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0 회)
제 7 장
우리는 젊은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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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택로장이 종대와 아니, 술과 씨름하고있을 때 물에서 어지간히 맥을 뽑고난 젊은 패들은 두척의 뽀트에 앉아 태수를 몰아대고있었다.
어떻게 은심이와 짝을 뭇게 됐는가를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으면 강물에 처박겠다는것이였다. 성격이 드센 친구들이여서 정말 당장이라도 태수를 꺼꾸로 처박을 기세였다. 이런데 나오면 의례히 있을법한 화제였고 또 흔히 새로 섞인 사람에게 집중되기마련인 요구이기도 했다.
《이거라구야, 제길!》
태수는 구원을 바라는듯한 눈길로 뒤전에 앉아있는 진호를 넘겨다보았으나 진호는 오히려 잘코사니야 하는 표정을 짓고있었다.
(뭐, 날 바라본들 소용없어. 그걸 여태 나한테도 말하지 않지 않았나. 그러니 응당 벌을 받는 수밖에.)
《뻔해! 얌전한 생김새에 반한거겠지.》
누군가 이렇게 말하자 태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성격인가?》
《아―니.》
《생긴것두 아니래, 성격도 아니래 그럼 도대체 뭐란 말인가?》
모두들 의아한 눈길로 태수를 쳐다보는데 뒤켠에 앉아있던 형묵이가 갑자기 《암― 그런게 있지.》하고 한마디 삐쳤다.
《뭔데요?》
《그런걸 총각들이 알면 되나, 흐흐―》
흉측한 그의 웃음소리에 대번에 폭소가 터져올랐다.
《사실 따져보면 난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성격이 어떤지는 알지도 못하면서 사랑하게 된것일세. 동정이랄가 아니면 의무감이랄가.》
《의무감?》
세상에 사랑을 의무감으로 했다는건 듣다 처음이라는듯 모두의 눈이 둥그래졌다.
누구보다 놀란것은 진호였다. 아무 일이나 의무감에 못이겨 행동하지 않을뿐더러 그런것을 제일 싫어하는 태수가 하물며 사랑을 의무감으로 하다니?
(또 그럴듯하게 둘러댈 잡도리군.)
그러나 두발을 물에 잠근채 배전에 앉아있는 태수의 기색은 자못 심각했다.
《그럼 말하지. 어처구니없다고 웃을수도 있지만 이건 사실이네.》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 은심이한테는 원래 교제하던 남자가 있었네. 철제일용품공장의 지도원이랬다던가? 몹시 은심이를 따랐던 모양이야. 그가 은심이를 가까이 하게 되면서 제일 마음쓴건 바로 은심이가 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자라났다는것이였네. 왜 안그러겠나? 사랑하는 처녀가 부모의 얼굴을 모를뿐 아니라 아직 생사여부조차 모르고있으니 말일세.
은심이는 어릴 때부터 초등학원에서 자랐어. 말하자면 전쟁때 부모와 헤여져 고아로 됐단 말이네.
그는 어떻게 하든지 은심이 부모를 찾아내기로 결심했지. 하긴 요즘도 전쟁때 헤여졌던 부모를 다시 찾은 사람이 얼마나 많나. 5호에 있는 수남이도 왕별을 단 아버지가 나타나지 않았나 말야. 물론 살아있다고 믿긴 어렵지만 그래도 친척이나 고향만이라도 알면 그게 어딘가!
그런데 그 친구가 사방에 줄을 놓기도 하고 편지질을 해서 종내 은심이 부모에 대한 래력을 알아냈단 말일세. 아버지는 전쟁 이듬해에 돌아갔고 어머닌 은심이를 낳던 해에 돌아갔다는거야. 고향이 문천 어디라는것까지 알아내서 거기 있는 친척들과도 편지거래가 됐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 친구의 덕분으로 은심이는 25년만에 아버지산소를 찾아볼수 있었으니 말일세.
은심이로서야 실상 그가 부모보다 더 고맙고 가까운 사람이 아닐수 없었지. 한데 문제는 그때부터 그가 은심이를 멀리하기 시작한데 있네.》
《멀리하다니?》
《리윤즉 은심이 아버지가 해방전에 잘살았다는거야. 어느 정돈지는 몰라도 밥술은 굶지 않았다는거야, 가게방을 차려놓았다기도 하고… 바로 이것이 그를 은심이로부터 멀어지게 한 요인이지. 그러고보면 그 친군 은심이 아버지도 왕별을 달고있거나 아니면 그쯤한 사람일거라고 기대했던게 틀림없어. 이런 그의 속심을 알길 없던 은심이는 그가 대학으로 추천받은것이 기뻐서 가방을 선물했다는거야. 그런데 그가 대학으로 떠나면서 그 가방을 다시 돌려주었는데 그안에 편지가 들어있더라는게 아닌가.
사연인즉 이러저러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은 끝에 이젠 자기를 잊어달라는것이였지.》
《저런!》
《결국 그 친구는 은심이한테 부모를 찾아준 기쁨보다도 몇배 더한 슬픔을 가슴에 새겨놓고 떠나고말았지. …》
태수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배전을 치는 단조로운 물소리가 들리였다.
물에 젖은 두쌍의 노는 날개처럼 공중에 쳐들린채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고있었다.
《내가 이 말을 들은건 은심이와 한호실에 있는 처녀한테서였는데 그는 나하고 기술과에 같이 있었지. 그 말을 듣고나니 잠이 와야지. 그자에 대한 격분이 치밀어올라서 말이야. 그에 대한 불만이 크면 클수록 또 그 처녀에 대한 동정을 금할수 없더란 말일세. 매일밤 그자를 원망해서 울고 아버지까지 원망하며 울 처녀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르는게 아니겠나. 에라! 찾아가 만난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그따위 친구를 두고 고민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무엇때문에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과오를 그가 걸머져야 한단 말인가! 그보다 더 엄중한 과오를 범하고도 당의 관대한 처사로 하여 개조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아니, 무엇보다 그야 우리처럼 새로운 교육을 받고 자라난 새세대가 아닌가 하는 격분이 치밀어 견딜수 있어야 말이지.
난 다음날 그가 있는 유치원으로 찾아갔네. 마침 마당에서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주고있더군. 난 한참동안 담장밖에서 처녀를 지켜보았네. 저 처녀가 과연 어떤 심정으로 노래를 부르고있을가 하고 말일세. 그런데 얼굴엔 한점의 수심도 찾아보기 어렵지 않겠나. 적어도 웬만한 고민쯤은 누를줄 아는 처녀라고 생각했지.
저녁에 다시 합숙으로 찾아갔네.
어리둥절해하는 그에게 난 단도직입적으로 들이댔지.
〈난 동무가 고민하고있다는걸 알고있소. 그래서 찾아왔소. 물론 리해는 할수 있소. 하지만 동문 새세대가 아니요. 새세대로서 그런걸 가지고 고민한다는건 부끄러운 일이요, 수치란 말이요. 그따위 낡은 유물은 우리 세대가 털어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요. 자― 맘을 크게 먹으시오. 눈을 똑바로 뜨고 앞에 펼쳐진 현실을 보란 말이요.〉
그는 말없이 나를 지켜보기만 하더군. 의문과 불만이 섞인 눈길로 말일세.
이튿날 다시 그와 함께 여기에 나왔지. 바로 저 바위앞까지 말이네.
〈난 어제 동무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던 노래를 들으면서 많은걸 생각했소. 그때 무슨 노래를 가르쳐준줄 아오? 〈우리의 아버진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그걸 감추려고 하지 않더군. 우린 서로 이렇게 알게 됐고 가까와졌고 또 결혼까지 하게 됐네. 그런데 결혼식날 그 노래를 같이 불렀는데 도중에서 은심이가 뚝 그치는게 아니겠나. 돌아보니 제길! 울고있는게 안야.》
《…》
모두다 숙연한 침묵에 휩싸였다.
또다시 노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소리만 가락맞게 들리였다.
태수에 대한 그 어떤 새삼스런 선망으로 하여 진호는 걷잡을수 없는 심정에 사로잡혔다. 당장 그를 부둥켜안아주고싶기도 했고 그가 행복하기를, 누구보다 영원토록 행복하길 바라는 간절한 소원이 불길처럼 솟구쳐오르기도 했다. 그러면서 언젠가 그가 사랑에 대해 하던 말이 생생하니 되살아올랐다.
《사랑이란 무엇보다 상대에 대한 참다운 리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보네. 그래 이런 리해가 동무한테 있나?》
그의 이 말이 새삼스런 의미로 안겨오면서 어쩐지 현옥이의 모습이, 두눈에 눈물을 담고 구슬픈 눈길로 자기를 지켜보던 현옥이 모습이 떠오르는것이였다.
《그러니 오늘은 그때의 2중창을 꼭 불러야겠군.》
분위기를 눙쳐보려는듯 형묵이가 이렇게 말하자 한 친구가 걱정스레 되받았다.
《또 울면 어떡하지?》
《아따, 우리가 있지 않나. 모두다 합창으로 부르면 될게 아니야.》
물결에 실린 뽀트들은 어느새 하얀 모래가 깔린 백사장으로 밀려왔다.
모두들 기슭에 오르기 바쁘게 비서네가 그물로 잡아온 고기를 들여다보며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허― 이놈은 대짠데?》
《아니, 잉어도 있군 그래!》
《뭐니뭐니해도 로장아바이가 잡은 숭어가 제일 커.》
버치안에서 제일 큰놈을 골라든 영기가 친구들을 돌아보며 눈을 끔뻑해보였다.
《그까짓건 아무것도 아니여. 더 큰놈도 있었지만 알을 가져서 놔줬지.》
우택의 말에 모두들 배를 그러쥐고 웃어댔다. 비서까지도 모래밭에 주저앉아 눈물이 글썽해지도록 웃었다.
이들이 웃는데는 그럴만한 리유가 있었다.
로장이 낚시대를 걸쳐놓은채 드러누워 코를 골고있는 사이 영기가 그물로 잡은 고기중에서 제일 큰놈을 골라 낚시코에 걸어놓았던것이다. 그리고는 로장을 깨웠다.
《아바이, 물렸어요. 빨리요!》
자리에서 후닥닥 일어난 우택은 영기한테서 낚시대를 받아쥐긴 했으나 곧 오랜 낚시군의 관록을 시위하려는듯 시답잖은 기색을 지었다.
《어디 걷어볼가?》
낚시줄을 당기자 시누런 황금빛비늘을 번쩍이며 커다란, 그야말로 보기 드물게 큰 숭어가 꼬리를 휘저으며 가녁으로 끌려왔다. 그러나 그걸 보고 하는 그의 말이 더 걸작이였다.
《별루 크지도 못한 주제에… 또 놔주구말가부다.》
《아― 아니!》
급해맞은 영기가 부랴부랴 물안에 뛰여들어 그놈을 건져냈던것이다.
모두가 알고있는 이 사실을 우택이만은 아직 모르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