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3(2014)년 10월 18일 《우리 민족끼리》
열렬한 애국으로 빛나는 한생
오늘은 험난한 세월의 풍파를 헤치시며 애국, 애족, 애민의 고결한 생애를 빛내이신 열렬한 애국자 리보익녀사께서 서거하신 날이다.
이날을 맞으며 온 겨레는 우리 민족사에 영원히 지울수 없는 모습을 남기신 리보익녀사의 생애를 가슴뜨겁게 돌이켜보고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할머니는 마음속깊은 곳에 꿈을 묻어두고 살았습니다. 말하자면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값있게 살았습니다.》
위대한 혁명가의 어머니, 위대한 혁명가의 할머님으로서의 존엄과 지조를 끝까지 지키고 빛내이신것, 여기에 리보익녀사의 한생의 총화가 있다.
자손들에 대한 리보익녀사의 애정은 세속적인 가정의 울타리에 파묻힌 범속한 사랑이 아니였다. 그것은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참된 혁명가로 키우신 뜨거운 정이였고 손길이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부터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리보익녀사의 사랑은 몇곱절 더 강해졌다. 할머님께서는 가문의 장손인 어버이수령님의 성장을 보는데서 인생의 유일한 락을 찾고계시였다.
리보익녀사의 사랑은 많은 경우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기대와 믿음으로 표현되였다.
주체15(1926)년 아드님의 산소를 찾으신 리보익녀사께서 우리 수령님께 하신 말씀은 오늘도 만사람의 가슴을 뜨겁게 울려주고있다.
《증손아, 이제는 아버지가 메고있던 짐을 네가 메야겠구나. 너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어이 나라를 찾아야 한다. 나나 어머니에게 효도를 못해도 좋으니 조선을 독립하는 일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치거라.》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할머님의 그 말씀에서 큰 충동을 받으시였고 커다란 힘을 얻으시였다. 후날 수령님께서는 만일 그때 할머니가 조선독립이 아니라 앞으로 부자가 되거나 출세를 할 생각이나 하라고 하였더라면 자신께서는 그다지 큰 감동을 받지 못했을것이라고 감회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리보익녀사의 특징은 한마디로 강의한 로인이라고 표현할수 있다. 녀사께서는 그 나이의 녀성들치고 보기 드문 강자이시였다. 가난하고 불행하고 선량한 사람들에게는 그지없이 상냥하고 부드럽지만 사람같지 않은자들에게는 추상같으신분이 리보익할머님이시였다.
리보익녀사께서 《혜산사건》이후 일제의 악랄한 《귀순공작》에 의해 만주산야에서 별의별 고생을 다 겪으시면서도 꿋꿋이 보여주신 도고한 기품은 사람들을 얼마나 감동시키는것인가.
말이나 돈으로는 만경대집안사람들을 귀순공작에 움직일수 없다는것을 알게 된 적들은 총칼로 리보익녀사를 끌어내여 만주로 데리고 떠났다. 그렇게 되자 할머님께서는 좋다, 너희들이 억지로 날 데리고가겠거든 가자, 그렇다고 너희들을 도와줄줄 아느냐, 그대신 나는 나대로 이 기회에 손자가 싸우고있는 백두산과 만주의 산천이나 실컷 돌아보겠으니 어디 누가 이기나보자고 하시였다.
리보익녀사의 배짱은 정말 보통배짱이 아니였다. 륙순이 넘은 로인의 몸으로 1년가까이 서간도의 산악지방으로 돌아다니였으니 할머님께서 얼마나 고된 신역을 치르시였겠는가.
비록 힘들어도 할머님께서는 내 손자가 싸우고있는 산천을 보니 기운이 솟는다고 말하군 하였다. 적들이 총으로 몸을 쿡쿡 찌르며 손자를 찾으라고 강요할 때마다 할머님께서는 나는 그런 미친 소리는 할줄 모른다, 네놈들이 나를 죽이고 무사할줄 아느냐, 우리 손자의 총알을 받고싶거든 어디 네놈들 하고싶은대로 해봐라라고 맞받아 위협하군 하시였다.
설명절때 《귀순공작반》을 맡은 일본놈이 김장군할머니에게서 설인사를 받고싶은데 그 늙은이더러 와서 세배를 하게 하라고 한적이 있다. 그 말을 전달받으신 리보익녀사께서는 쓴웃음을 지으시며 《세상에 별소릴 다 듣는구나, 버릇없는 놈! 그놈더러 와서 김장군할미한테 세배를 하라구 해라!》하고 불호령을 내리시였다.
일본놈은 그 말을 듣고 어찌나 큰 충격을 받았던지 손에 들고있던 술잔까지 떨어뜨렸다. 수틀리면 흉기부터 뽑아들고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빌 때까지 야료를 부리는 독종이였건만 그날만은 기가 꺾여 아무 행패질도 못하고 과시 김장군의 할머니가 다르긴 다르다, 손자가 백두산의 호랑이라더니 그도 역시 할미호랑이가 틀림없다고 감탄하였다.
할머님께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싸움에서 이겼다는 소식을 들으실 때마다 누가 곁에서 듣건말건 조금도 상관치 않고 《내 손자가 장하다! 어서 왜놈들을 다 잡아치우고 우리 나라 땅에서 왜놈들의 씨를 말려라!》하고 기세를 올리시였다.
두차례나 리보익녀사를 《귀순공작》에 동원시켰던 적들은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채 고향으로 돌려보내지 않을수 없었다. 결국 리보익녀사께서 총 한자루 없는 로인의 몸으로 적들을 이기신것이다.
해방후 만경대고향집에 처음으로 들어서시던 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할머님께 그동안 자신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말씀드리시였다. 그러자 리보익녀사께서는 오히려 환하게 웃으시면서 내 고생이야 네가 한 고생에 어찌 비기겠느냐고 흔연히 말씀하시였다.
리보익녀사께서는 직업적인 혁명가도 아니시였고 학교를 다니신적도 없으며 조직적인 혁명교양을 받으신 일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여 녀사께서 적들과 그처럼 당당하게 대결할수 있었으며 매사에 처신을 그처럼 지혜롭고 대바르게 하실수 있었는가.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만경대집안가풍이 그리고 혁명이 할머니를 그런 녀걸로 만들어준것 같다고 회고록에 쓰시였다.
리보익녀사께서는 주체48(1959)년 10월 18일 83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나시였다. 해방후 14년을 제외한 이전의 근 70성상은 가난과 싸우고 불의와 싸우고 외적과 싸우시지 않으면 안되였던 풍랑사나운 세월이였다. 그렇지만 리보익녀사께서는 장장 수십년에 달하는 그 암흑의 시대를 적수공권으로 꿋꿋이 헤쳐오시여 손자분께서 안고오신 해방의 날을 맞으시였고 이 땅에 세워진 사회주의락원을 보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할머님의 기나긴 생애에 대하여 추억하시면서 할머니는 꿈이 많은분이였다고, 할머니가 장수할수 있은것은 꿈이 많은 덕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사상이 확고하고 신념과 의지가 강한것, 꿈이 많은것, 근면한것, 이것이 우리 할머니가 장수할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말씀하시였다.
리보익녀사께서는 국가수반의 조모였지만 일생을 소박하고 청렴하게 사시였다. 할아버님과 할머님께서는 국록을 바라지 않으시였으며 손자의 덕으로 호강하는것도 원치 않으시였다. 어디까지나 수수한 평백성으로 살아가려고 하시였다. 그러다나니 말년까지 농사일을 계속하시였다.
할머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소박한 초가집에서 그냥 사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나라의 모든 마을들에 기와집을 지어주고 천지개벽을 일으키시면서도 할머님께는 새 집을 지어드리지 못하신것이였다.
리보익녀사의 애국의 한평생은 민족사와 더불어 길이 빛날것이다.
본사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