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 회)

제 6 장

정 련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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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의 눈길은 사색에 몰두하던 사람이 일시 외계에 시선을 돌렸을 때와 같은 그런 범상한 눈빛에 불과했다. 그러나 곧 무엇에 놀라기라도 한것처럼 그는 자리에서 움쭉 일어서기까지 하는것이였다. 집요하면서도 뭔가 알아내려는듯한, 특히 자기의 짐작이 옳은가 어떤가를 따져보는듯한 처녀의 눈길에 현옥이는 당황해지고말았다.

《책을 빌리러 왔댔는데 동무가 먼저 보는군요. 그렇지만 일없어요. 후에 보지요.》

무슨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현옥은 얼굴까지 붉히며 말했다.

《어느 책이예요? 이 책?》

책상우에 펼쳐놓은 책들을 이것저것 짚으며 처녀는 빠른 어조로 말했다.

《아니, 됐어요. 미안해요.》

《미안한건 오히려 제편인걸요.》

여러권의 책을 들고 현옥이앞으로 다가선 처녀는 방긋 미소를 지었는데 그것은 틀림없이 자기의 짐작이 옳다는것을 확신한 사람이 짓는 미소였다.

《현옥동무지요?》

《?》

현옥은 가슴이 철렁했다.

《어떻게 절? …》

《왜 모르겠어요. 정문 벽보판에 커다란 사진이 붙어있는걸요.》

책들을 책상우에 놓은 처녀는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전 ㅎ제철소에 있답니다. 윤정아라고 해요.》

ㅎ제철소라는 말에 온몸의 피가 일시에 심장에 모여들면서 목구멍으로 뜨거운것이 꽉 치밀어오른 현옥은 대뜸 어떤 모멸감으로 하여 어쩔바를 몰랐다. 그래도 제혼자 생각할적에는 태연한 마음을 가질수 있었지만 정작 진호와 함께 일하고있는 이 낯모를 처녀앞에 서있다고 생각하니 불현듯 창피와 수치로 하여 눈물이 핑 돌았다.

《전 강철직장에서 일하는 공정기사예요.》

그의 태도를 통해 현옥이는 그가 벌써 자기가 누구며 어떤 처지에 있다는것까지도 다 알고있다는것을 짐작하지 않을수 없었다.

《아이구, 저것 보지. 네가 종내 방해를 끼치고말았구나.》

책을 한아름 안은 보배아주머니가 현옥이를 나무랐다.

《괜찮아요. 이젠 시간도 됐는걸요.》

책상우에 있는 책들을 주섬주섬 챙긴 정아는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공원으로 가요. 좋지요?》

《…》

현옥이는 불시에 나타난 이 처녀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이제부터 이 처녀가 틀림없이 자기가 그처럼 고통스럽게 얻어낸 마음의 안정을 깨뜨리리라는것을 의식하지 않을수 없었으나 거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도무지 알수가 없었다.

현관을 나서면서 정아는 한결 더 정다운 태도를 지어보였다.

《우리 제철소에 왔댔다지요?》

《…》

《동무가 왔다갔다는 말을 저도 들었어요.》

사실 현옥이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정아는 그가 어떤 처녈가? 자기의 출현을 어떻게 생각할가? 오히려 더 큰 후과를 초래하게 되지나 않을가 하는 조바심에 휩싸여있었다. 그 조바심이 어제 벽보판에 붙어있는 그의 사진을 본 순간부터는 그만 불안으로 확대되였던것이다.

(아이, 이뻐!)

부지중 튀여나온 탄성이였다.

처녀들사이에도 저절로 탄복하리만치 매혹적인 용모가 있는 법인데 현옥이야말로 바로 그런 처녀였던것이다. 꼭 다문 입, 가늘면서도 길게 휘여든 눈섭과 특히 그밑에서 한곳을 응시하면서도 그윽한 미소를 띠우고있는듯한 정찬 눈매, 이 모든 인상은 자기로서는 도저히 마주설, 특히 심중에 고여있는 감정을 가늠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기엔 너무도 눈부신 모습이였다.

이처럼 아름다운 처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의식으로 하여 남달리 도고한 법이고 그래서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것을 정아도 모르지 않았다. 더할나위없이 곱게 다듬어진 그의 얼굴은 아무모로 보나 사소한 융통도 있을것같지 않았다.

하나 그를 대하는 첫순간에 정아는 벌써 자기가 괜한 걱정을 하고있다는것을 알았다. 확실히 현옥이의 눈은 더없이 아름다운 눈이였으나 어딘가 깊은 곳에는 슬픈 빛이 간직돼있었다. 모르긴 해도 정아는 그의 눈빛이 틀림없이 과거의 괴로운 추억이 나타내는 회오의 발로라는 생각이 들자 도리여 그가 측은해지는것이였다. 그의 눈은 마치 모든 잘못이 자기에게 있다는것을 공손히 시인하는듯 《그래요, 전 몹쓸 처녀예요.》하고 말하는상싶었다.

그들은 체육관앞 오색등불이 명멸하는 분수가로 나왔다. 갖가지 색조의 명암을 받은 맑은 은구슬들이 찬란한 진주의 턴넬을 만들고있어 그 무지개빛의 황홀한 굴속을 한번 지나가고싶게 만들었다. 그런가하면 연분홍빛으로 활짝 퍼진 나팔꽃모양의 분수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생생하니 풍기는듯싶었다.

《…》

《…》

두 처녀는 걸음만 옮겼다.

정아는 이제 무슨 말부터 해야 할가 하고 생각했고 현옥이는 현옥이대로 불시에 나타난 이 처녀가 무슨 말을 하려나 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기다리고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가 진호에 대한 얘기를 두려워하고있음을 짐작하고 그에 대한 말을 한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는 처녀가 내심 고마왔으나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말을 듣고싶어 견딜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감히 그 말을 먼저 물어볼 자신은 없었다.

(이젠 아무런 미련도, 과거에 대한 그 어떤 추억도 없다는걸 보여줘야지. 오직 일에만 전념하고있다는걸 느끼게 해야 해. 그리고 무엇보다 그까짓건 대수로운 일이 아니며 쉬이 잊게 된다는걸 아니, 이미 잊어버렸다는걸 보여줘야 해. 다만 그가 지금 어떻게 일하며 무엇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낸다는것만 알면 돼.)

자기의 이런 의사가 얼마나 일면적이며 무리한것인가 하는걸 그로서는 미처 가릴수 없었다.

《일 잘돼요?》

현옥이는 될수록 랭담한 기색을 지으며 물었다.

《일요? 정말이지 무척 힘이 들어요.》

정아는 그가 먼저 말을 꺼낸게 여간 반갑지 않았다.

《실험에서는 어느 정도 열량을 담보하는데 실지 취입에선 그렇지 못하거던요. 연재에 의한 작용도 아직은 알수 없고요. 우선 취입을 해봐야겠는데 아직 사고심의때문에… 그렇지만 이젠 됐어요. 아침에 전화를 걸어보니까 공장에서 결론이 있었대요. 겨우 3회의 시험취입이지만 승인됐나 봐요. 그것도 우리한텐 큰 혜택이지요. 아마 그 시험결과를 놓고 다시 결심하려나봐요.》

아침에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정아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어떻게 하든지 빨리 일을 끝내고 시험취입전으로는 돌아가겠다고 생각했던것이다.

(다행이구나!)

단 3회긴 하지만 기술안에 대한 시험이 승인됐다는 말을 들으니 현옥은 진호가 무사하다는 안도감으로 하여 숨이 나갔다.

《참, 이젠 일없어요? 그때…》

현옥이는 입원한 진호의 상처에 대해 물으려 했댔으나 정아를 보고는 곧 묻는 말을 바꾸어버렸다.

《투사긴지 하는것 말이예요.》

그러나 정아는 현옥이가 묻고저 하는 참뜻을 알아차렸다.

《투사기는 새로 제작하기로 했답니다. 이젠 투사기를 창안한 태수동무도 우리와 함께 새 연료안을 같이 하고있어요. 알지요, 태수동물? 실은 그가 동물 꼭 한번 만나보라는게 아니겠어요.

어쨌든 그때 정말 위험할번했어요. 하지만 이젠 일없어요. 얼마간 입원하고있기는 했지만 요즘은 또 매일같이 현장에서 밝히고있답니다.》

구태여 누구라는것을 밝히지도 않았고 묻지도 않았다.

현옥이는 정아가 눈치채지 못하게 한숨을 쉬였는데 그것은 진호의 무사함을 확신한 안도의 숨이였고 오래간만에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 뚜렷이 그려볼수 있게 된 누를길 없는 애수의 탄식이였다.

《어찌도 복잡한 문제들이 많은지 전 조수노릇조차 변변히 못한답니다.》

《조수라니요?》

《아이참! 잊었댔군요. 전 조수랍니다. 그의 조수요.》

《그럼 여기 온것도 그 기술안때문인가요?》

《그래요.》

정아는 그동안의 시험과정에 대해서 대충 얘기한 다음 한결 친숙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얘긴 후에 하고 동무얘기나 좀 해요. 어떻게 지내고있는지.》

《저요? 저야 뭐 어떻고말고가 있어요?》

현옥이는 웃어보이기까지 했다.

《그저 매일 원고에 파묻혀 정신이 없는걸요. 뭘 생각하고 조용히 앉아 사색할 여유조차 없답니다. 그래도 퍽 재미는 있어요. 특히 자기가 맡은 원고가 독자들에게 반향을 일으킬 땐 보람이 있지요. 바로 그 재미에 일하지요.》

마음속으로는 자기자신에 대해 조금도 용서할수 없는 비렬한 처녀로 여기면서도 겉으로는 아주 뻔뻔스럽고도 대담하게 말했다.

《물론 태수동무의 부탁도 있긴 했지만 전 스스로도 동물 꼭 만나보고싶었어요. 이렇게 마주하고 얘길 나누고싶었어요. 그런데 글쎄 첨엔 막 겁이 나지 않겠어요. 어떻게 만날가 하고, 혹시 동무가 나를 경원하지 않을가 하고 말이예요. 우습지요?》

현옥이는 벌써 정아가 무엇 하나 숨기는 일 없는 아주 소탈한 처녀라는것을 알았다. 그가 지니고있는 발랄한 생기는 그의 눈가에 떠도는 미소와 어울려 아무리 누르려고 해도 저절로 넘쳐나는것같았다. 그러면서 이 솔직한 처녀가 영영 사라져버린것으로 치부했던 추억을, 이미 죽은것으로만 여겨온 그 감정을 다시금 소생시켜 심장을 사로잡게 한다는것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내가 무슨 말을 할수 있단 말인가! 자기 잘못을 알면서도 털어놓는것이 두려웠노라고? 나에 대한 미련이 저주로 변하지 않았나 걱정이였다고? 저주로운 배반으로 하여 더럽혀진 나의 가슴에 그의 깨끗한 손이 닿을가봐 두려웠노라고? 천만에! 난 그런 용서를 바라기는 고사하고 변명할 자격조차 없어!)

현옥은 다시 랭담한 기색으로 돌아섰다. 자기가 진호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는가 하는 호기심이 정아의 얼굴에 나타나있다는것을 알아차린 그는 조용히 그러나 아주 자연스레 말했다.

《저도 이젠 안착이 됐어요. 모든걸 잊고 일에 열중할수 있게 됐지요. 물론 첨엔 가슴이 아팠지만 이젠 아무 일 없어요. 아마 그런건 시간이 저절로 해결해주는가봐요. 그래서 사람들은 새생활에 익숙되는거겠지요.》

《…》

《사실 저와 같은 일이야 처녀라면 누구에게나 흔히 있는 일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무엇때문에 고민하겠어요. 그건 결국 자기를 괴롭히는 외에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생활이란 다양하고 그 다양한 생활을 마음대로 택할 권리란 누구에게나 있는거니까요.》

현옥이는 말하는 품이 아주 자연스러웠지만 너무나도 말수가 많았다. 그는 자신이 이것을 감촉하였을뿐 아니라 자기를 지켜보는 정아의 눈초리에서도 그가 이것을 느끼고있다는것을 짐작할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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