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회)

제 4 장

사랑을 꽃에 비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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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기사실의 방문을 열자마자 정아의 눈에 비친것은 목에 수건을 두른채 책상을 내려다보고있는 책임기사의 모습이였다.

그의 이마에는 아직도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그러나 그가 왜 고개를 숙이고있는가를, 즉 무엇을 보고있는가를 안 순간 대뜸 바늘끝같은 비애가 가슴을 뚫고 지나가는것이였다.

(역시 도면이구나!)

그의 책상우에는 커다란 도면이 펼쳐져있었다.

어떤 반감과 서글픔이 일시에 솟구쳐오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하긴 뭐 나같은건, 나같이 단순하고 뛰여난 점이라고는 없는 처녀야 한갖 사업대상으로밖에는 달리될수 없지! 없고말고!)

저절로 목이 메여올랐다.

《자, 이쪽으로 오오. 이리 와서 도면을 좀 보오.》

정아의 내심이 어떻다는건 알지도 못하고 기철은 자못 반가운 기색을 지으며 자기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켜보였다. 그러나 정아는 그가 가리키는 의자가 아니라 자기의 손목시계만 얼핏 내려다보았다.

《왜 무슨 일이 있소?》

《예, 누구와 좀 만나려구요. 만나자고 해서요.》

《?…》

자기를 마주 쏘아보는 정아의 눈길과 더우기 여느때없이 싸늘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놀란듯 기철은 정아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더없이 명랑하다가도 이렇듯 리유도 없이 새침해지군 해서 도저히 갈피를 잡을수 없다는 기색이였다.

사실 왜서인지 기철은 정아를 마주할 때면 이렇다 할 리유도 없이 당황해질 때가 있었다. 어떤 일감을 놓고 그 수행정형에 대해 따지고 새로운 과업을 주는것은 자기지만 오히려 그럴 때마다 자기의 내심을 읽히우는것같은 그런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는것이였다. 그러나 그 리유가 무엇때문인지는 저로서도 딱히 알길이 없었다.

《그렇다면 할수 없지. 후에 만나는수밖에. 래일 얘기하기요.》

바로 이런 점, 언제나 자기를 남들과 똑같이 대해주는 이 점이 정아에게는 더 부아를 돋구는것이였다. 차라리 갈수 없다고 하든가 누구를 만나느냐고 물어보기라도 해도 좋으련만!

《그래야 뭐 이 도면에 대한 계산이겠지요?》

당장 나갈듯이 출입문쪽으로 돌아선 정아였으나 나가지는 않고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던졌다.

《아니, 그런게 아니요. 무슨 과제나 지시가 아니라 내 개별적인 부탁때문이요.》

(개별적인 부탁?)

정아는 한걸음 책상앞으로 나서며 도면을 내려다보았다.

첨 보는 도면이였다. 대체의 륜곽으로부터 선을 따라가며 구조들을 더듬어나가던 그는 갑자기 온몸이 긴장되면서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아니, 이건?)

자기의 짐작을 확인할양으로 그는 도면의 맨밑에 있는 명기란에 시선을 옮겼다.

《로내에서 열관리개선의 새로운 대책(중유절약안)!》

틀림없었다. 바로 그 도면, 자기를 그토록 흥분시키던 그 기술안이였다.

(이걸 어떻게 하자는걸가?)

가슴속에 도사렸던 착잡한 감정은 삽시에 사라져버리고 까닭모를 의혹이 서려들기 시작했다.

《이 기술안을 동무가 좀 맡아줄수 없겠는가 해서 그러오.》

(이 기술안을?)

정아는 더욱 어리둥절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찬탄해마지 않는 기술안, 고심참담한 노력을 다 바쳐 마침내 황홀한 결실을 눈앞에 둔 기술안이 아닌가! 그걸 무엇때문에 이제와서 나한테 인계한단 말인가? 단번에 소화하기에는 너무도 아름찬 충격으로 하여 그는 숨이 다 막혔다.

《실은 다른 과제가 제기돼서 그러오. 얼마전에 새로운 산소취입안을 제기했더니 공장에서는 생산성을 담보하는 안이라고 당장 그것부터 추진하라는거요. 하긴 이젠 중유도 풀렸기때문에 모든 력량을 생산에 집중하는것이 응당한 일이 아니겠소. 그렇다고 그것때문에 이 기술안을 그냥 묵여둘수는 없고. 그래서 따져보던 끝에 난 바로 동무가 이 기술안의 적임자라고 생각했소. 누구보다 공감해온것도 그렇고 리해하는것도 그렇고, 특히 이 기술안의 고충이 바로 전기장치의 도입에 있는데 그런 측면에서 볼 때도 동무이상 적임자가 없더란 말이요.》

《…》

그대로 믿기에는 너무도 놀라운 사실이여서 정아는 기철이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불만과 절망의 나락으로부터 대번에 행복과 환희의 절정에 솟구쳐오른듯한 느낌이였다. 기술안자체가 가지는 의의도 의의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한테 맡겨주는 그의 의도에는 다만 전기를 전문했다는것만이 아닌, 자신이 여태껏 그토록 바라마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내색조차 할수 없었던 그 살뜰한 온정이 스며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으로 하여 더욱 가슴이 터질것같았던것이다.

(누구보다 공감해온것도 그렇고 리해하는것도 그렇고…)

정아는 그의 말을 되새기며 틀림없이 이 도면에 자기의 섬약한 마음의 매듭을 풀어주는 그의 따뜻한 정이 간직되여있으리라는것을 믿었다. 아니, 믿고싶었다.

심술사나운 론리의 목소리는 이 사실을 믿을만 한 근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우겨대는것이였으나 그의 감정은 이 모든 반박을 물리치고 한사코 《그렇다! 그렇다!》하고 자신있게 속삭이는것이였다.

흔히 누구나 소망이 간절하면 할수록 사소한 일상사도 줄곧 거기에 결부시켜 생각하기 마련이고 그것을 서로 련관시키면 시킬수록 또 틀림없이 그럴것이라는 확정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법이다.

《어떻소? 맡아주겠소?》

《…》

한마디로 대답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물음이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과제가 아니기때문에 내키지 않는걸 억지로 맡을수야 없지 않겠소. 때문에 나도 결코 강요하는건 아니요.》

기철은 방금 자기를 쏘아보던 정아의 눈길을 되새기며 못내 조심스런 어투로 말했으나 반대로 정아는 자기의 태도가 그처럼 야무진것이 바로 그자신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그만치 열렬하기때문이라는것을 알아주지 못하는 책임기사가 여간만 안타깝지 않았다.

《하겠어요, 해보겠어요.》

정아는 어쩐지 당장 눈물이 쏟아져내릴것같아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고맙소.》

《그런데 제힘으로 감당해낼수 있겠는지…》

《하긴 쉬운 일이 아닌것만은 사실이요. 그렇지만 난 동무가 꼭 해결해내리라고 믿소.》

《그래도 옆에서 도와주셔야 해요.》

《물론 그래야지. 그러나 내가 출장을 떠나게 되면 그땐 진호동무가 방조하게 하려고 하오. 이 기술안의 방조가 그의 새 연료안 수행에서도 도움이 될테니까.》

(진호?)

진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정아는 내심 언짢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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