 집은 모두 지붕이 허물어지고 울타리가 넘어졌는데 왕왕 보이는 푸른기와의 큰 집들은 모두 중들이 거처하는 곳이라 이에 개탄하지 않을수 없어 시에도 그 뜻을 담았노라.》 유승단이 이 시를 어느때 지었는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왕의 명령을 받고 급하게 길을 다그쳐가다가 작은 고을인 덕풍현에서 쉬고갈 때 지었다고 한다. 물론 유승단은 덕풍현에서 처음 보는 사실만 가지고 이 시를 쓴것이 아니다. 그는 여러 고을을 지나오면서 어디에서나 보아왔고 볼 때마다 가슴아프게 여겨온 사실을 덕풍현에서 또 보게 되여 축적된 체험과 감정에 기초하여 지었다. 시에서는 어디가나 백성들의 집은 허물어졌는데 절의 큰 건물들만 우뚝우뚝 남아있을뿐아니라 절간들이 모두 풍성하게 잘사는것을 대조시키면서 그것을 비정상적인 일로, 가슴아픈 현상으로 강조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통하여 불교를 숭상하던 당시의 현실을 보여주고 그것이 심히 큰 부정적현상으로 되고있는 사실을 비난하였다. 시는 특히 인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진실하게 보여주고 백성들을 동정하는 마음을 담고있는것으로 하여 문학사적의의를 가진다.
《암흑을 비치는 야광주》
유승단은 인품이 준수하고 위엄있어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가 아직 한창 젊었을 때 있은 일이다. 상서라는 장관급 벼슬아치가운데 박인석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무슨 연고가 있어서 유승단이 그 집에 더러 들리군 하였다. 박인석은 1231년 몽골침략군을 물리치기 위한 구주성방위전에서 헌신분투하여 끝까지 적을 막아낸 애국명장 박서의 아버지이다. 그는 1143년생으로서 유승단이 명종 27년에 강화도로 추방당한 태자(후날의 강종)사건에 관련되여 벼슬길을 잃고 풍파를 겪다가 겨우 다시 벼슬길에 나서고있던 시기에 69살로 죽었다. 이 박인석에게 소문난 장점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사람들의 우단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인재를 잘 알아보는것이였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박인석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공은 무슨 까닭으로 아들벌이나 될만큼 년소한 사람을 마치 대단한 인물처럼 환대하십니까?》 이에 대해서 박인석은 긴 설명을 하지 않고 압축된 몇마디 말을 하였다. 《이 사람은 암흑을 비치는 야광주와 같다. 좀처럼 얻어보기 어려운 인물이지. 그런 사람이 이처럼 찾아주는데 내가 어찌 그를 우대하지 않겠는가!》 박인석의 이 짧은 답변은 유승단이 애젊은 시기부터 인재를 아는 사람들의 신망을 얼마나 받았는가 하는것을 잘 보여준다. 유승단은 벼슬길에서 곡절많은 생애를 걸었지만 문학계에서는 무신통치의 《암흑을 비치는 야광주》의 하나가 되여 세상에서 산문으로는 《원순의 문장》이 으뜸이라는 소문을 냈고 12세기 후반기~13세기 전반기 문학발전에 기여하였다. 아깝게도 그렇게 유명하였던 유승단의 글이 많이 남지 못하여 후세에 전하면서 《야광주》의 빛을 뿌려주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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