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회)
제 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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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문득 아버지가 래일을 위해 무엇을 준비했을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제부녀절이면 아버지는 어머니를 위해 옥림의 입이 딱 벌어질만큼 멋진 기념품들을 마련하군 했다. 물론 원님덕에 아전이 호강한다고 옥림도 어머니덕에 한몫 보군 하는것은 사실이였다. 그래놓고보면 국제부녀절이 어머니들만이 아니라 어머니가 될수 있는 처녀들도 존경받고 우대받는 날이라고 한 강철민의 말은 영 틀린 말이 아니였다.
문득 옥림은 아버지와 함께 퇴근하고싶어졌다. 지금과 같은 때일수록 어머니를 더 기쁘게 해주어야 하며 그런 면에서는 같은 녀자인 딸의 조언과 방조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자기의 몫도 아버지의 선택이 아니라 자기의 의사에 비추어서 마련하고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옥림의 입은 저도 모르게 방글싸해지고 얼굴에는 웃음이 흘렀다.
《너희들은 먼저 가. 난 아버지와 함께 퇴근하겠어.》
《오, 명절 잘 쇠!》
《명절 쇠고 나한테 맛있는거 가져오는거 잊지 말아.》
옥림은 동무들에게 손을 흔들어보이고나서 아버지가 서있는쪽으로 다가갔다. 문득 공장의 《3걸》, 제화직장장 조인섭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니, 이거 자재과장 이 사람이 차를 끌고간다고 소리를 쳐놓구는 슬그머니 뒤구멍으로 도망친게 아니요? 사람이 제 털 뽑아 제 구멍에 넣을
보매 아버지와 기사장 그리고 조인섭직장장은 다같이 자재과장을 기다리고있는듯싶었다. 그러고보니 정문앞에 서있는 자동차도 국경도시에 생고무를 실러 가군 하는 자재과의 전용차였다.
고무바닥운동화는 생고무와 나프샤를 비롯한 수입자재에 의존하는 신발이다. 고무바닥운동화와 수지운동신을 각각 절반씩 생산하는 공장에 있어서 수입해들여오는 생고무는 공장의 절반생산을 좌우하는 심각한 문제이다. 이즈음 생고무가 떨어져 공장은 고무바닥운동화생산을 하지 못하고있었다. 그런데 오늘 그 생고무를 실러 자재과장이 국경도시로 떠나는 모양이였다.
문득 정문으로 다가오는 자재과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자동차옆에 서있는 사람들을 알아보고는 무춤 서버렸다. 조인섭이 소리내여 웃었다.
《오긴 오는구만. 난 안가려는가 했지.》
《아니, 왜들 이렇게 나와섰소?》
《자네가 생고무를 실러 간다구 몇번이나 들구날구하던 자동차를 버젓이 끌어냈길래 오늘은 생고무가 오나부다해서 반가워서 나왔지.》
《관두우!》
웬일인지 자재과장이 성이 나서 소리를 쳤다. 그러나 조인섭은 여전히 싱그레 웃는 얼굴이였다.
《원, 이 사람 간 떨어지겠네! 게사니고길 먹었나, 소래긴 왜 지르나?》
자재과장은 잠시 말없이 서있었다. 그러다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뭐, 몰라서 그러우? 그놈의 생고무인지 삶은 고무인지 하는것때문에 내 머리털이 얼마나 세여빠졌는지 모른단 말이요?》
《자네 이젠 맥이 빠졌나?》
《젠장!》
자재과장은 누구에게라없이 성을 내며 몸을 떨었다.
《너무 그러지 말라구.》
《안그러게 됐소? 생고무가 당장 들어올것같아서 오늘 간다, 래일 간다 하다가 가는 길에 있는 어머니한테도 못갔소. 래일은 국제부녀절이구 다음날은 어머니 여든돐생일날인데… 내 사람들 보기 민망해서 어머니한테라두 갔다오구말자는거요.》
《자재과장!》
기사장 김세천이 조용히 불렀다. 자재과장은 흠칫하며 굳어졌다.
60살이 넘은 년장자이고 로력영웅인 김세천을 사람들은 모두 어려워한다. 주변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다구 없는 생고무가 생기겠나?》
《에잇, 그놈의 생고무인지 날고무인지 하는걸 아예 안쓰면 내 혈압이 오를 일도 없겠는데…》
기사장 김세천이 달래듯 말했다.
《자재과장, 다른 생각말구 어머니생일에 가라구. 가서 어머니를 축하해드리라구. 그리구 오던 길에 이웃군에 모아놓은 파고무를 싣고 오게.》
조인섭직장장이 자재과장의 옆에 다가서며 조용히 말했다.
《그래, 다른 생각말구 가서 어머니한테 인사를 전하라구. 차에 뭘좀 실었는데 성의뿐일세.》
아버지도 말없이 다가오더니 자재과장의 주머니에 무엇인가를 넣어준다. 보매 공장에서 오래동안 함께 일한 이들은 자재과장에게 자기들의 성의를 전하기 위해 이렇게 나와선것인듯했다.
흥겨워야 할 자리건만 그들은 말없이 서있었다. 엄혹한 현실이 주는 중압감이 무거운 침묵으로 굳어져있었다.
미제의 악랄한 제재책동과 제 집의 리익밖에 챙길줄 모르는 리기적이고 편협한 주변나라들로 하여 우리는 자기의 생존과 발전에 필요한 모든것들을 엄중히 위협당하고있다. 원쑤들은 각방면에 걸쳐 악착하고 비렬한 제재의 빗장을 질러놓았다. 지어 놈들은 철부지아이들의 장난감과 녀인들의 화장품마저도 제재항목에 올려놓았다. 원쑤들은 우리의 생존공간을 바늘귀만도 못하게 만들어버리려고 미친듯이 발악하고있다.
이윽고 자재과장은 두서두서 인사를 하더니 떠나갔다. 아버지와 기사장 김세천, 제화직장장 조인섭은 그냥 한자리에 서있었다.
문득 조인섭직장장이 기사장 김세천에게 말했다.
《기사장동지, 이거 생고무가 못들어와서 공장의 절반생산이 죽었는데 아직두 그 다품종화를 해야 합니까?》
기사장은 대답없이 서있었다. 아버지도 조심스럽게 기사장의 인상을 살펴보며 말했다.
《이전처럼 몇개 품종만으로 수지운동신을 냅다 밀면 되겠는데… 지배인이 어떻게 생각하겠는지?》
사실 시내의 그리 크지 않은 신발공장인 옥림의 공장에서는 생고무가 떨어져 고무바닥운동화생산이 죽으면 원료의 국산화가 실현된 수지운동신생산을 배로 높여 액상으로라도 계획을 해내군 했다. 그러다나니 몇개의 공인된 수지운동신품종을 한달에도 몇만컬레씩 생산하군 했다. 그런데 새 지배인 김윤화가 오더니 이 모든것을 뒤흔들어놓았다. 몇종의 신발품종만으로 수만컬레씩 생산하는 소품종다량화가 아니라 여러가지 신발품종을 개발하여 한 품종당 몇백컬레이상을 넘기지 않게 생산하는 다품종화생산을 하자고 주장해나선것이였다. 그것을 위하여 지배인은 공장에 신발을 전문적으로 개발하는 개발실을 새로 내왔다. 기술자, 전문가들로 구성된 30여명규모의 개발실을 내왔는데 그들로도 성차지 않아 공장의 모든 사람들이 개발사업에 적극 참가하라고 했다.
그런데 개발실과 현장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해낸 그 신발들이 재봉공처녀들에게는 소스라칠 정도의 힘겨움과 복잡성을 안겨주었다. 눈감고도 만들만하던 고정된 형태의 신발갑피를 떠나 어떤 때는 30여가지나 되는 부속품으로 이루어진 새 형태의 신발갑피를 가공하자니 힘든것은 둘째치고 복잡하고 까다로와서 도무지 속도를 낼수가 없었다. 지어는 손에 설어 자꾸만 오작이 났다. 재봉공처녀들은 비명을 질렀다.
《야, 이건 늙은이처럼 돋보기를 걸구 쉬염쉬염 만들어야 할 신발이구나야.》
《난 재봉기술이 대학생에서 유치원생으로 도로 내려간 기분이야.》
수지운동신을 만드는 합성가죽에 여러가지 색갈을 입혀 재단직장으로 보내는 인쇄작업반에서도 혼란과 소동이 일어났다. 단순하게 한두가지 색갈만 내던 작업반이 단번에 수십가지의 색갈을 내자니 일손이 딸리고 공정이 밀려 쩔쩔매였던것이였다. 거기다가 각 재봉직장들에서는 자기들이 맡은 제품의 색갈을 먼저 내달라고 인쇄작업반앞에 장사진을 이루고 서있군 했다. 부처님 여위게 하고 살지게 하고는 석수쟁이 손에 달렸다고 어느 색갈부터 먼저 내주는가는 인쇄작업반사람들의 결심에 많이 달려있어 슬그머니 뒤공작을 하는 일마저 있어 물의가 일어나기도 했다. 한신발을 놓고도 30여가지나 되는 신발부속품들을 재단해야 하는 재단직장에서도 이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있었다. 이렇게 온 공장을 혼란에 몰아넣는 새 품종의 신발을 한달에 보통 열가지이상씩 만들어야 했다. 공장의 생산실적은 단번에 뚝 떨어졌다. 오늘 옥림의 재봉직장 처녀들은 점심참에 자기들끼리 모여서 소곤거렸었다.
《아니, 이전처럼 몇개 품종만 하면 생산실적두 나구 편안두 하겠는데 지배인동진 왜 일을 복잡하구 까다롭게 만드는걸가요?》
《다품종화라지 않니.》
《난 지배인동지가 잘못 생각하고있다고 봐요. 멋쟁이경질그릇에다 고급료리를 담아먹으면 좋은줄이야 누가 모르겠나요? 하지만 주어진 조건에 따라 때로는 보통그릇에다 보통음식을 곡상으로 담아먹을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생산, 생산, 현물생산! 현재로서는 이것이 공장이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해요.》
《네가 뭘 안다구 그래?》
《왜요? 저고리고름 못다는 며느리가 맹물 발라 머리빗는다구 우리가 지금 실적은 제대로 못내면서두 멋만 잔뜩 내고있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아니, 지배인동지의 생각은 옳아! 다만 우리가 아직 이발두 안나왔는데 뼈다귀추렴을 하겠다구 한다 이거지 뭐!》
《새로 지배인사업을 시작했으니 뭐나 다 해보고싶겠지요 뭐.》
조인섭직장장과 아버지는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고있는것이였다. 옥림이마저 긴장하여 침을 꼴깍 삼키며 기사장 김세천을 바라보았다.
환갑이 넘었어도 허리가 곧고 얼굴에 군살이라고는 없어 갱핏해보이는 김세천기사장은 다소 불쾌한 눈매로 아버지와 조인섭직장장을 바라보고있었다. 그러더니 조용히 말했다.
《지배인이 하자는 일은 옳은거야. 자네들은 그래도 공장의 한다하는 일군들인데 자네들부터가 그러면 지배인이 어떻게 일을 하겠나?》
아버지와 조인섭직장장은 다같이 말이 없었다. 아버지는 먼산을 바라보았고 조인섭은 기사장을 외면한채 한숨을 쉬였다.
《뭐니뭐니해두 공장이야 계획을 하고봐야지 지금처럼 생산실적이 안나서야 어디 손맥이 풀려서…》
조인섭이 시름겹게 중얼거리는 말이였다. 아버지도 먼산에 눈을 준채 중얼거렸다.
《우리가 뭐 그 다품종화라는걸 시도해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못하지 않았습니까.》
기사장은 말이 없었다. 시름겨운 침묵을 안고 세사람은 굳어진듯 서있었다. 이윽고 아버지가 모든 번거로움을 털어버리듯 머리를 흔들고나서 기사장과 조인섭을 바라보았다.
《에이, 래일은 명절인데 일찍 퇴근합시다.》
김세천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듯 아버지를 나무랍게 바라보고나서 몸을 돌려 사무실쪽으로 걸어갔다. 조인섭도 뭐라고 중얼거리며 제화직장현장쪽으로 걸어갔다. 아버지는 량쪽으로 갈라져가는 두사람을 보며 말없이 서있었다. 그러다가 옥림을 알아보고는 웃어보였다. 다가왔다.
아버지가 다가오자 옥림은 저도 모르게 강철민이 준 종이곽을 등뒤로 가져갔다. 아버지는 애정어린 시선으로 옥림을 바라보았다.
《퇴근하댔니?》
《예!》
방금전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의 기념품을 사려던 생각을 했던것을 말할수가 없었다. 왜서인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듯한 생각이 들었던것이였다. 아버지는 옥림의 생각을 알아차린듯했다.
《같이 퇴근하자. 래일 어머니를 축하해줘야지.》
《아버지!》
옥림은 어리광치듯 아버지의 팔에 매여달렸다. 확실히 아버지는 사업과 생활에 다같이 준비된 큰사람이다. 이런 아버지를 《힘》이 없다고 한 어머니의 말은 정말 옳지 않다. 하지만 이제 불원간 어머니도 아버지의 《힘》을 알게 될것이고 공감하게 될것이다. 래일의 국제부녀절은 바로 그런 계기가 될것이다.
옥림은 아버지의 팔에 매달려 까치뜀을 하듯이 공장정문을 벗어났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면서도 종이곽만은 버릇처럼 등뒤에 가져간 처녀의 잔등에서 춤추듯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