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 회)
제 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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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경철은 이러한 김윤화지배인이 자기를 도와주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머니는 그에게 박사원을 마치고 류성신발공장으로 갈것을 요구했다. 너무도 강경하고도 무자비한 요구여서 아무 말도 못한채 눈을 흡뜨고 굳어졌다. 그러나 말없이 자기를 지켜보는 어머니의 눈을 보니 거절하거나 반박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그를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어머니. 대동강에 얼음이 지기만 하면 어머니는 아침마다 버릇처럼 그에게 얼음판에 들어서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군 했다. 어느날 아침 그가 바쁜김에 대동강얼음판을 건너서 대학으로 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어머니는 줄곧 아들이 얼음구멍에 빠지는 악몽에 시달리면서 그에게 애원반, 추궁반의 그런 약속을 받아내군 하는것이였다. 대동강의 얼음이 다 풀려야 어머니는 걱정을 놓군 했다. 지나오가면서도 대동강에 얼음이 풀렸는가를 살폈고 얼음이 풀리면 기뻐서 말하군 했다.
《이젠 대동강에 얼음이 다 풀렸더구나.》
그런 어머니가 자기에게 지금 인생의 새로운 대학과정을 시작할것을 요구하고있는것이였다.
사람들은 어머니를 두고 일밖에 모르는 녀자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성미가 무쇠쪽같은 녀인이라고 혀를 차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무쇠쪽같은 가슴에 깃들어있는 녀인으로서의 아픔과 고뇌를 알고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경철아, 어머니두 힘들다! 외롭기두 하구… 나두 녀자가 아니냐! 하지만 난 네 아버지를 욕되게 할수가 없구나. 그래서 난 힘들 때마다…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그저 죽어라 하구 일을 한단다. 그럼 힘들지두 않구 외롭지두 않아.》
경철은 어머니의 그 말이 진심이라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어느 겨울날 경철은 어머니가 없는 빈집에 홀로 있게 되였다. 어머니가 먼 지방공장으로 출장을 갔던것이였다. 그때 집에는 식량도 땔감도 다 떨어졌었다. 어렸던 경철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서럽고 외로왔으며 텅 빈 방이 춥고 무섭기까지 했다. 외로움과 배고픔을 이겨낼 아무런 방도도 없었던 경철은 그 순간 어머니의 말을 생각했고 자기도 어머니처럼 죽어라 하고 일, 즉 공부를 해보리라고 생각했다. 경철은 그렇게 삼일간이나 빈방에서 공부만 했다.
…
《경철아, 너 왜 이러니, 응?》
《엄마, 왜 이제야 왔나? 나 3일동안 그냥 공부만 했다. 그러니까 배고프지두 않구 춥지두 않아.》
《경철아!-》
어머니는 자기 품에 맥을 놓고 노그라지는 아들을 붙안고 소리내여 울었다.
《엄마가… 엄마가 잘못했다!》
경철은 자기 얼굴에 따겁게 떨어지는 어머니의 눈물을 느꼈다. …
결국 한경철은 어머니의 요구대로 류성신발공장으로 왔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김세천기사장에 대한 반발심때문이였다. 그리고 더 정확하게는 자기에게 온 정체불명의 편지때문이였다.
얼마전 그에게 한통의 편지가 왔다. 그런데 편지에는 보낸 사람의 이름이 없었다.
《이름을 밝히지 못하는것을 용서해주기 바랍니다. 말할수 없는 사연도 있지만 보다는 동무를 알고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것처럼 저도 동무를 돕는것을 저의 평범하고도 응당한 일로 여기고싶습니다. 나는 동무의 아버지를 잘 알고있습니다. 동무의 아버지는 참으로 훌륭한분입니다. 그런 아버지를 가지고있는 동무가 모든 면에서 떳떳하고 긍지롭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동무의 아버지를 알고있는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심정일것입니다. 그래서 실례인지도 모를 이런 편지를 씁니다. 나는 동무의 학위론문이야기를 들었으며 공장의 실태도 잘 알고있습니다. 누구를 탓하거나 요행수를 바라기 전에 동무가 남다른 지향과 완강한 실천력을 지니고 현실에서 자기의 학위론문을 끝까지 완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미흡하고 소박한 나의 견해와 방도를 적어봅니다.》
그는 한경철이 학위론문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현장에 있는 증부가마를 개조하여야 한다고 했다. 증부가마의 개조방도를 제기하고 그 설계마저 그려서 보냈다. 결국 리론의 수준으로 현실을 끌어올리는것이였다. 너무도 명백하고 기발하며 정도이상의 관심과 성의가 깃들어있는 그 편지는 한경철을 깜짝 놀래웠다. 그는 편지를 몇번이나 곱씹어 읽었다.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이 누구일가 하고 골똘해서 생각해보았다.
또박또박 곱게 박아쓴 편지의 글씨와 어조를 보니 그것은 분명 녀자의 체취였다. 한경철은 편지를 보낸 녀자가 처녀일것이라고 생각했다.
왜서인지 편지에서는 그러한 체취가 풍겨왔다. 어쩌면 한경철
한경철은 자기가까이의 대학동창생처녀들을 만나보았으며 슬그머니 그들의 필적을 대조해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같은 필적은 없었다. 문득 이 편지의 주인공이 류성신발공장에 있는 처녀가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장에도 대학을 졸업했거나 통신대학을 다니는 처녀들이 많다. 공장의 증부가마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그들중에 학위론문때문에 고심하는 나를 알며 지켜보고있는 처녀들이 있을수 있는것이다.
결국 한경철은 고맙고도 신비한 느낌을 주는 그 처녀를 찾아내며 현장에서 자기의 학위론문을 기어이 완성하려는 열망을 안고 류성신발공장으로 왔던것이였다.
공장에 오니 김윤화지배인은 그를 기술과에 배치했다. 룡청해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기술과장이 부서사람들에게 그를 인사시키고 자리에 앉히려다가 당황해서 말했다.
《이거 갑자기 새사람이 오다나니 걸상이 없구만. 학성동무, 거 3층 기능공학교 사무실에 가서 교장을 만나오. 내가 걸상을 하나 달란다고 말하오. 그럼 줄거요.》
《제가 가서 가져오겠습니다.》
한경철은 자기가 직접 가서 걸상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놓으라는 자리에 놓았다. 그러나 앉지는 않고 조용히 말했다.
《기술과장동지, 절 현장에서 일하게 해주십시오.》
기술과장은 놀랍고 의아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난 현장에서 일하면서 거기서 내가 해야 할바를 찾겠습니다. 그런 다음 이 자리에 와서 앉겠습니다.》
모두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한경철은 그 눈길을 등지고 말없이 방을 나왔다. 그길로 그는 아버지의 묘가 있는 이 산으로 올라왔다. 그는 저도 모르게 품속에 간직했던 편지를 꺼내들고 내려다보았다.
남다른 긍지와 자부를 안고살던 그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맛본 실패와 좌절이였고 역시 처음으로 받아본 이성의 진정과 관심이였다. 한경철은 편지를 볼 때마다 왜서인지 가슴이 울렁거려지는것만 같은 느낌이였다. 처녀의 성의에 보답하고싶었고 처녀가 누구인지 꼭 알아내여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싶었다. 그는 편지를 손에 든채 아버지의 묘앞에 오래도록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