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3(2014)년 9월 16일 《우리 민족끼리》

 

절세위인의 품에 안겨 (1)

 

위대한 김일성대원수님과 김정일대원수님은 바다와 같이 넓은 도량과 포옹력으로 지난날 민족앞에 죄를 지은 사람들까지도 한품에 안아 뜨거운 사랑과 믿음을 베풀어주신 민족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우리는 지난날 민족앞에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잘못을 뉘우치고 민족의 편에 돌아선다면 과거를 백지화하고 관용으로 대하며 그와 단결할것이다.》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품속에 안겨 인간의 참된 삶을 마음껏 향유한 사람들 가운데는 지난날 남조선에서 《반북》일선에 서있던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 가운데는 해방전에 장개석국민당군대에서 독립대대장(대령)으로도 복무하고 해방후에는 리승만《정부》의 《국군》상층부에도 있었으며 그후에는 《국군》 군단장으로, 외무부 장관 등을 지내며 《반북》일선에서 누구보다도 앞장서온 최덕신선생도 있었다.

그러던 그가 자기의 리념이 반민족적인 리념이라는것을 깨닫고 미국으로 건너간것은 주체65(1976)년이였다.

미국으로 건너간 최덕신선생은 늦게나마 민족통일을 위해 무엇인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고저 어버이수령님께서 밝혀주신 민족대단결리념을 받들어 련공합작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다.

그리하여 그는 《배달민족회》를 조직하고 그 의장으로 일하면서 해외에 사는 교인들을 민족의 화해와 단합을 위한 길에 나서도록 하는데 힘썼다.

그러나 한해두해 세월이 흐를수록 최덕신선생의 마음속에는 두고온 고국산천에 대한 그리움이 못 견디게 사무쳐왔다.

그의 이러한 고민과 번뇌는 날로 더해만 갔다.

최덕신선생의 이러한 마음속고충을 헤아려주신분은 바로 위대한 대원수님들이시였다.

위대한 대원수님들께서는 최덕신선생의 얼룩진 과거경력보다 인생말년에나마 조국앞에 떳떳한 일을 하고싶어하는 그의 민족적량심을 더 소중히 여기시고 그를 한없이 넓은 품에 안아주시였다.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이렇듯 뜨거운 사랑과 믿음속에 주체70(1981)년 6월 최덕신선생은 애국렬사릉에 안치되여있는 선친의 묘를 찾는 행운을 지닐수 있었다.

선친의 묘를 제눈으로 직접 확인한 그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오열을 터뜨리고야말았다.

사실 최덕신선생의 부친 최동오선생으로 말하면 어버이수령님의 사랑을 누구보다도 많이 받아온 사람들중의 한사람으로서 그이의 따뜻한 품속에서 인생말년까지 나라의 통일성업에 이바지한 애국지사였다.

최덕신선생은 자기 부친을 애국지사로 불러주시고 죽어서도 영생하는 언덕에 높이 내세워주신 위대한 대원수님들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감사의 인사를 드리였다.

위대한 대원수님들께서는 친어버이심정으로 그의 숙식조건과 생활에 이르기까지 깊은 관심을 돌려주시였다.

그나날 최덕신선생은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뵈옵는 크나큰 영광도 지닐수 있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조국을 방문한 최덕신선생을 몸소 접견해주시고 오찬도 마련해주시였다.

그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가 치아가 나빠서 음식을 먹는데 불편을 느끼고있다는것을 아시고 못내 걱정하시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되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가 조국방문의 나날에 새로 이발을 해넣도록 은정어린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자기 신상의 불편까지 헤아리시여 새 이발까지 해넣도록 하여주시는 위대한 대원수님들에 대한 한없는 고마움으로 하여 최덕신선생은 감격을 금할수 없었다.

최덕신선생의 마음속에는 자기자신만이 아닌 온 민족의 운명도 미래도 다 맡길 진정한 어머니품은 오직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품이라는 절대불변의 의지가 고요히 자리잡게 되였다.

이렇게 되여 최덕신선생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눈에 흙이 들어가는 마지막순간까지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을 따르리라 굳게 다짐하고 공화국에 영주할 결심을 내렸다.

그러나 최덕신선생은 자기에게 어떤 행운이 차례질것인가에 대해서는 미처 알수 없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75(1986)년 9월 17일 공화국에 영주한 최덕신부부의 소행을 두고 못내 기뻐하시며 고급살림집을 마련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최덕신부부에게 마련해주신 집은 영사실과 당구장, 식당과 응접실, 침실과 서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비품이 구색을 맞추어 갖추어져있었다.

풍치수려한 보통강기슭에 자리잡은 집으로 새집들이하던 날 최덕신부부는 다시한번 세찬 감격과 흥분속에 휩싸였다.

그들이 집에 들어서자 방 한가운데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생일상이 차려져있었다.

후날 최덕신선생은 감격에 울던 그때를 회고하여 자기의 수기에 이렇게 썼다.

《본인도 잊고있던 생일날 새집을 받고 그분께서 보내주신 생일상앞에까지 마주앉고보니 손님들의 축하를 받으면서도 이 사람은 그저 목이 메여올라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

누구나 세상에 태여난 사람치고 생일없는 사람은 없을것이다. … 그러나 언제 한번 인상에 새겨진 생일날은 없었다.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타향으로 류리표박할제 무슨 축복받을만 한 인생이라고 생일날을 기념하였을것인가. 고달픈 해외망명생활에서도 생일은 해마다 찾아왔으련만 역시 인상에 남은적은 없다. 심지어 한번밖에 없는 환갑날조차 하도 경황없고 정신상의 여유가 없어 먼 유럽땅에서 라면 한그릇으로 굼때였고 안해는 그것이 한으로 맺혀 늘 가슴아파하곤 하였다. 그런데 김정일령수께서 이 사람이 새 생활을 시작하는 날을 뜻깊게 해주시려고 이렇게 새집을 주시고 생일상까지 보내주시여 타향에서 맺힌 설음을 한꺼번에 가셔주시는것이 아닌가. 곁에 앉은 안해도 손수건을 눈언저리에 갖다대고 머리를 숙이는것이였다. 일군들이 건네는 축배잔을 받으며 나는 끝내 참았던 오열을 터뜨리고야말았다.

〈오늘은 일흔두번째 생일이 아니라 이 최덕신이 세상에 다시 태여나는 날이올시다. 이 백골난망의 은혜를 제 어찌 다 갚으리까.…〉》

최덕신선생에게 돌려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은 날을 따라 더해만 갔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최덕신선생에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의 신분증을 수여하도록 하시였다.

최덕신선생이 고백한바와 같이 이것은 단지 직함의 증서만이 아니라 크나큰 아량으로 그의 어지러운 과거를 백지화하고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영원한 동지로 믿어주시고 내세워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뜨거운 사랑과 믿음이 어린 보증이였다.

이역땅에 살면서 별로 한 일도 없는 자신에게 살림집과 생일상을 보내주신것만 해도 보답할 길이 없을진대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의 중책을 지닌것을 축하하는 성대한 행사도 마련해주시였으며 저녁에는 옥류관에서 있은 애국렬사유가족들을 위한 연회에 그들부부를 또다시 초대하여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최덕신선생의 건강과 독서, 문화정서생활에 이르기까지 깊은 관심을 돌려주시였으며 그를 어버이수령님을 모시는 영광의 자리에도 여러차례 내세워주시였다.

그리고 부친 최동오선생의 생전의 모습이 담겨져있는 기록영화와 그 부분을 사진으로 합성하여 보내주시는 크나큰 은정도 돌려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또한 주체76(1987)년의 새해를 맞는 그들부부에게 사랑의 선물도 보내주시였으며 한 일군을 부르시여 최덕신선생의 생활에서 불편한 점은 없는가에 대하여서도 친히 알아보시면서 일군들이 그의 집을 자주 찾아가보기도 하고 식사도 함께 하면서 즐겁게 지내도록 할데 대하여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참으로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최덕신선생에게 인간이 받아안을수 있는 온갖 사랑과 최상의 믿음을 다 베풀어주시였다.

그러시고도 주신 사랑이 적으신듯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최덕신선생을 원형으로 한 영화를 만들도록 하여주시고 영화가 세계적인 걸작으로 완성되도록 걸린 문제들을 하나하나 다 풀어주시였으며 영화가 완성되여 내외의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을 때에는 그 누구보다도 기뻐하시였다.

최덕신선생에게 돌려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은 이뿐이 아니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가 앓고있는 급성취장염을 걱정하시여 중앙의 큰 병원에 입원하여 집중적인 치료를 받도록 하여주시였으며 그가 퇴원한 후에는 혹시 병이 재발할가 념려하시여 평양시를 벗어난 먼거리에 다니지 않도록 세심한 관심을 돌려주시였다. 그러시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여 그를 유럽의 어느 한 나라에 보내여 계속 치료를 받도록 하여주시고 매일과 같이 병상태를 알아보시였으며 병의 증상에 따르는 고급약재와 보약도 아낌없이 보내주시였다. 그리고 최덕신선생이 그 나라의 음식에 잘 적응되지 못한다는 보고를 받으시고는 신선한 남새와 두부, 콩나물 등 조선음식감까지 매주 특별비행기로 보내주시는 한량없는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최덕신선생에게 돌려주신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사랑과 은정은 이처럼 뜨겁고 위대한 어버이사랑이였다. 

이렇듯 최덕신선생은 공화국영주의 닻을 내린 때로부터 불치의 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3년동안밖에 생활하지 못했지만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사랑의 품속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8기 대의원으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무소속대변지 《통일신보》 명예사장으로 사업하면서 보람있는 삶을 누릴수 있었다.

본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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