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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청년학생들의 선군정치주제의 론문경연에서 발표된 글]
선군정치와 6.15남북공동선언과의 관계
리현정, 문소영, 윤미숙, 박지영(덕성녀자대학교) 목 차 들어가며 Ⅰ. 북미관계변화에 따른 6.15공동선언성사 Ⅱ. 6.15공동선언리행에 유리한 조건 마련 1. 이북의 선군정치는 6.15공동선언리행에 유리한 민족내부의 힘을 마련하였다. 2. 이북의 선군정치는 6.15공동선언리행에 유리한 국제적여건을 마련하고있다. Ⅲ. 6.15공동선언리행에서 선군정치의 역할
들어가며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민족은 남북이 서로 반목하고 대결을 앞세우던 지난 반세기를 지우고 상호공존과 단결의 의식을 높여 통일로 나아가고있다. 이를 가능하게 한것이 바로 전민족의 의지로 탄생한 2000년 6.15공동선언이라는것은 누구나 공감하고 인정하는 사실이다. 또 《한》반도의 평화를 막고 끊임없이 전쟁위협을 일삼는 미국과의 힘의 관계에 전환점을 마련한 이북의 선군정치가 있다. 이 론문에서는 선군정치와 6.15공동선언과의 관계를 알아보고자 한다.
Ⅰ. 북미관계변화에 따른 6.15공동선언성사 전세계의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반도는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적위치로 하여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영향을 받아왔다. 91년 12월 쏘련의 해체로 랭전체제가 종식되자 미국은 《적》이 사라짐으로써 군사훈련, 군력증강의 명분을 되찾아야 했다. 중동아랍의 이란, 이라크, 수리아와 동북아시아의 이북이 그 주요대상으로 미국은 90년대 전기간 WINㅡWIN 군사전략을 관철했다. 이로부터 미국의 정치, 경제, 군사적압박정책과 이에서 벗어나기 위한 각국의 필사적체제수호전략이 충돌하였다. 특히 반제자주로선을 확고히 세워 사회주의기치를 고수하고있는 이북과 미국의 격돌로 인해 분단이래 지금까지 남북관계는 북미관계의 커다란 영향을 받을수밖에 없었다. 선군정치와 6.15공동선언의 관계를 밝히는데 있어 북미대결의 력사가 전제로 나서는 리유가 여기에 있다. 1993년 이북이 1985년부터 전력난해소를 위해 건설, 운영해온 녕변의 원자력발전소를 핵문제시비의 구실로 삼았던 녕변핵위기를 시작으로 1994년 6월 《한》반도는 미국과 이북사이에 고조된 긴장속에서 전쟁의 위기상황에 봉착했으나 같은해 10월에 발표된 북미기본합의서(제네바합의서)가 채택됨으로써 그 긴장은 해소되는듯이 보였다. 그러나 제네바합의는 북미관계정상화로 이어지지 않았다. 제네바합의서명후 6개월안에 체결되여야 할 경수로제공계약은 1995년 12월이 돼서야 확정되였고 미의회의 예산승인 역시 공화당의 반대로 지연되였다. 클린톤정부는 94년 김일성주석의 서거로 이북의 붕괴가 가속화될것이라 판단하여 제네바합의의 리행사항을 제대로 리행하지 않았기때문이다. 이로 인해 2003년까지 경수로를 인도하겠다는 미국의 약속은 2000년 2월이 되여서야 경수로발전소 본 공사가 시작됨으로써 미정부는 시간에 쫓길수밖에 없었다. 1998년 8월초,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에서 이북의 금창리지하시설공사문제가 화두, 이어 《뉴욕타임스》 8월 17일자 보도는 이북의 지하시설공사문제가 제네바합의의 파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북은 건국 50주년 기념일(9월 9일)을 앞둔 1998년 8월 31일 《광명성 1호》라는 인공위성을 발사하였다. 광명성 1호 발사를 두고 이북은 《100% 자체기술로 이룩한 자립적민족경제의 또 하나의 결실이자 인류공동의 재보에 기여할 귀중한 과학기술성과》, 《실용위성발사를 위한 튼튼한 토대로서 주체조선 국력의 힘있는 과시로, 사회주의강성대국건설의 새로운 리정표를 마련한 의의깊은 사변》이라며 대내외에 널리 알렸다. 이북이 인공위성을 궤도에 진입시킬수 있는 운반로케트를 개발했다는것은 이북이 첨단과학기술을 보유하였으며 이는 대륙간탄도미싸일(ICBM) 개발가능성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미국은 이를 《충격적이고 도발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였고 광명성 1호에 대해 《실체가 확인되지 않는다》며 《실패한 인공위성》으로 규정하는가 하면 ICBM인 《대포동 1호》로 정정하는 등 갈팡질팡했다. 미국의 강경파들은 이북이 미국 몰래 미본토를 공격할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싸일을 개발하고있었으며 대량파괴무기비확산정책을 뒤엎고 제네바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금창리굴착공사를 핵개발의혹과 결부시키면서 제네바합의무용론과 대북전쟁불사론을 웨치기 시작, 《새로운 전쟁계획(new warplan)》ㅡ작전계획 5027-98ㅡ을 언론에 공개하면서 이북을 자극하고 《한》반도에서 전쟁위기를 조성하려 하였다. 이에 이북은 선제타격권은 미국에게만 있는것이 아니며 공격을 받을 경우 미국본토를 미싸일로 공격하겠다는 항전의지를 담은 강경한 성명을 발표하며 미국의 공세에 맞선것이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대북전쟁은 개시될수 없었는데 이는 미국이 이북의 《광명성 1호》 발사로 이북의 군사적전쟁억지능력을 인정했다고 판단할수 있다. 이후 클린톤정부는 1998년 윌리엄 패리(W.Perry) 전 국방장관을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임명하였으며 다음해 5월 이북을 방문한 패리는 방북직후 1999년 9월 미의회에 《패리 보고서》를 제출하여 미국의 대북전략은 강경에서 대화로 변화된다. 패리는 1999년 10월 공개용보고서를 최종 발간하였으며 그 주제어는 포용이였다. 그의 보고서에는 앞으로도 상당기간 남북이 공존한다는 전제아래 이북과의 협상 등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담겨있었다. 이북은 제네바합의의 지속적준수와 미싸일실험유예, 중동지역 미싸일판매를 포함한 미싸일프로그람의 중지를 위한 계속적인 조미대화 등에 동의했다. 이러한 북미관계의 진전은 이북은 사라지거나 붕괴하지 않는다는 판단아래 패리가 표현한대로 《우리가 의도하는 이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이북》과 관계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바탕을 둔것이다. 그동안 미국은 이북에 끊임없는 핵의혹을 제기하며 군사, 외교, 경제 측면에서 대북제재를 가하였다. 반면 이북은 90년대 일시적인 경제난속에서도 선군의 기치를 고수해왔다. 이에 미국은 대북특사 패리가 이북을 방문한 후 작성한 패리보고서를 통해 이북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였고 대북정책을 수정하면서 대화에 나서게 되였다. 이러한 북미관계의 변화는 남북관계발전을 차단하려는 미국의 긴장고조정책을 약화시켰다. 90년대 후반 이북의 선군정치는 《한》반도의 분렬과 긴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미국의 대북전략에 금이 가게 했으며 이것으로 남북간의 대결과 긴장을 화해, 협력으로 돌려세워 6.15공동선언이 나올수 있게 하였다.
Ⅱ. 6.15공동선언리행에 유리한 조건 마련
1. 이북의 선군정치는 6.15공동선언리행에 유리한 민족내부의 힘을 마련하였다. 우리 민족은 지난 반세기동안을 분단된채 서로 대결하며 살아왔고 그로 인해 이남국민들 정서에 반북, 반공의식이 뿌리깊은 현실이였다. 하지만 통일에 대한 우리 민족의 념원은 끝나지 않았고 2000년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 아래 자주적통일에 합의한 6.15남북공동선언을 통해 화해와 대단결의 시대를 열어가게 되였다. 6.15공동선언의 발표로 우리 민족의 힘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공존공영을 실현할수 있게 되였다고 볼수 있다. 6.15공동선언의 발표로 리산가족상봉과 비전향장기수분들의 송환에 더불어 그해 올림픽에서는 남북단일기를 들고 동시입장하는 등 체육, 문화, 예술분야에서도 남북의 교류는 정부와 민간차원을 넘나들면서 활발히 진행되였고 개성공단을 세워 경제협력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또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 도로련결사업의 본격화와 금강산륙로관광이 시작되고 로동자, 농민, 녀성, 청년학생 등 각 분야에서 폭넓은 민간교류가 끊임없이 진행되여왔다. 2005년에는 분단 이후 최초로 정부당국과 민간단체에서 함께 진행한 6.15민족대축전을 계기로 조국통일의 새로운 전환이 열리게 되였다. 김정일국방위원장과 정동영통일부 장관의 6.17면담은 미국의 전쟁위협으로 그동안 얼어붙었던 남북관계를 전면적으로 발전시킨 면담이였다. 같은해 8.15행사에서는 그 열기를 이어 북측 대표단의 《현충원》방문으로 이어졌으며 남북 국가대표의 축구경기 등을 통해 대중적이고 평화적인 민족행사를 성사하였다. 이러한 남북화해의 기운은 이남에서 보안법페지에 대한 여론을 형성하여 2004년 12월에는 이북을 《적》으로 규정한 보안법페지에 대한 국민단식롱성을 국회앞에서 진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북은 악화된 북미관계속에 핵보유선언, 미싸일발사, 핵시험을 하면서 미국을 다시 대화로 이끌어내였다. 이것은 이북이 선군정치를 앞세워 미국과의 대결에서 우위를 차지하였음을 보여주었고 이남민중들에게 통일된 우리 민족은 외세에 좌우되는 약소민족이 아닌 힘있는 민족이 될것이라는 기대를 심어주어 우리 민족의 힘으로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의지를 크게 고양시켰다. 이렇듯 이북의 선군정치는 북과 남, 해외의 온 민족에게 민족적긍지를 높여줌으로써 6.15공동선언의 리행에 유리한 방향을 제시하였다.
2. 이북의 선군정치는 6.15공동선언리행에 유리한 국제적여건을 마련하고있다. 랭전시대 한 축을 형성하였던 로씨야의 급격한 쇠퇴는 미국을 전세계적규모의 《초대국》으로 급부상시켰다. 미국은 1991년 걸프전의 승리로 세계의 일극지배체제를 강화할수 있었다. 이러한 세계질서 가운데 이북은 우리 식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체제를 유지해나갔다. 이북에서는 90년대 북미관계악화와 《고난의 행군》속에서 이북사회가 유지될수 있었던것은 선군정치의 힘이라고 한다. 이러한 근거는 1999년 발표된 패리보고서이후의 정세변화에 있다. 1999년 패리보고서로 유화된 북미대결국면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그해 10월 조명록차수의 미국방문과 알브라이트 미국무장관의 방북이 이어져 결국 북미공동콤뮤니케까지 이끌어내였다. 북미공동콤뮤니케로 이북과 미국은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한》반도의 새로운 평화체제론의를 위해 대화로 나서게 되였다. 《한》반도의 평화적국면을 열고 근본적관계개선 등의 지향에 합의를 열어 북미관계정상화가 예고되기도 하였다. 이북은 미국뿐만아니라 동북아지역 국가들과의 관계정상화도 추진했다. 당시 로씨야의 신임대통령 뿌찐은 강력한 로씨야의 재건을 표방하면서 미국의 지위를 견제하였다. 뿌찐대통령은 김정일국방위원장과 두 차례 정상회담을 갖고 동북아 및 《한》반도정세, 경제협력문제 등을 론의하고 2001년 7월 19일 북ㅡ로공동선언을 채택하였다. 북ㅡ로 정상회담에서 이북은 이남주둔미군철수가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보에 중요한 관건임을 내세웠다. 랭전이후 공식적으로 이남주둔미군의 거취문제를 론하지 않아온 로씨야에서 이북의 이남주둔미군철수에 대한 적극적지지를 표하였다. 북ㅡ로 정상회담은 《한》반도문제의 자주적해결에 대한 로씨야측의 지지를 얻어 6.15공동선언리행의 유리한 조건을 한층 높였다. 이북은 중국과도 정상회담을 하였다. 이북과 중국의 정상회담은 두 국가의 혈맹관계가 여전히 건재하고있음을 보여준다. 당시 중국은 강화된 미ㅡ일간의 안보협력이나 미국의 전역미싸일방어씨스템에 대응할만한 마땅한 협력체제가 없었다. 이에 중국으로서는 북ㅡ중 공조체제로 미국과 일본을 견제하는 효과를 얻을수 있었다. 이러한 흐름에 이어 이북은 과거 《한》반도를 식민지배했던 일본과의 정상회담이 진행되게 된다. 북ㅡ일관계정상화는 동북아의 랭한기류를 걷어내는데 도움이 되였다. 북ㅡ일 정상회담에서 일본은 과거 일제식민지배에 대해 사과를 표명했으며 이북과의 경제협력에 합의했다. 선군정치를 앞세워나간 이북은 로씨야, 중국, 일본을 넘어서 유럽의 나라들과도 수교를 맺으면서 긴장된 동북아정세를 완화시켰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내 힘은 군력에서 나옵니다. 내 힘의 원천으로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모두가 일심단결하는 일이고 두번째가 군력입니다. 외국과 잘되는것도 군력이 있어야 하고 외국과의 관계에서 힘도 군력에서 나오고 내 힘도 군력에서 나오고있습니다. 다른 나라와 친해도 군력을 가져야 합니다.》라고 하시였다. 이를 통해 볼 때 이북은 강력한 군력으로 이북사회전반뿐아니라 외교관계까지도 이끌고간다고 볼수 있다. 그러므로 이북은 선군정치의 힘으로 《한》반도를 둘러싸고있는 나라들과의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6.15공동선언을 리행할수 있는 유리한 국제적조건을 마련하였다고 보는것이다.
Ⅲ. 6.15공동선언리행에서 선군정치의 역할 북미관계를 통시적으로 살펴본다면 6.15공동선언이후에도 미국의 대북적대정책과 이북의 선군정치는 지속적으로 대립하였음을 알수 있다. 2000년 발표된 6.15공동선언과 북미공동콤뮤니케는 《한》반도정세와 더불어 북미관계의 전환점을 마련하였지만 미국의 공세는 끝나지 않았다. 2001년 들어선 미국의 부쉬행정부는 이전의 성과물들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북미간의 합의를 뒤엎고 대북적대정책을 본격화함과 동시에 남북관계에도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부쉬 미대통령은 이란과 이라크, 이북을 《악의 축》으로 지목하고 《예측할수 없는 적들이 미국을 공격하기전에 먼저 공격한다.》는 핵선제공격개념의 대상국으로 공식화하였다. 그뿐만아니라 같은해 9월 20일에 작성된 국가안보전략보고서(NSS, National Security Strategy)에서는 이북을 이라크와 더불어 《대표적불량국가》라고 지칭, 다음해 1월 28일 년두교서에서 부쉬 미대통령은 이북을 《무법정권》이라 언급하며 외교적압력을 가하였다. 또한 미국은 이북의 《우라니움리용 핵개발시인설》을 주장해 제네바합의에 명시된 중유공급을 중단함으로써 북미간의 약속을 파기했다. 이러한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에 대해 이북은 《우리는 미국대통령특사에게 미국의 가중되는 핵압살위협에 대처하여 우리가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한것도 가지게 되여있다는것을 명백히 말해주었음》이라고 밝히며 《강경에는 초강경으로》 맞서겠다는 원칙적립장을 고수하겠다고 주장하였다. 미국은 대북송금문제를 터뜨려 이남에서 특검법이 통과되는데 결정적영향을 끼쳤으며 해볕정책을 바탕으로 한 남북교류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6.15공동선언발표이후 남북의 정부와 민간차원에서의 교류, 협력사업이 활발해지고 《한》반도평화통일에 대한 본격적인 론의가 진행되는 정세속에서도 미국은 이북을 《폭정의 전초기지》로 규정지으며 대북적대정책을 유지하였다. 라이스 미국무장관의 대북관에 대해 부쉬 미대통령은 2005년 2기 부쉬행정부취임사에서 《세계의 폭정을 종식하는것이 미국의 정책》이라 표명하였다. 그러나 북은 이러한 미정부에게 선군혁명총진군대회를 개최하고 핵무기보유 및 증산과 6자회담 무기한 불참선언으로 대응하였다. 2005년 2월 이북의 핵보유선언에 압박을 받은 미국은 결국 6자회담에 나와 그해 9월 19일 6자공동성명을 내게 된다. 북의 핵무기포기, 미국의 대북핵위협중단 및 관계정상화와 《한》반도의 공고한 평화체제구축을 위한 별도의 협의를 진행하는 등의 내용의 《9.19성명》을 도출해냈다는것은 북미대결에서 눈여겨볼 부분이다. 정전협정이 유지되는 가운데 나온 9.19공동성명은 제네바합의를 사실상 퇴장시키고 《한》반도정세를 좌우할 새로운 틀로 등장한것으로 평가되기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미국은 공동성명리행은커녕 북의 인권문제를 들어 유엔에 대북인권결의안을 통과시켰으며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의 이북자금을 동결하는 금융제재를 가하였다. 2006년 3월에 발표된 미국가안보전략보고서(NSS)에서는 《악의 축》, 《대표적불량국가》발언에 이어 이북과 이란, 수리아 등의 국가들을 가리켜 《독재국가》라 지칭하였다. 이러한 군사적, 경제적압력에 맞서 이북은 2006년 7월 미싸일발사와 10월 핵시험을 통해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에 강력히 대응하였다. 이북의 핵시험이후 진행된 미국주도의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의 확대와 강화, 유엔안보리의 대북제재가 긴장된 국내외 정세를 낳았다. 그러나 곧 이북의 핵시험을 통한 핵억지력으로 북미간의 힘의 력학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였고 《한》반도내 평화협정에 대한 론의들이 진행되였다. 2007년 《9.19공동성명리행을 위한 초기조치》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2.13합의문》에는 이북의 핵시설페쇄와 불능화, 핵사찰수용, 중유지원 100만t 상당의 경제적지원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2.13합의는 《한》반도평화를 위한 상호주의에 립각한 행동 대 행동의 첫 출발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또한 이북이 2.13합의문의 리행 전제조건으로 강력히 요구한 BDA자금동결해제문제의 경우 미국이 북측의 요구사항을 들어줌으로써 국제정세와 북미관계에서의 힘의 력학관계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2.13합의문에 힘입어 올해 5월에는 남북을 가로짓는 경의선이 재개통되였으며 하반기 남북의 정상회담이 열리기로 공식 발표됨으로써 6.15공동선언의 리행에 더욱 큰 힘을 불어넣고있다. 이처럼 6.15공동선언발표이후 미국의 끊임없는 군사, 외교, 경제적부문에서의 대북적대정책에도 불구하고 9.19공동성명과 2.13합의라는 성과가 나올수 있었던것은 공동선언을 리행하고자 하는 민족구성원의 열의와 《강경에는 초강경》이라는 선군정치의 원칙적립장을 고수하며 부쉬행정부의 대북적대정책을 수정하게 만든 북의 영향으로 볼수 있겠다. 분단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는 항시적인 긴장과 대결이 지속되였지만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이북의 선군정치와 6.15공동선언지지리행세력이 《한》반도에서 북미간 힘의 력학관계가 전환될수 있게 하였고 그 힘으로 우리는 지금 9.19공동성명의 초기조치들이 리행되는 순간을 목격하고있다. 때문에 《〈한〉반도의 평화적통일》이라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민족구성원모두의 멈추지 않는 6.15공동선언리행의지와 함께 《한》반도정세에 큰 영향을 미쳐온 북의 선군정치를 잘 알아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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