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 회)

제 6 장

정 련 기

29

(1)

 

그 당시에는 지나친 충격으로 하여 사태의 본질을 깨닫지 못했던 사람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의의를 점차 느끼게 될 때가 있는 법이다. 마치 예견치 않은 사고로 하여 병원에 실려간 사람이 다음날 정신을 차리고 퉁퉁 부어오른 상처를 볼 때에야 자기가 어째서 이런 처지에 빠지게 되였는가를 알아차리게 되듯이.

어디를 다쳤는지 모를 때와는 달리 상처를 직접 눈으로 본 다음에는 그 아픔이 더해지는것처럼 현옥이도 제철소에 다녀온 직후에야 바로 그런 상태에 있었다. 온몸에 붕대를 감은채 침대에 누워있는 진호를 볼 때까지만 해도 미처 자신을 다잡을수 없던 그였으나 집에 돌아와서는 그때 알지 못했던 새로운 고통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은 여태껏 자기의 가슴속에 도사리고앉아 항시 자기를 괴롭히던것이 무엇인가 하는것을 어렴풋이나마 감득하지 않을수 없게 된 그것이였다.

확실히 겉으로 보기에는 그가 실패를 거듭하고 사람들의 말밥에 오르고있었으며 무리한 시험을 한 결과 사람들에게는 물론 집단에까지 피해를 입히고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오빠가 예견한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것이 어쩐지 한갖 무모한 행동의 결과로만 느껴지지 않고 어떤 지나친 현상에 지나지 않는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을 지울길이 없었다. 어떤 근거가 있는것도 아니였으나 왜서인지 그렇게 믿고싶었고 믿을수록 또 그것은 안개속에서 자태를 드러내는 물체처럼 점점 뚜렷한 륜곽을 나타내는것이였다.

《난 무모한 인간일뿐 아니라 량심조차 없는 파렴치한 인간이요. 모든 사실이 그걸 증명하고있지 않소.》

그때에는 진호의 이 말도 그대로 받아들였던 자기였으나 돌아와서는 자꾸만 이 말이 새삼스레 상기됐고 혹시 거짓이 아닐가 하는 의혹까지 금할수 없었다. 그러면서 처음 헤여질 때도 어째서 그가 자긴 그런 인간이라고, 사람들을 속이고 동무를 기만했다고 스스럼없이 시인했는지 새삼스레 의문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의문이 무서웠다. 의심이 들수록 그는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 애썼다.

이제 와서 그 의심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다시말해 진호의 처지가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으며 그가 한 말이 고통스런 나머지 꾸며낸 거짓이라는것을 인정한다면 자기라는 존재야말로 너무나도 죄많은 처녀가 아닐수 없기때문이였다. 그 사실을 인정한다는것은 그처럼 순진한 처녀로 자처하던 자기가 성실하기는 고사하고 가장 비렬하게 행동하였음을 증명하는것이 아닐수 없기때문이였다.

(모든건 그의 탓이야! 그가 나를 기만한데 있고 그가 무모한 기술안을 고집한데 있고 또 그가 내 권고를 듣지 않은데 있어!)

속으로는 이렇게 외우는것이였으나 그것이 실지로는 더없이 무서우면서도 겉으로는 무섭지 않아! 무섭지 않아! 하고 소리치는것과 같다는것을 그자신도 의식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데 이때 투사기심사차로 제철소에 다녀온 오빠가 집에 나타났었다.

《그래 이젠 너도 그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걸 똑똑히 알겠지? 그런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걸 말이다! 그는 이젠 어쩔수 없는 막다른 처지에까지 자길 몰아넣고말았어! 그런 사람한테 차례지는 결과란 언제나 명백한 법이니까.》

자기의 주장이 얼마나 정당했는가를 증명하기에만 급급해있는 오빠를 보는 순간, 특히 사소한 동정의 기색은 고사하고 오히려 승리자로서의 우월감이 비껴있는 오빠의 얼굴을 보게 되자 현옥은 오빠가 내리는 결론보다도 더 놀라운 사실을 깨닫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은 오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였다.

(설사 진호동무가 그런 처지에 있다 해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말할수 있을가? 어쩜 오빤 이런 사람이 돼버렸을가? 어쩌면 이리도 싸늘하고 랭담한 인간으로 되였을가?)

확실히 어떤 사태도 그것이 비록 절망적인 사고나 뜻하지 않은 불행이라 해도 오빠에겐 한갖 자기의 주장을 증명하는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을 느끼게 되자 현옥이는 소름이 끼쳤다. 모르긴 해도 오빠에겐 뭔가 중요한것이, 사람에게 없어선 안될 귀중한 무엇이 결여돼있다는것을 무서운 마음으로 돌이키지 않을수 없었다. 이런 생각은 곧 그의 머리속에 한가지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언젠가 학급동무들과 함께 3대혁명전시관에서 새로 제작된 로보트를 관람하던 때의 일이였다. 그때 해설원이 로보트가 사람보다 더 정확히 동작을 수행할뿐 아니라 인식과 판단, 지어는 감각하고 사고까지 한다는 바람에 옆에 있던 한 동무가 물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람하고 다른 점이 뭐예요?》

《거야 명백하지요. 아무리 훌륭하게 제작된 로보트라 해도 사람이 짜준 지령에 의해서만 움직인다는데 있지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고귀한 본성인 감정과 창조성이 없는것으로 해서 기계가 아니겠습니까.》

(그래! 감정과 창조성이 없는것으로 해서 기계지! 오빠도 바로 그런 기계에 불과해. 기계적인 사색이 빚어내는 테두리안에서 인간적인 감정은 마비되고 고갈되여 오직 타산된 한계내에서만 움직이는 기계!)

이런 확신은 오빠에 대한 불만도 불만이였지만 여태껏 자기가 그처럼 부인하려고 애쓰던 진호에 대한 의심이 한갖 억지에 지나지나 않을가 하는 의혹을 품게 했다.

실로 따져보면 볼수록 진호와 오빠는 너무나도 상극을 이루고있었다. 정확한 타산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오빠라면 일단 마음먹기만 하면 무작정 돌진하는 진호였다. 남들이 뭐라든 자기 목적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서슴지 않는 진호라면 단 한번의 실수도 없는것을 행동의 유일한 목표로 삼고있는 오빠였다.

(사실 오빠와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를 리해할수 있단 말인가! 오빠가 그런것처럼 나 역시 그를 제대로 리해할수 없는건 당연한 일이지. 난 언제나 오빠의 관점으로만 사물을 대해온 청맹과니였으니까.)

그제야 그는 소스라쳤다. 여태까지 거울에 비쳐진 어떤 물체가 찌그러졌다고만 여겨오던 사람이 실은 그 물체가 찌그러진것이 아니라 거울이 제대로 투영되지 않아서 그렇다는것을 알았을 때와 같은 심정이라고 할가.

(그래! 난 바보였어! 바보! 바보!)

그러나 아무리 가슴을 쳐야 이젠 소용이 없었다. 너무나도 먼거리에 있는 진호이기때문이였다. 그래도 이전에는 맘 한구석으로나마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기에 대한 그의 원한이 식어질수도 있고 따라서 그때 가서는 진정으로 되는 용서를 빌수도 있으려니 하는 미련을 품을수 있었으나 이젠 그 희망마저 사라져버렸다. 이제 와서 그의 사랑은 물론 리해를 바란다는것은 산산쪼각이 난 꽃병을 주어다가 다시 붙이려는거나 마찬가지로 어렵고 어이없는 일로만 생각되였다. 분명 이젠 머나먼 그의 세계를 바라보기만 할뿐 더는 찾을래야 찾을수 없는 아득한 그림자에 불과했다.

(난 이젠 맘속으로나마 그를 생각할 자격조차 없어! 없고말고!)

그래도 밤이 되면 그는 눈물을 삼키며 그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보군 했다.

(저한테 이름조차 불리우기 역겨워할 동무라는걸 모르지 않아요. 한푼의 가치도 없는 처녀, 허영에 들뜬 경망한 처녀, 더우기 동무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이 몹쓸 처녀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말 못할 울분을 느끼며 지나간 추억의 파편들을 무자비하게 뽑아던질테지요. 그렇지만 이제야 동무를 배반한것이 죄라는것을 안 저는 이렇게 자신을 저주하며 울고있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다음에야 사랑이 어떻다는걸 안 미련한 처녀의 응당한 설음이지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씻을념도 않고 그는 다시금 속삭였다.

(이젠 아무리 바라도 다시는 결합될수 없어! 영영 헤여지고말았어. 잊자! 그를 잊어버리자!)

전에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를 잊으려고 했다면 이번에는 아득히 머나먼 세계에 따로 떨어진 자기의 처지로부터 그를 잊으려고 했다. 아니, 잊어야 했던것이다.

사람이란 누구나 자기의 처지가 비참한 경우에 이르게 되면 그것이 비록 자기탓으로 생긴것이라 해도 은연중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게 되며 그것이 온당치 못한 소행이라는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타당화하려는것이다. 그래야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수 있기때문인것이다.

(물론 나의 처지가 비참하긴 하지만 나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아. 옥주도 그렇고 성숙이도 다 처음엔 실패하지 않았어! 그들도 이런 고통을 거쳤을테지만 지금은 새생활에만 몰두하고있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지난날을 두고 생각하는것은 우둔한노릇이야!)

그것은 마치 자기에게 더없이 귀중한 무엇을 잃어버렸을 때 처음에는 아쉬움으로 하여 좀처럼 잊을수 없다가도 그것을 다시는 찾을 가망이 없다는것을 알았을 때는 그것이 없으면 무척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뭐 그게 없은들 뭐라나.》 하고 위로하게 되는것과 같은 심정이였다.

하지만 어려웠다. 사무친 원한을 품고 자기를 저주하며 경멸할 진호의 격분에 찬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무작정 그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리려고 했으나 그것은 한갖 욕망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자기 생활에서 너무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있었기때문이기도 했지만 보다는 자기의 처지에서 그를 잊으려고 하는것이 또 하나의 무서운 죄를 짓는 일로 되지 않을수 없기때문이였다.

이런 마음은 그로 하여금 뒤늦게나마 마음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수 있는 일을 해야 하리라는 충동을 느끼게 했는데 그것은 새로운 일, 즉 새 연료안도입에서 부득불 제기되지 않을수 없는 축열실격자축조에 대한 개조안을 완성하는것이였다.

결코 그는 이 론문이 진호를 위한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정신적괴로움을 덜기 위한 위안물이라고만 여겼었다. 어떤 사람이 그리울 때면 사진첩을 펼치고 그의 사진을 보는것처럼 진호에 대한 죄스러움에 사무칠 때마다 그는 그 도면을 펼치고 거기에 온갖 심혈을 쏟으며 자기의 마음을 위로하군 했다.

(그래! 나같은 처지에서는 생활이 요구하는대로 하는것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어! 그 방도란 곧 그날그날의 요구에 충실하는거야.)

이때부터 그는 의식적으로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려고 애썼다. 이런 의식적인 노력은 날이 감에 따라 차츰 그를 본래의 모습으로 재생시켜나가는상싶었다. 확실히 상처란 첨엔 피가 나고 아프다가도 점차 아물기마련인지.

결국 이렇게 되여 낭떠러지에서 굴러떨어진 한줄기의 물, 현옥이의 생활은 회오리치는 소용돌이와 거친 암반에 부딪쳤다가 마침내 서서히 흐르는 대하로 굽이쳐가는것같았다.

 

계단을 내려선 현옥이는 현관 바로 옆에 있는 자료실로 향했다.

편집계획에 의하면 아직 얼마간 여유가 있는 원고였으나 오늘중으로 마무리해놓을 심산이였다. 그래야 래일부터 대학에 가서 축열실개조안에 대한 방조를 받을수 있기때문이였다. 대학때부터 자기를 극진히 돌봐주던 강좌장으로부터 도와주겠노라는 다짐까지 이미 받았던것이다.

《자요, 이 책을 부탁해요.》

익숙한 동작으로 도서카드를 골라낸 그는 그것을 접수대에 앉아있는 뚱뚱한 사서에게 내밀었다. 살집이 좋은데 비해서는 신기하리만치 동작이 민첩한 사서는 근 30년을 출판사에서 일해오는데 아무리 까다로운 이름을 가진 외국원서도 제때에 골라냈고 어느 부문에 참고할 책이 어떤것이라는것까지 휑하니 알고있어 직장사람들의 각별한 인기를 끌었다. 이름이 보배래서 그렇게 부르는지 아니면 그를 보배처럼 여겨서 그렇게 부르는지 현옥이도 아직 알지 못했다.

《이 책을 당장 봐야겠니?》

주문받기만 하면 서슴없이 서가안으로 사라지군 하던 그가 무테안경너머로 올려다보는 바람에 현옥은 저으기 락심했다.

《대출됐어요?》

《대출된게 아니라 지금 열람중이여서 그래, 저―기.》

그가 가리킨쪽을 돌아본 현옥이는 그제야 빈줄로만 알았던 자료실의 한쪽구석에 웬 처녀가 앉아있는것을 보았다. 무드기 쌓아놓은 장서들을 펼쳐가며 그는 무엇을 옮겨쓰기에 여념이 없었다. 직장사람은 아니였다.

《누구예요?》

《제철소에서 왔다는데 무척 바쁜 일인 모양이야. 어제부터 온통 정신이 없어!》

(제철소?)

현옥은 흠칫했다. 저절로 심장이 쿵 하고 방아를 찧었다.

(그래도 그 제철소에서 오진 않았을거야.)

애써 이렇게 생각하며 그를 바라보는데 잠자코 앉아있던 그가 무슨 기미를 느꼈는지 얼핏 이쪽을 돌아보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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