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 회)

제 4 장

사랑을 꽃에 비김은…

21

(1)

 

세상에 자기처럼 불행한 처녀가 어데 있을가? 자기처럼 지꿎은 운명의 장난에 희롱당하는 처녀가 또 어디 있을가 하는 생각으로 하여 현옥이는 숨이 다 막혔다.

제철소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진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그였다.

《글쎄 몰래 시험했지요 뭐. 그래서 문제가 더 커졌답니다. 공장에서는 지금 야단이예요. 그런데다가 심사를 앞둔 태수동무의 투사기까지 파괴했으니…》

태수를 찾아갔으나 그가 출장을 떠나고 없는것으로 하여 할수없이 직장사무실에 들렸을 때 자기를 맞아준 통계원처녀가 하던 말이였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그가 느낀것은 까무러칠듯싶은 경악도 경악이였지만 보다는 자기가 왜 한발 먼저 오지 못했을가 하는 뼈저린 후회였다. 며칠만 먼저 왔어도 진호에게 결코 그런 불상사가 없었으리라고 믿게 되는것이였다.

제철소로 떠나오기 전에 그는 진호가 어떻게 지내고있는가를 알기 위해 동창들중에서 제철소와 밀접한 련계가 있는 부문에서 일하는 동무들을 만나보았던것이다. 그들의 말을 통해 진호가 여전히 새 연료안에 몰두하고있다는것을 알았을 때 놀라움도 컸지만 보다는 역시 그는 자기 희망을 쉽사리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는, 결코 오빠가 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일종의 믿음으로 하여 가슴이 후더워오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믿음은 곧 많은 사람들, 특히 연료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의 얘기를 통해 점점 불안으로 확대되였던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진호가 하는 일을 두고 진심으로 걱정하고있었기때문이였다.

《물론 절실한 과젠것만은 사실이요, 그래서 또 그만치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하지만 아직 어디서도 해본적이 없는 그걸, 그것도 혼자힘으로 해보겠다는것이 좀 무리가 아닐가? 이젠 국가적으로도 중유를 맘대로 쓸수 있는 조치가 취해졌는데 이럴 때야말로 덤비지 말고 과학의 매 단계를 차곡차곡 밟아나가는게 어떨는지…》

이런 충고는 현옥이에게 많은걸 생각해보지 않을수 없게 했다.

(사실 무엇때문에 아직 파악도 없는것을 도입하기 위해 서두를 필요가 있단 말인가! 생산에 지장을 받는것도 아니고 당장 수행하라는 급한 지시가 있는것도 아닌데!)

사정이 그렇다는걸 모르지 않을 진호가 왜 그토록 그 기술안을 고집하는지 현옥은 짐작이 갔다. 그것은 이미부터 해오던 일에 대한 미련도 미련이지만 그 기술안으로 해서 받은 수모와 울분이 그에게 이젠 아무것도 가리게 하지 않는 처지에 몰아넣고있다는 확신이였다.

(그래! 틀림없어! 그것때문에 그는 자기를 더 과격하게 내모는거야! 가자! 이제라도 가서 그를 타이르자! 현실을 랭정하게 봐야 한다고, 지나친 감정으로 자기를 내몰지 말라고.)

이런 생각이 들자 그런 권유는 오직 자기만이 할수 있다는 의무감까지 솟구쳤던것이다. 물론 자기의 출현이 그를 괴롭히는것으로 되지 않을가 하는 우려, 즉 배신한 처녀를 마주하게 될 때 느끼게 될 진호의 수치와 고통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한것은 아니였지만 그런 걱정에 비하면 그를 만나고싶은 충동이 너무도 불같았다. 그가 자길 어떻게 대하며 지나친 모멸감이 분노로 폭발하여 혹시 무례한 행동으로 망신시키지나 않을가 하는 위구따위도 문제로 되지 않았다.

다만 그를 만나기만 하면 항시 끈덕지게 자기를 괴롭히는 형체모를 불안으로부터 해방되여 사소한 구속도 느끼지 않고 살수 있고 그에게도 진정한 도움을 줄수 있으리라는 그 하나의 기대가 모든 불안과 근심을 일소해치웠던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내려왔건만 바로 이틀전에 그가 사고를 내고 중상까지 입었다니 무슨 운명이 이렇게도 가혹하단 말인가! 어쩐지 이제 와선 진호가 그런 사고를 낸것이 마치 자기가 한발 늦게 도착한탓으로 빚어진 후과같아 눈앞이 깜깜해지기만 했다.

(투사기를 파괴한데다가 분출구까지 허물어 로를 수리하지 않으면 안되게 했다니 이번엔 필경 무사치 못할거야. 더우기 한번도 아니고 두번째가 아닌가!)

이런 두려움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는 진호를 두고 하던 오빠의 말이 상기됐다. 진호와 같은 사람이 어떻게 되나 두고보라던, 그런 사람은 집단이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그 말이였다. 아무리 괴로와도 상기하지 않을수 없고 상기할수록 그 말은 현실에 그대로 증명되고있다는것을 의식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를 만나야 하나? 만나지 말아야 하나?)

그제야 너무나도 단순한 생각으로 제철소에 내려온 자신의 소행이 돌이켜졌다.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잊을수 없고 잊으려고 할수록 도리여 더더욱 간절히 되살아나는 진호의 모습이 못 견디게 보고싶어 내려온 그였다. 단 한순간 먼발치에서 얼핏 보기만 해도 자기의 괴로움이 덜어질것같았고 모든 의혹이 가슴속에서 씻은듯이 사라지리라고 여겨 달려온 그였다. 더우기 그가 오빠가 말하는것같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을 안고싶은 충동이 그를 기차에 태웠던것이다. 한데 사태는 자기가 바라던바와는 너무나도 반대가 아닌가!

(만나야 하나? 만나지 말아야 하나?)

그는 또다시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처지가 아무리 고통스럽고 난감하다 해도 그를 만나지 않고는 돌아갈수 없다는것을, 자기의 출현이 자기뿐 아니라 그에게도 괴로우리라는것을 여겨 만나지 않고 간다면 후에 자기 맘이 몇배 더 고통스러울것은 물론 두고두고 자신을 후회하리라는것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진호가 입원해있는 제철소병원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그 시각 진호는 침대에 드러누워 앞으로 자기에게 닥쳐올 일들을 불안한 마음으로 점쳐보고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막연하기만 했다. 그럴수록 자신에 대한 멸시와 함께 여태껏 가슴속에 고여있던 묵은 상처의 아픔까지 되살아나는것이였다.

(하긴 나같은 놈이 연구는 무슨 연구란 말인가! 밤낮 손가락질만 받는 처지에 희망은 무슨 희망이고. 자길 위해서는 친구의 성과까지도 서슴없이 해치는 놈이 량심은 또 무슨 량심이란 말인가!)

누구를 탓할것도 없었다. 모두가 제 불찰이고 제 잘못이였다.

(연료연구는 고사하고 이젠 공정기사로도 둬두지 않을게다. 아니, 직장에서 내쫓을지도 모른다. 그럼 이번엔 어떻게 한다?)

밤낮 쫓겨다녀야만 하는 자기의 처지가 스스로도 가련하고 역겨웠다.

이때 그는 출입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을수 없었는데 누가 방안으로 들어와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선을 끄는 일이 있어서도 아니였다. 다만 그쪽으로 돌아보지 않을수 없게 하는 그런 내적인 충동이 일었기때문이였다.

순간 그는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여태까지 비여있던 출입문 옆의자에 웬 처녀가, 곤색양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어떤 처녀가 앉아 고개를 숙인채 어깨를 떨고있는것이 아닌가!

《?!》

처녀를 여겨보던 그는 더욱 놀랐으나 너무나도 어이없는 자기의 착각에 곧 랭소를 머금고말았다.

(정신이 나갔지. 도대체 무엇때문에 그가 여기에 나타난단 말인가!)

어제 꿈에서 보았던 환각이 재현된것이라고 여기며 그는 다시 창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는 곧 어떤 흐느낌소리,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참을수 없어 터져나오는 그런 흐느낌소리에 놀라 재차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아―니?)

그제야 두손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고있는 처녀가 누구인가를, 자리에서 일어나긴 했으나 정작 발걸음은 떼지 못하고있는 처녀가 누구라는것을 그는 똑똑히 알아보았다. 그랬다. 그는 틀림없이 현옥이였다.

두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현옥이는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있었다. 공포에 질려 얼굴을 두손에 묻었다가는 묻었던 얼굴을 다시 들고 할뿐이였다.

《어쩜 동문… 어쩌면 이렇게까지…》

토막토막 끊어지는 그의 목소리는 당장 통곡이라도 터뜨릴것만 같았다.

그래도 병원에 올 때까지만 해도 될수록 태연한 태도를, 지어는 자기를 기만했던 진호에게 어느 정도 못마땅하게 여기고있다는것을 보여주려고 맘먹었던 현옥이였으나 정작 요드냄새가 코를 찌르는 입원실에 들어서서 벽에서 조금 떨어진 침대우에 머리와 상체를 온통 붕대로 감고 누워있는 그를 보느라니 그 결심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울음이 북받쳐올라 견딜수가 없었다. 특히 붕대밑으로 삐여져나온 굽실굽실한 머리카락과 피골이 상접한 그의 안면을 보느라니 살을 에이는듯한 련민의 정으로 하여 가슴이 찢어지는것이였다.

(과연 저 사람이 그란 말인가! 그처럼 억센 근육을 자랑하던 그란 말인가!)

이제 와선 그가 겪는 모든 불행이 다 자기때문인것만 같았다.

그가 제철소에 내려온것도, 내려와 무리한 시험을 한것도 그리고 엄청난 사고를 내고 이런 처참한 상태에 처해있는것도 다 자기탓인것만 같았다. 전에는 그가 자기를 괴롭히고 불행에 빠뜨렸다고 원망했으나 지금에 와선 자기가 바로 그를 이런 처지에 빠뜨렸다는 생각을 지울길이 없었다. 당장 그의 발밑에 엎드려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두손모아 빌고싶기만 했다. 생각같아서는 당장 그의 가슴에 파고들며 《동무에 대한 사랑을 이기지 못해 체면도 자존심도 다 버리고 온 저예요. 그런데 어째서 동문 이런 몸이 되여 따뜻한 손길 한번 내밀어주지 않아요. 어째서 다정한 미소 한번 던져주지 않나 말이예요.》하고 몸부림치고싶기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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