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 회)

제 5 장

할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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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위는 벌써 어두웠다.

병원으로 갈 때까지는 물론 소독약냄새가 풍기는 복도에 들어서서 의사가 가르쳐준 호실을 찾을 때까지도 그는 진호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오히려 제편에서 불안스러워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아무런 결심도 가지지 못했지만 8이라는 호실번호가 눈에 띄자 그는 저로서도 리해할수 없으리만치 단호한 기세로 문을 열어제꼈다.

먼저 눈에 비친것은 량쪽벽에 붙여놓은 두개의 침대와 그사이에 있는 원탁이였다. 한쪽침대에 까딱않고 누워있던 환자, 팔이며 어깨며 머리에 온통 붕대를 동이고있는것으로 하여 움직이기가 몹시 거북한듯 겨우 이쪽으로 돌아눕는 환자를 본것은 그다음이였다.

《어―》

괴상한 소리를 지른 그가 일어나앉으려고 할 때에야 태수는 그를 알아보았다. 우묵히 패여져들어간 눈확, 삽날처럼 뾰족해진 턱, 한둘레나 작아져 가냘파보이기까지 하는 어깨… 과연 이 사람이 진호란 말인가? 대번에 가슴이 저려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흠! 꼴 좋군! 붕대를 칭칭 동인게 꼭 패잔병같군 그래!》

미리 준비한 말이 아니여서 퍼그나 수월하게 나갔으나 어쩐지 진호를 면바로 쳐다볼수가 없었다.

《…》

자기와 시선이 부딪치기 바쁘게 얼른 눈길을 아래로 내려깔며 송구해하는 진호를 보자 왜서인지 더 큰소리가 터지는것이였다.

《남의 투사기는 하늘로 날려치우고 셈평좋게 떡 드러누워있어?》

《…》

고개를 든 진호였으나 또다시 눈길을 피하는것을 본 태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가를 짐작하고는 얼른 뒤를 달았다.

《그러게 내 뭐라던가! 호케이선수가 불바다에 뛰여들면 폭발이 인다고 말이야. 그 주제에 뭘 해보겠다고…》

태수는 벌써 자기가 애초에 품었던 감정을 털어놓을수 없다는것을 알았다. 털어놓을수 없을뿐 아니라 이런 진호앞에 그것을 털어놓는다는것이 친구로서 너무도 부끄러운 일이라는것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용서해주게.》

《용서? 투사기를 콩가루로 만들어놓은 이제 와서 용서는 무슨 놈의 용서야!》

《하긴 용서조차 바랄수 없지. …》

목갈린 소리로 떠듬거리는 진호의 가긍한 정상에 태수는 대뜸 눈굽이 달아올랐다.

(제길! 이렇게도 고지식하다구야.)

자기한테서 어떤 란폭한 일격이 있기만을 기다리는듯한 그의 공손한 태도를 지켜보느라니 그에게 품었던 자기의 감정이 더욱 수치스러웠다. 어쩌면 자기가 진호에게 그런 야비한 감정까지 품을수 있었던지 도저히 리해되지 않았다. 그럴수록 이상하게도 말은 더 가혹하게만 나가는것이였다.

《하여간 동문 량심이 없는 사람이야. 파괴된 투사기를 보았을 때 난 미칠것만 같았어. 동무가 미리 입원했으니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내한테서 더 심한 부상을 당했을걸.》

그는 자기가 품었던 불만을 숨기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보임으로써 그 불만이 덜하다는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할 말이 없네. 사실 투사기로 취입할 때까지도 난 그게 동무의 고심어린 창조물이라는것을 생각하지 못했어. 심사를 애타게 기다리고있을 동무의 심정에 대해선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단 말일세. 동무한테서 그런 부탁까지 받고도 말이네. 그저 내 기술안에만 혈안이 돼있었지. 글쎄 이런 내가 무슨…》

너무도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로 하여 태수는 더 과장된 태도를 취할수가 없었다.

《그래도 난 여태까지 자신을 성실한 인간으로 여겼었지, 그만하면 진실하다고 치부했고. 그러나 이제 와서야 내자신이 어떤 인간인가 하는걸 비로소 느끼게 됐네. 왜 남들이 나를 욕하며 질시하는가 하는것을 알게 됐고 또 그것이 백번 응당하다는것도 깨닫게 됐네. 사실 나같은 인간이 사람들의 조소를 받는거야 너무나도 마땅한 일이 아닌가.》

《그래 사고심의는 언제 한대?》

태수는 서둘러 진호의 말허리를 꺾어버렸다.

《글쎄…》

《이번 시험에서도 성과가 없나?》

《뚜렷한건 없네. 그렇지만 온도가 이전보다 20도나 올랐지. 보충연료의 덕분도 있겠지만 난 첨가제가 그만한 열량을 담보하는것으로 믿네. 그리고 또 하나는 이제껏 알지 못하던걸 새로 발견했는데 그건 연료의 지나친 취입이 오히려 열을 떨군다는걸세.》

《그건 어째선가?》

《그건 나도 아직 모르겠네. 이렇다할 근거가 없기때문에 남들은 웃을지 모르겠지만 난 어느 정도 신심을 얻었네. 확신을 얻었단 말일세, 비서동지도 리해해주고. 그렇지만 이제야 무슨 소용인가! 다 필요없어!》

진호는 갑자기 맥을 놓으며 침대모서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난 어떤 일이 있어도 새 연료를 완성하는걸 통해 자길 증명해보이려고 했지만 이젠 틀렸네. 어리석었지. 오히려 한쪼각의 량심도 없는 철면피한 인간이라는것이 낱낱이 드러났으니 말일세.》

태수는 그가 이미 받은 부당한 의심, 그것도 진정을 부인당한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필사의 노력을 다하다가 도리여 더 험한 구렁텅이에 빠져들었다는것을 통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이젠 거기에서 헤여나올 기력마저 잃고 절망상태에서 허우적거린다는것을 알았다.

이런 느낌은 불현듯 막다른 골목에 빠진 진호를 어떻게든 구원해야 하리라는 의협심과 함께 오직 그것은 자기에게 한하는 일이며 또 자기가 해야 한다는 충동으로 사품쳐오르게 했다.

(어째서 이처럼 고지식하고 진실한 진호가 그런 혐오의 대상으로 되여야 한단 말인가! 돕자! 도와야 한다. 이럴 때 돕는게 참다운 벗이렷다.)

그는 진호에 대한 이런 감정의 도약에 저로서도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기뻤다. 자신의 감정을 난생처음 자신의 의지에 복종시킨것으로 하여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직장에는 부탁해놓았네만 이제라도 꼭 다시 만들어주게.》

자기 생각에만 옴해있느라고 태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기술과에서도 승인했네. 이젠 공무직장에 도면만 넘겨주면 될거네. 최대한 빨리 제작해주겠다고 했으니까.》

그제야 태수는 진호가 투사기에 대해 말하고있다는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동무의 취입기자재로 내 투사기를 만들라는건가?》

《글쎄 그건 나를 위해서라잖나! 나한테도 약간의 량심쯤은 있다는걸 보이게 해달라는거야.》

그의 고뇌에 찬 모습과 애원이 담긴 목소리를 듣는 순간 태수는 불시에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고개를 들고 일어나 자기를 더 대담한 어떤 새롭고 신비로운 길로 이끄는것을 느꼈다.

《그렇게 해주겠지?》

의미심장한 눈길로 진호를 바라보던 태수는 갑자기 히쭉 웃었다.

《정 요구라면 할수 없지! 그렇게 하는수밖에! 아니, 꼭 그렇게 하겠네!》

그제야 그는 자기 내심에 이는 충동이 어떤것인가를 똑똑히 깨달을수 있었다.

(그래! 그 자재로 투사기가 아니라 그의 취입기부터 만들어놓자! 이제라도 그가 바라는것이 어떤것인가를, 무엇을 위해 그가 헌신하는가를 사람들이 알게 하자!)

이렇게 결심하자 그의 가슴은 형언할수 없는 기쁨으로 설레기 시작했다. 그까짓 고민이 뭐냐고, 우리는 젊은 사람들이 아니냐고, 우리의 번민은 새것을 위한 투쟁으로 환원시켜야 한다고 하던 은심이의 말이 상기됐다.

(암! 그렇고말고!)

그것은 분명 자기가 한 말이였으나 그 참된 의미는 오늘 은심이에게서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것이였다. 그렇다! 우리는 젊은이들이다. 그 어떤 시련도 고민도 난관도 절망도 무자비하게 짓밟고 일어서야 할 불타는 청춘들인것이다. 그까짓 사고가 뭐란 말인가! 내 투사기야 도면이 있으니까 아무때나 만들수 있지 않는가!

그는 자기의 이 새로운 결심을 진호가 눈치챌가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쪽으로 걸어갔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사실 태수는 입원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듣고싶던 말, 현옥이에 대한 말을 진호가 먼저 꺼내기를 기다리고있는것이였으나 그는 자기가 바로 그것을 기다리고있다는것을 빤히 짐작하면서도 말을 하지 않는다는것을 알았다. 그래서 더는 참기를 그만두고 그에게로 돌아섰다.

《현옥동무가 왔댔다면서?》

진호는 마주 쳐다보기만 했다.

《왔댔네.》

그러면서 그는 고개를 돌리고 한숨을 내쉬였다.

《그렇지만 그가 온건 진심으로 자기 잘못을 깨달아서나 어떤 결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 맘이 괴롭기때문에 내려왔을뿐이네. 아니, 날 설복하려고 왔었지. 차라리 난 그가 어떤 론거를 가지고 내 기술안을 부정해주기라도 했다면 그다지 맘이 쓰리진 않았을거네. 그러나 그는 나를 이젠 어떤 객기를 부리는 가련한 존재로밖에 여기지 않는단 말일세.》

《그래서 그시로 돌려보냈나?》

《어쨌든 우리사이의 간격이 어떤것이라는것을 난 이번에야 똑똑히 알게 됐네. 동문 언젠가 내가 지나치다고 했지만 실은 내가 지나친것이 아니라 따져보면 우리 두사람사이에 가로놓였던 심연이 그때 그 모습을 처음으로 드러냈던거야. 하지만 오늘은 리해의 샘이 영영 말라버린 그가 바로 그 메마른 모습을 다시 드러냈거던. 그땐 날 의심하던 그가 이제 와선 동정하지. 그저 불쌍하게 여길뿐이란 말이네. 그러나 그런 동정이 얼마나 나에 대한 모욕인가 하는건 모른단 말일세. 그래 어떻게 서로의 사이에서 가장 귀중하고도 선차적인 리해를 그따위 동정으로 메꿀수 있겠나 말일세.》

《리해?》

진호에게로 돌아선 태수는 곧 침대앞으로 다가섰다.

《그래 그가 아직 동물 제대로 리해하지 못하는건 사실이라고 하세. 동정으로만 대한다고 하잔 말이야. 그럼 대체 동문 그를 얼마나 리해하나? 그의 고통이 뭔지, 그 고통을 가시기 위해 그가 얼마나 모대기는지, 또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그의 마음속에 어떤것이 고여있는지 알기나 하나? 알려고나 했나 말일세.

동문 그가 자길 동정하고있다고 분해하지만 동무자신은 그를 동정이라도 해보았나? 상대는 연약한 처녀지만 그래도 동무야 사내가 아닌가! 내가 보건대 동문 확실히 자기가 정해놓은 어떤 기준에 상대가 이르길 바랄뿐이지 자긴 한번도 상대의 요구에 비춰보지 않거던. 무서운 독선주의자란 말이네.》

《?》

진호는 새삼스런 눈길로 태수를 바라보지 않을수 없었다. 덜퉁할뿐 아니라 아무 문제나 직선적인 감정 하나로 식별하기에 버릇된 그가 이런 말을 한다는것이 놀라와서였다.

자기가 알기엔 태수는 모든 생활이 그런것처럼 사랑이며 결혼도 특별한 요구를 내세우지 않지만 저절로 남다른 혜택이 차례지는 행운아였다. 그런데 자기의 경우에는 별로 높지도 않는 요구임에도 불구하고 그 요구를 실천하기 위해 모든것을 다 바치는데도 생활은 빈번히 자기를 배척하는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런 자기를 태수는 너무 까다로운 요구를 내대기때문이라고 했지만 진호는 오히려 태수가 남다른 팔자를 타고났기때문이라고 여기는것이였다.

그러나 지금 그가 한 말은 그런 사랑의 행운아가 한마디 한것이라고 듣기에는 스쳐버릴수 없는 어떤 뜻이 담겨져있는것같기도 했다.

《난 이렇게 생각하네. 동무가 결코 속으로는 그처럼 그에게 매정하게 대하고싶진 않았을거라고. 그런데 왜 그랬는가? 그건 이제 와서 그를 리해시킨다는것이 이제까지 고집하던 자기의 주장을 부정하는것으로 되는것같았으니까 그랬던거네. 안그런가?》

진호는 도리를 저었다. 그 말이 리해되지도 않았거니와 받아들일수도 없었던것이다. 그것은 사랑의 리치를 단순하게만 생각하는 태수가 구체적인 실정을 모르는데로부터 자기 가슴에 얼마나 깊은 상처가 있는가를 가늠하지 못한다는데도 있었지만 보다는 현옥이에 대한 자기 립장을 따져볼 때 어떤 잘못도 없다고 확신하게 되기때문이였다.

이때 환자복을 입은 뚱뚱한 중년의 사내가 주사를 맞고오는지 살집이 좋은 엉치를 비벼대며 방안에 들어섰다. 다른 한쪽침대의 주인인듯싶었다.

《그럼 난 가겠네. 아직 저녁도 못먹었어.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란 말일세.》

진호를 유쾌하게 만들어주고싶었던 태수는 얼른 그의 귀가에 입을 갖다대며 말했다.

《은심이가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있거던. 밥을 먹고 가라는걸 뿌리치고 일어섰더니 그럼 술이라도 한잔 하라는게 안야. 그래서… 알만한가? 하긴 총각이 이런 재미를 알게 뭔가!》

방문을 나서면서 그는 다시 오겠다고 부언해두었다.

하늘에는 어느덧 야무진 별들이 명멸하고있었다.

(아직 철부지라니까… 어쩌면 그렇게도 단순할가? 하긴 그래, 남달리 깨끗하기도 하지! 그건 그렇고, 어떤 일이 있어도 당장 취입기부터 만들어놓자! 어찌 취입기뿐이랴! 나도 이제부턴 그의 새 연료안에 같이 뛰여들자! 진정한 친구란 장래를 내다보는 눈이 같기때문에 친구라지 않는가!)

큰길에 나서서도 그는 줄곧 이 하나의 생각에만 젖어있었다. 어쩐지 저절로 걸음발이 빨라졌다.

《아이, 태수동무가 아니예요?》

웬 처녀가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희미한 가로등불이였지만 태수는 그가 누구라는것을 이내 알아보았다. 정아였다.

《언제 오셨어요?》

《낮차로, 방금 병원에 들렸다 오는 길이요.》

자기를 마주보는 그의 눈길에서 어떤 동정, 분명 《투사기가 파괴돼서 안됐군요.》 하는듯한 위로를 읽은 태수는 곧 정색을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참! 듣자니 정아동무가 진호의 새 연료안을 제일 반대한다는게 사실이요?》

《?》

뜻하지 않던 물음이였던지 정아는 어리둥절해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의 기술안을 그렇게 일축하오? 그가 그걸 위해 얼마나 많은걸 바쳤는지 알기나 하오? 얼마나 애태우고있는가 하는걸 알기나 하는가 말이요. 저기 좀 앉기요. 동무한테 할 말이 있소.》

《?》

태수를 마주보는 정아의 두눈에는 더욱 짙은 의혹이 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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