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 회)
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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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딸애는 돌아갔으나 김세천은 굳어진듯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온 방안에 딸애가 남겨놓고 간 싱싱하고 간곡한 기운이 그냥 떠돌고있는듯했다. 아까 현장실험을 해야 할 기술안들을 검토하고있는데 문득 누군가가 자기의 두눈을 살며시 가렸다. 눈가에 닿은 따스하고도 자그마한 손. 김세천은 흠칫 놀랐다. 대뜸 딸이라는것을 알아차렸다. 이 공장에서 아니, 이 세상에서 그렇게 자기 눈을 가릴 존재는 오로지 딸밖에 없는것이다. 김세천은 말없이 딸애의 자그마한 손을 투박하고 커다란 손으로 어루더듬었다.
《김해, 우리 김해구나!》
《아버지!》
딸애는 아버지의 눈을 풀어주고는 소리내여 깔깔 웃었다.
김해옥은 김세천의 외동딸이였다. 우로 두 아들을 낳고 늘그막에 본 막내이자 외딸인 해옥을 김세천은 누구보다 귀애했다. 그애는 다른 애들보다 일찍 말을 떼기 시작했는데 자기의 이름에서 마지막 옥자가 잘 발음되지 않아 《김해… 탁아소 갈래.》, 《김해… 사탕 줘.》하고 말하군 했다. 그것이 너무도 귀여워 《우리 김해》, 《우리 김해》한것이 그만 애명으로 굳어져버렸다. 그런 딸애가 어느덧 대학을 졸업하고 졸업배치를 기다리고있다.
《너 아버지공장에 오지 않으련?》
《난 먼저 아버지가 신발사출기를 만들어낸 신발기계공장에서 일하고싶어요. 배치담화때두 그렇게 말했어요.》
《원, 애두!》
김세천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자기의 인생에 이 딸이 얼마나 크고도 귀중한 존재로 비껴있는가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딸애가 여섯살 났을적에 있었던 일이 또 떠오른다. 일요일인 그날도 김세천은 공장에 나갔다가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들어왔다. 안해는 역시 자지 않고 기다리고있었다. 그는 녀자란 집을 나간 사람들이 다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지론의 소유자였다. 아무리 만류하고 욕해도 듣지 않았다. 까딱까딱 졸지언정 앉아서 기다렸다. 녀인으로서는 그것이 훌륭한 미덕일지 몰라도 낮과 밤이 따로없이 일을 하는 김세천에게 있어서는 여간만 부담스러운 마음의 짐이 아닐수 없었다.
그들은 서먹하고 썰렁한 분위기속에서 저녁식사인지 아침식사인지 모를 식사를 끝냈다. 안해가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여보, 당신은 자기가 남편이구 아버지라는 생각을 너무도 잊고 살아요. 자기앞에 앉아있는 녀자가 당신이 늘 들여다보는 그런 쇠덩어리가 아니라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는걸 알려고도 하지 않아요. 이게 무슨 생활인가요? 당신은 너무해요!》
《여보! 당신은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른단 말이요?》
목소리를 높이며 다투다가 문득 밑을 보니 딸애가 이불을 목까지 덮고 눈을 꼭 감은채 까딱도 하지 않고있는것이 보였다. 다투던 부부가 동시에 그 애를 보았고 그 순간 알지 못할 죄책감으로 조용해졌다.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지자 딸애는 이상한듯 눈을 반짝하고 떴다. 자기를 내려다보는 아버지, 어머니와 눈길이 부딪쳤다. 걱정과 원망, 애정과 기대로 반짝이는 그 깨끗한 눈동자. 딸애는 아버지, 어머니를 똑바로 바라보다가 겁을 내듯 다시 눈을 꼭 감았다. 가슴이 무엇인가에 쿡 찔리우는듯했다. 저도 모르게 불렀다.
《김해야!》
하지만 딸애는 더 힘껏 눈을 감고 뜨지 않았다. 용서를 빌듯, 달래듯 다시 불렀다.
《김해야!》
그래도 딸애는 꼭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안해가 먼저 흐느꼈고 김세천도 눈굽이 달아올랐다. 눈을 꼭 감은 딸애앞에서 부부는 서로의 잘못을 빌고 화해했다. 그것이 버릇이 되여 딸애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의견이 있거나 제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때에는 눈을 꼭 감고 마주보지 않군 했다. 거기에는 김세천이나 안해나 다같이 꼼짝을 못하군 했다. 딸애가 자기도 아버지가 다닌 대학의 기계학부를 다니겠다고 했을 때에도 역시 그랬다.
안해는 남편의 뚝뚝하고 극단적인 성격이 쇠덩어리공학인 기계공학을 배웠기때문이라고 여기는 녀자였다. 그래서 두 아들중 한명은 체육인으로 키우고 한명은 예술을 시켰으며 딸애도 절대로 공학을 전공하지 않게 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신의 기계공학재간은 물론 훌륭해요! 하지만 난 딸애만은 가정적인 재간을 가지게 하고싶어요.》
그런데 그 딸애가 아버지처럼 기계공학을 전공하겠다고 한것이였다.
안해는 놀랐고 격분하기까지 했으며 그토록 바랐던것이였지만 김세천도 한순간 주저했다. 어쨌든 녀자애가 아닌가?
《얘, 김해야!》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소리가 합창이라도 하듯 울렸다. 하지만 그 순간 딸애는 아버지, 어머니앞에 마주선채 눈을 꼭 감아버렸다. 그렇게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그것으로 모든것은 결정되였다. 그때 김세천은 딸애와 안해가 모르게 자기 방에 들어가 혼자 울었다. 자기 한생의 지향을 높이 사준 딸애가 고마와서였다.
김세천은 일본땅에서 태여났다. 그는 11살 어린 나이부터 신문배달을 하여야만 했다. 새벽 3시면 소스라쳐 일어나 신문퉁구리를 안고 달리던 자기. 땡볕이 내리쪼이는 점심시간에는 식당들에 얼음을 날라주느라고 온통 물주머니가 되여 달려야 했다. 일본아이들은 일본인마을에 자꾸 나타난다고 길목을 지켜섰다가 못들어가게 했다.
《이 거지새끼, 도적질을 하러 오지?》
주먹을 부르쥐고 달려들었지만 강약이 부동이였다. 쪼들린 살림을 펴보려고 앓는 몸으로 거리를 헤매던 그의 아버지마저 쓰러졌다. 아버지가 가족들을 불러앉히고 말했다.
《내 가다가 죽어도 좋으니 우리모두가 조국으로 가자. 이 험악한 세상에서 나까지 죽으면 너희들은 어쩐단 말이냐?》
그리하여 그는 조국의 품에 안겼다. 그때에야 진정한 마음의 보금자리를 찾을수 있었고 마음껏 공부할수 있었다. 3대혁명소조시절 그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신발사출기를 만들어냈다.
딸애는 점점 생활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사업에서도 큰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사실 기사장사업을 그만둘 생각을 한것도 약동하는 젊음과 지식에 충만된 딸애가 준 충격때문이였다. 딸애가 신발사출기를 만들어내던 때의 일에 대해 묻거나 이야기할 때면 김세천은 알지 못할 모멸감에 시달리군 했다.
보고 참고할만한 설계조차 없어 전국의 신발공장들과 기계공장들을 돌아보며 기계들을 연구하고 그에 기초하여 선을 긋고 점을 찍는 식으로 5 000여매의 설계도면을 그려야 했던 그때, 그때 그가 3대혁명소조생활을 하던 신발기계공장에는 나이가 많은 설계실장이 있었다. 오랜 사업년한과 관록을 가지고있는 그가 설계를 해서 내놓으면 모두가 그쪽에 눈길을 주었다. 이제야 대학생이고 20대인 김세천이 내놓는 설계는 당연하게 뒤전으로 밀려났다. 그것으로 하여 많은 복잡한 문제들이 제기되였다. 김세천의 설계가 기발하고 과학적타당성이 명백하다는것을 제일먼저 발견한 그 설계실장은 스스로 신발사출기책임설계원의 자리를 김세천에게 내주었다.
《실장동지, 이러시면 안됩니다. 제가 어떻게?…》
《아니야! 세천이, 과학과 진보에는 나이나 명예가 필요없어. 우리의 신발사출기를 만들어낼수만 있다면 내 체면이 뭐고 명예나 관록이 뭐이 그리 중한거겠나. 다른 생각말구 자네가 책임설계를 맡게.》
결국 김세천이 설계를 총 책임지게 되였고 암중모색의 피타는 나날을 거쳐 5 000여매의 설계를 완성할수 있었다. 그가 받은 영웅메달에는 바로 그렇게 말없이 뒤전에 서서 그를 도와준 로동계급과 기술자들의 깨끗한 량심이 비껴있었다.
지금이야말로 나에게 그 설계실장과 같은 량심과 결단이 필요한 때가 아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