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 회)

제 4 장

사랑을 꽃에 비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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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호는 아직도 자기가 어떤 착각에서 깨나지 못하고있지 않나 하는 의혹에 잠겨있었다. 침대모서리를 움켜잡고 흐느끼는 이 처녀가 현옥이라는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믿을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점점 뚜렷이 느끼지 않을수 없었는데 그것은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그 감미롭고 부드러운 현옥이의 목소리가 갈가리 터갈라진 자기 가슴을 따뜻이 감싸주면서 일시에 온몸의 피를 설레게 한다는 그것이였다. 그런 느낌은 곧 현옥이에게 《난 사실 한순간도 동무를 잊은적이 없었소.》 하고 소리치며 뜨겁게 안아주고싶은 충동으로 변하는것이였다. 설사 아직까지 현옥이가 자기의 과실이 무엇이라는것을, 자기를 의심한것이 단순한 오해가 아니였다는것을 깨닫지 못한다고 해도 좋았다. 다만 자기를 찾아 내려왔다는 이 사실, 어째서 이렇게 되였느냐는 그 한마디 말에 그의 모든 잘못을 다 용서해주고싶었다.

이제 와서야 그는 그때 자기가 현옥이에게 결별을 선언했고 그것을 태수에게도 종지부라고 단언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에 지나지 않았다는것을, 속으로는 언제나 그를 생각하고있었으며 또 그와 다시 만나 뜨겁게 포옹할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고있었다는것을 절실히 깨닫지 않을수 없었다.

《낮차로 왔소?》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이렇게 물었으나 현옥이는 대답대신 고개만 끄덕이였다.

《거기 동무들은 다 잘 있소?》

《예.》

비로소 자기가 눈물만 흘리고있어서는 안될 처지라는것을 깨달은 현옥은 손수건으로 눈굽을 훔치면서 오던 길에 사들고온 과일이며 사이다를 꺼내놓았다. 그리고는 그사이 자기 직장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 평양에 있는 동무들에 대해 또 흔히 문병 온 사람이 환자의 기분을 위로할 때 하군 하는 그런 얘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얘기를 하면 할수록 현옥은 그 얘기가 자기들과는 인연이 없으며 아무런 의의도 가지지 못하는것이라는걸 알았다. 자기가 그런 얘기를 하는것은 단지 자기들사이에 놓여있는 본질적인 문제, 즉 헤여진 다음에 겪은 고통이며 그 과정에 얻은 결론, 특히는 자기의 내심을 밝히기 꺼려해서 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을 자신은 물론 진호도 벌써 다 짐작하고있다는것을 눈치채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이윽고 의자를 들어 침대옆에 놓은 현옥은 거기에 걸터앉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용기를 내여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 가끔 동무가 혼자서 얼마나 고생이 많을가 하고 생각해보군 했어요. 그러나 제가 상상해본 동무의 고통이란 아무것도 아니군요. 아무것도 아니라는것을 전 오늘에야 똑똑히 알았어요. 과연 동무일은 어쩌면 모두…》

자기 목소리가 다시 젖어들기 시작하는것을 느낀 현옥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

《그렇지만 제가 오늘 보다 절실히 느낀건 동무가 자기에 대해 너무나도 가혹하다는거예요. 확실히 동문 언제나 자기스스로가 자신을 그런 처지에 내몰군 하지요. 의식적으로 말이예요. 저도 동무가 바라는것이 뭔지 모르지 않아요. 그걸 꼭 해야 한다는것도 알고요. 그렇다고 그런 모험까지 할건 뭐예요? 어째서 누구나가 아직은 실현하기 어렵다고 하는걸 그렇게도 무리하게 시험하나 말이예요. 전 이 말만은 꼭 해야겠어요. 아니, 이 말을 하자고 왔어요.》

《…》

《물론 이미부터 하던 일이니까 미련이야 있겠지요. 그렇지만 이젠 중유도 공급되지 않아요? 국가에서도 새 연료취입이 어렵다는걸 인정하고있지 않나 말이예요.》

진호는 창문을 통해 미풍에 흐느적이는 버드나무아지들을 바라보고있었으나 현옥이의 목소리에서 자기에 대한 원망과 함께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깃들어있다는것을 알았다.

《다른 사람들도 진심으로 권고하고있어요. 쉽사리 성사되지 않을 일인데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요.》

《…》

현옥이쪽으로 돌아선 진호는 붕대를 감은 팔을 힘겹게 옮겨놓으며 입을 열었다.

《나도 내가 하는 일이 쉽게 되지 않는다는걸 알고있소. 그러나 아무리 힘이 들어도 그 일만은 그만둘수도 없고 미룰수도 없소.》

《어째서요?》

현옥이의 두눈에는 대뜸 불만이 어렸다.

《아직도 자기가 겪는 고생이 모자란다는건가요? 아직도 사람들한테서 받은 수모가 부족하다는건가요? 이것 봐요, 이젠 제발…》

현옥이의 표정은 갑자기 애원하는 사람의 간절한 표정으로 변했다.

《부탁이예요. 제발 이젠 그런 고집은 버려주세요. 그래 그 고집의 결과가 뭐예요. 뭔가 말이예요? 주위를 좀 랭정한 눈길로 돌아보세요. 남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고요. 동문 지금 제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진호는 얼굴을 감싸쥐려는 현옥이의 손목을 잡으려고 했으나 현옥이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너무해요. 동문 정말 너무하단 말이예요. 언제나 자기 생각밖엔 없지요, 없구말구요.》

참아오던 오열을 터뜨린 현옥이는 다시금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억울한 사연을 하소연할 길이 없는 사람의 설음에 겨운 울음이였다.

그런 현옥이를 바라보는 진호의 얼굴에는 은연중 서글픈 애소가 어렸다. 입가에 맺혀 흩어질줄 모르는 그 애소는 현옥이때문이 아니라 어느땐가는 자기의 진정을 리해하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되리라고 여겼던 그 처녀한테서 되려 설복당하고있는 자신의 처지때문에 떠오른것이였다.

《사실 동무가 어떤 말을 한다 해도 난 할말이 없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의 자책어린 목소리로 그는 말을 이었다.

《확실히 난 무모한 인간일뿐 아니라 한푼의 량심조차 없는 인간이요. 모든 사실이 그걸 증명하고있지 않소. 그렇지만 난 어떤 소리를 듣는다 해도 설사 지금보다 더한 소리를 듣는다 해도 새 연료연구만은 미루지 못하겠소.》

《할수 없는 일인데두요?》

《그래도 꼭 해야만 할 일이란 말이요.》

《?…》

절망과 분노와 안타까움이 어린 눈길로 마주보는 현옥이의 시선에서 진호는 새삼스레 비참한 몰골이 되여 누워있으면서도 한사코 제 고집만을 내세우는 자기에 대한 련민의 빛, 동정의 빛을 똑똑히 읽을수 있었다. 그러자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어떤 소외감이 전신을 휩싸는것이였다.

(현옥이의 저 눈빛은 흔히 불치의 병에 걸려있으면서도 자기의 병이 뭔지 모르고있는 환자를 바라볼 때의 그런 눈길이 아닌가? 어째서 현옥이는 아직도 나를 제대로 리해하지 못하는걸가? 어째서 내가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고 그래서 어떤 고통을 참아가면서도 기어이 이룩하려고 하는 일을 한갖 무모한 객기로밖에 여기지 않는걸가?)

이런 느낌은 곧 현옥이에 대한 감정을 서글픔으로 변하게 했을뿐 아니라 보다 이젠 자기는 완전히 고독하다는 의식으로 하여 비통하게까지 만들었다. 자기가 동정을 받는 처지, 그나마 오로지 진정을 리해해주었으면 하고 바랐고 드디여 자기의 진정을 리해한것이라고 믿었던 처녀한테서 동정을 받게 되였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목이 메여올랐다.

(어째서 우린 단 한번도 서로가 진정한 리해에 도달하지 못하는걸가? 나의 지향과는 너무나도 먼거리에 있는 현옥이가 아닌가! 도저히 넘어서지 못할 단애가 있는 이것이 바로 우리의 운명일가?)

방금전까지만 해도 현옥이가 자기 잘못이 무엇이라는걸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용서해주리라던 진호였으나 그가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바라는가를 알게 되자 그런 생각은 고사하고 아무리해도 자기와 현옥이가 결합될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기를 찾아온 그가 못내 야속스럽기만 했다. 만일 현옥이가 그때 자기에게서 완전히 멀어졌다면 분노와 불행만을 느꼈을뿐 지금 느끼고있는것같은 자기로서는 도저히 다잡을수 없는 정신상태에는 빠지지 않았으리라는 한가지 생각밖에는 없었다.

그는 될수록 태연한, 지어는 무관심한 태도를 지어보이려고 애썼다. 지금 부닥친 사건이 의외의 일이 아니며 따라서 그 일이 평범한 사건에 지나지 않는것으로 느끼는 사람과 같은 태도를 취하기 위해 온 신경을 썼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꾸만 가슴이 미여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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