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 회)
제 5 장
할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
24
정아는 며칠째 잠을 이룰수 없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입원하고있는 진호를 찾아가려고 했던 결심을 오늘도 그는 지킬수가 없었던것이다.
그날 병원앞에서 태수를 만나 그로부터 진호가 새 연료안을 위해 얼마나 고심해왔는가를 들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고개를 저었었다. 고생해 만들어놓은 자기의 투사기가 파괴된데 대한 아쉬움보다 친구의 지향을 더 소중히 여기는 태수의 우애에 자못 감심은 되였으나 그가 진호에 대해 지내 과찬하는것으로만 여겼었다.
《언젠가는 진호동무가 동무의 투사기를 두둔하더니 오늘은 동무가 그의 새 연료안을 비호하는군요.》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바로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를 제대로 리해할게 뭐요. 투사기에 바친 내 노력은 그에 비교할수도 없소. 비교하기조차 부끄럽단 말이요. 자, 들어보오.》
정아는 장시간 그에게서 진호에 대한 얘기를 들었었다.
실로 놀라움을 금할수 없는 사연들이였다. 대학 전기간을 그 하나의 연구에만 바친 일이며 시험을 위해 방학을 매번 공장에서 보냈다는 사실 그리고 그처럼 부에서 가슴아픈 의심을 받고 제철소에 내려왔건만 조금도 그런 티가 없이 여전히 그 기술안에 열중하고있는것이 아닌가!
(도대체 어떤 기술안이기에 그토록 몰두하는걸가?)
이튿날 정아는 진호의 시험일지며 분석자료들을 봐야겠다는 생각에 그의 서류함을 열어보았으나 거기에는 여러가지 기술서적들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험일지는 며칠전에 초급당비서가 가지고갔다는것이였다. 그는 비서를 찾아갔다.
《마침이요, 그렇지 않아도 동무한테 꼭 보이려던 참이였는데.》
이러며 빙그레 웃기까지 하는 비서였다.
《저한테요? 어째섭니까?》
《보오! 보면 다 알게 되오. 그런데 도중에서 덮어버리든가, 집어던지지 말고 마지막까지 봐야 하오. 알겠소? 그리고 다 본 다음에는 나한테 와서 꼭 의견을 말해야 하고.》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다.
세권이나 되는 책을 하나로 묶은 일지에는 4년전부터 진행해온 시험들에 대한 기록들, 언제 얼마만한 연료를 어떻게 투입했으며 그때의 배합비가 얼마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가가 상세히 밝혀져있었다. 누구에게나 있는 평범한 일지라고 보기에는 보풀이 인 두툼한 책과 거기에 적혀있는 수자들이 너무도 많은것을 암시하고있었다. 온통 수자들과 부호들이여서 구체적인 의미를 해석하기는 어려웠으나 도간도간 여백에 써놓은 글들만은 비슷이 짐작이 갔다.
《오너라! 파도여! 시련의 폭풍이여!》하고 시구절처럼 써놓은것이 있는가 하면 《나는 알았네 1:0》하고 장난처럼 갈겨쓴것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만세― 발화 성공!》 하고는 그옆에 축포를 터뜨려놓기도 했고 《총 ×천 ×백원》이라는 엄청난 돈액수가 적혀있기도 했다.
무심코 보았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그였으나 태수의 말을 듣고난 뒤여서 그 돈이 모름지기 실패로 인한 손해액이라는것을 짐작할수 있었다.
일지의 갈피마다에는 어째선지 현옥이라는 이름이 자주 나타나군 했다.
(누굴가, 애인일가?)
그에 대해서는 태수한테서 한마디도 듣지 못했던것이다.
그가 제철소에 온 이후의 페지들을 들춰보던 정아는 문득 《소극적이다―중유절약안!》하고 씌여있는 곳에 시선을 멈추었는데 거기에는 그때의 비분강개한 심정을 표시한듯 감탄부호가 세개씩이나 찍혀있었다.
(현실에 피동적이라는거겠지?)
중유절약안을 놓고 론쟁하던 때를 회상하며 다음장을 넘긴 그는 두드러지게 새겨진 자기의 이름을 보고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더 아연한것은 그옆에 《왜 맹목적인 순종》 하고 기중기갈구리같은 의문부호를 커다랗게 그려놓은것이였다.
락서로밖에 여기지 않을수 없는 글이였으나 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르면서 화까지 치밀어올랐던것이다. 숨기려고 애쓰던것을 로출당했을 때와 같은 수치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어째서 맹목적으로 순종하느냐는 그 물음이 마치 책임기사에 대한 련정때문이 아니냐고 반문하는것만 같았기때문이였다.
《그래요! 그를 사랑해요. 어쨌단 말이예요. 그게 동무와 무슨 상관이예요. 그렇다고 그런 감정을 그의 기술안에 대한 공감과 일치시키진 말아요. 전 이미부터 그 기술안에 매혹돼왔고 지금도 그래요. 그래 이게 나빠요?》
눈앞에 진호가 있기라도 한것처럼 그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그 다음장에 있는 글을 보고는 더 아연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할수 있는것만 하려는 한심한 처녀―윤정아》
《?》
바로 이것을 보고 비서가 자기가 꼭 봐야 한다고 했다는것을 짐작하자 분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한심하긴 뭐가 한심하다는거야! 그럼 자기처럼 아무 담보도 없는걸 고집해야 할가? 타산과 전망도 없는 그런 기술안이 옳다는건가? 천만에! 그런건 내가 타협할수 없어! 절대로! 만약 다시한번 중유절약안을 헐뜯어보지?)
이렇게 반박하던 그는 또 한장을 번진 순간 또다시 굳어지고말았다. 거기에는 자기의 불만에 대한 대답이 명백히 적혀있었기때문이였다.
《우리의 과제― 그것은 할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데 있다!》
(할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
그는 몇번이고 반복해 읽어보았다. 처음 듣는 말은 아니였으나 뭔가 새로운것을 느끼게 되면서 태수가 하던 말이 다시금 상기됐다.
《하긴 동무가 어떻게 그를 제대로 리해하겠소. 친구라고는 하지만 나 역시 그의 지향을 리해하자면 멀었단 말이요.》
(할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
집에 돌아와서도, 지어는 잠자리에 누워서까지도 자꾸만 그 글줄이 눈앞에 아물거렸다.
다음날 그는 또다시 진호의 시험일지를 펼쳤다. 이번에는 어떻게든 확고히 반박할수 있는 실질적인 근거를 쥐여야겠다고 결심하면서 수자며 부호들에 포함된 의미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무진애를 쓰며 그는 한장한장을 번져나갔다.
한데 그 과정에 그는 놀랍게도 자기의 결심과는 반대되는 사실, 즉 진호가 무엇을 위해 어떤것을 이룩하려고 하는가 하는것을 어렴풋이나마 깨닫지 않을수 없었다. 새로운 첨가제의 도입, 새 연료의 부족점과 취입과정에 나타나는 약점들을 첨가제로 극복하려는것이 그의 기술안의 핵으로 되여있었다. 근 4년을 이것 하나에 바쳐왔고 지금도 그것을 위해 모든것을 깡그리 쏟아붓고있었다. 이러저러한 성과는 둘째치고 우선 무엇이 그를 이런 새롭고 대담한 길에 들어서게 했는지, 또 어째서 부디 이런 어려운것을 택하게 됐는지 그리고 이런 스스로의 고행을 바라는 그의 심중의 밑바닥에 어떤것이 고여있는지 새삼스레 따져보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면서 은연중 그의 기술안과 자기가 맡은 중유절약안을 대조해보게 되였다.
확실히 같은 연료에 대한 기술안이긴 하지만 서로 달랐다. 아니, 판이했다. 한두가지의 구조나 요소의 차이가 아니라 본질적인 차이였다. 한쪽은 할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하려는것이지만 다른 한쪽은 하기는 어려워도 기어이 그렇게 돼야만 하기에 하려는것이였다.
(그가 그처럼 이것을 주장하는것은 우리의 현실이 바라기때문인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그는 론쟁에서 일정한 론거를 가지고 증명해나가던 자기가 론쟁도중에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의도하는가를 알게 되자 자기
사람이란 흔히 우연한 기회에도 귀중한 진리를 체득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자기에 대한 요구와 참다운 자존심을 가진 사람에게만 한하는것이다.
그런 사람은 그 진리를 서슴없이 자기것으로 만들뿐 아니라 보다 새로운 경지로
여태껏 아득히 멀고 불가능한것이라고만 여겨온 진호의 기술안이 점점 뚜렷한 형체로 눈앞에 나타나면서 움직일수없이 가능한 사실로 여겨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럴수록 진호와 자기와의 차이, 새것을 창조하려는 사람과 순탄한 길로만 졸졸 따라가는 자기, 해야 할 일을 위해 자기를 바치는 그와 어떤 위험도 없기때문에 하려고 하는 자기와의 차이를 뚜렷이 감득케 했고 나아가서는 그를 자기가 그처럼 탐구와 열정의 우상으로 여겨오던 책임기사와도 대조시켰던것이다.
(분명 차이가 있어, 뭔가 뚜렷한 차이가.)
그처럼 해박한 지식으로 사업에 대한 특출한 재능을 소유하고있다고 생각해온 책임기사가 진호와 비교해볼 때 확실히 그의 지식과 열정이 훌륭하고 고상한 품성에서 발로되는것이라기보다 그 어떤 다른 목적에서 오는것, 그렇다고 성품이나 재능에서 오는 부족이 아니라 흔히 참다운것이라고 하는 그것의 부족, 오직 하나의 목적을 향해 매진하는 사람이 나타내는 그런 결함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싹텄던것이다.
물론 그로서도 기철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있을수 있는 약점이 어떤것이라는것을 모르진 않았다. 그것을 그는 부득이한 결함, 지어는 특출한 사람에게만 한하는 필수적인 부족점이라고까지 여겼던것이다. 그러나 지금 새롭게 깨닫게 된 그의 약점은 그런 부족점이나 기술적인 약점만이 아니라 서로의 지향의 차이, 심장의 열도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결함이 아닐수 없었다. 바로 이 점이 그를 괴롭히는것이였다.
자기가 가지고있지 못했던, 그렇기때문에 더욱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는 정신적천부로 말하면 한쪽은 너무도 풍부했고 다른 한편은 빈약했다. 그렇지만 감정은 특히 진호에 대한 이미부터의 곰살궂지 못한 타성은 그에게서 새로 받아안은 진리, 리성의 힘을 마냥 부인하면서 한사코 기철이를 옹호하라고 속삭이였으나 그때마다 그의 성격속에 숨어있는 완고하리만치 결곡한 기질이 그것을 허락치 않았다.
(안돼! 이것만은 숨길수도 없고 숨겨서도 안돼! 기철동무 역시 새 연료안이 어떤것이라는것을 알면 발벗고 나설거야. 그는 바로 그런 사람이니까. 가슴속에 차넘치는 그 열정이야 누구한테 비길수 있어!)
이제라도 그에게 중유절약안보다 새 연료안이 우월하다는 자기의 속심을 터놓아야 한다는 생각, 사랑하는만큼 그가 깨닫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솟구쳤으나 차마 행동에 옮길 용기까지는 나지 않았다. 그를 진정으로 위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과 또 그러다가는 혹시 그가 벼락같은 소리를 지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이 마음을 괴롭힐 때마다 그는 리성의 부르짖음이 야속해선지, 아니면 사랑의 감정이 원망스러워선지 저도 모르게 새여나오는 한숨을 호― 하고 내뿜었다.
그런 번뇌는 어쨌든 진호의 기술안에 대해 자기가 느낀바를 말하지 않을수가 없어 그는 비서를 찾아갔다. 그런데 비서는 도당에서 조직한 당일군들의 강습에 참가하기 위해 떠나고 없었다. 며칠후에야 돌아온다는것이였다.
(진호동물 찾아가자. 새 연료안에 대해 느낀걸 솔직하게 털어놓자! 그리고 알고싶은것들을 다 물어보자.)
그러나 병원앞 갈림길에서 그는 주저하지 않을수 없었다. 정작 그에게 해야 할 말이 여태까지 자기가 취해온 행동과는 너무도 상반된다는데도 있었지만 보다는 옆에 같이 퇴근하는 동무들, 특히 책임기사가 있었기때문에 더욱 그 용단을 내릴수 없었던것이다.
《호―》
그는 이불깃을 헤치고 다시금 한숨을 내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