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 회)
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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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혹시 귀 막고 방울도적질 하는것만큼이나 어리석고도 무책임한 생각을 하고있는것이 아닐가?
한경철이 대답을 못하고 서있자 최현민은 실망한듯 고개를 숙인채 잠자코 서있었다. 그러더니 돌아섰다. 시들하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그의 잔등에서 들려왔다.
《우리 한번 생각을 깊이 해보자구.》
한경철은 그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있었다. 아무래도 자기가 지배인에게 아무런 안도 제출하지 못할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밥도 아니고 죽도 아닌 절반짜리 해결책, 지어는 위태롭기까지 한 방안을 김윤화지배인에게 제기하지 말아야 한다. 자칫하면 그것이 김윤화지배인을 해치는 일로도 될수 있다.
한경철은 사무청사쪽을 바라고 섰던 걸음을 천천히 정문쪽으로 돌렸다. 그가 몇걸음 걸었을 때였다. 문득 뒤쪽에서 오토바이 발동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앞에 오토바이를 탄 강철민이 불쑥 나타났다. 웃고있는 그의 얼굴에서 해넣은 이발이 유표하게 반짝거린다.
합숙 김치사건이 있은 다음 한동안 콤퓨터를 배우던것도 걷어치우고 그를 도끼눈으로 대하던 강철민이 이즈음에 와서는 다시 콤퓨터도 배우고 각근하게 따른다. 경철은 솔직하고 정열적이며 마음 깨끗한 이 청년이 마음에 들었다. 강철민이 물었다.
《집에 가려고 그래요?》
한경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기에 무슨 안을 제출했나요?》
강철민은 멋을 부리는듯한 턱짓으로 사무청사를 가리켜보였다. 이즈음은 그런 말과 동작이 공장사람들의 인사고 멋이라고 한다.
한경철은 대답없이 서있었다. 알지 못할 시름과 모멸감이 갈마든다.
강철민이 무슨 말인가 할듯말듯하며 한경철을 바라보았다. 한경철은 그를 여겨보았다.
《철민인 무슨 안을 제출했어?》
강철민은 웃어보였다.
《사실은 그것때문에 조언을 좀 받으려구요. 그래두 이거 공장에서 일하는 이름값이라두 하려구 뭘 쓰긴 썼는데 고양이를 그렸는지 강아지를 그렸는지 알수가 있더라구요. 그래서 좀 보고 의견을 말해줬으면 해서요.》
한경철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강철민이 자기의 옆가방에서 종이 한장을 꺼내들었다. 한경철은 읽었다. 그리고는 놀랐다. 강철민의 글은 짧았는데 그처럼 방도도 단순하리만치 명백했다. 그것은 지금 현재 공장이 고장이 나서 페기하고있는 앞골기를 비롯한 수지운동신설비들을 모두 고쳐서 쓴다는것이였다. 첫 순간에는 어이없는 생각이 들었으나 차츰 긴장해졌다.
공장에는 앞골기와 사방압착기를 비롯하여 고장이 나서 살리지 못한 여러대의 수지운동신설비들이 있다고 했다. 그 설비들은 낡고 못쓰게 된것도 있지만 핵심적인 분야의 기술을 몰라서 되살리지 못한 설비도 있다. 바로 그것을 강철민은 살려낼수 있으며 살려내야 한다고 주장한것이다. 그의 말대로 된다면 가장 난문제인 앞골기나 사방압착기문제에서 돌파구가 열리는것이다. 강철민이 제기한 안에는 수지운동신을 하겠다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한경철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강철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단순하고 즉흥적인듯한 이 청년에게서 문득 알지 못할 힘과 예지가 풍겨오는듯 느껴졌다. 이런 청년들까지 수지운동신을 하겠다고 머리를 쓰고 노력을 하는데 비해선 자기가 너무 손님처럼 처신한다는 부끄러움이 갈마들었다.
《철민이, 이걸 그대로 지배인동지에게 제출하라구.》
《웃지 않을가요?》
《이 문제가 어디 웃을 문제야?》
《좋아요! 그럼 내겠어요! 난 사실 만드는건 어떨지 몰라두 고쳐내는것만은 정말
그러면서도 종이장을 받아든 강철민은 미타한듯 고개를 기웃거렸다.
그리고나서는 도움을 청하듯이 경철을 향해 웃어보였다. 종이장을 도로 내밀었다.
《그래두 제출하기는… 좀 해줘요. 난 아무래두
한경철은 웃고말았다. 그 순간 한경철은 자기도 생각했던 안을 지배인에게 그대로 말하리라 마음먹었다. 강철민의 안을 보고나니 갈래없이 흔들리던 마음이 한결 진정되는것 같았다.
《좋아! 그럼 내가 생각했던것을 이야기하면서 동무의것두 함께 제출하겠어.》
《그렇게 해줘요.》
강철민은 한시름 놓인다는듯 웃었다.
《그럼 부탁해요! 난 가겠어요.》
강철민은 윙하는 발동소리를 토해내며 멀어져갔다.
《속도를 놓지 말아!》
한경철은 그의 등뒤에 대고 소리쳤다. 한동안 서있던 한경철은 발걸음을 돌려 사무청사로 향했다. 그가 사무청사 출입문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유리문안쪽에서 누군가가 나오는것이 보였다. 한경철은 그가 먼저 나오게 하려고 멎어선채 기다렸다. 안쪽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고나왔다. 어떤 처녀였다. 두사람의 눈길이 서로 부딪쳤다. 그 순간 처녀는 흠칫 놀라더니 무심결에 그런것처럼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한경철은 당황하여 굳어졌다. 무엇인가 아리숭한 추억의 한귀퉁이를 들추고 미지의 처녀가 다가서는듯한 느낌, 하지만 당장은 이 처녀가 누구이며 자기가 지금 어떤 인연과 명목으로 인사를 받는것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당황하여 얼굴을 붉힌채 인사를 받는것인지 물리는것인지 모를 엉거주춤한 자세로 처녀를 바라보았다. 처녀는 당황하여 굳어진 한경철을 보더니 자기도 역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그의 곁을 스쳐지나 총총히 가버렸다. 한경철은 멍하니 선채 멀어져가는 처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저 처녀를 어디서 봤던가?
한경철은 기억을 더듬어내려고 애썼다. 불시에 어떤 빛과도 같은것이 흘러들며 머리속이 훤해지는듯한감. 2년전 경기장에서 오늘처럼 자기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던 처녀의 모습이 우렷이 떠오른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