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 회)
제 2 장
3
오늘은 봄비가 내렸다. 어린 소녀애의 입김처럼 소리없이 그리고 조심히 해종일 내렸다. 어린 나무들은 가는 비발속에 명상에라도 잠긴듯 까딱도 않고 서있었다. 봄꿈을 꾸느라고 그럴것이다.
김윤화는 종업원들이 심어놓은 나무들을 바라보며 공장구내길을 천천히 걷고있었다. 전국경공업대회에 참가하고 돌아와 저도 모르게 몸에 붙은 버릇이였다.
김윤화의 자책과 번민은 컸다. 공장에서 다품종화생산을 실현할수 없는것도 절반생산을 수입에 의존하기때문이다. 생고무가 떨어지면 수지운동신
한두개 품종만으로 생산을 높여 계획을 해내던 공장. 결국 수입에 의존하는 고무바닥운동화생산이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은 참으로 큰것이다. 그것으로
하여 사람들은 알지 못할 모멸감과 조급함을 느끼며 자기들의 힘과 지혜에 대한
하다면 그것을 되찾아줄 방도는 무엇인가?
바로 그 방도를 김윤화는 오늘에야 드디여 찾았다.
그것은
이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결국 그날로부터 김윤화의 가슴속에는 자기
하지만 그것은 입에 올리기조차 두려워지는 너무나도 힘겨운 일이였다. 수지운동신설비들은 국제시장에서 그 가격이 엄청난 현대적인 설비들이다. 만약 그 설비들을 모두 사오려 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작은 수지운동신공장을 통채로 사오는것과 같은 막대한 자금이 드는 일이였다.
김윤화는 무엇인가를 독촉하는듯한 봄비의 가는 속삭임소리가 가득찬 구내길을 자꾸만 걸었다. 문득 한그루의 어린 나무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은 림봉숙이 한경철의 이름으로 심어놓은 나무였다. 그 나무우에 림봉숙과 나는 말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는듯싶어졌다.
《행정일군의 힘은 리성이고 수자다. 난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이걸 무시하구 지배인이 욕망 하나만 가지고 일을 하려들면 너희네 공장과 같은
혼란과 침체가 일어난다구 난 생각한다. 난 네가 이 공장과 자기
김윤화는 비내리는 속에서 어린 나무앞에 그린듯이 서있었다. 불쑥 땅속에서 솟아오른것처럼 한경철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 순간 김윤화는 까닭을 모르면서 흠칫 놀랐다. 림봉숙이 자기 아들의 이름으로 심은 나무앞에서 보게 되는 한경철이 야릇하고도 두려운 느낌으로 안겨왔다.
《지배인동지, 왜 이렇게 비를 맞으십니까?》
《넌 왜 우산두 없이 다니니?》
한경철은 비물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빙긋 웃었다.
《전 지금 지배인동지를 찾아가던 길입니다.》
《왜?》
《지배인동지, 증부가마를 개조하려고 하는데 좀 도와주십시오.》
순간 김윤화는 가슴이 쿡 찔려오는듯한 아픔과 당황함을 느끼며 얼없이 한경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경철은 지금 김윤화가 모두 없애버리고싶어하는 고무바닥운동화에 집념하고있는것이였다.
《생고무두 없는 때 왜 하필 고무바닥운동화설비를 맡아안구 그러겠다는거니?》
《공장이야 아무때건 고무바닥운동화생산을 할게 아닙니까? 내 학위론문이 고무바닥운동화분야구 또…》
한경철은 다소 주저하는듯하더니 자기가 받은 편지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품속에서 그 편지를 꺼내들었다.
김윤화는 뻐근한 아픔을 느끼며 그 편지를 손에 든채 한경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경철이 고무바닥운동화에 집념하게 된것이 다름아닌 자기때문이라는것을 깨달았다. 그랬다. 그것은 분명 자기때문이였다.
이 순간 김윤화는 자기가 다름아닌 한경철을 위해서도 고무바닥운동화를 수지운동신으로 바꾸어야 한다는것을 깨달았다.
인간의 모든 선택에는 언제나 인간이 있다. 자기를 위한 선택인가 아니면 남을 위한 선택인가가 문제일뿐 그 선택의 한가운데는 역시 인간이 있는것이다. 자기를 바쳐 남을 선택해본 인간은, 그리하여 자기의 온 생으로 《너를 선택한다.》라고 말해본 인간은 절대로 자기의 선택을 욕되게 하지 못하는것이며 그것을 운명처럼 지켜가는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림봉숙과 한경철은 온 생을 다하여 《너를 선택한다.》라고 한 존재였다.
김윤화는 심호흡을 하듯 크게 숨을 들이그었다. 조용히 말했다.
《경철아, 난 너의 증부가마개조를 찬성하지 못하겠구나.》
한경철은 깜짝 놀란 얼굴로 굳어져버렸다. 아연해지고 서운해진 눈길로 김윤화를 바라보았다. 김윤화는 그 눈길을 마주보기가 몹시도 힘들었다. 고무바닥운동화를 모두 없애버리고싶은 자기의 심정을 이야기하고싶었으나 왜서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에게도 경철이에게도 그것은 얼마나 힘들고 위태롭기까지 한 일이란 말인가?
그는 오랜 침묵이 흐른 끝에야 시름겹게 조용히 중얼거렸다.
《경철아, 현실에 발을 붙인다는건 고개를 숙이고 눈앞의것만 본다는걸 의미하지 않는다. 고개를 높이 들고 봐라. 거기서 제일 높구 아름다운걸 선택해라.》
방황하는 마음처럼 어린 나무들사이를 끝없이 걷기만 하던 김윤화가 다시금 멎어섰다. 숨이 가쁘리만치 치밀어오르는 격정과 흥분, 불안과 위구를 안은채 비속에 굳어진듯 서있었다.
문득 비가 멎었다. 고개를 쳐들었다. 자기의 머리우에 우산이 씌워져있는것을 알아보았다. 돌아보니 등뒤에 당비서 정명남이 서있었다.
그는 우산을 받쳐든채 빙그레 웃고있었다.
《지배인동무, 왜 이렇게 비를 맞고 서있습니까?》
김윤화는 말을 못하고 서있었다. 문득 정명남이 손세를 써가면서 말했다.
《지배인동무, 지배인동무가 자식들의 이름으로 나무를 심자고 한건 좋았는데 한가지 놓친것이 있는것같습니다.》
《?!》
《나무마다 그 자식들의 이름을 써넣는걸 말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모두가 공장과 하나로 된 자기들과 자식들의 래일을 그려보게 될거란 말입니다.》
김윤화는 어린애처럼 신이 난듯한 정명남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못했다. 옳은 생각이기는 했지만 수지운동신설비문제를 생각하고있는 김윤화에게는 너무도 거리가 먼 일이였다. 그러나 정명남은 여전히 흥분한듯한 얼굴이였다.
《그렇다구 명찰표들을 제마끔으로 해오게 하지 말구 공장에서 멋들어지게 만들어주면 좋겠습니다. 좋은 나무에다 색칠을 하얗게 하구 이름을 써서 거기에 눈비에 지워지지 않게 도포까지 씌워서 말입니다.》
김윤화는 사소한 문제에 열중한듯한 당일군의 얼굴을 처음이라도 보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려깊고 여유작작해보이는 눈길로 김윤화를 지켜보며 정명남은 조용히 웃고있었다.
《지배인동지, 난 지배인동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다 압니다.》
《?!》
《고무바닥운동화를 모두 없애버릴 결심을 하고있겠지요?》
《비서동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다소 놀라고 어리둥절해서 김윤화는 물었다.
《공장을 자꾸만 돌아보는 지배인동무의 발걸음이 수지운동신설비들에 한번 갔다면 고무바닥운동화설비들에는 두번 가더군요.》
김윤화는 아무 말도 못하고 말없이 서있었다. 정명남은 빙그레 웃었다.
《지배인동무, 자기가 옳은 결심을 했다고 생각했다면 우리 공장의 로동자들을 믿으십시오. 이 공장과 영원히 운명을 함께 하려고 하는 우리 로동자들을 말입니다.》
《비서동무!》
《그리고 나도 믿어주십시오. 나도 이 공장에 내 자식의 이름으로 나무를 심었습니다. 힘 쓸 일이든 책임질 일이든 우리 함께 어깨를 들이대구 풀어봅시다.》
김윤화는 마음속에 비구름마냥 우중충하던 불안과 괴로움이 바람에 불리운듯이 사라져버리는것을 느꼈다. 자기가 당비서의 이 말을 듣고싶어 비속에 그냥 서있은듯이 느껴졌다. 한없는 고마움과 믿음을 안고 당일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명남은 다시한번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아직 지배인동무가 결론을 안했습니다.》
《뭘 말입니까?》
《나무들에 명찰표를 다는 일 말입니다.》
《합시다. 하구말구요.》
그들은 다같이 소리내여 웃었다. 그들의 머리우에서 커다란 우산이 내리는 비발을 막아주고있었다. 다음날이였다. 김윤화는 전체 종업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장의 고무바닥운동화생산공정을 모두 수지운동신생산공정으로 바꾸려는 자기의 결심을 이야기했다.
바람에 휩싸인 산의 울림과도 흡사한 웅성거림이 회관안에 떠돌았다. 김윤화는 자기를 지켜보는 수백쌍의 눈길들앞에 어지럼증이 나는듯한
심정이였다. 그 수백쌍의 눈길들을 납득시킨다기보다는 자기
《물론 아직은 아무런 방도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설비를 사올만한 돈도 없고 도와달라고 어디다 손을 내밀데도 없습니다. 우리가 믿을것은
오직 자기
수백쌍의 눈이 차츰차츰 하나의 커다란 눈으로 변하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해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공장이 살길이고 나라가 발전하는 길이기때문에 죽으나 사나 해내야 합니다. 나는 우리 공장의 로동계급과 기술자들을 믿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공장의 모든 종업원들이 고무바닥운동화생산공정을 수지운동신생산공정으로 바꾸기 위한 방도들을 연구해서 저에게 제출해줄것을 호소합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지배인을 지켜보았다.
《단 한줄의 소박하고 짤막한 견해라고 해도 좋습니다. 혹시 실현 불가능한 방도라고 해도 탓하지 않겠습니다. 그와 관련한 문제라면 언제든지, 깊은 밤에도 좋고 새벽에도 좋으니 절 찾아와주십시오. 전 그런 동무들을 진정으로 고맙게 여길것입니다. 동무들, 우리모두가 한사람같이 떨쳐일어나서 기어이 원료, 자재의 국산화를 실현하고 다품종화생산을 완성합시다.》
회관안은 한순간 조용해졌는데 누가 먼저 쳤는지 모르게 박수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불시에 화끈 달아올랐다. 저도 모르게 손바닥이 깨져라 박수를 쳤다. 요란한 박수소리가 회관안에 울려퍼졌다. 박수를 치지 못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부지배인 송명식은 박수를 치지 못한채 멍하니 김윤화를 바라보고있었다. 한경철은 고개를 숙인채 소심하게 박수를 쳤다. 박수소리는 오래도록 회관안에 울려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