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 회)

제 6 장

정 련 기

28

(1)

 

드디여 새 연료안에 대한 심사성원들의 결론이 있었다. 결론은 예견했던것보다 더 무자비했다.

《현실성이 없을》뿐 아니라 《무모》하기때문에 기술안을 당장 취소할것과 창안자에 대한 문제를 별도로 엄격하게 취급해야 한다는것이였다. 이 결론은 그대로 제철소당위원회에도 제기되였다.

(그러니 이젠 결국…)

혹시나 하고 바랐던 한줄기의 기대마저 잃고나니 진호는 눈앞이 캄캄했다. 전신을 휩쓰는 허탈감으로 하여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조차 가릴수가 없었다.

가슴속에는 오직 한가지 생각, 이젠 자기의 희망이 영영 사라져버렸다는 애달픔과 그처럼 고심참담한 과정들을 거쳐 이룩해놓은 모든것이 일시에 거품처럼 되고말았다는 절망감뿐이였다.

(이런 조건에서 뭘 더할수 있단 말인가! 몇년이 아니라 일생이 걸릴수도 있다구? 그것을 끝까지 해내는 사람이 참된 사람이라구?)

로장이 하던 말이 이제 와선 한갖 현실과는 거리가 먼 뜬소리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을 피해 터벅터벅 구내산으로 들어섰다. 용광로의 열풍소리와 매미소리가 귀청을 따갑게 긁어댔으나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초연히 서서 멀리 바다처럼 펼쳐진 대동강과 그우에 일매진 무늬를 이루고있는 조개구름만 멍하니 바라보고있었다.

털썩 그 자리에 퍼더버리고앉은 그는 두손을 뒤로 뻗치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젠 하소연조차 할데 없는 자기라는 생각이 들자 저절로 목이 메여올랐다.

(현실은 어째서 나에게는 매번 이리도 가혹한것일가? 어째서 나는 매 걸음이 암초에만 부딪치는것일가? 내자신이 스스로 그런 처지에 내몬다구?)

현옥이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물끄러미 옆에 있는 꽃밭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에는 저도 모르게 허구픈 웃음이 스쳤다. 그것은 이름도 모를 하얀 꽃송이우에 앉을듯앉을듯 팔랑거리면서도 종시 앉지 못하는 노랑나비가 마치 그 어디에도 제대로 발을 붙이지 못하는 자기의 처지같았기때문이였다.

(그래도 저 나비야 더 좋은 꽃가루를 찾아다니지만 나야 어디…)

갑자기 그는 무엇에 놀란 사람처럼 벌떡 허리를 일으켰다. 불시에 어떤 흥분이 온몸을 사로잡는것이였다.

(그래! 가자! 저 나비처럼 아무데라도 가자! 거기서 쫓겨나면 또 다른데 가서라도 새 연료만은 기어이 만들어놓을테다!)

자리를 차고 일어난 그는 황황히 초급당비서 사무실로 향했다.

마침 비서는 방에 혼자 있었다.

다른데로 가겠다는 하나의 충동에 못이겨 비서를 찾아온 진호였으나 정작 그를 마주보느라니 그런 충동보다 그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이 앞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퇴원후 단둘이 마주앉기는 처음이였다.

간혹 직장모임때나 현장에 있는 그를 먼발치에서 볼 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진호는 지금 비서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우랴, 더우기 그 괴로움을 털어놓을수 없는 처지로 하여 얼마나 고통스러우랴 하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미여지군 했던것이다.

《어떻게 왔소?》

줄곧 무뚝뚝한 눈길로 자기를 주시하고있는 비서를 보느라니 새삼스레 그에 대한 죄책감이 갈마들었다.

《비서동지! 이런 말 한다고 욕하지 마십시오. 전 제가 저지른 일이 비서동지한테까지 피해를 입게 할줄은 몰랐댔습니다. 무슨 말로 잘못을 빌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상범은 한쪽입귀를 실룩해보였는데 그것은 흔히 맞갖잖을 때마다 나타내군 하는 그의 버릇이였다.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전 어떤 결론이라 해도 저의 기술안에 대한 기대만은 버릴수가 없습니다. 제딴엔 자신도 있구요. 앞으로 있게 될 추궁이 어떤것이라 해도 전 다 접수하겠습니다. 또 달게 받겠습니다. 그런데는 이미 습관됐으니까요. 다만 기술안을 계속할수 있는데만 보내준다면…》

진호는 말을 더 이을수 없었다. 그전에 사고를 냈을 때도 부당비서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었다는 생각이 가슴을 허비였기때문이였다.

《그러니 다른데로 가겠다 그 말이요?》

《아무데라도 좋습니다. 야금로가 있는데라면 기꺼이 가겠습니다. 보내주십시오.》

비서의 눈치를 살핀 진호는 한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주필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던 상범은 한동안 아무말없이 진호를 바라보기만 했다.

《가겠다…》

또다시 침묵을 지키던 그는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가겠다는 사람을 붙들어놓을수야 없지.》

너무도 선선한 대꾸에 진호는 얼떠름했다. 원주필을 만지작거리고있는 변함없는 거동이며 침착하고 태연한 표정으로 봐서는 비서가 진정으로 자기의 제기를 받아들이는것같았으나 방금 한 대답을 통해서는 뭔가 못마땅해하는 뜻이 포함돼있지 않을가 하는 의심이 드는것이였다.

사실 상범은 방금전까지 바로 진호의 기술안에 대한 심사조의 결론에 대해 그리고 그 결론에 대한 자기의 의견을 당위원회에 제기했던 사실에 대해 되새기고있던터였다. 만약 당위원회에서 자기의 제기를 무시하고 그대로 집행할것을 승인하면 어떻게 할가 하는 불안도 없지 않았지만 보다는 설사 그렇다 해도 그 기술안을 버릴수 없을뿐더러 어떤 책벌이 차례진다 해도 그걸 포기할 권리가 자기에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던것이다.

그는 진호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었다. 그가 심사결과를 놓고 고민하고있으리라는것과 자기의 앞날에 대한 불안에 잠겨있으리라는것은 짐작했지만 차마 여기를 뜰 생각까지 하고있는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그런 진호를 보느라니 깨우쳐줘야겠다는 의무감보다 어쩐지 배반당한듯한 노여움이 솟구쳐오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하나 물어보기요.》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침착했다.

《동문 혹시 자길 어떤 수난자로 여기는게 아니요? 억울한 희생만 강요당하는 수난자 말이요.》

(수난자?)

너무도 뜻밖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진호였으나 곧 어떤 도전적인 기분에 사로잡히고말았다.

(그래! 사실 내가 수난자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진정을 유린당했지, 사랑을 잃었지, 그것도 부족해서 이젠 고의적인 방해자로까지 락인되고있는 내가 수난자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세상에 나보다 더 애꿎은 수난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것 보오!》

자리에서 일어난 상범은 창가로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어떤 일도 목적과 방도만 가지고는 어려운 법이요. 특히 첨 해보는 일일수록 말이요. 그건 왜냐하면 목적과 방도를 찾기보다 몇배 더 힘든 열정이 있어야 하기때문이 아니겠소. 열정이! 그런데 그런 열정이 동무한테 있소?》

상범은 진호가 미처 대답할새도 없이 손을 홱 내리그었다.

《없소! 동무한텐 그런 열정이 없단 말이요. 왜? 그건 언제나 동문 자기가 하는 일을 자기 개인의 리해관계에만 얽매놓기때문에, 다시말하면 동문 새 연료안을 통해 자기가 어떤 사람이며 자기가 얼마나 결백한가 하는 그것만을 증명하려고 할뿐이요. 자― 봐라! 난 이런 사람이다! 바로 이걸 시위하지 못해 안달아할뿐이란 말이요!》

진호는 고개를 들었으나 무섭게 번뜩이는 비서의 두눈을 보고는 다시 시선을 떨구지 않을수 없었다.

《동무같은 사람은 남들이 상상할수 없는 정열을 발휘할 때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리해관계와 결부될 때뿐이요. 모든 일을 자기에 대한 리해에 얽매기때문에 그 정열에 편파가 있을수밖에 없단 말이요. 더우기 참된 목적은 승리하기마련이라는 이 하나의 생각에만 몰두할뿐 승리를 위해선 복잡한 생활속에서 그 목적을 신념으로 고수하고 그것을 자기의 의지와 노력으로 관철해나가는것이 더 어려운 일이라는걸 모르고있단 말이요. 말하자면 참된 지향은 시련을 이겨내는 투쟁을 통해서만 증명된다는것을 모른단 말이요. 알아두오만 동무같은 그런 행동은 한갖 개인영웅주의자의 유치한 공명에 지나지 않소. 자길 수난자로 여기는 패배자의 너절한 추태에 불과하단 말이요!》

생전 처음 듣는 말이였다.

도저히 접수할수도 없는 말이였다.

(내가 공명주의자라니? 자기 리해관계밖에 생각하지 않다니?)

조금도 납득되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 말에 가슴을 찌르는 무엇이 있다는것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고, 그러면 그럴수록 마음속으로는 이상하게도 여태껏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드센 격랑을 받아안은것같았다. 그는 그것이 무엇때문인지는 알지 못하면서도 그 새로운것에 커다란 충격을 느끼게 되는것이였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어제 제철소당위원회확대회의가 있었소. 그 회의에서 또 새 연료안에 대한 문제가 론의됐소. 수령님께서 중유를 해결해주셨으면 더 많은 증산으로 은덕에 보답하도록 대중들을 동원하는것이 당일군으로서 본분이지 파악도 없는 기술안을 붙들고 생산에 지장을 주는것이 옳은가고 들이대더군. 난 그 비판을 다 받아들였소. 모든 잘못이 내한테 있고 책임도 응당 내가 져야 한다고 말이요. 그렇지만 한가지만은 리해해달라고 했는데 그것은 수령님께서 해결해주신 중유로 더 많은 깡을 생산하는것도 필요하지만 내 생각에는 중유가 아니라 우리의 연료로 깡을 생산하는것이 보다 중요한 일이며 바로 이것을 수령님께서 더 바라시고계시리라는걸 믿는다고 했소. 때문에 새 연료안을 취소시킬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시험하게 해달라는것을 제기했단 말이요. 바로 동무를 믿고! 다른 사람은 못해도 동무만은 해내리라는것을 믿고 말이요. 그런데 가겠다? …

사실 난 우리의 연료를 기다리고계실, 우리의 연료로 쇠물을 끓인다는 보고를 애타게 기다리고계실 수령님의 영상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저려 잠을 이룰수가 없었소. 그런데 동문 자기 체면, 자기 자존심, 자기 명예밖에 안중에 없거던. 정말 동무야말로 한푼의 량심도 없는 사람이요.》

진호는 호되게 얻어맞은것처럼 눈앞이 아찔했다.

한푼의 량심도 없다는 말이 며칠전에 하던 로장의 말과 합쳐지면서 예리한 비수가 되여 페부를 찌르는것이였다.

《가겠으면 가오. 그러나 이번엔 사람들의 조소나 힐난이 아니라 수령님의 기대를 저버린 배신자라는걸 똑똑히 알고나 가오. 그것도 두렵지 않거든 가란 말이요.》

더는 마주하기도 싫다는듯 창문쪽으로 돌아서는 비서의 모습을 진호는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퇴근시간이 지난지도 오랬지만 진호는 공정기사실에 앉아 낮에 하던 비서의 말을 곰곰히 곱씹어보고있었다.

비서의 말은 그의 마음속에 줄곧 전기의 불꽃과도 같은 작용을 일으키며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제까지 무기력했던 모든 생각들을 일제히 변경시키는가 하면 하나의 옹근 덩어리로 뭉쳐놓는것이였다.

모르긴 해도 그는 지금까지 자기의 온 생명을 틀어쥐고있던 머리속의 중요한 나사못이 풀어져있었다는것을, 바로 그것을 비서가 예리하게 지적했다는것을 깨닫지 않을수 없었다.

수난자―그래 내가 과연 자신을 희생만 강요당하는 수난자로 여기지 않았단 말인가! 자기보다 불우한 사람이 없다고 여기면서 울분에 잠겨 사소한 일에도 저돌적인 흥분을 나타내지 않았단 말인가! 마치 남다른 목적을 위해 시련에 찬 길만 걸어야 하는 억울한 희생자처럼 여기지 않았단 말인가!

개인영웅주의자―정녕 내 마음속에 자기에 대한, 자기 체면과 명예에 대한 생각밖에 뭐가 더 있었단 말인가! 수령님께서 바라시는 일이라는 생각, 그 숭고한 목적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있었는가! 오직 자기의 서푼어치 량심을 증명해보이려는 그 일념, 그것을 통해 자기를 비난하던 사람들에게 보란듯이 복수해보일 그 일념밖에 뭐가 또 있었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그런 비렬한 감정을 기술안을 위한 정열로, 남다른 헌신으로 자부해오지 않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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