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 회)
제 4 장
사랑을 꽃에 비김은…
20
그는 옹근 이틀이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오늘이 사흘째였다. 방금전부터 그는 자기 눈앞에 나타나 맴돌이치기 시작하는 반점들, 빨갛고 파랗고 노란 색갈의 반점들과 맹렬히 싸우고있었다. 커졌다가는 작아지고 작아졌다가는 다시 커지는 그 반점들은 무섭게 소용돌이치는 회오리속에 자기를 몰아넣고는 까마득히 높은 하늘로 치솟아오르게 하는가 하면 갑자기 천길 아득한 나락으로 멨다꽂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아츠러운 비명을 지르며 까무라치군 했다. 그러기를 몇차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영영 사라진듯싶던 반점들이 다시 먼곳에서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기를 아까처럼 어지럽히지는 않고 조심스레, 마치 안개처럼 차분히 자기 주위를 감도는것이였다. 뜻밖에도 그 요지경같이 현란한 장막을 헤치고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한 녀인이 자기앞에 조용히 다가서고있었다. 어머니였다. 수수한 치마저고리를 입고있는 어머니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사려깊고 인자했다.
다정한 목소리로 무슨 말인가 속삭이는데 통 알아들을수가 없었다. 눈에는 눈물이 어려있는것같기도 했다. 무엇때문인지 어머니의 표정은 삽시에 돌변하는것이였다. 온화한 기색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노한 눈길로 무섭게 쏘아보는것이였다.
《안돼! 안되고말고.》
연방 엄한 질책을 퍼붓기만 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자기에게가 아니라 방 아래목에 앉아있는 진희에게 하는 꾸중이였다.
《용서할수 없어! 절대로 널 가만두지 않을테야!》
진희는 방바닥에 엎드려 서럽게 울기만 했다.
《왜 그러니?》
얼른 자기에게 매달린 진희였으나 말은 못하고 그냥 흐느껴대기만 했다.
《무엇때문이야? 글쎄.》
긴 속눈섭에 내려덮인 눈시울로는 뜨거운 눈물만 줄지어 흘러내리고있었다.
《자― 눈을 뜨고 말해봐, 어서!》
눈물에 젖은 눈을 조심스레 뜬 진희가 자기를 바라보는 순간 그는 또다시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누이동생이 어느새 다른 처녀로 변해있기때문이였다. 금시까지 눈물을 흘리던 처녀가 방그레 웃기까지 하는것이 아닌가!
《아니?》
그 처녀가 누구라는것을 안 순간 진호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지 않을수 없었다.
《저예요.》
《?》
마주 서있는 처녀는 아무리 봐야 현옥이가 틀림없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자기를 빤히 쳐다보고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섭을 바르르 떨면서 곁에 바싹 다가서더니 타는듯 뜨거운 입김을 들씌우면서 자기 목에 매달리는것이였다.
《보고싶었어요, 정말.》
진호는 저도 모르게 그를 그러안고 힘껏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째선지 돌연 현옥이가 자기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안깐힘을 쓰는것이였다. 아무리 붙잡으려고 해도 한사코 자길 떠박지르는것이였다. 가슴을 주먹질까지 하는것이였다.
《눈을 떠요! 정신을 차려요.》
진호는 정말 누군가가 자기의 가슴을 흔들고있다는것을 느꼈다.
천천히 눈을 뜬 그였으나 첫 순간엔 뭐가 뭔지 분간할수가 없었다. 다만 육안으로 쇠물을 볼 때와 같은 그런 강렬한 빛이 동공을 찌를뿐이였다. 차차 사람들의 희미한 모습이 얼른얼른하는데 그것도 초점이 맞지 않는 사진기렌즈를 볼 때처럼 온통 뿌옇기만 했다.
(왜 이럴가? 어째서 제대로 보이지 않을가?)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희미한 망막속에 어머니와 진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문득 현옥이에 대한 생각에 미치자 은연중 지나간 일들에 대한 구슬픈 선률의 추억이 가슴을 헤집는것이였다. 자기가 사랑하였고 자기를 사랑한 그 미모의 처녀가 자기에게 준 가지가지 감정의 신비로운 세계가 몽롱하게 떠올랐다. 그러면서 그 처녀에게서 받은 모욕과 그 모욕에서 흘러나온 분노와 반감도 기억에 새로왔다.
(잊자! 이젠 다 잊어버리자! 아무래도 우린 그렇게밖에 될수 없는걸.)
한쪽으로 돌아누우려던 그는 갑자기 어깨를 찌르는 동통으로 하여 그만 비명을 지르고말았다. 그제야 그는 자기의 상체가 붕대에 감겨있다는것을, 상체만이 아니라 머리며 얼굴에도 온통 붕대가 동여져있다는것을 알았고 자기를 둘러싸고있는 사람들이 의사들이라는것도 알아보았다.
(그러니 내가 병원에 와있는가? 어째서? 참! 투사기로 취입시험을 했었지, 1 760도까지 올랐던가? 아니, 그보다 더 상승했어!)
그의 머리속에는 취입시험을 하던 때의 일이 점점 선명하게 되살아올랐다. 그러자 곧 새로운 흥분이 심장의 박동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는것이였다.
(확실히 이전보다 첨가제의 질이 좋아졌어. 그만하면 배합도 괜찮다는걸 의미하지 않는가! 아니! 아직은 그런 결론은 일러! 그건 보충연료의 덕택일수도 있으니까.)
그는 자기의 부상이 어느 정돈가 하는것보다
(그래도 이 친구가 돌아오면 시까슬러대겠는걸? 호케이선수가 언제부터 자유락하선수가 됐느냐고, 넨장!)
그는 자기 몸이 공중에 솟구쳐오르던 때의 광경을 되새겨보았다. 압의 반출, 연료의 폭풍, 굉장한 폭음과 함께 자기 몸에 미치던 드센 타격!
(과연 무엇이 그리도 요란한 소리를 냈을가? 압의 반출로만 그런 굉음이 날리는 없지, 확실히 뭔가 터지는 소리였어. 분명 어떤 쇠붙이가 깨지는 그런 소리였어. 뭘가? 혹시 투사기가?)
투사기생각에 이른 그는 갑자기 가슴이 철렁했다.
(뭐, 투사기가?)
후닥닥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는 다시금 드센 망치로 얻어맞는것같은 아픔이 뒤통수에 미쳤으나 이번에는 그걸 가릴 여유가 없었다.
(아니, 그게 어떤거라구? 태수가 얼마나 고심해 만들어놓은것이라구. 아니야! 그 육중한 설비가 어떻게 파괴된단 말인가!)
하나 리성은 이런 믿음을 삽시에 부인해버리는것이였다. 불안은 점점 어떤 확신으로 굳어졌고 그 확신은 또 무서운 절망으로 번져졌다.
(아―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친구가 그토록 고심해 만들어놓은 기계, 그것도 심사를 부탁하기까지 한 투사기를 파괴하다니! 세상에 이렇게 무례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변론을 당부하던 태수의 표정이 되살아나는가 하면 걱정말라고 장담하던 자기의 모습이 상기됐다. 그러나 보다 더 똑똑하게 들려오는것은 량심에 대해 력설하던 자기의 목소리였다.
《난 바로 그걸 증명할테네. 우리 생활에선 순수한것만이, 오직 성실한 량심만이 승리한다는걸 말일세. 그 진리가 누구한테 있는가 하는걸 똑똑히 보여줄테란 말이네.》
(그러던 내가 이젠 도리여 한푼의 량심도 없는 인간이라는것이 증명된것이 아닌가! 자기를 위해서는 친구의 성과까지도 서슴없이 해치는 그런 비렬한으로 된것이 아닌가!)
이미 자기를 그런 인간이라고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자 더욱 가슴이 미여지는것같았다.
(이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저절로 신음이 터졌다. 그 신음은 상처의 아픔으로 해서가 아니라 만회할길 없는 실패로 하여 그처럼 이루어보려던 소원이 사라져버렸다는 허무감과 몸을 깨면서까지 자기의 진정을 증명하려고 했건만 오히려 친구의 성과까지 해친것으로 하여 더 험한 구렁텅이에 빠졌다는 괴로움이 심장을 아프게 비틀어짜기때문에 새여나오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