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 회)
제 4 장
사랑을 꽃에 비김은…
16
(어째설가? 무엇때문에 만나자고 할가? 도면일가? 아니면 무슨 계산때문일가?)
현장지령실의 책상우에 있는 일보철을 뒤적이며 정아는 아까부터 이 한가지 생각에만 골똘해있었다.
지령탁에는 방금 교대를 인계받은 2교대 부직장장이 늘 그런것처럼 뿌루퉁한 표정으로 앉아 뭐라고 중얼거리며 작업일지를 뒤적거리고있었다.
(확실히 뭔가 주저하는 눈치였어! 부탁이라고 했지? 그런데 어째서 무엇이라는걸 밝히지 않았을가? 그의 부탁이란 도대체 뭘가?)
누가 생각해도 책임기사가 공정기사를 찾는다면 더없이 당연한 일로 여기련만 당사자인 정아로서는 그렇게만 느낄수 없었다. 여느때없이 조심스런 책임기사의 태도가 어쩐지 사뭇 야릇한 흥분으로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것이였다.
낮에 그는 설계연구소에 다니는 동무와 함께 구내산 야외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었다.
대학에 같이 다니다가 직장에 배치받은 후로는 처음 만나는터여서 음료며 얼음보숭이를 청해놓고도 그동안 지나온 얘기에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그것들은 돌아보지도 못했다.
《허― 이건 지나친 용해구려.》
이런 소리에 고개를 돌린 정아는 자기네 식탁옆을 지나 식당안으로 들어서는 두사람, 공장설비과장과 그뒤를 따르는 책임기사를 보았다.
설비과장이 지나친 용해라고 한것은 받아놓고도 손을 대지 않아 그릇우로 녹아내리고있는 얼음보숭이를 가리켜 한 말이였다.
《누구니?》
그들이 아름드리느티나무옆에 있는 식탁에 앉는것을 지켜보며 선옥이가 물었다.
《이쪽에 있는 사람은 설비과장이고 그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우리직장 책임기사야!》
《책임기사?― 오, 그래! 대학때 가끔 강의에도 출연하던 그 사람이구나, 발명권을 두개씩이나 가지고있다는 사람! 그렇지?》
《두개가 뭐야, 세개란다.》
세손가락을 펼쳐보인 정아는 《그래서 말이야.》 하며 하던 말을 계속하려고 했으나 웬일인지 방금까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댔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원인이 바로 책임기사한테 있다는것을 짐작하자 그는 어쩐지 뾰로통 화가 치밀어올랐다.
《넌 좋겠다 얘. 저런 사람하고 같이 일을 하니 말야.》
《좋긴 뭐가 좋아!》
《왜? 그래도 많은걸 배울게 아니니?》
《배워? 하긴 나도 첨엔 그렇게 생각했댔어. 많은걸 배울수 있다고 말이야. 그런데 정작 같이 일해보니 영 딴판이야!》
《딴판이라니?》
《뭐라고 할가? 형편없이 메마른 사람이지 뭐야. 그저 싸늘한 대리석인걸.》
《그래도 보기엔 그렇지 않은것같은데?》
《얘, 사람 겉보고야 아니?》
《…》
《저런 사람은 말이야, 겉으로는 싹싹한것같아도 속은 언제나 자기 생각밖에 없는 법이야.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데 대해선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거던. 하긴 뭐 그런것까지 내가 상관할건 아니지만!》
《?…》
의혹이 어린 꼬부장한 눈길로 정아를 흘겨보던 선옥이는 갑자기 《너 혹시》 하며 발쭉 웃었다.
《혹시 너 저 사람을 사랑하는게 아니니?》
《뭘?》
정아는 펄쩍 뛰였다.
《누구나 흔히 맘에 드는 사람에 대해서는 괜히 내리깎는다더구나.》
《바보! 아무렴 내가 사랑할 사람이 없어서 저런 사람을 사랑하겠니? 천만에! 난 저런 사람은 싫어! 사랑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사랑받을 필요도 없어! 없지 않고.》
그러면서 정아는 깔깔 웃었는데 그것은 사랑을 제 맘대로 주고받는 물건처럼 취급해버린것이 어처구니 없어선데도 있었지만 보다는 선옥이가 어쩌면 자기 속심을 그리도 면바로 찌를가 하는데 대한 놀라움에서였다.
사실 대학때부터 책임기사에 대한 남다른 감정을 품고있는 정아였다.
강단에 나선 그가 열정적인 눈빛으로 자기들을 바라보며 과학의 가장 미세하고 깊은 곳에까지 파고들어가 수자와 실례들을 가지고 꺼리낌없는 비유를 사용할 때면 그는 저도 모르게 솟구쳐오르는 감동을 금할수 없었다.
《내가
《내가
그의 말을 곱씹어보는 정아의 두눈은 열정과 환희에 반짝였다. 무한한 힘이 지식을 향해, 만물과 그 법칙을 향해 뜨겁게 분출하는 동시에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이성에 대한 새로운 감정이 가슴속에서 타오르는것이였다.
그는 왜서인지 범속하고 일반적인것을 싫어하는 처녀였다.
자기가 그런것처럼 자기가 바라는 대상에 대해서도 특별한 점, 특히 남들은 도저히 엄두도 못낼 그런 비상한 포부를 품고 그 가능성을 위해
그는 자기가 바라마지 않던 이런 정신적매력을 대뜸 겸임강사 기철이한테서 느꼈던것이다. 더우기 중유절약안에 대한 그의 특별강의를 듣고나서는 너무나도 큰 격정으로 하여 며칠밤을 한잠도 자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점에 대해 언제나 과학적인 시기심으로 맞서야 합니다. 그래서 과학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자면 탐구가 없는 하루, 사색이 없는 한때를 절대로 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것도 오늘이고 가장 쉽게 잃어버리는것도 오늘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가장 잃기 쉬운것이기때문에 그것은 더욱 귀중한것입니다.》
(저런 사람의 세계는 얼마나 심원할가! 저런 사람들이 꿈꾸는 생활이야말로 얼마나 벅차고 아름다울것인가!)
끝없이 고상하고 아름다운것을 동경해마지 않는 그의 순진한 가슴은 구름처럼 부풀어올랐다. 점점 정아에게는 기철이가 모든 완벽의 모범으로만 간주됐다. 자기에게는 도저히 있을수 없는것, 아무리 노력해야 최소의 한정된 량밖에는 가질수 없는 지식이며 탐구력이며 열정을 최고도로 구비하고있는것으로 여겨졌던것이다.
(저 사람과 같이 일해봤으면…)
그런데 정작 대학을 졸업하고 그가 있는 강철직장에 배치받게 되자 정아는 기쁨보다 두려움이 앞섰었다. 어째서 그런지 따져보지 않았다.
설사 그것이 책임기사에 대한, 그의 능력과 학식에 대한 존경의 한계를 벗어난 그 어떤 다른 감정때문이라 해도 그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인정할수가 없었던것이다. 그런데는 책임기사가 세상에 그 누구보다도 비교할수 없이 고상하고 흠잡을데 없는 존재로 생각되면 될수록 자기는 너무도 평범한 존재여서 그의 옆에는 서기조차 부끄러울 상대로밖에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였다. 그럴 때면 그는 자기가 좀더 아는것이 많고 아름다왔으면싶었다.
원래 외모를 무시하거나 남에게 주는 인상을 아랑곳하지 않는 습성이라고는 없는 그였지만 어쩐지 더욱 곱게 보이고싶었고 부족한 아름다움이나마 될수 있는 한 사람들의 마음에 들었으면 했다.
보통 한 사내에 대한 이런 존경은 처녀를 소심하게 만들거나 주눅이 들게 하기 십상이련만 정아는 결코 그런 부류에 속하는 처녀가 아니였다. 다른 사람에 비해 감정이 섬세한 그였으나 그것을 태연히 누를줄 알았고 지어는 고민이 있을 때조차 웃을수 있는 정신력을 지니고있었다. 그런가 하면 만사에 결단이 빨라 머리속에서 어떤 결심이 생기면 서슴지 않고 실천에 옮기는 담대한 기질까지 가지고있었다.
이런 기질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그가 책임기사를 사모하면서도 정도이상으로 랭정하게 대하게 되는데는 바로 자기의 감정에 대한 그의 지나친
무관심에 있었다. 자기의 감정을 고백한것도 아니고 더우기 그것을 눈치채게 행동한적이라고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가
물론 그도 책임기사가 자기에게 관심을 돌리지 않는것이 자기로서는 전혀 알수 없는 무슨 다른 리유가 있다는것을, 사업에 한하는 어떤 중요한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있기때문이라는것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불만을 품고있으면서까지도 태연하게
《저런 사람은 어떤지 아니?》
바로 그런 심정으로 하여 그는 낮에도 책임기사를 더욱 몰아세웠던것이다.
《사업에선 성공할수 있어도 사랑에선 실패하기마련이야. 저런 수재들이란 사랑에선 꼭 불우하기마련이거던. 내 말이 틀리나 이제 두고보렴! 난 말이야…》
《좀 가만가만 말해! 듣겠다 얘.》
《들음 뭐래?》
그쪽을 힐끔 돌아본 정아는 정말 입을 다물지 않을수 없었다. 벌써 자리에서 일어난 그들이 이쪽으로 걸어오기때문이였다.
자기들의 식탁옆을 지나려던 책임기사가 걸음을 늦추며 이쪽으로 돌아서는것으로 보아 정아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련다는것을 알아차렸다.
《정아동무! 퇴근할 때 좀 들려주겠소?》
《무엇때문에요?》
《부탁할 일이 있어서 그러오.》
(부탁?)
어쩐지 여느때없이 주저하는 기색이였다.
《대리석이라구? 뭘 사근사근하기만 하다 얘.》
구내산쪽으로 걸어가는 그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선옥이가 이렇게 말했으나 정아는 곧 고개를 저었다.
《뭐 부탁이라는게 다른걸것같니? 틀림없이 도면이 아니면 무슨 계산이야, 뻔해!》
하지만 그때부터 속으로는 (정말 도면이나 계산일가? 아니, 이번엔 그런것같지 않아! 그럼 도대체 뭘가?) 하는 생각으로 하여 도저히 진정할수 없는 마음이였다.
사람이란 누구나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는 극도로 예민한 감정을 지니는 하나의 반응체인것이다. 퇴근준비를 하고 지령실에 들려 오늘 작업에서 제기된 자기 부문공정들을 료해하는 지금에 와선 더욱 걷잡을수 없는 심정이였다.
《아니, 그렇게 우물쭈물할게 뭐요. 속에 있는걸 다 털어놓으란 말이요다.》
송수화기를 든 부직장장이 꽥하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정아는 깜짝 놀랐다. 언제나 무슨 억울한 루명을 뒤집어쓰고있는 사람의 표정인 그는 입심이 세기로 유명했다. 한번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면 상대방이 항복할 때까지 끊임없이 줄폭탄을 쏟아붓는것이였다.
《아니, 뭐 용선초과라구? 우리가 언제 용선을 초과해 먹었단 말야. 손이야 발이야 빌어도 안 줄 땐 언젠데 이제 와선 초과해먹었다는거야. 제발 그따위나발은 작작 줴치게. 뭐? 그게 나발이 아니구 뭔가? 나발도 왕나발이지, 꺼럼!》
그가 말할 때면 주런이 박힌 금이발로 하여 온 입안이 번쩍거리군 했는데 특히 웃을 때는 더욱 호화찬란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도 자기의 웃음을 《황금의 미소》로 자처하는것이였다. 지금도 그 황금이 마구 번쩍거리고있었다.
탁우에 있는 또 한대의 전화기가 울자 그는 들었던 송수화기를 얼른 턱짬에 끼우고는 새 송수화기를 들었는데 그 모양은 흡사 연주창을 앓는 목삐뚤이같았다.
《얼마? 파철이 920에 광석이 1 400? 가만, 자넨 좀 가만있게. 젠장 귀구멍은 둘이래두 따루 듣는 재간은 아직 못 배웠어.》
량쪽 송수화기에 대고 번갈아가며 말을 하던 그는 턱밑에 끼운 송수화기가 아래로 미끄러져내리자 턱에 더 바싹 힘을 주기만 할뿐 종내 그것을 내려놓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정아는 무심결에 자기앞에 놓여있는 산업TV화면조절기를 돌려보았다. 조절에 따라 용해장은 말할것도 없고 출강장, 남비장, 원료장의 실태까지 한눈에 다 알아볼수 있게 되여있는 자동카메라였다.
원료장의 신호공아바이가 화면에 나타났다. 어딘가 웃쪽을 쳐다보며 간절한 표정을 짓고있는것으로 보아 기중기운전공에게 무슨 부탁을 하고있는 모양인데 운전공이 잘 응하지 않는것같았다. 눈을 지릅뜨는가 하면 발을 굴러대며 위협하기도 하던 그는 대뜸 옆에 있는 장입바가지에서 반죽한 도이제를 한줌 쥐여뿌렸다. 그게 운전공의 얼굴을 매닥질해놓았는지 그는 무릎을 짯짯 치며 이발도 없는 입을 벌린채 통쾌하게 웃어댔다.
《자, 다시 시작해볼가?》
다시 본래의 송수화기를 쥔 부직장장이 후반전을 계속해보지 않겠냐는듯한 도전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보면 상대도 여간 질긴 사람이 아닌것같았다.
정아는 이번엔 용해장으로 카메라를 돌렸다.
무엇때문인지 4호로앞에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있고 그 한복판에서 한사람이 손을 흔들며 무슨 설명을 하고있었다. 손세로 미루어보아 틀림없이 기중기의 가동을 놓고 얘기하고있는것같았다. 그에게로 화면을 접근시켜나가던 정아는 그가 이쪽으로 돌아서는 순간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땀을 흘리며 이쪽 어딘가를 가리키고있는 사람은 바로 책임기사였기때문이였다.
얼른 조절기를 다른 곳으로 돌리긴 했으나 눈길은 저절로 화면을 마주하고앉아있는 부직장장한테로 쏠렸다.
그런데 어찌된 일이람? 방금전까지 미간을 찌프리고있던 그가 흐뭇한 그 황금의 미소를 짓고있는것이 아닌가!
《아 알만하네, 알만해! 그럼 진작 그렇다구 할게지. 사람두 원, 그런걸 난 또… 거야 다 좋은 일이 아닌가! 꺼럼.》
워낙 능구렝이같은 부직장장이여서 송수화기를 들고있긴 했지만 자기의 속심을 들여다보고 하는 말같아 정아는 그자리에 더 있을수 없었다.
(언제나 하던 부탁같으면 이번엔 받지 않을테야! 바쁘다든가 하다못해 다른 일이 있다고 해서라도.)
이렇게 마음다지며 그는 총총걸음으로 지령실을 나섰다.