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 회)

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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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천은 복잡한 생각에 잠겨 사무실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문득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부지배인 송명식이 다가오고있었다.

《어디 있는지 몰라서 한참을 찾아다녔습니다.》

《무슨 일이 있나?》

송명식은 김세천의 얼굴을 살피듯 바라보았다. 바재이는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래일 기술부서사람들중에서 열사람만 작업에 동원시켜주십시오.》

김세천은 저도 모르게 얼굴빛이 꿋꿋해서 송명식을 바라보았다. 그는 기술일군들을 자기 분야가 아닌 작업동원에 참가시키는것을 제일 싫어했다. 그것때문에 행정일군들과 여러번 언짢은 말이 오고가기도 했다.

《어쩌겠습니까? 래일 당장 공장아빠트기초를 다시 메워야 할 일이 제기됐는데 생산과장은 현장로력은 절대로 낼수 없다고 막 야단입니다. 공장에 생고무가 들어오지 않습니까?》

생고무이야기를 하는 송명식의 얼굴에는 밝은 기운이 흘렀다.

《그동안 밀린 고무바닥운동화를 보충하자구만 해두 고양이손이라두 빌려야 할 형편이라구 생산부서구 현장이구 막 아우성입니다. 그렇지만 공장아빠트기초야 다시 메워야 할게 아닙니까?》

공장아빠트기초를 다시 메운다는것이 무슨 소리인지는 잘 알수 없었으나 생고무가 들어온다는 소리만은 귀에 쑥 들어오는것같았다. 온다온다 하더니 오늘에야 오는 모양이다. 고무바닥운동화설비들을 모두 없애겠다고 하는 지금에 와서도 생고무가 들어오니 기뻐지는것이 어이없고 면구하기까지 했다. 오래동안 몸에 밴 타성인것이다.

망설이던 김세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송명식이 가버린 다음 새삼스럽게 공장을 휘둘러보았다. 준비직장쪽에서 고무바닥운동화설비들이 돌아가는 육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생산에 들어가기에 앞서 멎었던 기계들을 돌려보는가싶다. 고무바닥운동화설비들은 그렇게 다 크고 육중한 설비들이다.

김세천은 멍하니 서있었다. 불시에 공장에 달라진것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쳤다. 다품종화생산도 아직은 시도일뿐이며 고무바닥운동화를 없애고 수지운동신생산공정을 완성하는 일도 역시 상징적인 선포일뿐 아무런 진척도 없는것이다. 공장은 여전히 자기의 이전 호흡과 맥박대로 움직여가고있었다.

결국 내가 사임까지 결심하며 고민하고 주저한 모든것은 무의미하고 때이른 늙은이의 로파심이 아닐가?

김세천은 기운이 빠진듯 한걸음새로 천천히 자기 사무실로 향했다. …

일을 끝내고 집에 들어가니 남들은 벌써 잠자리를 펴는 시간이건만 딸애는 아버지가 일찍 들어왔다고 반기며 달려나왔다.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왔어요. 어마나! 그런데 집에 들어서는 아버지 인상이 왜 이럴가요? 뚝뚝해서…》

《늘 그렇단다. 선떡 먹구 체한 사람처럼.》

《아! 알만해요. 선떡이 아니라 일에 체했을거예요.》

《뭐, 일에 체해? 허허… 참! 별소릴 다 들어보는구나. 그럼 그런 체기엔 뭐가 필요하니?》

《음… 어머니의 웃음이라는 소체환이 필요해요. 못믿겠으면 한번 웃어봐요. 웃어보라는데두요.》

《아이구야, 간지럽다!》

《잘 웃으시는군요 뭐. 어마나! 저것봐요. 아버지도 웃어요!》

온 집안에 웃음소리가 넘쳤다. 김세천은 우울하고 번거롭던 마음이 삽시에 밝아지고 기분이 들뜨는것을 느꼈다. 그는 안해와 딸과 함께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밤에는 버릇처럼 잠들지 못하고 책상앞에 앉아 자기가 연구하고있는 재단프레스해결방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공장의 현실은 어떻든 그리고 자기가 언제까지 기사장사업을 하든 재단프레스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인것이였다. 인쇄공정과 함께 재단프레스의 능력이 딸려 다품종화를 원만히 실현하지 못하고있는것이 공장의 현실이다. 그래서 재단프레스를 더 들여오든가 효률을 높여야 한다는 문제가 제기되였던것이였다.

김세천은 새벽녘까지 모지름을 쓰다가 잠자리에 누웠다. 잠이 들어서 그만 헛소리를 쳤다.

《해옥아, 저 프레스를 잡아라!-》

김세천은 그냥 프레스를 잡으라고 소리를 쳤다. 안해는 겁에 질려 해옥이를 찾았다. 그 소리가 김세천의 잠꼬대소리보다 더 높았다.

《아버지, 자요, 물!》

해옥이가 프레스가 아니라 물과 약을 가지고 와서 아버지앞에 앉았다.

《아이구, 원! 이젠 네 아버지가 옆사람까지 잠을 안재우는구나.》

안해가 활랑거리는 가슴을 부여안고 푸념을 했다. 해옥은 아버지의 이마에 내밴 땀을 씻어주었다.

《아버지, 너무 마음쓰지 말아요! 심장에 나빠요.》

김세천은 한숨을 쉬였다.

《어떻게 하든 공장의 힘으로 재단프레스를 해결해야겠는데…》

아버지와 딸은 어머니를 제쳐놓고 잠자리에서 자기들의 견해를 토론하기 시작했다.

《해옥아, 우리 공장에서 수지운동신생산공정을 갖추는데 그중 걸린 문제의 하나는 재단프레스다. 다섯대이상의 재단프레스가 더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 드는 자금만 해도 상당하다. 이걸 풀면 한시름 놓겠는데… 어떻게 공장의 힘으로 이 프레스문제를 해결할수 없겠는지?》

해옥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는듯하더니 말했다.

《나도 아버지네 공장프레스를 좀 알아요. 그 프레스는 다목적프레스예요. 그런데 조작이 까다롭고 사람들이 수동으로 각종 형타와 형지를 해체하고 설치하고 하기때문에 로력과 시간곡선이 내려가요. 하지만 로력과 시간곡선을 올리면 능력이 제고될게 아니나요. 내 생각에는 콤퓨터에 의한 수자조종으로 이 프레스가 자동적으로 각종 지표들을 인식하고 찍어내게 한다면 로력과 시간을 절약하고 설비의 능력도 높일수있다고 봐요. 한마디로 설비를 CNC화하면 되는거예요.》

김세천은 눈을 흡뜬채 굳어졌다. 뚫어지게 어딘가 허공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맥이 나간 사람처럼 뒤로 털썩 주저앉았다. 딸애의 얼굴을 처음 보듯이 바라보았다. 그 시선앞에 해옥도 안해도 당황해지고 긴장해졌다. 한동안 그렇게 얼이 나간듯 앉아있던 김세천이 불현듯 딸애앞에 넙적 엎드렸다.

《내 절을 받아라!》

《아니, 아버지!》

《됐구나, 됐어! 머리속에 뱅뱅 돌기만 하더니… 네가 나보다 낫구나! 여보, 당신 오늘 당장 우리 지배인한테 좀 가오. 여기에 진짜 기사장감이 앉아있다구 얘기하오.》

《기사장감이 아니라 색시감이예요!》

안해가 열을 내여 부르짖었다.

《나 하나 자다가 놀라 깨났으면 됐지 어느 귀한 집 아들을 또 잠자리에서 들춰일구려구 그래요?》

세사람은 그만 소리내여 웃고말았다. 김세천은 춤이라도 출듯이 기뻐했다.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빙빙 돌기까지 했다.

《이제야 앞이 열린다! 네가 공작기계수자조종화를 배운 전문가라는 생각을 내가 왜 못했을가? 한심하기란! 하긴 한심한 일이 어디 한두가지냐? 요새 젊은 녀석들은 도대체 어디 가서 뭘하고들 있을가? 여기에 얼싸한 색시감이 있는줄 모르다니? 아무래도 눈들이 다 깨물어진 모양이야.》

어머니와 해옥은 허리를 꼬부리고 웃었다. 불밝은 집안에 행복에 넘친 웃음소리가 오래도록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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