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 회)

제 4 장

사랑을 꽃에 비김은…

18

(2)

 

노래가 끝나자 이번에는 처녀방송원의 챙챙한 목소리가 귀청을 긁어댔다.

미래의 용해공들을 키우는 교수교양사업에서 남다른 성과가 있는 어느 유치원의 교양원을 소개하겠다는것이였다. 강철전사들의 투쟁을 고무하기 위해 그의 가족들을 찾아가 취재록음해온 내용을 노래와 함께 섞어 편집한 선동축하방송이였다.

《정말 많은 일을 하셨군요. 래일의 강철전사들을 믿음직하게 키우고있는 동무의 성과를 축하해서 노래를 한곡 선물하렵니다. 어떤 노래를 요청하겠어요?》

《노래요? 제가 뭘했다고… 그래도 들려주시겠다면 〈철의 도시 밤하늘에 붉은 눈이 내리네〉이 노래를 부탁하겠어요.》

걸음을 멈춘 진호는 길가에 있는 파철덩이에 장갑을 놓고 그우에 털썩 주저앉았다. 숱한 노래중에서도 이 서정가요의 은근한 선률과 녀성저음가수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그중 좋아하기도 했거니와 늘 수도에서만 듣던 이 노래를 철의 기지 밤하늘아래서 직접 듣는다는 새삼스러움이 구미를 동하게 했던것이다.

《한데 전 이 노래를 같이 듣고싶은 사람이 있어요. 그의 사업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길 바라서요.》

그러고보면 교양원도 꽤 다심한 녀자가 틀림없었다.

《좋아요. 누군지 어서 말씀하세요.》

《강철직장에서 새 기술안을 완성하기 위해 분투하고있는 리진호동뭅니다.》

《엉?》

진호는 후닥닥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교양원?)

얼른 머리를 스치는 한 녀자가 있었다. 두손을 모두어쥔채 수집은듯 방그레 웃던 태수의 안해 은심이였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그에 대한 고마움이 절로 가슴속에 꽉 차오르면서 아직 한번도 체험해보지 못한 류다른 감정이 온몸에 소용돌이치는것이였다.

(고맙소, 은심동무!)

《그럼 강철직장에서 새 기술안도입을 위해 분투하고계시는 리진호동무도 함께 들어주십시오.》

(현옥이도 이 노래를 좋아했었지.)

불시에 현옥이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르는것이였다. 아름찬 일들에 휩싸여 정신없이 돌아치다가도 잠시의 여가가 생길 때면 느닷없이 지나간 추억이 되살아나면서 이상하게도 꼭꼭 한쌍의 눈물에 젖은 맑은 눈길과 부딪치군 했다. 그것은 현옥이의 눈이였다. 눈물이 고인 눈길로 무엇인가 원망하고 나무람하기도 하고 구름에 가리워진 쪼각달처럼 애달픈 미소로 무엇인가 하소연하면서 말없이 자기를 지켜보는 현옥이의 눈이였다.

현옥이를 생각할 때마다 그는 언제나 그 처녀다운 날씬한 어깨우에 자연스레 흘러내린 부드러운 머리칼과 애티나는 맑은 눈을 먼저 그려보게 되는것이였다. 그중에도 매번 자기를 황홀케 하는것은 무엇을 물어볼 때마다 그 대답이 어떤것인가를 미리 짐작하고 짓는 눈가에 새겨지는 다정한 미소의 물결이였다. 그 눈매의 독특한 표정은 그 용모의 섬세한 아름다움과 어울려 잊을래야 잊을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제철소로 내려오면서 자기가 제일 불안해했던것, 즉 여기 사람들이 자길 어떻게 보며 어떻게 대해줄것인가 하는 근심은 곧 공연한것임을 깨달을수 있었으나 자기가 자신의 의지로 얼마든지 극복할수 있으리라고 여겼던 현옥이에 대한 생각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뿐더러 더욱 강렬하게 되살아나는것이였다. 특히 눈내리는 보통교의 란간에 서서 두손에 얼굴을 묻은채 흐느끼던 그의 모습을 상기할 때면 자기가 무엇인가 다시 찾지 못할 귀중하고 아름다운것을 버렸다는 상실감마저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확실히 그는 자기가 현옥이를 잃어버린데 대한 섭섭한 생각을 가슴에서 지워버릴수 없으며 또한 현옥이와 함께 있음으로 하여 맛보았던 행복한 순간들, 그 당시에는 별반 깨닫지 못했던것이 지금에 와서는 온갖 매력을 가지고 자기의 마음을 뒤흔들어주는 그 행복의 순간들을 기억속에서 씻어버릴수 없다는것을 알았다. 그에 대한 기억은 흡사 어둠속에서 반짝이는 밝은 점처럼 생생하니 떠오르는것이였다.

(나는 그를 사랑했었지. 순결한 애정으로 진실하게 사랑했었지. 그런데 그는… 아서라! 내가 무슨 생각을… 이제야 다 지나간 일이 아닌가!)

 

수령님 다녀가신

철의 도시에

 

이윽고 녀가수의 은은한 목소리가 꿈결에서처럼 조용히 울렸다. 마치 자기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것같은 그 고요한 선률은 자기를 부드러운 요람에 태워 어딘가 멀고먼 곳으로 아니, 황홀한 세계로 서서히 이끄는상싶었다.

한 소절의 노래가 이다지도 심금을 울리리라고는 상상도 해본적이 없는 진호였다. 그 하나하나의 선률은 부드러운 눈송이마냥 천천히 가슴속으로, 끝없이 심연속으로 떨어져들어갔다. 떨어져서 수면에 고요한 파도를 일으키며 잠겨들면 수면은 가벼이 일렁이다가 어둠속에서 소리없이 심장을 쿵 하고 울리는것이였다.

 

이밤도 송이송이

눈이 내리네

 

그의 눈앞에는 어느덧 눈덮인 공장과 구내길이 펼쳐지면서 흰눈을 맞으시며 용해장을 찾으신 자애로운 수령님의 영상이 우렷이 안겨왔다. 천천히 로앞으로 다가서신 그이께서 보안경을 드신채 사품쳐오르는 쇠물을 여겨보신다, 오래도록 여겨보신다.

마침내 수령님의 자애로운 안광에 환한 미소가 넘쳐흐른다.

무엇이 기쁘시여 그리도 만족해하시는것일가? 무엇이 흡족하시여 그리도 밝은 미소를 지으시는것일가?

세상에는 물과 불이라는 가장 거대한 힘을 가진 두 자연력이 있다. 그 불과 물이 한데 합쳐진 쇠물이야말로 얼마나 위력한 힘, 아름다운 힘을 가진것이랴! 저것이 어떻게 기계가 되고 대포가 되며 산악을 버티고 설 동발이 된단 말인가! 저 령롱한 구슬이 어떻게 수천톤의 화물선이 되여 대양을 횡단하고 화려한 고층건물의 철주가 된단 말인가! 과연 뉘라서 세상의 억만재부가 바로 저 아름다운 구슬로 쌓여지리라는것을 믿을수 있단 말인가!

끓어오르는 용금에서 부강해질 조국의 미래를 그려보시기때문일가? 아니면 용해공들의 불같은 충정의 마음을 읽으시기때문일가? 아, 어쩌면 우리 수령님 저리도 저리도 기뻐하실가? 다만 끓는 쇠물에서 우리의 미래를 보시기때문만이 아니리라, 용해공들의 뜨거운 마음을 읽으시기때문만이 아니리라, 저 쇠물이 중유가 아니라 우리의 연료로 끓고있기때문이리라, 바로 그때문에 그토록 만족해하시는것이리라.

수령님! 이젠 우리의 연료로 쇠물을 끓이고있습니다. 중유는 한방울도 먹지 않습니다.》

해빛같은 미소를 지으신 수령님께서 자기를 마주보시는 순간 온 하늘의 꽃송이가 축하의 꽃보라인양 자기를 향해 마구 쏟아지는것이였다. 터질듯한 행복감으로 하여 그는 일시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쇠물보다 뜨거운 충성의 마음

저 하늘에 차고넘쳐 붉게붉게 내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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