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회)

리상로

(1123-1197)

 

리상로는 당시 정권탈취를 목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과 친교관계가 있다고 하여 정배살이를 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청주로 내려갔다.

그후 의술을 배워 뛰여난 침구술로 하여 명의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량반관료들은 물론 당시 국왕이였던 왕현(의종)도 그에게서 치료를 받고 낫게 되자 리상로에게 벼슬까지 주게 하였다.

그러나 인민들속에서 리상로에 대한 신망이 높아지게 되자 부패무능한 봉건관료배들은 농민폭동군과 내통했다는 반역죄를 씌워서 그를 섬으로 정배살이 보냈다.

리상로는 정배살이를 하면서도 자기의 재능과 기술을 부단히 련마하여 치료에 전심하였으며 후에는 리부상서의 벼슬에까지 오르게 되였다.

리상로는 고려시기 침구학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람으로서 고려사에 이름을 남긴 명의였다.

 

제1장 운명의 회오리

1

 

황토먼지가 풀썩풀썩 피여오르는 소로길로 한 소년이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고있었다. 무척 먼거리를 걸어온듯 그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잔뜩 실려있었다.

그가 바로 후날 고려의 명의로 이름을 날린 리상로였다.

귀양살이를 가는 아버지 리중부를 따라 청주로 가는 길이였다.

리상로는 아버지의 귀양살이라는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개경조정에서 중서사인의 벼슬을 하던 아버지가 귀양살이에 끌려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것이다.

어렸을 때 조정에서 란이 터지고 그때마다 죄인들이 쇠고랑에 채워 귀양지로 끌려가는 모습을 몇번 본 일이 있었지만 그것은 자기의 세계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고 무관한 저 달나라에서의 일처럼 여겨오던 리상로였다. 허나 오늘은 아버지가 역적과 친하다는 죄목에 걸려 귀양지에로 끌려가고있는것이다.

눈앞이 아뜩하고 하늘이 무너져내리는것같았다.

아! 도대체 아버지가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이 나라에서 역신이란 어떤 사람인가?

세상리치를 깨닫기에는 리상로의 나이가 이제 겨우 열두살이였다.

번거로운 리상로의 뇌리속에서는 지나온 무시무시하면서도 격동적인 일들이 마치 어제일이런듯 생생히 떠올랐다.

꿈에서조차 잊지 못할 충격적인 일들이였다.

대동강이 감돌아 흐르는 풍치수려한 모란봉기슭의 청류벽우에는 웅건하면서도 고색창연한 영명사가 자리잡고있다.

영명사는 고구려시기의 절이다.

영명사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제일 끄는것은 화강암으로 쪼아만든 앉아있는 돌사자이다.

금방에라도 서슬푸른 광채를 내뿜는듯한 뚝 부릅뜬 두눈, 아가리를 쩍 벌린채 턱을 힘있게 추켜든 대가리, 불쑥 내민 가슴과 억센 다리는 맹수의 용맹과 솟구치는 힘을 잘 살려낸것으로 하여 고구려인민들이 지니였던 용맹한 기상과 굳센 의지를 그대로 담고있다.

이 영명사 절간안의 고요하면서도 다소 음침한감을 자아내는 부처 앞에는 두개의 초불이 은은히 타오르고있었다.

늘 보아야 이상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커다란 귀방울을 매단 부처가 엄숙한 표정에 단정한 자세로 참선하고있는 두명의 신자를 인자하게 굽어보고있었다.

이 절의 주지 묘청과 개경조정에서 중서사인의 벼슬을 지니고있는 리상로의 아버지 리중부이다.

경건한 자세로 참선을 마친 이들은 곧 묘청의 방으로 들어섰다.

방안에는 또 한명의 중이 있었다. 체격이 미끈하고 잘 생긴 젊은 중이였다. 묘청이 소개하였다.

《중서사인나리, 소승이 제일 총애하는 애제자이오이다.》

중이 가볍게 머리를 숙여 례의를 표했다.

《승지라 불러주사이다.》

《중서사인 리중부요.》

이어 이들은 마주앉았다.

묘청은 조정의 적지 않은 대감들속에 인망이 높은 스님이요, 리중부는 개경조정의 대신이며 승지는 묘청이 총애하는 제자인지라 이들 셋은 스스럼없이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묘청은 리중부에게 있어서 짙은 안개속에서 아리숭하게 바라보이는 존재였다. 그는 서경일판에서 고승(이름난 중)으로 명성이 뜨르르하였다.

리중부가 묘청과 알게 된것은 1년전부터였다.

그전부터 묘청에 대한 풍문을 여러 대신들에게서 적지 않게 들어왔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묘청은 풍수설에 밝아 그것으로 앞날을 예언하고 길흉화복을 타진하는 재간이 실로 귀신같다고들 하였다.

어느해인가 한 대신의 부인이 심하게 앓고있는것을 묘청이 풍수설을 잘 보아주어 병을 고쳤다는 말도 돌았다.

리중부는 검교소감 백수한으로부터 묘청에 대한 소문을 귀가 아프게 여러번 들었다.

《정심법사의 풍수설은 그 어디에 가든지 지세만 척 보아도 대뜸 길흉화복을 예언하는데 그것이 어찌나 잘 맞아떨어지는지 모두들 다 혀를 내두를 정도요. 나도 루차에 걸쳐 그에게서 길흉화복을 점치여 재난을 면하고 많은 복을 구할수 있었소.

앞으로 그는 꼭 큰 사람이 될것이요. 내 그새 묘청과 오래동안 상종하면서 그에게서 참으로 오묘한 음양비술을 전수받았소.》

리중부는 지난해 여름 기거주 정지상의 추천으로 개경으로 올라온 묘청을 처음 보았다. 그는 조정에서 쟁쟁한 문인재사로 불리우고있는 정지상까지도 내세우는 묘청이 대체 어떤 인물일고 하는 짙은 호기심을 안고 묘청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별로 특이한데가 없었다. 둥그스름한 얼굴에 불교세계의 법도에 따라 너붓너붓한 잠상을 걸치고 머리까지 박박 깎아버린 그의 얼굴륜곽은 완전히 둥그런 타원을 그리고있었다.

그러나 범상한것같은 그 얼굴에서도 류다른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의 눈빛이였다.

정기를 담은 눈빛은 그의 기개를 더 름름하게 보이게 하였다.

리중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과시 눈빛이 다르군.…)

묘청의 풍수설에 대한 소문은 서경과 개경의 대신들속에서 짜하였다.

묘청은 이것으로써 조야의 이목을 모으고있었다.

리중부가 묘청을 숭배하는것은 결코 묘청을 신비화하는 백수한의 말을 들어서나 풍수설때문만이 아니였다.

그럴만한 연유가 있어서였다.

현재 조정에서는 한창 승하고있는 금나라(녀진족)에 대한 사대외교를 주장하는 개경파와 그것을 반대하는 서경파사이에 마찰이 일어나고있었다.

녀진족은 고려땅 북쪽에 위치한 동북지방으로부터 황하지류인 회수북쪽지방에 널려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세력에 불과하였던 녀진인들은 점차 세력을 합세하여 금나라를 세우고 이웃나라들을 무자비하게 점령하면서 무시할수 없는 큰 나라로 등장하였다.

금나라는 왕조성립초기부터 이웃나라인 고려에 대하여 적대적태도를 취하였으나 고려의 강대한 국력과 강경한 정책에 위압되여 감히 침략하지 못하고 후에 고려와 국교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왕조의 대가 바뀌고 시일이 흐름에 따라 고려조정이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자 금나라세력들은 되려 오만하고 무례하게 놀아대기 시작했다. 당시 인민들은 물론 조정의 대다수 관리들은 민족적자존심과 존엄에도 저촉되는 사대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리자겸, 탁준경을 위시로 하는 개경량반들은 사대를 주장해나섰다. 리자겸은 13살난 어린 인종의 외조부로서 나라의 실권을 모두 거머쥐고있었다.

리자겸, 탁준경 등이 백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금나라에 사대하기로 한것은 그것을 일시 집권한 자기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책으로 삼아보려는데서 출발한것이였다.

리자겸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조정의 요직을 차지한 김부식, 김부의 등은 여전히 금나라에 대한 사대외교가 나라를 보존하는 가장 훌륭한 방책이라고 주장하여나섰다.

큰 나라에 대한 사대를 결사반대하는 정지상과 묘청, 백수한을 위시로 한 적지 않은 서경출신의 량반들은 이것을 참을수 없는 모욕으로 간주하면서 견결히 반대해나섰다.

묘청은 금나라에 대한 굴복에 결사의 반기를 든 사람이였다.

리중부도 사대를 반대하였으며 묘청의 주장에 공감하게 되였다.

특히 그가 펴나가고있는 서경천도(도읍을 옮기는것)와 같은 어벌찌 큰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묘청은 서경천도의 큰뜻을 이루어내야 고구려의 정신을 이을수 있고 사대를 업으로 삼는 개경의 대신들을 꾹 눌러놓을수 있다는 주장으로 정지상을 비롯한 량반관료들의 이목을 모으고있었다.

리중부도 묘청의 서경천도를 자못 중시하고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묘청과의 인맥관계를 친밀히 하는것이였다.

리중부는 묘청을 만난 후 그날로 개경으로 돌아섰다.

집으로 돌아온 리중부는 부인 김씨에게 말하였다.

《이제 얼마 안있어 우리도 아마 서경으로 자리를 옮겨야 할가보오.》

김씨가 놀란 기색을 짓고 물었다.

《서경으로요? 관직을 옮기나이까?》

김씨가 의아쩍은 눈길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러거나말거나 리중부는 부인에게 늘 자기의 마음속에 감돌고있는 심정을 터놓았다.

《부인, 내 말을 한번 들어보오. 서경은 본시 강국 고구려의 수도였소. 그때는 서경땅을 평양이라고 불렀지. 아직도 그곳에는 강국의 기상이 용용히 어려있는 웅건한 유적들이 그대로 남아있소. 또 태조께서도 서경은 중요한 도성이라고 하셨소.》

일단 흥분에 떠서 여기까지 말을 번져나간 리중부는 어조를 낮추어 수군거렸다.

《근본요는 이렇게 유명한 서경땅이 이제 얼마 안있어 나라의 왕경으로 된다는거요.》

김씨의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서경이 왕경으로요? 그럼 이 개경은?》

《하여간 그런건 나라와 임금께서 다 알아서 조처할 일이니 그저 그 정도만 알고있소. 부인은 상로의 글공부를 더 착실히 시켜야겠소.》

《오늘도 기거주나리댁에 글을 배우러 갔소이다.》

리중부가 애처가였다면 남편에 대한 김씨의 사랑과 정 역시 곡진하기 이를데 없었다. 이와 함께 아들 리상로에 대한 모성애 또한 류달랐다.

리중부는 아들 리상로를 당대 대감들속에서 재사로 불리우는 정지상에게서 글을 배우게 하였다. 남달리 총명한 아들을 품을 들여 키워 장차 높은 벼슬길에 올려세우자는것이 리중부의 뜻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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