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선청년학생들의 선군정치주제의 론문경연에서 발표된 글]

 

1960년대 김정일국방위원장의 군부문사업을

통해 본 선군정치의 시작점

 

류 형 종(광주청년 김양무)          

목 차

Ⅰ. 서론

Ⅱ. 본론

Ⅲ. 결론

 

서론

선군정치는 언제 시작되였는가?

이북학자들은 대체로 1995년 1월 1일, 김정일국방위원장의 김일성주석 서거 이후 첫 현지지도로 다박솔초소를 찾은 때를 선군정치의 시작점으로 보는데 이북에서는 선군정치의 기원을 김일성주석의 군중시로선에서 찾고있다.

이 글에서는 김정일국방위원장이 군단위지도를 시작한 1960년대를 살펴봄으로써 선군정치의 기원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남북의 통일을 위해서도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정치방식에 대해 연구할 필요성이 있다. 특히 정상회담을 앞둔 지금 시기에 우리는 김정일국방위원장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2000년 8월 12일 언론사 사장들이 김정일국방위원장을 면담할 때 이북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질문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첫째가 일심단결이고 두번째가 군력이다. 군력이 있어야 외국과의 관계를 자주적립장에서 풀어나갈수 있다. 다른 나라와 친해도 군력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외세에 롱락당한 리조말엽의 대원군이나 민비신세가 될수 있다.》

이북의 기본정치방식은 선군정치와 인덕정치라고 할수 있다. 선군정치로 군력을 키우고 인덕정치로 사회의 단결력을 높이는것이 김정일국방위원장의 기본정치방식이라 본다.

북의 문헌에는 선군혁명령도와 선군정치라는 두 용어가 자주 나온다. 선군혁명령도와 선군정치의 관계는 무엇인가. 령도(領導)라 함은 사전적으로는 《거느려 이끌다, 앞장에서 지도하다》라는 뜻이다. 선군혁명령도는 군대를 앞세워 혁명을 이끌고 지도한다는 뜻이고 선군정치는 선군혁명령도가 국가사업으로, 그것도 제일국사로 공식화된것이라고 본다. 이 글에서는 김정일국방위원장이 국방부문지도사업을 시작한 첫 시기인 1960년 8월 25일부터 1960년대 말까지를 기본으로 해서 김일성주석으로부터 김정일국방위원장에로의 군중시정책의 계승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본론

김정일국방위원장은 군사중시로선의 출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수령님께서는 일찌기 아버님으로부터 두 자루의 권총을 물려받으시고 타도제국주의동맹의 기치를 높이 드신 때로부터 혁명과 건설을 령도하여오신 전과정에 총대중시, 군사중시의 사상을 일관하게 견지하시고 언제나 군사력을 강화하는데 선차적인 힘을 넣으시였습니다.》

《…선군혁명령도는 수령님께서 1932년 4월 25일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하시고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을 시작하신 때로부터 이미 시작되였습니다.》

이북이 주장하는 선군정치의 출발은 이북의 군중시로선, 총대중시로선에 기원을 두고 김일성주석의 아버님이신 김형직선생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김일성주석의 아버님이신 조선국민회(반일지하조직) 회장이였이던 김형직선생(1894.7.10ㅡ1926.6.5)은 림종하면서 《〈칼든 놈들과는 칼을 들고 싸워야 이길수 있다〉는것이 3.1운동을 비롯한 반일운동의 교훈이였다.》라고 하며 두 자루의 권총을 어린 김일성주석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였다고 한다. 이 당시의 정황에 대해서는 김일성주석이 자세히 회고한바 있다.

이 두 자루의 권총은 김일성주석이 견지하여온 군중시정책의 출발점이며 이북은 이 두 자루의 권총이 오늘날 김정일국방위원장이 내세운 선군정치의 력사적시원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이북의 자료에 따르면 선군사상은 주체사상을 기반으로 창시되였다.

김일성주석은 1930년 6월 30일, 카륜회의에서 《무장은 우리의 생명이다! 무장에는 무장으로!》라는 총대중시구호를 제시하고 총대를 앞세워 일제를 타도하고 조국을 광복할데 대한 로선, 즉 선군혁명로선인 항일무장독립투쟁을 반일민족해방투쟁의 기본로선으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첫째가는 과업으로 규정하였다. 이때부터 총대로 나라와 민족의 자주독립과 번영을 이룩할데 대한 군중시로선이 시작되였다고 본다.

이북문헌에 의하면 김일성주석은 다음해 1931년 12월 명월구회의에서 《무장에는 무장으로, 반혁명적폭력에는 혁명적폭력으로!》라는 구호밑에 반일전쟁을 선포하고, 1932년 4월 25일,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하여 첫 혁명적무장력, 선군사상을 구현할 핵심력량을 마련하였으며 1934년 3월에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하였다고 한다. 조선인민혁명군은 군대이면서 동시에 당, 정권기관으로서의 기능도 다 같이 수행하는 정치적력량이였다.

김일성주석의 항일유격대는 1937년 6월 4일에는 보천보전투를 벌려 국내에 진출했으며 백두산에 근거지를 만들고 일제패망까지 항일투쟁에 나섰다. 광복후에는 두달도 되지 않아 1945년 10월 10일, 당을 창건하였다. 1945년 11월 17일, 첫 군사정치간부양성기관인 평양학원을 세우고 륙해공군창설준비를 다그쳐 1948년 2월 8일 정규군인 조선인민군을 창건하였다. 1948년 9월 9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웠다. 이처럼 김일성주석은 먼저 항일유격대부터 창건하고 조국광복을 이룩한 후에야 비로소 당도 국가도 창건하는 절차를 밟았다.

이북의 자료에 따르면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어린시절에도 《두 자루의 권총》이 있다고 한다. 이는 이북의 선군정치가 일시적으로 제기되는 정치방식이 아니라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일생을 두고 일관되게 추진되는 정치방식이라는것을 보여준다.

1949년 9월 22일, 어린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어머님의 림종을 맞았다고 한다.

어머님은 김정일국방위원장에게 평소 착용하던 소형권총 한 자루를 물려주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그 소형권총을 가리켜 《마음의 기둥》이라고 표현한다고 한다.

두번째 권총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7월 10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에서 김일성주석이 어린 김정일국방위원장에게 《혁명가는 일생동안 손에서 총을 놓지 말아야 한다. 총은 혁명의 승리를 담보해주는 방조자라는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며 혁명의 계주봉으로 생각하라고 가문에서 3대째 내려오는 권총을 넘겨주었다고 한다. 이상의 자료를 통해 알수 있는것은 이북에서 주장하는 총대가 일시적인 구호와 로선이 아닌 항일독립시절부터 전통으로 내려오는 유산이라는 점이다.

군사를 중시하는 이북의 립장은 김정일국방위원장에게도 그대로 투영되여 김정일국방위원장은 대학에 입학하기 며칠전인 1960년 8월 25일부터 군부대 현지지도를 수행하였다고 한다.

당시 1960년대의 정세는 미국의 제국주의적압박이 거세여지던 상황이였다. 꾸바 미싸일위기이후 쏘련에 대해 자신감을 얻은 미국은 《한》반도에서도 정전협정을 위반하고 주《한》미군에 핵무기를 도입해서 《한》반도에 긴장을 고조시켰다. 이런 속에서 김정일국방위원장은 1960년부터 군부대를 방문하였으며 이것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이 1964년 6월 19일에 당중앙위원회에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한것과 비교하더라도 4년이나 빠른 시점이다. 이같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정치경력은 김일성주석이 군건설을 중시하는 로선의 계승이라고 볼수 있는것이다.

김일성주석은 《한》반도의 긴장고조와 윁남지역의 전면전쟁 등을 비롯한 미국에 의해 조성된 위태로운 정세의 요구를 반영해 1962년 12월 경제와 국방을 병진시킬데 대한 로선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김정일국방위원장과 함께 대덕산초소에 현지지도를 가신 1963년 2월 6일, 군대의 전투력강화를 위한 지도적방침을 이렇게 밝힌다.

《인민군대에서 들고나가야 할 구호는 일당백입니다. 옛날부터 싸움 잘하는 장수를 〈일당백〉이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하나가 백을 당한다는 말입니다. 군인들이 정치사상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전투훈련과 방어공사를 잘하면 일당백이 될수 있습니다.》

경제를 약화시키지 않고 국방을 강화하려면 근본혁신대책이 필요했다. 그것은 현존 인원과 무기를 가지고도 증강된 적과 싸워서 이길수 있는 강한 군대를 만드는것이였다. 당시 김일성주석이 제시한 《일당백》구호는 전군의 간부화, 전군의 현대화, 전인민의 무장화, 전지역의 요새화라는 4대군사로선으로 이어지며 오늘날 선군정치의 밑받침인 군력을 키워냈다.

이 당시 이북의 군안에서도 군벌관료주의가 남아있었다고 보인다. 이북은 군벌관료주의를 두고 군사명령을 만능으로 생각하고 군인대중의 창조적열의를 억눌러 군대 안에서 당의 지도력을 약화시킨다며 반대의 립장을 밝히고있다. 이북은 1967년 5월 4일부터 8일까지 열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주석의 선군사상을 반대한 간부들을 폭로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일당백》구호를 반신반의하고는 《어떻게 혼자서 백을 당한다는 말인가》고 하며 미국과의 평화공존론에 편승했으며 항일무장독립투쟁의 전통을 거세해버리기 위해 1967년 건립되던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에 김일성주석의 동상을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또한 당시 전략적로선이였던 경제와 국방의 병진로선을 반대했으며,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를 출판하지 못하게 하면서 군중시로선에 도전한것이다.

이에 김일성주석은 1967년 5월 25일에 《당의 유일사상체계》(오직 하나의 사상으로 전당을 일색화하는 당건설원칙)를 세우며 이에 기초한 당의 통일단결의 실현에서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오기 위해 《당면한 당선전사업방향에 대하여》라는 연설을 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유일사상교양사업, 특히 항일혁명전통교양사업에 불이 붙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전군에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는데 주목하였으며 군벌관료주의를 극복하는데에도 앞장섰다고 한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1969년 1월 19일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및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일군들과 《인민군대 당조직과 정치기관들의 역할을 높일데 대하여》라는 담화를 하면서 군벌관료주의자가 불필요한 구호라면서 내리라고 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당중앙위원회를 목숨으로 사수하자!》라는 구호를 계속 높이 들고 전군을 당과 수령의 두리에 굳게 묶어세워야 하며 수령의 유일적령도밑에 전군이 하나와 같이 움직이는 군령도체계를 철저히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결과적으로 김정일국방위원장이 국가사업에 나선 첫 시기였던 1960년대는 김일성주석의 군중시로선을 이북사회내에 관철해나가던 시기로 볼수 있다.

이러한 김정일국방위원장의 군단위지도는 실제 미국과의 대결에서도 세계여론의 주목을 이끌었다. 1968년 1월 23일 이북의 군해병들이 동해의 북령해를 침범한 미군의 《푸에블로》호를 나포한것이다. 당시 《푸에블로》호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진 북미대결전은 사회주의와 제국주의와의 운명을 건 치렬한 싸움이였다.

김일성주석은 1968년 2월 8일 《우리는 전쟁을 바라지 않지만 결코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보복에는 보복으로, 전면전쟁에는 전면전쟁으로〉 대답하겠다.》고 강경하게 언명하였다. 336일간이나 계속된 외교전 끝에 성탄절을 앞두고 12월 23일 미국정부대표는 판문점에서 북의 정부대표가 요구한 사죄문에 미합중국정부의 명의로 서명하고 포로들을 찾아갔다. 이북은 이를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지략이 돋보인 외교전이였다고 평가한다.

이어 1969년 4월 15일, 이번에는 하늘로 미국의 《EC-121》전자정찰기가 북측 상공에 들어갔다가 격추되였다. 미국은 또 보복하겠다고 떠들었지만 이북당국은 《미제가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단다면 맞받아나가 총결산을 짓겠다》며 물러서지 않았고 이 경우에도 결국 미국이 물러서고 말았다.

 

결론

김정일령도자에 의한 선군정치방식의 확립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것은 군대에 대한 정치적지도권과 함께 군사적지휘권을 행사하면서 군중시정책을 이어나간것이다.

1960년대 말 김정일국방위원장은 군대에 대한 당적지도를 통하여 군대안에 당의 령도체계를 철저히 확립하였으며 《푸에블로》호사건, 《EC-121》기 사건을 비롯한 중요한 군사작전들을 승리적으로 결속함으로써 이북의 군중시정책의 생활력을 증명하였으며 이는 선군정치의 토대가 되였다고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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