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 회)
제 6 장
정 련 기
27
(2)
진호는 로장과 아버지사이에 마치 그 어떤 보이지 않는 뉴대가 형성돼있는것같았는데 그것이 모르긴 해도 계급적바탕에 깊숙이 뿌리박은 인간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그런 동질적인 감정이 아닌가싶었다.
한데 무엇때문인지 로장은 요즘 수명이 지난 로를 그냥 유지하고있는것으로 하여 사람들의 말밥에 오르고있었다. 흔히 수명이 차기 전부터 로를 수리해달라는것이 로장들의 일반적인 요구인데 무슨 변덕인지 계획을 이미 수행한데다 보수날자가 지났는데도 한사코 가동을 고집하는것이였다.
《흠! 이젠 도급에 눈이 어두웠구려. 골고루 노나먹어야지 혼자 배부르면 되우?》
이런 시비도 없지 않았으나 그는 끄떡도 안했다.
실상 따져보면 로가 낡으면 그만치 잔손질이 많아질뿐더러 제강시간도 턱없이 길어지기때문에 도급이래야 몇푼 붙지도 않았다. 그래서 용해공들도 속으로는 달갑잖아했으나 그런 내색을 하면 어떤 벼락이 떨어질지 모르는터여서 벙어리 랭가슴앓듯 속으로만 끙끙거렸다.
《아바이도 절 무척 노엽게 생각하시지요?》
큰길에 나선 진호는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가늠할수 없는 로장의 덤덤한 표정을 지켜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왜?》
《자기 기술안을 위해 투사기를 파괴했지, 로를 마사먹었지, 거기다가 비서동지까지 피해를 입게 했으니 말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로장의 모습에서 그가 이미부터 자기의 속심을 짐작하고있었을뿐 아니라 바로 그래서 이런 기회를 만들었다는것을 깨달을수 있었다.
《나도 자네 심정을 모르는건 아닐세. 고민이야 있겠지.》
달빛에 어려 환영같이 어른거리는 나무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우택은 탄식조로 중얼거렸다.
《왜 가슴이 아프지 않겠나.》
그의 다심한 목소리에 진호는 어쩐지 목이 메여오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이룩하려던것에 비해 너무나도 가혹한 결과만 차례지기때문인지 아니면 그 결과가 이젠 더는 어떤 희망조차 품게 하지 않기때문인지.
오직 하나의 충동, 자기는 결백하며 때문에 언제든 꼭 그것이 증명될 날이 있으리라는 그 하나의 신심으로 일해왔지만 증명되기는 고사하고 도리여 점점 더 파렴치한 인간으로만 인정되는것이 아닌가! 내가 과연 그렇게도 비루하고 무뢰한 인간이란 말인가! 솟구쳐오르는 격정을 삼키며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바이, 전 요즘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누구나 살아가느라면 원하든 원치 않든간에 지켜야 할 도덕적의무가 있다고 말입니다. 아무리 량심이 없는 인간이라 해도 그 의무의 최소의 량은 지켜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게 바로 사람의 도리라구요.》
《도리?》
우택은 마치 진호를 처음보는 사람이기라도 한것처럼 찬찬히 바라보았다.
《도리라… 자넨 지금 자기 기술안으로 해서 다른 사람들을 고생시키기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것같은데 내 생각엔 옳은 처사가 아닌것같네.》
이때 앞에서 자전거를 타고오던 사람이 속도를 늦추며 로장에게 자기네 로가 지금 무슨 작업을 하더냐고 묻는 바람에 로장은 그쪽을 보지 않을수 없었다. 용해공이라면 누구나 출근할 땐 자기 로의 공정을 묻는것이 상례로 되여있었다.
《한창 쫄이구있네.》
《아니, 벌써요? 그럼 올라가자마자 또 한물 뽑아야겠군! 좋―다! 넨―장!》
대뜸 엉치를 하늘로 추켜세운 그는 갑자기 자전거선수라도 된것처럼 허리를 새우처럼 꼬부리고 신명나게 페달을 밟아댔다.
《어쨌든 자네가 생각하는건 도리가 아니야! 뭐라고 할가? 눈치? 그래, 눈치지!》
《눈치요?》
《암, 눈치구말구, 사람들이 자길 어떻게 볼가 하는 눈치!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행동하고 저런 경우에는 저렇게 행동해야겠다는 눈치란 말일세.》
아버지가 하던 말이 회상됐다. 남들이 자길 보고 뭐라겠는가고 하자 아버지는 그런 눈치는 볼 필요가 없다고, 행동으로 증명하라고 했었다. 그런데 그 행동의 결과 오늘은 또 이런 처지에 빠지지 않을수 없게 되였는데 로장은 또다시 눈치를 본다고 하지 않는가!
《그럼 저의 립장에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그래도 계속 자기 주장을 고집해야 한다는겁니까? 저도 첨엔 그런 결심을 했습니다. 의심도 받고 손가락질도 받았지만 눈을 꾹 감고 일에만 달라붙었지요. 그걸 실현하는것이 자기를 증명해보이는거다 하고 말입니다. 참된 량심은 어느때든 승리하기마련이다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승리가 어데 있습니까. 어디 있나 말입니다.》
또 한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수고했다고 인사를 했으나 우택은 이번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서 눈치를 봐서야 안되지. 사람이 그렇게 되기 시작하면 불구가 되고마는 법이네. 왜냐하면 마음의 주추를 잃어버리니까 결국 허수아비가 되고말지. 남의 말을 듣고 자기를 가늠할수밖에 없게 된단 말일세.》
진호는 로장의 말을 다는 리해하기 어려웠으나 그가 말하는것과 자기가 생각하는것의 차이만은 깨닫지 않을수 없었다. 자기가 생각하는것은 한갖 평범하고 범속한 범주에 속하는것이라면 로장이 말하는것은 모르긴 해도 그보다 훨씬 숭고한 뜻이 깃들어있는것같았다.
《그 주추란 뭐겠나? 그건 바로 우리
진호는 어떤 새로운 충격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자기가 여태껏 바라왔지만 이룩할수 없었던것, 그래서 포기하려는것을 로장이 부인하고있다는 사실은 어쩐지 반발을 촉발케 했다.
(과연 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런데 어떻습니까? 누가 그걸 리해해줍니까? 도와주기나 하나 말입니다. 도리여 비웃고 손가락질 하다못해 이젠… 자― 이런데도 여기에 무슨 량심이 필요합니까. 여기에 무슨 성실한 마음이 필요하나말입니다.》
걷잡을수 없는 흥분과 어떤 자학적인 감정으로 하여 눈앞에 안개가 서리였다.
《이 사람아! 진리가 명백한것이긴 하지만 즉시에 나타나지 않을 때도 있는 법이 아닌가! 4년이 아니라 일생이 걸릴수도 있지. 아니, 일생이 걸려서도 못할수도 있지. 한데 문제는 뭔가? 몇년이 걸리던 그 진리가 확증된 다음에 행동한다는건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걸세. 진리가 진리로 되기 전에 느껴야 할뿐 아니라 그렇게 행동까지 하는게 보람이 있지. 사람은 바로 그런 재미에 사는게 아니겠나.》
《? !》
《실은 나도 그 재미를 한번 볼가 해서 수명이 찬 로를 그냥 유지하고있는걸세. 자네의 새 연료를 취입해볼가 해서 말이네.》
진호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로장의 말에 대한 움직일수 없는 힘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 말을 더욱 받아들이게 되지 않았다.
《아무리 아바이가 그렇게 생각하신다 해도 누가 알아줄줄 아십니까? 그런 마음을 지지해줄줄 아나 말입니다. 보십시오! 지금도 아바인 그것으로 해서 시비를 듣고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말밥에 오르고있지 않나 말입니다.》
《그건 나도 아네. 그렇지만 난 자네처럼 눈치를 보진 않아! 결심을 달리 하지도 않고!》
어딘가 어둠에 휩싸인 한곳을 응시하며 걷고있는 로장의 모습이 진호에겐 전혀 딴사람처럼 여겨지는것이였다.
《물론 사고심의도 있고 책임추궁도 있겠지. 그렇다고 량심이야 저버릴수 없지 않나. 안그런가?》
《전
진호는 자기의 목소리가 어느덧 항변이라기보다 이미의 타성에서 오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고 그럴수록 어떤 격정으로 하여 가슴이 떨리였다.
한마디로 말해 로장이 말하는 량심이란 사람이 사람다울수 있는 근본조건, 즉 그 사랑을 지탱케 해줄뿐만 아니라 그로 하여금 새로운 인간으로 갱생케 해주는 힘, 그래서 사람이 죽을 때까지도 변함없이 지켜야 할 마음의 기둥이라는것이 아닌가!
사람은 어떤 얘기를 통해 자기가 깨닫지 못했던 힘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것을 새롭게 느껴서가 아니라 그 힘이 자기한테 있다는걸
깨우쳐주기때문인것이다. 그가 자기에게 새로운것을 주입시켜서가 아니라
진호는 로장에 대해 바로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로장의 인격이 암암리에 주는 영향력이 바로 그런 능동적인 힘을 자기한테 불러일으키는데만 있는것이 아니라 어떤 충고나 책망까지도 마음속에서 새로운 의욕을 더욱 강하게 불어넣어주는 그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누가 옳은가 어디 오늘 밤새껏 론쟁해보세!》
단단히 벼르는것같기도 하고 빙그레 웃는것같기도 한 로장을 바라보던 진호는 갑자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것처럼 비칠거렸다. 얼른 진호를 부축한 우택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아직은 길이 험하네. 그렇지만 저 굽인돌이를 지나면 한결 낫지, 포장도로니까.》
그러면서 로장은 진호의 어깨를 철썩 갈겼다.
로장네 집은 소박하고 평범하면서도 독특한 친근미가 넘쳐흐르고있었다. 그것은 어느 집에서나 일부러 흉내낸다고 될 성질의것이 아니며 따라서 흔히 볼수 있는것도 아니였다. 어린애들이 많은 집, 모든것이 흩어져있으면서도 루추한감을 주지 않는 집, 손님이라 해도 격식을 차릴줄 모르는 집, 그런 집이 바로 로장네 집이였다.
현관에 들어서던 우택은 무슨 기미를 느꼈는지 갑자기 진호를 돌아보며 조용하라고 손짓했다. 가만히 들여다보느라니 건너방에서 로장의 두 손자, 열둬살짜리와 일곱살쯤 되여보이는 놈이 된소리를 지르며 맞붙어싸우고있었다.
찰싹찰싹 따귀를 갈기는 소리가 나더니 두놈은 권투선수들처럼 방어태세를 취하고 상대방에게 일격을 가할 기회를 노리고있었다. 그러다가 큰놈이 동생을 문밖으로 홱 밀쳐버리고는 회심의 미소를 띠우며 문이 열리지 않게 걸상으로 막아놓았다.
《늘 이런 판일세.》
미간을 찌프리긴 했으나 웃방을 흘끔 바라보는 품이 무슨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지 않으려나 하고 기다리는 눈치였다.
밖에서 작은 놈이 방문을 두드렸지만 큰놈은 태연하게 앉아서 가위로 종이를 오리기 시작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멎더니 이번에는 악을 쓰며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문을 열어! 열지 않겠어?》
또다시 주먹으로 힘껏 두드리고는 방안의 반응을 기다리는듯 잠잠했다. 그래도 대꾸를 안하자 곧 되알진 소리가 튀여나왔다.
《문 열어라. 요 짱구새끼야.》
진호는 웃음이 터져나오는것을 참을수 없었다. 짱구란 말을 듣고보니 정말 방안에 있는 큰놈의 머리가 앞뒤로 삐져나왔을뿐 아니라 하관이 길고 뾰족했기때문이였다.
한참동안 잠잠하더니 이번에는 열쇠구멍으로 간사스런 목소리가 노래소리처럼 새여들어왔다.
《짱구, 짱구, 길짱구―》
그 소리에 큰놈은 가위를 방바닥에 내던지더니 문앞에 세워놓은 걸상을 치우고 힝하니 밖으로 달려나갔다. 복도에서 뺨치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작은놈은 도망을 치며 온 집안이 떠나갈듯이 비명을 올렸다. 그러다가 현관에 서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하자 대번에 그 품에 콱 안겨들었다.
《할아버지, 짱구 봐요. 막 때려요.》
《그래? 어디 요 짱구놈 오기만 해라. 혼쌀낼라.》
보매 로장은 언제나 작은놈 편인 모양이였다. 동생이 할아버지한테 안긴것을 보자 큰놈은 더 달려들지 못하고 주밋거리다가 옆에 서있는 진호를 보고는 얼른 허리를 굽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