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 회)

제 6 장

정 련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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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아는 의혹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표정으로 봐서도 분명 말 못할 비탄에 젖어있는것같았으나 막상 현옥이가 표현하는 말은 정반대기때문이였다.

(대체 이 처녀의 가슴속에 어떤 마음이 간직돼있는걸가? 정말 체념과 망각속에 모든걸 묻어버린것일가? 아니면 자기의 감정을 숨기고있는것일가? 자기가 생각하고 느낀바를 죄다 말할수 없기때문일가? 아니면 진정으로 그럴 마음이 없기때문일가?)

《전 동무의 심정이 어떤지 알수 없어요. 설사 짐작한다 해도 동무자신이 느끼는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테지요. 더우기 전 진호동무한테서는 아직 동무얘기를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으니까요. 그 동문 언제나…》

《거야 그럴수밖에요.》

정아의 말허리를 꺾은 현옥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일단 결심한 일이면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실행하고야마는 사람이니까요, 그것이 비록 잘못된것이라 해도. … 그런데 하물며 저와의 관계를 놓고는 그자신이 천만번 지당하게 행동했는데 무엇때문에 그러겠어요. 저에 대한 회상자체가 벌써 자기에 대한 모욕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을텐데요.》

《아니 아니, 제 말은 그런 말이 아니예요.》

정아는 그의 손을 잡으려고 했으나 현옥은 얼른 자기 손을 가무러뜨렸다.

《저도 이젠 다 알아요. 알구말구요. 그러니 저에겐 그런 말은… 그런 말은 그만둬요.》

그제야 정아는 현옥이의 목소리에 감출길 없는 애소가 깃들어있음을 깨달았다. 자기와의 상봉으로 하여 일어난 흥분을 되도록 가라앉히고 일부러 랭정한 태도를 취하려고 했으나 어쩔수 없이 솔직한 감정이 솟구쳐오르고있다는것을, 또 그것은 그가 숨길래야 숨길수 없으리만큼 자기가 죄스러운 립장에 있다는것을 스스로 시인하고있음을 뚜렷이 느끼게 했다. 그 점이 정아를 기쁘게 했다.

《제가 하자는 말은 그게 아니예요. 전 다만 그가 얼마나 새 연료안을 위해 헌신하는가를, 그걸 위해 그 어떤 시련도 희생도 무릅쓰고있다는걸 얘기하려고 했을뿐이예요.》

《그런 얘긴 이젠 저한텐 아무 소용이 없어요. 무슨 상관이 있다고요.》

《그러지 말아요. 그건 솔직하지 못한 말이예요. 진호동무가 동무얘길 하지 않은것도 그렇지요. 그가 동무에 대한 얘길 입밖에 내지 않는것이 동무를 잊어서 그럴가요? 회상하기 싫기때문일가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어떻게 잊을수 있겠어요. 잊을수 없지만 나타내지 않을뿐이겠지요. 오히려 그 강압적인 침묵속에 그만큼 더 표현 못할 감정이 물결칠수도 있잖겠어요. 흔히 그처럼 과격한 사람은 자신을 가혹하게 내몰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만치 처절하게 뉘우치기도 하니까요.》

현옥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동무가 아직 몰라서 하는 말이예요. 제가 그를 어떻게 배반했는가를 안다면… 그걸 안다면…》

현옥이는 이제껏 가슴속에 숨겨온 모든 감정, 모든 설음이 일시에 가슴을 헤치고 분출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의 괴로움을 삐치지 말자고 했던 결심이 물먹은 담벽처럼 허물어지고 가슴속에 고이고고였던 고뇌와 절망,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수 없었던 슬픔이 무섭게 쏟아져나오는것이였다.

《그래요. 전 그에 대한 사소한 미련이나마 자기에 대한 모욕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을만큼 그를 혹독하게 배반했지요. 그렇고말고요.》

자기의 슬픔을 그에게 이야기하고싶은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쓰라린 감정을 가슴에 품은채 도저히 딴 이야기를 할수는 없는노릇이였다. 그는 마음속의 비애를 시원히 털어놓을수 있는것이 기쁘게 생각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바로 진호와 함께 일하는 처녀앞에서 자기의 수치를 드러내놓아야 한다는것이 참을수 없이 괴롭기도 했다. 하지만 털어놓지 않고는 견딜수 없었다.

진호와 교제하기 시작해서부터 그의 지향에 공감했던 일, 그러다가 오빠의 말을 듣고는 그를 배반한 일 그리고 입원하고있는 그를 만나고 돌아온 이후 자신이 겪은 고통에 대해서도 그는 다 얘기했다.

《모든것이 다 제 잘못이지요.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하겠어요. 오빠를 원망하지도 않아요. 오빠가 나쁘긴 하지만 전 그보다 더 나쁘니까요. 사실 전 진호동무가 바라는 그런 위험과 위훈에 찬 생활을 동경은 했지만 그 동경이 한갖 호기심에 지나지 않았어요. 오직 한때 남못지 않게 일했다는 겉치레가 필요했던거예요. 아니, 그런 생활에 몸바칠 용기가 없었던거예요. 글쎄 저같은 처녀가 어떻게 그의 지향을 리해할수 있고 힘이 돼줄수 있었겠어요. 어림도 없지요. 설사 같이 제철소에 갔다 해도 전 오히려 그의 짐이 됐을거예요. 짐이 되기 전에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을거예요. 이 모든걸 전 요즘에야 깨달았답니다.》

정아는 현옥이의 표정이 자기에 대한 랭소와 환멸 그리고 그 어떤 처절한 비감에 젖어있는것을 보고 말할수 없는 련민의 정을 느끼였다. 그러면서 이처럼 고통에 시달리는 그의 마음속에 자신에 대한 증오와 원한이 차있는 동시에 무엇인가 더없이 아름답고도 고상한것이 깃들어있음을 깨닫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자 그전에는 현옥이를 비난하던 자기가 이제 와서는 이 처녀의 처지와 심정이 십분 리해되면서 진호가 이 처녀를 충분히 리해 못하지나 않았을가 하는 의심이 드는것이였다.

《제 말을 들어봐요. 동무자신이 말했지만 이런 일이야 처녀들에겐 누구에게나 있을수 있는 일이 아니겠어요. 문제는 그걸 동무처럼 일면적으로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봐요. 흔히 남자들이란 사랑하는 사람에겐 정도이상의것을 바라는 법이지요. 그래서 서로의 행동을 지나치게 보고 오해하기도 쉽고요.》

《오해라고요?》

현옥이의 얼굴에는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 표정은 마치 《나도 이젠 사랑이 어떤것이라는것쯤은 알고있어요.》 하고 말하는것같기도 했고 《제발 그런 값눅은 위로는 하지도 말아요.》하고 호소하는것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표정은 순간일뿐 다시금 쌀쌀한 랭소가 입가에 어렸다.

《천만에요. 만약 아직도 그걸 오해라고 여길 여지가 있다면… 그러나 그건 그럴수 없는 일이예요. 어쨌든 저에겐 이제부터라는건 없어요. 그와의 관계에선 이제부터라는건 도저히 있을래야 있을수가 없어요.》

《어째서 그런 약한 소리를 해요.》

천성이 올곧은 정아는 자기에 대한 그의 서글픈 멸시가 격분을 자아내게 했다.

《이봐요, 현옥동무! 우린 젊은 사람들이 아니예요. 청춘이 아닌가 말예요. 이 세상 모든것이 우리의것이고 우리를 위해 있다고도 할수 있지요. 바로 그렇기때문에 누구보다 기쁨도 많고 번민도 많고 자랑도 많고 슬픔 또한 많은게 아니겠어요. 문제는 이런 감정, 특히 이기기 어려운 번민과 절망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데 있잖겠어요. 그런 힘이 없는가요? 그게 없다면 청춘이 아니지요. 글쎄 제 얘길 들어봐요.》

무슨 말을 하려는 현옥이를 제지하며 정아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저도 첨엔 진호동무의 기술안을 의심했댔어요. 의심정도가 아니라 반대했지요. 그것도 제일 선두에서 말이예요. 그러나 그의 의도가 어떤것이며 그의 지향이 얼마나 정당한가 하는것을 알고는 곧 그의 기술안을 도와나섰어요. 그런 저를 두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난했게요. 그럴수밖에요. 저의 행동이 어떤 사람에게는 모진 아픔으로 되지 않을수 없었으니까요.》

기철이에 대한 생각으로 하여 잦아든 자기의 목소리에 불안을 느낀 정아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런 고통이 문제겠어요? 남들의 시비가 두렵겠어요? 우리야 옳은것을 행동으로 증명하라고 교육받은 새 세대들이 안예요. 그래 그 진리를 다른것과 바꿀수 있어요? 거기서 주저하고 물러설 권리가 있나 말이예요.》

《그것하고야 다르지요.》

《무엇이 다르다는거예요. 옳지 않은걸 인정하는데 그치지 말고 대담하게 행동으로 증명해야 한다는데야 매일반이지요. 꼭같지요. 이런말 하는게 어떤지는 몰라도 전 동무가 좀 대담했으면 해요.》

《…》

현옥이는 생면부지의 이 처녀가 자기에게 이렇듯 서슴없는 공격을 들이대는게 놀랍기도 했지만 보다 더 놀라운것은 그런 공격을 순순히 받아들이고있는 자신이였다.

《사랑도 그렇지요. 아무리 굉장한 사랑일지라도 어떤 새로움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의 생활을 채워주지 못한다면 충분치 못한게 아니겠어요. 만약 동무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의 가슴속에 뛰여들어야지요. 귀찮아하건 성을 내건 아랑곳하지 말고 말이예요. 체면이나 자존심이 문제겠어요? 그가 괴로와하면 그 괴로움을 같이 나누어가지는것으로써 사랑을 해야지요. 물론 이건 어렵겠지요. 누구나 할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정아의 눈앞에는 또다시 우울한 기색을 짓고있는 기철의 모습이 떠올랐다.

(난 과연 그를 그렇게 대했던가?)

내심으로는 그에 대해 어느 정도의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자기 처사가 어디까지나 정당하다는 확신으로 하여 이미부터 모든걸 털어놓으려고 했지만 정작 그렇게 되지 않았다. 어째서 그처럼 리해력이 풍부한 그가 자기의 실책을 인정하는것이 만회할수 없는 일을 저질러놓는것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는것을 모를가? 자기를 잠시 볼 때조차 그 어떤 저주와 원망이 비낀 빛을 감추지 못하는 그의 얼굴을 그려보느라니 가슴이 터지는것같았다.

《첨엔 서로가 리해하지 못해도 그걸 깨닫게 됐을 때를 생각해봐요. 그땐 본래보다 몇배 더 뜨거운 정을 느끼게 될게 아니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전 이렇게 생각해요. 남자들에게는 결코 처녀의 외모나 생김새가 중요한게 아니라고, 그건 하등의 의의도 갖지 못하는거라구요.》

그때에야 자기가 누구의 립장에서 말을 하고있는가를 안 정아는 깜짝 놀라 현옥이를 살펴보았다. 혹시 그가 다른 눈치를 채지 않았나 해서, 자기 말이 얼굴이 예쁜 현옥이의 마음을 건드리지 않았나 해서. 하지만 현옥이의 표정에서 여전히 변함없는 수심기만을 읽은 정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하긴 그것도 어느 정도는 작용하겠지요. 그걸 중시하는 사람들도 많으니까요. 그렇지만 사랑이란 궁극에는 외모가 아니라 마음에 뿌리를 두는게 아니겠어요. 끝없이 진실하고 순결한 마음에서 그 뿌리가 더욱 왕성해지는게 아니겠어요.》

《…》

정아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현옥이는 한가지 새로운 점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진호에게 취한 모든 행동이 자기와는 너무도 상반된다는것이였다.

누구보다 믿어야 할 진호를 의심하고 배척했던 자기였다면 남들이 하나같이 의심하고 비난할 때 진호를 진정으로 도와나선 정아였고 자기로 하여 지울길 없는 상처를 가슴에 새긴 진호라면 그의 힘찬 격려에 새로운 희망을 안고 투신하는 진호가 아닌가. 한마디로 말해 자기가 결심했던것을 이 처녀는 행동으로 옮기고있는것이였다.

이 뚜렷한 대조는 필경 진호로 하여금 정아에게 고마움이상의 감정을 품게 했으리라는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조수라고 했지? 그래! 틀림없어!)

벌써 현옥의 생각은 외곬으로만 뻗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더욱 정아한테서 부드러우면서도 열정에 넘친 눈빛과 다른 사람들은 도저히 흉내낼수 없는 약동하는 생기를 뚜렷이 엿볼수 있었고 그것이 분명 사랑을 받는 처녀에게서만 볼수 있는, 이미 자기한테서는 영영 사라져버린 그런 모습이라는것을 절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은 모든 정황을 자기에게 더 불우하게 해석하기 십상인것이다. 행복한 사람앞에서 불행을 느낄 때보다 더 서글픈 때는 없지만 현옥은 자기의 처지를 지금처럼 비참하게 느껴보기는 처음이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솟구쳐나오는 눈물을 어쩔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이 모든 비애의 원인이라고 느낄 때만 나타내는 그런 깊은 절망의 눈물이였다. 그러나 맘속으로는 정아가 밉거나 어떤 악의에 찬 감정을 품게 되지 않았다. 도리여 그가 더없이 고상하고 아름답게만 여겨지는것이였다.

그 점은 정아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현옥이에 대한 부족점은 부족점대로 느끼면서도 이 처녀가 더없이 훌륭하게 느껴지는것이였다.

두 처녀는 서로에 대한 감정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존경은 금할수 없었다. 현옥이로서는 정아가 훨씬 더 자기보다 훌륭하고 령리한것같았고 정아로서는 또 현옥이가 곱절 더 자기보다 순결하고 고상한것같이 생각되는것이였다.

이들은 오래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도 다음날 다시 만날것을 약속하고야 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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