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 회)
종 장
아름다워라 청춘이여!
36
(1)
9월에 접어들자 한여름의 더위가 가신 푸른 하늘에 올해 들어 처음으로 서늘한 공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가을은 눈에 띄지 않게 찾아들어 조심스레 퍼져나갔다. 황이 들자면 아직 멀었지만 그래도 나무잎이 한잎두잎 떨어지기 시작하는 계절이 온것이다.
《그러니까 꼭 반년이군요. 어때요? 그동안 무척 힘들었지요?》
무성한 잡초들이 자란 동뚝길을 앞서 걷던 정아는 무릎을 스치는 풀대 하나를 뽑아들고 뒤따라오는 진호를 돌아보았다.
《글쎄, 그 반년이 힘이 들었는지 어쨌는지, 짧았던지 길었던지 내
《보람찬 일일수록 아마 과정들은 기억에 남지 않는가봐요.》
이들은 며칠전에 새 연료에 대한 취입시험을 완전히 끝냈던것이다. 확증시험까지 끝내자 제철소에서는 즉시 도입을 위한 전투를 조직했다. 도입에 필요한 일체 설비와 자재들은 부의 조치에 따라 이미 현장에 마련돼있었다.
취입공정이 완성될 때까지의 열흘간을 휴가로 받은 진호는 집으로 가기 위해 지금 수도행 정기려객선이 정박해있는 부두로 향하는 길이였다.
《다음대상은 용광로라지요?》
《아니, 회전로부터 할가 하오. 회전로의 취입조건을 개조하는 과정에 용광로도 병행해서 연구하는게 더 나을것같아서.》
《그러니 이젠 저의 임무도 끝났군요. 변변치 못한 조수였다고 욕하지 마세요.》
밝게 웃으면서도 어딘가 서운한 빛을 감추지 못하는 정아였다.
《그사이 정말 동무의 수고가 많았소. 뭐라고 했으면 좋을지…》
《또 그 말이예요?》
언제나 이런 말이 나올 때면 그런것처럼 이번에도 정아는 그 말은 결코 진정이 아니라는듯 또 진정으로 받아들일수 없다는듯 롱으로 치부했다.
《아니요. 사실 동문 날 도와주었다기보다 가르쳐주었소. 난 많은것을 동무한테서 배웠단 말이요.》
《아이참, 그 말이야 제가 해야지요. 전 동무와 일하면서 키가 한뽐이나 더 자랐는걸요. 이젠 저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일해야 하는가를 똑바로 알게 된것같아요. 우리 일에는 가능성의 한계가 없다는 동무의 신조가 저의 마음속에도 든든히 자리를 잡았으니까요.》
진호의 머리속에는 중유절약안을 놓고 서로 론쟁하던 일이며 그처럼 새 연료안을 반대하던 정아가 자기의 기술안에 호응해나섰다는 말을 듣고 놀라던 일 그리고 서로 밤을 패며 분석에 몰두하다가 쪽잠에 들었던 일들이 선히 떠올랐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지나간 일이라고 다 아름답게 추억되는것은 아닌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해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자부하게 될 때라야
그리고
뚝은 넓었으나 길은 좁게 나있어 나란히 걷자면 부득불 한사람은 풀우로 걸어야 했다. 그러나 진호는 그까짓것쯤 거치장스러울것이 없다는듯 무성한 풀대를 짓밟으며 정아옆으로 다가섰다.
(지금 이 처녀는 어떤 마음일가? 책임기사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있을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정아의 옆모습을 지켜보느라니 불쑥 이런 생각이 드는것이였다.
현장심사가 있은 그날부터 줄곧 정아의 눈치를 살펴온 진호였으나 좀처럼 내심을 가늠할수가 없었다. 결코 그럴수 없으리라는것을 짐작하면서도 이 모질고 깔끔한 처녀가 혹시 책임기사를 단념해버리지나 않았을가 하는 위구까지 스며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렇게 봐서 그런지 정아의 태도에는 책임기사에 대한 사소한 구속의 그늘도 없는것같았는데 이 점이 진호에게는 더욱 의심을 자아내는것이였다. 더우기 고백을 한것도 아닌데다가 어떤 감정을 품고있었다는것조차 상대가 모르는터여서 그냥 물러선다고 해도 도덕적인 의무감에 지배되지 않으리라는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드디여 이들은 동뚝에서 내려섰다.
이제부턴 숱한 강괴더미들이 야적되여있는 적재장을 지나야 했다. 이 적재장이 끝나는 곳에 바로 부두가 있었다.
《이제 가면 무척 반가와하겠군요. 부모님들이랑 진희가 말이예요. 그리고 현옥동무도요. 현옥동무에게 저의 인사를 전해주세요.》
현옥이에 대한 생각에 미친것이 기쁜듯 그는 뽑아든 풀대를 손가락끝에 뱅뱅 감으며 빠른 말씨로 속삭였다.
《제가 보고싶어하더라고 그리고 고맙다는 인사도요.》
《고맙다는건 뭐요?》
《저에게 많은걸 깨닫게 해주었으니까요. 사랑이 어때야 한다는 교훈 말이예요. 그리고 우리 기술안을 방조해준데 대해서도 응당 인사를 해야잖겠어요.》
《기술안?》
진호를 돌아본 정아는 미소를 머금은채 말을 이었다.
《이번에 우리가 새롭게 개조하기로 한 축열실도안 있지요? 그건 바로 현옥동무가 설계한거랍니다.》
(현옥이가?)
진호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현옥이가 그걸 설계하다니? 전혀 상상도 못한 일이였다.
《도면을 보내면서 그는 절대로 누가 보낸다는걸 밝히지 말아달라고 했어요. 아니, 처음부터 설계의 명기란에 다른 사람의 이름을 써넣었으니까요. 때늦은 후회긴 하지만 이제라도 다소나마 보상하고싶노라고, 그렇게 해서라도 동무에 대한 마음의 부담을 덜고프다고 말이예요. 그리고보면 진정한 조수는 제가 아니라 그였지요.》
(그 많은 도면을 과연 그가 다 그렸단 말인가!)
숱한 밤을 밝혔을 그, 그때마다 자기를 저주하기도 하고 원망도 했을 현옥이의 모습이 점점 더 크게 확대되면서 어쩐지 가슴을 아프게 허비는것이였다.
《얼마나 아름다와요. 잘못된
진호는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진호동문 정말 얼마나 행복해요. 전 진호동무를 볼 때면 얼마나 부러운지…》
그제야 진호는 정아의 목소리에 어떤 애소가 깃들어있음을 깨닫고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 애소가 현옥이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자 여태껏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감정, 책임기사에 대한 애달픈 감정이 저도 모르게 새나왔다는것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니 그런 모습을 책임기사한테서는 기대할수 없다는건가? 그래서 이젠 단념했다는건가?)
진호의 내심을 짐작하기라도 한듯 그는 손가락에 감았던 풀대를 풀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그렇다고 그에 대한 감정이 달라진건 아니예요. 전 여전히 그를 사랑해요. 어쩐지 이전보다 더 열렬히 사랑하고싶어요. 결함이 있다고 물러선다면 그게 무슨 사랑이겠어요. 사랑은 둘째치고 저에게 리성이라는게 있어 무엇하겠어요. 전 그가 이젠 자기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있다는것도 알아요. 알고말고요. 전 다만…》
갑자기 고개를 숙이는 그의 눈가에는 어떤 고뇌가 물결쳤다.
《전 다만 그가 절 어떻게 생각할가? 이제 와서도 저의 사랑을 받아줄 여지가 있을가 하는 이 하나의 생각밖에 없어요. 전 그가 사랑한다는 그 한마디만 해준다면 이제라도 그의 품에 뛰여들겠어요. 모든걸 털어놓겠어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왔는지 아는가고, 동무가 얼마나 야속했는지 아는가고 소리치며 목놓아울겠어요. 그러나 그가 저의 이런 심정을 리해할가요? 자기의 결함을 타매하는것으로써 자기를 사랑해온 저의 심정을 리해하겠는가 말이예요. 전 그걸 생각하면 어쩐지…》
정아의 두눈에는 어느덧 맑은 눈물이 고여있었다.
《만약 그래서 그가 절 랭대한다면 세상에 저보다 불행한 녀자가 어디 있겠어요.》
비로소 진호는 그가 고민하는 리유를 알수 있었다. 자기의 진정한 사랑을 모욕으로 곡해받지 않을가 하고 두려워하고있는 처녀, 그 사랑이 그처럼 열렬하건만 혹시 모자라는것이 아닐가 하고 우려하는 처녀, 가슴속에 품고있는 사랑이 그 어떤것도 정화시키고도 남을만치 깨끗한것이련만 그 아름다움조차 의식하지 못하고있는 처녀라는 생각이 들수록 정아가 더욱더 순결해보였고 과연 이런 처녀의 사랑을 받는 책임기사야말로 얼마나 행복한 존재랴싶은 느낌이 가슴을 뜨겁게 했다. 그럴수록 어떻게라도 정아를 위로해주고싶은 충동이 사품쳐올랐다.
《아니, 그는 리해할거요. 세상에 그런 진정을 리해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소.》
《리해해줄가요?》
《꼭 리해하고말고.》
《그래도 흔히 남자들을 보면…》
어딘가 미심쩍어하는 정아의 표정을 보는 순간 진호는 그가 바로 자길 념두에 두고 남자일반을 의심한다는것을 알수 있었고 그것은 은연중 현옥이에 대한 자기의 태도를 돌이켜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