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 회)

제 5 장

할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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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장지에서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황홀한 기대의 상상봉으로 날아오르던 태수였으나 직장에 들려 집으로 향하는 지금에 와서는 정반대의 감정, 누를길 없는 절망으로 하여 가슴이 터지는것같았다.

숱한 탐색과 실패와 수정을 거듭한 끝에 자기의 완성된 특성을 가지고 뚜렷이 살아났던 매개의 선들, 그처럼 많은 고통과 기쁨을 가져다준 요소들, 또 그처럼 힘들게 이룩하였던 그 모든 조화의 률조들이 일조에 거품처럼 날아나고만것이 아닌가!

생각할수록 울분이 솟구쳐올라 견딜수 없었다. 그러나 입원하고있는 진호를 생각하면 자기가 그런 괴로움만 터뜨려놓을수 없다는 구속감에 사로잡히지 않을수 없었는데 이것이 그에게는 더 고통스러웠다.

워낙 사소한 감정도 숨기지 못할뿐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털어놓는것만이 진실한것이라고만 믿어마지않는 그로서는 이런 경우를 당해보지도 못했거니와 당한다 해도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가늠조차 할수 없었다. 아무리 참아야 한다고 속다짐하는 일도 감정은 한사코 그 계선을 넘어서는것이였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며 외진 오솔길로 접어든 그는 집쪽에서 마주 걸어오는 은심이, 분명 직장에 전화를 걸어 자기가 돌아왔다는것을 알고 아까부터 집앞에 나와 기다리고있었을 안해에게조차 말 한마디 던질 기분이 없었다.

《수고하셨어요.》

《…》

《가셨던 일은 잘됐어요?》

《…》

자기를 대하는 조심스런 거동에서 태수는 은심이가 자기의 기분상태를 이미 간파하고있다는것을 알았다.

아닌게아니라 은심이는 다 짐작하고있었다.

마당에 들어서서도 그는 괴로와하는 남편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좋을지 몰라 한동안 서성거리기만 했다. 그러다가 자기의 그런 매련없는 행동이 오히려 남편의 기분을 더 잡쳐놓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하여 조용히 부엌으로 들어섰다.

《여보!》

더없이 무뚝뚝하게 들리는 남편의 목소리에 은심은 돌아서지 않을수 없었다.

《녜?》

《술 없소?》

《술요?》

창황중에도 은심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스쳤는데 그것은 걸핏하면 과격하게 나오기 잘하는 남편의 버릇을 감촉했기때문이였다.

《있어요. 왜요?》

《가져오오.》

《지금요? 지금은 안돼요!》

은심이를 치떠보는 태수의 눈길은 남편으로서의 권위를 행사할 때마다 나타내군 하는 그런 위엄정도가 아니라 어찌보면 무섭기까지 했다. 그래서 은심이는 얼른 부언하지 않을수 없었다.

《드리긴 하겠어요. 그렇지만 병원에 갔다오신 다음에요.》

《병원에? 병원엔 내가 뭣하러 간단 말이요. 누가 뭐 다리라도 부러졌다오?》

늘 자기의 속심을 정확히 알아맞추군 하는 은심이가 여느땐 더없이 사랑스러웠으나 지금은 도리여 얄밉기만 했다.

《아무래도 가실걸요. 갔다오시지 않고는 한잠도 주무시지 못할텐데요.》

(챠― 요런!)

《그래 내가 그 친구한테 가서 무슨 말을 하라는거요. 투사기를 박살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라는거요?》

은심은 벌써 알고도 남는 남편의 성격 즉 참을수 없이 괴로운 나머지 가슴속의 오뇌를 지우기 위해 하등 상관도 없는 문제를 들고 트집하는 그의 내심의 요구를 짐작했다. 일단 불만을 품기만 하면 자기의 불만에 대하여 누구든 남에게 그중에서도 제일 가까운 사람에게 터놓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남편이였다.

《그래 내가 그 친구한테 간다고 합시다. 술을 먹으면 왜 안된다는거요? 주정을 할가봐?》

《아니요.》

《그럼?》

《술을 마시고 하는 말은 다 진정이 아니니까요.》

살며시 치떠보는 은심은 조심스러워하긴 하면서도 웃을수도 또 뾰로통해질수도 있는 표정, 이를테면 남편의 기색에 따라 자기의 태도를 결정지으려는 그런 눈매로 쳐다보았다.

《헛참! 모르면 가만있기나 하오. 실은 술을 먹고 하는 소리가 진짠데 사람들이 그걸 믿지 않는게 탈이란 말이요.》

《이봐요.》

남편의 기색이 다소 누그러진것으로 느낀 은심은 한걸음 다가서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알아요. 당신의 맘이 어떠리라는걸 제가 왜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보다 걱정스러운건 화만 내면 당신은 모든걸 다 잊어버리는거지요. 생각해봐요. 당신이 그러면 진호동무는 얼마나 괴롭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많은 사람들이 투사기를 파괴한것때문에 그를 얼마나 욕하게요. 그런데 당신까지 그러면… 당신도 말했지만 그는 이미 부당한 의심으로 하여 마음에 상처를 입고있는 사람이 아니예요.》

《그러니까 동문 내 투사기가 파괴된것보다 그에 대한 동정이 더하다는거요?》

《동무》라는 말에 은심은 또다시 어리둥절해지고말았다. 확실히 여느때와 다른 기분상태에 있는 남편이였다.

《혹시 동무도 투사기에 결함이 나타났기때문에 파괴된걸 대수롭지 않는걸로 여기는게 아니요? 진호도 바로 그래서 그걸 취입기로 썼겠지. 그렇지만 그런 부족점은 한주일이면 얼마든지 보충할수 있는거란말이요!》

진호에 대한 남편의 불만이 바로 자기가 그를 옹호해나서기때문에 더한것이였으나 은심은 이것을 눈치채지 못하고있었다. 다만 그로선 자기의 심정을 리해하려고 하지 않는 남편이 야속스러울따름이였다.

《어째서 당신은 자꾸 자기와 저를 따로 구분하는거예요. 자기가 괴로울 땐 저 역시 그만치 괴롭다는걸 왜 리해하지 못해요? 그리고 어떻게 해야 그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덜가 하고 저도 생각한다는걸 왜 모르세요.》

말끝을 흐리며 은심은 얼른 뒤로 돌아섰다.

그는 남편을 다루는데 있어서 제일 유력하다고 생각하는 무기 즉 정도이상의 감정으로 뾰로통해지는 무기를 사용하려고 했다. 그럴 때면 천성이 곧은 남편이 화는 내면서도 내심으론 어느 정도 누그러지기때문이였다. 아니나다를가 남편의 목소리는 한결 낮아졌다.

《이것 보오! 물론 내가 그를 위로해야 할 립장에 있기야 하지. 그렇지만 위로한다고 해서 어떻게 속에도 없는 소리를 한단 말이요. 난 그런 거짓을 꾸밀줄도 모르거니와 꾸미기도 싫소. 어쨌든 난 내가 품고있는 불만을 털어놓지 않을수 없소. 그러지 않고는 견딜수가 없단 말이요.》

《그래요. 바루 그거지요. 당신이야 원래 어떤 감정도 숨겨선 안된다고 생각하니까요.》

자기의 무기가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는것을 느낀 은심은 확신에 넘친 어조로 말했다.

《그렇지만 속에 있는걸 다 털어놓는게 진실한걸가요? 그게 솔직한걸가요? 그건 마치도 열을 내며 앓고있는 환자가 시원한 음료가 우선은 구미를 돋군다고 해서 마시는거나 같은것이라고 봐요. 그것이 당장엔 시원하겠지만 병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그것보다 약을, 내키지 않을수 있어도 쓴 약물을 택해야 하는것처럼 경우에 따라서는 하고싶은 말도 참는게 진실이 아닐가요? 상대를 위해서도 그렇고 자기를 위해서도 말이예요.

전 아직도 잊을수 없어요, 당신이 하던 말을. 그까짓 고민이 뭐냐고, 우리야 젊은 사람들이 아니냐고, 우리의 번민은 언제나 새것을 위한 투쟁으로 환원시켜야 한다고 하던 말을 말이예요. 전 그 말에 용기를 얻었고 또 그 말에 당신을…》

《…》

태수는 문득 보슬비내리는 합숙의 정원에서 그를 붙잡고 안타깝게 호소하던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자기가 그런 말을 했는지 어쨌는지는 알수 없으나 지나친 고민에 시달리고있는 그가 가엾었던것만은 사실이였다.

《그땐 그때고 지금이야 지금이지! 어쨌든 술이나 빨리 가져오오.》

이젠 별로 술을 마시고싶은 생각도 없었으나 일단 고집했던것을 관철해야 할 남편으로서의 자존심이 본래의 요구를 강조케 했다. 정 그렇게 요구되면 제가 부엌으로 내려가 마실수도 있으련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굳이 안해가 들고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수 없었다.

할수없이 부엌으로 내려선 은심은 유리잔에 술을 부어들고 나왔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마치 독약이라도 되는것처럼 내밀기를 주저했다.

대뜸 술잔을 앗아든 태수는《자 봐라, 이 정도엔 눈섭 한오리 까딱 안한다.》하듯이 잔을 통채로 입에 대고는 단숨에 꿀꺽 삼켜치웠다.

《참! 그 동무가 왔다갔다는걸 알아요? 현옥이라는 동무!》

《들었소.》

그 말을 들었을 때 태수는 현옥이가 내려온 그날로 되돌아갔다는데 대해서는 어딘가 리해되지 않았으나 모름지기 진호가 그를 그렇게 돌려세웠으리라는것을 짐작하고는 그에 대한 불만을 누를길이 없었다.

(하여간 얼빠진 친구라니! 어쨌든 만나야 해. 아니, 만나지 않을수 없어!)

그는 자리에서 움쭉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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