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회)
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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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는 지배인의 방이 있는 사무청사를 바라보며 움직이지 못한채 서있었다. 문득 자기앞으로 다가오는 직장장 조인섭을 보았다. 자기 직장에 관리국 국장의 아들이며 대학졸업생인 한경철이 왔다고 그는 얼마나 좋아하고 신기해하는지 몰랐다. 금방 직장에 들어온것치고는 말귀를 잘 알아듣고 아무 일에서나 선배들과 기능공들의 말을 귀담아듣는다고 칭찬을 했다. 한경철은 고개를 숙여 그에게 인사를 했다. 조인섭이 웃음을 지었다.
《왜 아직 퇴근을 안하고있나?》
《저…》
조인섭은 대답을 듣지 않고도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한 얼굴을 지어보였다.
《난 경철동무를 보면 왜 그런지 대뜸 보물통과 빈통이야기가 생각난단 말이야. 경철이야말루 보물통이지, 소리없이 굴러내리는… 말끝마다 큰일을 한다고 흰소리를 치는 누구하구는 다르거던.》
조인섭은 흰소리를 치는 누군가를 찾는지 주변을 휘둘러보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은밀한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그런데 앞으로 발전해서 어딜 가더라두 그 보물통의 보물은 우리 직장에 다 쏟아놓고 가야 해.》
한경철은 자기를 향해 웃음을 지어보이고있는 조인섭의 얼굴을 다소 불안스럽게 바라보았다. 직장사람들은 그가 별로 살뜰하고 귀맛좋게 이야기할 땐 주의해야 한다고들 말하고있다. 절대로 성을 내거나 남을 모욕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가 별로 살뜰하게 웃으면서 귀맛이 당기게 이야기할 땐 바싹 긴장해야 한다는것이였다.
강철민의 말에 의하면 그는 이 공장에 들어와서 전공이 되였는데 처음엔 그 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고 부끄럽기까지 했다는것이였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에 밤교대를 마치고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조인섭이 그를 자기 사무실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별로 귀맛좋게 이야기를 늘어놓더라는것이였다.
《전공직업이 어때서? 일명 뻰찌공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사실 뻰찌질을 배우면 못할게 없어. 공장일이나 가정일이나 뻰찌질 할 일이 여북 많은가? 특수한 재간이지! 온통 녀자들뿐인 우리 공장에선 바로 자네같은 뻰찌공이 진짜 로동계급이야. 전기작업반은 진짜 로동계급으로 꾸려졌거던. 자네 이제 어디 한번 어깨에 전기선을 척 걸치구 거리를 지나보게나. 처녀들이 어떻게 생각할것같나? 야, 저 사람은 재간두 있구 성실한 사람이구나하구 생각 안할것같나. 자넨 작업복차림에 전기선을 어깨에 메구 거리를 지나가두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란 말이야. 그러니 재간 배워 좋아, 슬슬 다니면서 전기선로를 볼 땐 위신이 있어 좋아! 좋은게 어디 한두가진가? 사실 우리 공장 처녀들두 준비직장 총각들이 있기는 하지만 련애를 거는걸 보면 꼭 전기반총각이더라니까. 오죽하면 전기작업반과 제화직장은 사둔간이라는 말까지 났겠나.》
그의 말을 듣고보니 세상에 전공직업만한것이 없어보였다. 그래서 전기선들을 살펴보며 고장을 퇴치해야 하는 선로작업을 아침도 못먹고 죽을둥살둥 모르고 해냈다는것이였다. 실은 그날 전기반 사람들이 모두 다른 작업에 동원되고 인원은 몇명 안되는데 전기는 오지 않지 하니 월말생산이 바빴던 조인섭이 그를 시켜 전기를 빨리 오게 하자고 했던것이였다. 조인섭은 이런 사람이였다.
지금도 그는 살가운 표정으로 한경철을 지켜보며 무엇인가 내심의 말을 꺼내들고싶어 조바심을 치는듯한 얼굴이였다. 한경철은 다소 긴장해졌다. 드디여 조인섭이 정색한 얼굴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자넨 지배인에게 무슨 방도를 제출했나?》
한경철은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못했다.
《제출하지 못한 모양이구만.》
《아직…》
조인섭은 한경철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다시금 물었다.
《그래, 어머니가 우리 공장 일을 두고 뭐라고 하던가?》
이것이 조인섭이 알고싶어하는 기본문제일것이다. 한경철은 대답이 없이 서있었다. 자기가 아무런 안도 제출하지 않은것이 이 공장에 대한 어머니의 태도로까지 오인될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어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인섭은 빙그레 웃었다.
《어머니가 무슨 견해가 있을게 아닌가?》
한경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어머니는 공장의 결심을 지지하고있습니다.》
조인섭은 확인하는듯한 눈길로 한경철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알만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불일간 우리 공장이 완전히 수지운동신공장으로 될수 있다 그 소린가?》
한경철은 대답을 못한채 서있었다. 그때 등뒤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그를 곤경에서 구원해주었다.
《밤은 아직 익지도 않았는데 밤청대에 손 델 걱정을 하고있군요, 제화직장장동지.》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등뒤에 설비부원 최현민이 서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또 설계원처녀 생각이 나서 한경철의 얼굴은 절로 후끈해졌다. 최현민은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수지운동신은 말입니다, 공장의 전망입니다. 1년후가 될수도 있고 3년이 될수도 있고…》
밥도 아니고 죽도 아닌 그 말에 조인섭은 아연한듯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설비부원이야 눈이 보석같은 사람인데 좀 적실하게 말해보게나. 그래 이제 일이 어떻게 될것같나? 사실 공장이 온통으루 다 멋쟁이수지운동신설비를 갖춘다면 나같이 늙은 놈이야 자리를 내놔야지.》
어쩌면 그것이 조인섭직장장의 본심인지도 모른다. 최현민은 대답이 궁한지 딴전을 피우며 서있었다. 그들사이에 거북한 침묵이 흘렀다. 최현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조인섭이 한숨을 내쉬였다.
《임잔 보나마나 지배인에게 좋은 안을 제출했겠지? 자네야 수재가 아닌가?》
최현민은 시틋한 표정을 지었다.
《뭐, 관리국이나 공장에 수재가 없어서 그동안 수지운동신설비를 다 못갖추었나요?》
조인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최현민이 조인섭에게 물었다.
《직장장동진 지배인동지에게 무슨 안을 제출했습니까?》
조인섭은 빙그레 웃었다.
《난 세전토끼처럼 집에서 공장으로, 공장에서 집으로만 왔다갔다하는 사람이 돼서 그런지 다른 길은 통 뵈질 않누만.》
모두가 소리없이 웃었다.
《실은 밤마다 집에서 베개를 그러안구 끙끙거려두 아무 방도두 떠오르지 않거던. 절벽앞에 선것처럼 눈앞만 아뜩한게… 나두 이젠 늙어서 아무짝에두 쓸모가 없는 페물이 되구만것같애. 하두 답답해서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머리속이 훤하지 않겠나 해서 물어본거지.》
조인섭은 다시금 묻는듯이 한경철과 최현민을 바라보았다. 그들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조인섭은 얼굴을 찌프렸다.
《하지만 늙은 말이 길을 안다구 나두 이제 길을 찾게 될걸세. 그저 하두 답답해서 수재라구 생각되는 사람들을 찾아왔댔는데 이건 빈집 문을 두드리다가 돌아가는 심정이구만.》
그 소리에 한경철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조인섭은 간다는 소리도 없이 멀어져갔다. 그를 지켜보던 최현민이 경철에게로 돌아섰다.
《지금 공장이 온통 지배인이 제기한 문제로 뒤숭숭해. 그래, 경철동문 지배인에게 무슨 안을 제출했나?》
한경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뭐 생각해둔것두 없나?》
한경철은 다소 주저하며 자기의 생각을 최현민에게 이야기했다. 최현민은 알릴듯말듯 고개를 끄덕이며 새삼스러운 눈길로 한경철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동문 고무바닥운동화를 뜯어서 수지운동신을 한다 이거구만.》
《설비부원동진 어떤 안을 제출했습니까?》
《글쎄…》
최현민은 왜서인지 한경철의 시선을 피하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러다가 고개를 쳐들고 한경철을 바라보았다.
《실은 나도 그 비슷한 견해인데 우려되는 점이 있어서 동무에게 좀 물어보겠어. 다르게 생각하지 말구 대답해보라구. 수지운동신흐름선을 고무바닥운동화걸 뜯어서 한다면 건조구간이나 급랭구간, 종합조종반같은건 공장에서 만든다치고 그 흐름선에 장비되여있어야 하는 앞골기와 사방압착기 같은 특수설비들은 어떻게 해결할수 있다고 보나?》
역시 최현민은 한경철의 안이 가지고있는 불합리한 점들을 제꺽 알아차린것이였다. 한경철은 다소 면구하여 중얼거렸다.
《그건 관리국에서…》
최현민은 웃었다.
《어머니한테 부탁한다 이거구만.》
한경철은 왜서인지 부끄럽고도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최현민의 어조며 표정에서 자기를 철부지로 여기는듯한 기운이 풍겨왔던것이였다.
그것을 느낀듯 최현민은 빙그레 웃었다.
《내 말을 고깝게 듣지 말라구. 동무가 현실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것같아서 그래. 우리 공장에 고장난 앞골기 한대가 있는데 관리국에서 공장에 보내준 이름난 회사의 설비야. 그런데 다루는게 서툴다나니 고장이 났지. 관리국에서까지 기술자들이 내려와서 살리려다 살리려다 못살리구말았어, 뇌수가 나갔으니까. 그래서 관리국이 부랴부랴 다시 설비를 해결해준게 1년후야. 오죽하면 관리국이 고장난 설비 한대를 놓고두 고치겠다구 사람들을 보냈구 다시 해주는데도 그렇게 긴시간이 걸렸겠나? 값이 상당한 설비니 그런거야. 이걸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거야.》
한경철은 말을 못한채 서있었다.
《그리구 또 한가지 고무바닥운동화흐름선을 뜯어서 수지운동신을 한다 하면 수지운동신설비들이 다 될 때까지 고무바닥운동화는 아예 할수 없다는 소린데 이게 산토끼 잡으려다가 집토끼 놓치는격이 아닐가? 지금도 우리 공장이 계획미달문제때문에 관리국의 말밥에 오르고있다는걸 동문 알고있나?》
한경철은 정통을 찔린듯한 심정으로 대답을 못하고 서있었다. 암담하고도 부끄러운 생각이 갈마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