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 회)
제 6 장
정 련 기
28
(2)
따져보면 볼수록 비서의 말은 깊숙이 박힌 화살처럼 좀처럼 가슴에서 뽑을수가 없었다. 저절로 무거운 한숨이 쏟아져나왔다.
《아니, 아직도 퇴근하지 않았어요?》
이런 소리에 고개를 돌린 진호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무슨 일을 하다가 오는지 여태 작업복을 입고있는 정아가 방안으로 들어서기때문이였다. 손에는 계산자와 도면말이가 쥐여져있었다.
《예비처리로의 자동권양기때문에 늦었어요. 자꾸 말썽을 부리는군요.》
피곤에 지친듯하면서도 어딘가 행복스러워하는 기색이였다.
자기 기술안을 도우면서도 공정기사로서의 임무는 꼭꼭 책임적으로 수행하는 그였다. 머리수건을 벗으며 자기 책상으로 다가서던 그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이쪽으로 돌아서서 방긋 웃는것이였다.
《저, 한가지 제기하랍니까?》
어딘가 롱이 섞인 어조였다.
《제기라니?》
《조수니까 아무 일이나 연구사의 허가를 받아야지요?》
《허가라는건 또 뭐요?》
언제나 그를 마주할 때면 그런것처럼 진호는 이번에도 그의 기분에 말려들고말았다.
《아무래도 제가 평양에 있는 연구소나 과학기술위원회에 다녀와야겠다는거예요. 시험로의 분석수치를 보면 계속 규소분이 높아지거던요. 축열실과 연도에 미치는 작용에 대해서도 미흡한 점이 많고. 마침 장입기도면을 끝냈기때문에 당장은 급한 일이 없어요.》
《…》
진호는 뭐라고 해야 할지 알수 없었다.
자기는 지금 기술안의 운명을 놓고 불안에 휩싸여있는데 이 처녀는 생각하느니 그것밖에 없지 않는가. 마치 이젠 자기가 새 연료안의 주인인듯 했다.
진호도 그가 속으로는 지금 못내 심사결론에 신경을 쓰고있을뿐 아니라 누구보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있다는것을 모르진 않았다. 놀라운것은 그런 불안을 그가 조금도 내색하지 않는것이였고 그것도 결코 무슨 기교나 잔꾀로써가 아니라 선천적으로 타고난 천성과 의지로 극복하는데 있었다. 정아의 그런 의지가 진호에게는 놀라운 한편 부럽기까지 했다.
《이젠 자료들을 빨리 확보해놔야겠어요. 참! 오늘 로장아바이가 책임비서동지를 직접 찾아가 취입시험을 하겠다고 제기한걸 알아요? 이젠 사고가 나도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하시면서…》
진호도 그 사실을 알고있었다.
낮에 그 얘기를 들었을 때 그는 너무도 놀라와 아무 말도 할수가 없었다. 로장의 결심을 몰랐던것은 아니였지만 기술안의 운명이 판가리되는 이때에 그런 제기를 들이대리라고는 짐작도 못한터였다.
《가도 되지요?》
《내야 뭐… 책임기사가 승인하겠소?》
《책임기사요?》
갑자기 말끝을 흐린 정아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여느때 같으면 틀림없이 《일없어요.》 하고
요즘 그는 확실히 책임기사를 피하는 눈치였다. 해야 할 말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하는가 하면 총화때에도 그를 마주보기조차 꺼려했다.
(하긴 아무리 정당한 행동이라 해도 옹색할 때가 있는 법이니까.)
《동문 어째서 전기를 전공했소?》
그의 울적한 기분을 가셔주기 위해 진호는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던졌다.
《네?》
《왜 전기를 택했냐 말이요.》
《왜요?》
《전기란 뭘 생산하는것도 아니니까 제품을 놓고 희열을 느낄수도 없고 또 워낙 처녀들한테는 어울리지도 않는 일이 아니요.》
정아의 두눈은 대번에 동그래졌다.
《생산물이 없다니요? 불과 열은 전기의 생산물이 아닌가요 뭐! 생산물중에서도 가장 값진거지요. 사실 제딴엔 첨엔 남달리 좋은걸 택했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전기일이란 잘하면 잘할수록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일을 제대로 못하니까 자꾸만 남의 눈에 거슬리기만 해요.》
못내 유감스러운듯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까지 내쉰 그는 어느새 다시 밝은 기색으로 돌아섰다.
《그래도 좋아요. 어쨌든 어두운 곳을 밝게 해주고 모든것을 뜨겁게 해주니까요. 그렇지요?》
《…》
정아를 대하게 될수록 진호는 그에 대한 어떤 호감과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호감은
아닌게아니라 정아는 요즘 여느때보다 몇곱절이나 더 행동하고싶고 투쟁하고싶은 열망에 타오르고있었다. 자기앞에 일감이 산더미처럼 쌓아져있기만 바랐고 그속에서 녹초가 되도록 일하고싶었다. 그런데는 단지 자기 내심에서 이는 정신적불안을 누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날이 더해지는 새 연료안에 대한 충동때문이였다.
중유절약안을 맡았을 때에는 그 일의 리해관계가 많이는 기철이에게 국한되여있었다면 지금은 자기가 하는 일이 진호의 기술안이라고는 하지만 집단과 전체를 위해서 아니, 보다 숭고한 목적을 위해 일한다는 기쁨을 느끼게 되는것이였다. 그 역시 지금 기술안의 운명이 위험에 처했다는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더 태연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는것을, 자기만이라도 그래야만 진호에게 다소나마 힘을 줄수 있으리라는것을 알고있기때문에 더욱 명랑한 태도를 취하는것이였다.
《평양에 가면 어디부터 찾아가야 방조를 받을수 있을가요?》
정아는 조심스레 그러나 의미있는 눈길로 진호를 바라보았다.
실상 그에겐 평양에 가서 방조를 받는것도 받는것이였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이 있었던것이다. 그것 역시 기본임무 못지 않게 어려운 과제였다. 아니, 그보다 더 어려운것인지도 몰랐다.
낮에 그는 설계실에서 태수를 만났었다. 아무래도 평양에 가서 방조를 받았으면 한다는 의향을 말하자 그는 대뜸 제도판을 밀어놓고 자기쪽으로 돌아앉는것이였다.
《마침이요! 그렇지 않아도 골치거리가 하나 있는데…》
사업과 관련된 어떤 부탁이려니 했는데 그는 왕청같은 말을 꺼냈다.
《거기 가면 ××출판사에 들려 현옥이라는 처녀를 만나주오.》
《현옥이요?》
언젠가 진호의 사업일지를 볼 때 거기에 적혀있던 이름이였다는것이 상기됐다.
《누군데요?》
《진호 애인이요. 대학때 말이요. 일전엔 여기까지 오기도 했는데, 글쎄 그 친구가… 어쨌든 그 친구에 비하면 얼싸한 처녀요. 대학적으로 소문난 미인이겠다, 마음은 또 얼마나 곱다구. 그런데…》
그들에 대한 전후사를 듣고난 정아는 어쩐지 한숨이 나갔다. 현옥이라는 처녀에 대한 불만이 솟구치는가 하면 진호가 지내 가혹한것같기도 했고 처녀의 처지가 리해되는가 하면 또 진호가 너무도 불쌍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느끼지 않을수 없는것은 진호에 대한 새로운 련민의 정이였다.
(너무해! 어째서 그에겐 그토록 가슴아픈 일만 생기는걸가? 도대체 어떤 처녀기에 그와 같은 사람도 리해하지 못할가?)
《거기에 들려 그 처녀의 기색이 어떤지나 알아봐주오. 속시원히 알아야겠단 말이요. 그래야 결심할 문제도 있고 해서. 처녀들은 말이 없이도 그런걸 알아내는 재간이 있지 않소.》
그 처녀를 어떻게 만나며 만나서는 무슨 말을 할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정아는 응했다. 응하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한데 사무실에 홀로 앉아있는 진호를 보니 그가 처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있는지 알고싶은 충동이 불쑥 일었던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는 진호의 생각이 처녀에게 미치게 하려고 촉수를 조심스레 뻗쳐보는것이였다.
《아무래도 부에 먼저 가야겠지요?》
《아니, 과학기술위원회에 가는게 더 효과적일거요. 거기 가야 연료전문가들도 있고 해당한 자료를 볼수 있을테니까.》
《혹시 우리한테 필요한 론문이 투고된건 없을가요? 출판사 같은데 말이예요.》
《출판사?》
얼른 자기를 마주보는 진호의 표정에서 정아는 그의 생각이 은연중 출판사에 있는 현옥이에게 미쳤다는것을 직감했다. 너무 직선적으로 들이댄것이 후회되기도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진호는 창문으로 다가가 달빛에 우중충한 구내산을 바라보기만 했다.
《출판사에 그런 원고가 투고될게 뭐요? 없을거요. 가지 마오.》
이렇게 혼자소리처럼 되뇌인 그는 문득 전화번호를 대줄테니 전화나 한번 걸어달라고 했다.
《네, 그러지요. 누군데요?》
가로수의 잎새로 새여드는 달빛에 비치였다가는 그늘에 덮이군 하는 진호의 얼굴을 살피며 정아는 다음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녀동생인데 내가 보고싶어하더라고만 말해주오. 시간이 있으면 한번 오라고…》
《…》
무겁고 축축한 밤공기가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마치 소나기라도 한바탕 퍼부으려는듯한 날씨였다. 검은 비구름이 뭉게뭉게 피여올라 순식간에 연기처럼 변하며 달빛을 가리는것이였다.
어떤 부질없는 상념을 쫓아버리려는듯 갑자기 고개를 쳐든 진호는 하늘을 바라보며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억양으로 말하는것이였다.
《아― 래일은 비가 올가분데?》
그 목소리가 어찌도 처량하고 구슬프게 들리는지 정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