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 회)
제 4 장
사랑을 꽃에 비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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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의 눈으로 볼 때 진호는 아무 일에나 지나친 열정을 시위하려는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때에 따라서는 리해할수 없으리만치 괴벽한 사람이기도 했다. 특히 아무때나 자기의 주장을 고집해나서는것을 볼 때면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도 제 생각밖엔 없을가 하는 불만을 품지 않을수 없었다.
(어쨌든 그의 도움은 받지 않을테야. 아니, 다치지 못하게 할테야. 이것만은 기어이 내 힘으로 해내고야말테야! 보란듯이!)
속으로는 이런 강심을 먹으면서도 그는 전혀 다른 말을 뱉었다.
《그럼 차라리 그 동무한테 맡기는게 어때요? 아무래도 그 동무가 저보다야…》
《그렇지만 그 동무야 직장에 갓 온 사람인데다가 자기 과제가 있지 않소.》
이렇게 대답한 기철은 이 처녀가 이제 와서 또 발딱 뒤집지나 않을가 하는 위구에 사로잡혀 조심스레 쳐다보다가 서둘러 말머리를 돌렸다.
《이 친구가 이젠 오겠는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던 기철은 그제야 눈이 둥그래졌다.
《아니, 내가 정신이 없구만! 내 얘기만 하느라고 동무가 누구와 만난다는것도 깜빡 잊고… 이제라도 어서 가보오.》
《됐어요. 후에 만나지요 뭐.》
《?!》
너무나도 흔연한 대꾸에 기철은 또다시 얼떠름해졌다. 과연 알다가도 모를 처녀다.
이때 이마에 붕대를 감은 진호가 모자를 벗으며 방안에 들어섰다.
정아가 있는것을 본 그는 일시 멈칫 했으나 책임기사의 표정을 살피고는 들어가도 무방하다고 느꼈는지 성큼성큼 책상앞으로 다가서는것이였다. 붕대는 붕대대로 동였지만 아직 눈섭우에는 아물지 않은 상처가 두군데나 있었다.
그날 우연히 6호연도옆으로 지나가던 축로공들이 아니였다면 자기가 어떻게 됐을지 모를 처지에 있었다는것을 전혀 생각지도 않는것같았다. 무슨 일을 하다가 왔는지 작업복은 온통 검댕이칠이였다.
책상을 가운데 놓고 두사람을 마주앉힌 기철은 례의 그 단정한 목소리로 새로운 과제, 산소취입법을 선행할데 대한 공장의 요구로부터 중유절약안을 인계하기로 한 결심을 말하고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이제부턴 이 기술안을 정아동무가 맡아하는 조건에서 진호동무가 옆에서 도와주었으면 해서 그러오. 물론 연료안추진에는 지장이 없도록 하면서 말이요. 내가 이걸 권고하는건 중유절약안을 빨리 수행하자는데도 있지만 진호동무의 기술안 완성에도 도움이 되리라고 믿기때문이요. 어떻소?》
《…》
진호는 줄곧 책상만 내려다보았는데 보매 거기에 펼쳐진 도면을 보고있는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집중시키고있는게 분명했다. 다시 시선을 옮겨 창밖을 한참 바라보던 그는 그제야 대꾸할 말이 생각나기라도 한것처럼 천천히 기철이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오래동안 생각한데 비해서는 너무도 단순한 대답이였다.
《솔직히 말하면 난 반댑니다.》
《?!》
기철은 물론 정아까지도 아연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책임기사동문 이 중유절약안을 방조하는 과정이 나한테 도움이 될거라고 했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난 벌써 몇번이나 이 기술안을 검토해보았지요. 두 기술안이 다 연료를 해결하기 위한것이긴 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서로 다릅니다. 하나는 중유를 인정하면서 절약하자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유를 무시하고 새 연료를 쓰자는겁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내가 반대하는 리유가 내한테 도움이 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내가 반대하는건 이 중유절약안이 우리의 현실에 피동적이기때문입니다.》
《피동적이라니?》
《나도 이 기술안의 착상이 기발할뿐 아니라 실현될 가능성도 풍부하다는건 압니다. 그렇지만 우린 어디까지나 우리의 연료로 제강할수 있는 길을 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힘이 들고 어렵다 해도 말입니다.》
실로 천만뜻밖이였다. 이 기술안에 대한 뭇사람들의 평가를 무시하는것은 둘째치고라도 그만치 현실을 식별할줄 아는 그가 이런 말을 한다는것이 기철에게는 놀랍기만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놀라움쯤은 누를줄 아는 사람이였다.
《물론 나도 동무의 의도를 모르는건 아니요. 나 역시 어디까지나 우리의 연료에 의한 제강조업, 이게 현실이 바라는 절박한 문제라는건 아오. 그렇지만 그건 아직 이렇다할 성과가 없고 또 앞으로 얼마나 더 걸릴 일인지 모르지 않소. 그래 빠른 시일에 해결할 전망이라도 있소? 바로 그래서 당에서도 중유를 우리한테 우선적으로 풀어준게 아니겠소.》
진호는 책임기사에게 자기 견해를 더 명백히 이야기하고싶었다. 자기 견해를 구체적으로 얘기한다면 그가 자기 주장을 계속 피력할 필요는 없어질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곧 이 문제에 대한 서로의 견해가 너무도 판이하다는것을, 그래서 자기가 아무리 설명한대야 도저히 서로가 리해에 도달할수 없는 일이라는것을 알아차리고는 입을 다물고 그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이런 조건에서 그중 합리적인 생산방법이 뭐겠소? 한방울의 중유라도 절약하면서 생산하는 이것이 우리한텐 당면한 과제가 아니겠소.》
《옳습니다.》
진호는 아무래도 자기의 생각을 털어놓지 않을수 없다는것을 깨닫고는 기철이를 마주보았다.
《론리적으로 따지면 그럴수도 있지요. 그러나 난 이런 경울수록 오히려 우리가 중유를 하루빨리 쓰지 않는 방도를 모색해야 한다고 봅니다.
모든 력량을 집중해서라도 말입니다. 우린 언제나
《?!》
기철의 눈길이 금시 꼿꼿해졌다. 이렇게까지 엇나오리라고는 예상도 못한 그였다.
《그러니까 동문 자기 기술안만이 가장 현실적이라는건가요?》
이렇게 쏘아붙이고 진호를 노려보는 정아의 표정에는 어딘지 모르게 모독적이고 혐오스러운것이 있었다.
《그렇소. 난 그렇게 생각하오.》
《전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하다가 포기한 그 안이야말로 가능하지 못할뿐더러 무모한 안이라고 보는데요. 그렇지 않아요?》
《그거야 사람나름이지요. 동무같은 사람이니까 그렇게 볼수밖에!》
진호의 이 말은 대번에 정아의 비위를 거슬렸다. 자기에 대한 로골적인 멸시를 느낀 그는 자기가 받은 아픔에 대하여 앙갚음할만 한 신랄한 문구를 궁리해내여 툭 내쏘았다.
《좋아요! 저 역시 동무같은 사람이 제 말을 리해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아요. 여기엔 분별과 리성이 필요하니까요. 물론 중유절약안에 대한 방조도 바라지 않구요.》
흔히 처녀들이 모욕적인 언사를 썼다고 생각할 때 쓰는 그런 표정을 지으며 정아는 진호를 쏘아보았는데 그의 눈길은 마치 《나를 더는 무시하지 말아요. 그랬다간 가만두지 않겠어요.》하고 단단히 벼르는상싶었다.
사실 그는 지금 진호에 대한 분노로 하여 가슴이 터질것만 같았다. 의의있는 기술안을 무시하는것도 그렇지만 그토록 자기에 대한 따뜻한 정이 스며있는것을 무자비하게 묵살하려는데는 도저히 참을수가 없었던것이다.
(흥, 제가 뭐라구…)
진호의 방조를 달가와하지 않던 그로서 이런 거절을 응당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것이나 그의 의도가 어떻다는것을 안 이 마당에 와서는 오히려 더없이 분하기만 했다.
한편 진호는 진호대로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이 처녀가 이처럼 되바라지게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그저 웃음많은 명랑한 처녀겠거니 했는데 보통 암팡진 처녀가 아니지 않는가! 마치 영문모를 뺨을 한대 얻어맞은것같기도 했다.
(어째서 중유절약안에 그토록 큰 의의를 부여하는걸가? 하긴 내 기술안이 어떤건지 모르니까 이런 절충안에도 매혹될수밖에. 다른게 없어! 하루빨리 내 기술안을 완성하는것밖에! 그래서 실물로 보여주는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